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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년 동학농민군

조간신문 한 귀퉁이에 1단 크기의 그 기사가 실린 것은 1995년 여름이었다. 일본 홋카이도 대학 연구실에서 한국 동학농민군지도자의 유골이 발견되었다는 기사였다. 1978년 간행된 신문지에 쌓인 채 종이상자 안에 들어있었던 여섯 개의 유골은 그 해 봄 퇴직한 한 문학부 교수가 썼던 표본실을 정리하던 중 발견됐다. 그 중 하나. 상자 안에 끼워있던 ‘촉루( : 비바람에 씻겨 뼈만 남은 머리뼈)’라는 제목의 기록으로 신원이 밝혀졌다.

 

‘메이지 27년 (1894년) 한국에서 동학당이 궐기 하였는바, 전라남도 진도는 그들이 창궐한 곳으로 이를 평정하고 돌아가는 길에 수백인을 살해하여 시체가 길에 널려 있었는데 그 중 수괴자는 효수에 처하였는바, 이 유골은 그 중의 하나로서 그 섬을 시찰하러 갔다가 채집한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진도전투에서 생포돼 효수 당한 농민군 지도자의 유골이 일본인 사토에 의해 채집되어 일본으로 가져갔다는 사실은 큰 충격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유골 봉환이 추진됐다. 동학관련 단체들이 마음을 모아 발족한 ‘동학농민혁명지도자봉환위원회’(상임대표 한승헌)가 봉환 주체가 됐다.

 

동학군 유골이 고국 땅에 모셔진 것은 동학농민군 전주성 입성 기념행사를 하루 앞둔 1996년 5월 30일이었다. 홋카이도 대학 측의 조사위원장인 하이야 문학부장과 조사위원인 이노우에 교수가 유해 봉환에 동행했다. 다음날 전주 덕진종합회관에서 동학군 진혼제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두 교수는 사죄문을 발표했다.

 

“일본에서는 식민학이라고 하는 학문이 성행하여 일본에 의한 식민지 지배를 이론적 실천적으로 받쳐주는 역할을 다해왔다. 또한 인종론이라는 그릇된 학문이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시켜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홋카이도 대학 문학부는 새삼 우리의 역사 인식을 바로 잡고 과거를 반성함으로써 앞으로 두 나라의 문화 학문의 교류 발전에 이바지하고자 한다”며 뜨거운 눈물로 사죄하고 자책했다.

 

지난 28일 동학농민혁명 2주갑(120주년)을 기념해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 봉환에 동행했던 이노우에 가츠오 홋카이도대 명예교수가 다시 섰다. 유골 봉환 이후 10여년. 왜곡되고 은폐되어 있는 일본의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해 사료 발굴과 연구에 매달렸던 그는 일본군의 동학농민 섬멸작전 전모를 공개했다.

 

“1894년 일본군의 고의적이고 조직적인 대량학살로 농민군 5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갑오년 역사, 그 실체가 더 확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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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kimej@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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