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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이 머무는 곳
기고   |  desk@jjan.kr / 등록일 : 2017.04.20  / 최종수정 : 2017.04.20  23:24:57
   
▲ 이여산
 

어릴 적 우리 집은 여산 장터에 살았다. 그곳에서 20분쯤 가면 ‘유성’이란 마을이 있는데 그곳엔 우리 셋째 아버지의 집이 있었다. 셋째 어머니께선 홍시가 떨어지면 주워 두었다가 내가 가면 “여산아, 어서 오너라!” 하시며 반갑게 맞으며 먹을 것도 주셨다. 언제나 어린 조카들을 함빡 웃으며 맞아주시던 셋째 어머니의 그 따뜻한 모습이 언제나 그립다.

그 집엔 선생님이셨던 사촌 오빠와 사촌 언니도 계시어 언제나 내 마음속엔 우리 셋째 집이 좋았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6·25 전쟁이 일어났는데, 우리 친척들은 대부분 셋째 집으로 피난을 가서 같이 먹고살았다. 셋째 집은 넓고 방도 많았다. 한 여름이라 뒷동산에선 매미 소리와 새소리 들렸는데 가끔 멀리서 대포 소리도 났다.

낮에는 텃밭에서 따온 옥수수도 쪄주고 고소한 미숫가루도 타주셨다. 장독대 둘레에는 채송화와 봉숭아, 맨드라미, 접시꽃이 한창 피어 있었다. 밤에는 언니들이 내 손톱에 봉숭아 물도 들여 주고, 내가 배탈이 나면 셋째 어머니께서 내 목에 짚으로 만든 새끼줄을 걸고 뒷간으로 데리고 가서 빌어주셨다. 그게 아마 배탈을 낫게 하는 비법이었나 보다. 서울에서 공부하시던 사촌 오빠들도 전쟁 중이라 모두 집으로 돌아왔고, 오빠의 친구 한 분도 피난을 와 있었다.

철없는 나는 전쟁 중이지만 이방에 가면 언니들이 있고, 저방에 가면 나를 ‘작은 아씨’라고 정답게 불러주던 보름달같이 예쁜 새언니가 있고, 사랑방에 가면 오빠들이 학교생활 이야기하는 것도 들을 수 있어서 마냥 좋았다.

평소엔 자주 만날 수 없었던 많은 친척들이 한데 모여 사니 그저 신나고 좋았던 기억뿐이다. 셋째 집 가족들은 어린 나를 누구나 예뻐했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못 잊은 분은 오늘 만난 언니다. 내가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우리나라 지형도를 만들어 오라는 지리 숙제가 있었다. 신문지를 물에 푹 담갔다가 며칠 후에 꽉 짜서 풀을 섞어 우리나라 지도 모형을 만들라는 것이다. 나는 도저히 엄두도 안 나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마음씨 착한 사촌 언니한테 찾아가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언니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그래? 그럼 만들어보자.” 하면서 종이 찰흙으로 우리나라 지형도를 만든 다음 물기가 마른 후 물감으로 색칠을 하니 훌륭한 지도 모형이 완성된 것이다. 나는 얼마나 신기하고 좋은지 뛸 듯이 기뻤다.

‘그렇게 어려운 일을 척척해내는 우리 언니!’ 나는 언니가 너무 자랑스러웠다. 그 밖에도 재봉, 식물 채집 등 어려운 일만 있으면 찾아갔으나 그때마다 항상 기분 좋은 얼굴로 선뜻 도와주던 천사 같은 사촌 언니였다.

그 당시 언니 나이가 스무 살쯤 된 때인데 대학교에 가려고 준비 중이었다. 그랬던 언니께서 공주로 시집을 가신 후에는 만나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렇게 흐른 세월이 몇 십 년이었는데 시월의 단풍이 곱게 물들던 어느 날 그 언니와 큰어머니의 외동딸인 사촌동생과 세 자매가 서울에서 만났다. 완전히 ‘이산가족 상봉’이었다. 젊은 시절엔 친척들의 애경사에도 참석을 못할 때가 많았다. 그런데 사촌동생의 장례식장에서 전화번호를 알게 되어서 사촌 세 자매가 이산가족 상봉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간단한 것을 40~50년간이나 못 보며 지내다니, 그만큼 삶의 질곡이 만만찮았다는 증거다. 이제부터는 내 발로 돌아다닐 수 있을 때까지 그리운 얼굴들을 부지런히 만나러 다녀야겠다.

△이여산 수필가는 초등학교 교사로 정년퇴직한 후 〈지구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전북수필문학상을 수상했다. 전북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수필집 〈아름다운 인연〉 등 3권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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