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거리서 우연히 만난 소박한 막걸리 장사에게 스무살의 봄을 빼앗겼다
밤의 홍대 놀이터는 여느 때처럼 길거리 음악가들의 공연으로 시끌벅적했다. 적당한 곳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로 서로의 안부를 묻는데 저만치서 낯선 모습의 남자가 다가왔다.
다 늘어나고 색이 바랜 옷차림이었지만 그가 끼고 있던 면장갑만큼은 유독 깨끗했고, 그가 끌고 온 커다란 리어카는 온통 막걸리 병으로 가득했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 본 그 괴이한 존재에 깜짝 놀라 바라보고 있는 동안 예수 형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가고 있었고 나는 그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았다.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 예수 형과 그의 대화는 편하고 즐거워 보였다. 그 내용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쩌렁쩌렁하고 쾌활한 그의 목소리는 멀리서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음색이었다. 악수에 포옹까지 요란한 인사를 치루고 돌아오는 예수 형의 손에는 검은 봉지가 들려 있었다. 막걸리 세 병이었다. 다 마신 맥주캔을 내려놓고 종이컵에 갓 사온 막걸리를 따르며 예수 형으로부터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통칭 막걸리 아저씨. 그가 홍대에 처음 모습을 나타낸 것은 10년도 더 전의 일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막걸리로 가득한 리어카를 끌고 홍대를 누비는 명물이라고 했다.
이름도, 고향도 불명. 일이 끝나면 벤츠를 몰고 다닌다느니, 근처의 건물 몇 채가 그의 소유라느니 하는 출처 모를 소문들이 무성하지만 워낙 베일에 싸인 인물이다 보니 진위여부를 가릴 수도 없다. 멀어지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막걸리를 한 잔 들이켰다. 기막힌 맛이었다.
그 후에도 홍대에서 가끔 막걸리 아저씨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신출귀몰한 사람이라, 찾으려 하면 절대 나타나지 않다가 생각 없이 홍대 거리를 걸을 때면 불쑥 나타나곤 했다. 그와 마주친 날이면 항상 그의 막걸리를 두어 병 사들고 집에 돌아갔다. 그의 막걸리가 탁월한 맛을 자랑하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와 대화를 나눈 뒤에는 항상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아졌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는 항상 웃고 있었다. 잔뜩 쉰 그의 목소리는 항상 격양되어 있어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끝자락에 가서는 서로의 목소리 싸움이 되기 일쑤였다.
그것이 그와 대화를 나누는 방법인 듯 했다. 한 병에 3000원, 두 병에 5000원. 세워서 보관하고, 취객 되기 싫으면 반 병만 마실 것. 총알같이 쏘아대는 아저씨의 유쾌한 상품 소개에 정신이 혼미해질 무렵이면 어느새 손에는 막걸리가 들려 있고(어째선지 절대 한 병만 사는 일은 없다), 뭐가 좋은지 배시시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집에 돌아와서 생각했다. 내가 산 건 사실 5000원어치의 웃음이고 서비스로 막걸리 두세 병 얻어온 거라고, 횡재한 거라고. 그러면서 혼자 킥킥대다 기분좋게 취해서는 간만에 행복한 숙면을 취했다. 스무살의 봄, 이것이 내가 나의 청춘을 예찬하는 방법이었다.
△이신혁씨는 서울국제초단편영상제 최연소 초청감독을 맡았으며, 현재 아티스트 창작브랜드 Project SH대표, 총괄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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