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에서 구전으로만 내려오던 지명이 최근 소환되고 있다. 후백제 왕성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나온 종광대(鐘廣臺)와 여단(厲壇)이 그것이다. 이중 종광대는 아파트 재개발 무산과 겹치면서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 1100년 전, 견훤왕은 후백제를 세웠고 도읍을 전주로 정했다. 후백제는 37년간 후삼국 중 가장 강성해 한반도를 호령했으나 갑자기 망하는 바람에 그 흔적이 대부분 지워졌다. 더구나 라이벌이던 고려 태조 왕건은 겉으로 온유한 척했으나 안남도호부(936∼941)를 설치해 5년 동안 후백제 유물 유적을 철저히 파괴했다. 도성과 궁성은 물론 경주에서 가져온 삼국의 서적까지 불살라 버렸다. 그러니 후대에 후백제의 흔적을 찾기가 쉬울 리 없다.
그러나 아무리 짓밟아도 역사의 흔적은 남는 법. 1960년대 이후 뜻있는 분들과 전주시의 노력으로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전주 동고사지가 그렇고 최근에는 왕성 일부가 그렇다. 대표적인 게 전주시 중노송동 일원에 남아있는 ‘전주 종광대 토성’이다. 이 토성은 후백제 왕도의 북쪽을 방어하기 위해 축성된 것으로 지난 6월 20일 전북자치도 문화유산(기념물)으로 지정되었다. 지난해 3월부터 발굴에 들어가 잔존규모 장축(동-서) 204m, 최대 단축(남-북) 14m, 최대 성벽 높이 2.5m의 후백제 토성이 확인되었다. 후백제 토목공사 흔적이 확인된 최초의 사례다. 국가유산청 심의 결과 ‘현지 보존’ 결정이 내려졌고 지금은 국가 사적으로 지정하기 위한 작업이 진행 중이다.
종광대 토성은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전주부 고적조에 ‘견훤이 쌓은 고토성’으로 기록돼 있다. 또 ‘여지도서(輿地圖書)’와 ‘대동지지(大東地志)’, ‘완산지(完山誌)’ ‘전주부사(全州府史 1942)’ 등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곳은 인근 기자촌 재개발에 이어 2008년 전주 종광대2구역 주택재개발사업(3만1243㎡)이 추진돼 보상을 둘러싸고 어려움이 없지 않다.
이 일대가 종광대와 구(舊) 여단터로 불려온 것은 꽤 오래전부터다. 언제부터 그렇게 불렸고 무슨 시설이 있었을까. 그에 대한 명쾌한 기록은 없다. 다만 전주문화원(2001) 이 발행한 자료에는 “종광대는 물앙말(물왕멀) 북쪽에 있었다는 종루(鐘樓)이다. 후백제 때에 종루라는 얘기도 전해지며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여단(厲壇)이 있었다고 한다.”로 나와 있다. 조선시대 시작된 여단은 질병이나 전쟁 등으로 죽은 주인 없는 외로운 혼령을 국가에서 제사 지내주던 제단이다.
이곳은 이 일대에서 가장 높아 전주 시가지와 익산 미륵산, 동고산성, 남고산성 등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조망점이다. 하루빨리 사적으로 지정되고 역사유적공원을 만들어 전주시민의 자긍심을 높이는 명소가 되었으면 한다.(조상진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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