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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신흥계곡에서 만난 ‘오래된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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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애  농부∙완주자연지킴이연대 활동가

추색 깊은 천변을 같이 걷던 J가 고개를 돌려 계곡물 속에서 피라미들만 수군거리는 모습을 보고 한마디 한다. “스무 가지도 넘는 물고기가 살았던 곳인데…” 말없이 나는 한 소녀를 떠올리며 걷는다. 사라진 물고기에 마음을 두고 그리워하는 J는 어스름한 저녁 양파망에 반딧불이를 잡아넣고 입구를 단단히 쥐고 여름의 계곡을 내 달리던 소녀였다. 움직일 때마다 빛을 발하는 다발을 손에 쥐고 이 별과 저 별 사이의 공간을 빛으로 연결하며 어둠 속을 향해 질주하는 유쾌한 소녀였다. 세속의 피로를 반짝이는 양파망과 함께 통과하는 짧은 그 순간 이 작은 물질감이 부리는 행복을 온몸으로 누렸을 신흥계곡 거주민(소녀)의 여름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분명 거기 그 장소에 있었는데, 사라져버린 원본은 J의 기억을 넘어 전설이 되어 신흥계곡 위로 흘러 다닌다. J는 절대로 원치 않겠지만, 반짝이는 양파망을 들고 달리던 마지막 인간인 것 같다.

신흥계곡 거주민으로 사는 ‘지금’은 과거로부터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을 타고 이곳에 도래해 있는 것이고, 다시 지금의 이 시간은 축적되어 미래로 향할 것이다. 지줄거리며 흘러내리는 계곡물은 싸늘했고, 햇볕에 달궈진 바위는 따뜻하여 아이들은 항상 그곳에서 놀며 가차 없이 다음 세대의 아이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이처럼 아이들이 자라는 자연과 환경 역시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미래로 향해 나갈 것이다. 그런데, 그 오래된 미래가 여기, 신흥계곡에서 가능할까. 지금의 계곡을 언제까지 계곡이라 부르는 게 가능할까. 이제 계곡은 수초와 해캄으로 뒤덮여 흐르는 물이 보이지 않을 지경에 이르다 못해 군데군데 마치 동산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라져 버린 것들을 그리워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세속이 농담처럼 느껴진다. 

세속의 농담 속에서 황폐해지고 그 전망조차 불투명해진(원시에 가까운 가장 아름다운 신흥계곡의 한 구간에 도로를 내겠다고 덤벼 망가트리는 행위를 보고 ‘인간이라는 실수’를 목격하기도 했다.) 신흥계곡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계곡이 되는 것이 아닐까. 결국 지는 싸움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닐까. 온갖 무력감에 지쳐갈 무렵 신흥계곡에 가야 시대의 제철지가 발견되었다. 이 지역을 기록하는 눈 밝은 황재남 사진가가 가던 길을 놓쳐 잘못 든 길에서 잠시 쉬다 제철 슬러지 더미를 발견했던 것. 가야문화와 제철지에 대한 이해가 있던 사진가는 이를 가야문화연구소 곽장근 교수에게 보이고 마침내 몇몇이 답사를 하게 되었다.

“이렇게 건강한 곳(제철지)은 없다. 완주의 복이다. 마치 유적공원을 조성한 것 같다.” 역사적 상상력을 가지고 종횡무진 가야의 제철지에 대한 설명을 마친 곽교수의 결론이었다, 그러면서 물길이 제철지와 가까워 내년을 기약할 수 없을 것 같으니 앞으로가 걱정이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그 오랜 시간 숨어 있다가 하필 이 불완전한 시기에 나타난 것일까. 이제는 버틸 수 없는 기미를 알아채고 지금 우리에게 나타난 것이 아닐까. 천년을 숨어 있던 가야의 제철지 앞에서 대책 없는 감격을 느끼면서도 두려웠다. 발견으로 나타난 역사적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 우리가 슬금한 지혜를 제대로 부리지 못한다면 어찌 되는 걸까. 그래서 세속의 농담 속에서 무너지지 않기를 고집하며 걷는다.

“깨어 있는 눈빛과 따뜻한 발목 살아 있음이란 그런 것이었나”(권경인) 

/이선애  농부∙완주자연지킴이연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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