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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노적마을 - 고재흠
내 고향 노적마을 - 고재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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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9.20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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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은 푸른 산 푸른 숲으로 둘러싸여 산 높고 물 맑은 청정지역 ‘노적마을’이다. 노적마을엔 산이 깊어 아침 해는 늦게 떠오르고 석양 노을도 늦게까지 머물러 있어 해가 질 무렵이면 적막감이 감도는 마을이다. 변산반도 국립공원 내변산 지역에 위치한 노적마을은 변산에서 두 번째로 높고 덕성스러운 산으로 알려진 삼예봉(三藝峯) 줄기 노적봉 밑에 노적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 좌측에는 거석천, 우측에는 청림천이 있어 좌우 두 냇물이 모이는 양수 합이라 예부터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산 가운데 마을로서 형국이 좁지만, 평원을 이뤄 땅이 비옥하고 논이 밭보다 많은 특이한 지형이라고 평하며 길지(吉地)라서 귀인이 난다고 했다. ‘명산은 인걸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듯이 이 마을에서 조선시대 때 11명의 과거급제자가 배출되었다. 문과 홍문관 교리 1명, 무과 1명, 진사 7명, 중추원 의관 1명, 금부도사 1명 등이다. 그중 밀양박씨와 전주이씨 댁에서 진사 3명이, 그 외 여덟 분은 모두 우리 고가(高家)집안의 선조다.

우리 마을 앞 한가운데 효죽(孝竹)거리가 있다. 예부터 과거에 급제하면 으레 나무로 용을 만들고 파란 물감을 칠하여 높은 대나무 끝에 매달아 놓고 과거 급제자들의 영광을 축하하는 풍속이 있었다. 효죽을 세웠던 그 길거리를 ‘효죽거리’라 부른다. 본인과 가문의 영광은 물론, 부안군과 호남지방, 나아가 전국적인 위상을 높인 쾌거라 할 수 있다.

효죽대로 뽑힌 그 대나무는 크고, 곧고, 높이 잘 자라서 우수한 효죽대로 한 역할을 맡았다. 수많은 대나무 중 우수한 장대로 뽑혔으니 그 대 역시 큰 영광을 얻었다. 조선시대에 세웠던 효죽거리의 효죽은 간데없고 지금은 그 유허지에 옛 선현의 발자취만 남아있다. 요즘 사회와 비교하면 과거급제는 고등고시 격이다. 한 명의 과거 급제자도 없는 마을이 많은데, 한 마을에서 11명이나 합격자가 나왔으니 희귀한 사례요,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지역은 오지여서 경제 사회적 문화가 미급한 환경이지만 많은 인사가 탄생한 점 그리고 위 선인들의 높은 학덕과 명성을 오래도록 기리고 후세에 길이 귀감이 되도록 하고자 그 옛날 효죽을 세웠던 거리였는데 요즈음은 조금 뜸하여 하루빨리 고향마을에 효죽 기념비를 세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내 고향 노적마을은 과거급제자가 많이 탄생한 만큼 유교 사상이 뿌리 깊은 마을이다. 50세대가 살았지만, 예의범절과 인심이 후하고 도둑이 없어 인근 마을에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불행한 6.25사변을 겪는 동안 밤이면 빨치산이 마을로 내려와 주민의 재산을 닥치는 대로 약탈해갔으며 내변산 주민 600여 세대가 모두 피난길에 나섰다.

이후 피눈물 젖은 피난살이를 하며 통한의 세월을 보내다가 빨치산이 완전히 소탕되어 지역주민들은 복귀하라는 통보를 받는 순간 다시 광명을 찾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옛날 오지였던 지역이 변산반도국립공원으로 지정돼 청정한 관광지를 찾는 탐방객들의 주목을 받는 명승지가 되었다.

영롱한 별빛과 은은한 달빛이 언제나 어둠까지도 밝혀주는 내 고향 노적리. 가을이 깊어가는 이 밤, 잠자리에 들기 전 눈을 감으니 고향 동산에서 뛰놀던 내 유년의 추억이 영화의 스크린처럼 스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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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흠 수필가는 월간 ‘문학공간’으로 등단했다. 행촌수필문학회 회장과 한국신문학인협회 전북지회장을 역임했다. 수필집 <초록빛 추억>이 있다. 전북수필문학상과 부안예술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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