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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고교생 피살사건으로 지역사회의 경각심이 높아지고 있으나, 전북도의 치안시스템은 기초 통계조차 없는 행정공백 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가 범행동기를 ‘이상 동기’라는 모호한 틀로 규정하는 사이, 전북도 역시 지역별 범죄 취약요소에 대한 정밀 실태조사를 외면하면서 현장 맞춤형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문제는 범행 성격에 대한 정부와 수사기관의 규정이 실제 데이터와 괴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부는 이를 범행 대상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 범죄’라고 설명하지만, 피해 통계는 특정 성별과 연령대에 위험이 집중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한국여성의전화가 발표한 ‘2025년 분노의 게이지’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모르는 사람에게 살해되거나 위협당한 여성은 최소 94명에 달했다. 특히 범행 동기가 확인된 사건 중 ‘성폭력 시도(20건)’와 ‘여성이라는 이유(11건)’가 전체의 약 33%를 차지했다. 이는 이른바 묻지마 범죄로 분류되는 사건 중 상당수가 명확한 표적을 둔 범죄임을 시사한다. 피해자 중 아동과 청소년 9명이 포함된 점 또한 일상적인 귀갓길 안전망의 취약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상황이 이렇지만 전북도는 공적 공간 내 위험요소를 관리할 행정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도내 공공장소의 젠더폭력 발생 현황이나 지역별 취약경로를 분석한 독자적인 ‘성인지 치안 데이터’는 단 한 건도 없는 실정이다. 분석 근거가 부재하다 보니 대책 역시 특성을 고려하지 못한 채 가로등이나 CCTV를 늘리는 식의 장비 확충에만 머물고 있다. 범죄 발생 구조에 대한 정밀한 진단 없는 물리적 장비 증설은 예방 효과에 한계가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현장에서는 지자체의 통계 방치가 대책 부재로 직결된다고 우려한다. 전주여성의전화 관계자는 “정부와 지자체가 실태조사를 외면하면서 국가가 파악하지 못하는 위험이 반복되고 있다”며 “지역 특성에 맞는 데이터 없이는 현장에서 실효를 거둘 수 있는 예방대책 수립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꼬집었다. 최근 원민경 성평등가족부 장관이 현장을 찾아 보호 체계 보완을 약속했으나, 지자체 차원의 기초 데이터 구축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이 역시 공허한 구호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지역별 범죄 특성을 반영하지 못한 일률적인 대책은 실제 위험이 발생하는 현장과 정책 사이의 간극을 메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지역의 한 활동가는 “도민의 생명을 통계 밖으로 방치하지 않도록 범죄 위험요소를 정밀하게 데이터화해야 한다”며 “이를 바탕으로 지역 특성에 부합하는 실질적인 안전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요 때문이었겠지요. 동구 밖 과수원 가는 길에 피었지요. 그렇게 추억하고 싶은 꽃입니다. 벌 떼 잉잉거립니다. 할머니 무릎의 옛날이야기만큼이나 먼 옛날, 사방공사란 걸 했었지요. 벌거숭이 붉은 산엔 메아리가 살 수 없다고 아이들은 자꾸만 노래를 불러댔고, 해마다 장마철이면 산사태가 나기 일쑤였으니까요. 속성수인 아카시아, 오리목, 싸리나무를 심었습니다. 지금은 공휴일 아니라서 있는지도 모르는 이 많지만, 식목일엔 대통령도 코흘리개 1학년짜리도 산에 산에 산에다 나무를 심었지요. 고향마을 동구에서 반갑던 그 꽃이 피었습니다. 영화 속 풍경일까요? 꿈속 기억일까요? 온다, 안 온다. 사랑한다, 안 사랑한다. 한 잎씩 떼어내며 애달팠었지요. 지천이던 토끼풀꽃 따 풀꽃반지도 만들었던 성싶고요. 젖배 곯은 누이동생처럼 서럽기도 한 꽃입니다. 우연히 장터에서 만난 막내 외삼촌이 가만 입에 넣어준 오다마 사탕보다 더 달콤한 꽃입니다. 흔하다고 천한 꽃 아니지요. 꿩 꿩 산꿩이 웁니다. 둘이서 마주 앉아 얼굴 마주 보며 쌩끗, 웃고 싶은 날입니다. 아카시 꽃이 맞다지만 내겐 언제까지나 아카시아꽃입니다.
580여년 전 세종대왕이 백성을 향한 긍휼한 마음으로 창제한 소통의 도구 한글이 기능적 의무를 내려놓고 시각적인 생명체로 재탄생했다. 전주현대미술관에서 29일까지 열리는 '한글이 숨 쉬다-Font Art 모색’은 납작한 기호로 박제된 문자에 조형적 숨결을 불어넣는 실험의 장이다. 지난해 첫선을 보였던 기획전을 계승한 이번 전시는 필획을 중시하는 전통서예와 색채를 강조하는 현대회화의 접점을 탐색한다. 이를 통해 디지털 텍스트가 지운 문자의 질감을 복원하려는 묵직한 논리적 화두를 던진다. 이번 전시에는 김춘선, 송하진, 박인선, 이기전, 이동근, 이성재, 이적요, 이희춘, 차유림, 최동명 등 10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이들은 한글을 각자의 문법으로 해체하고 재구성해 24개 자음과 모음이 품고 있는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을 시각화한다. 특히 서예는 색채를 수용해 회화로 나아가고 회화는 점획의 선형적 골격을 빌려 서예적 깊이를 확보하는 상호침투가 이번 전시의 핵심이다. 실제로 작품 면면을 보면 관습을 탈피하려는 구체적인 시도들이 읽힌다. 차유림 작품 ‘기록된 신체'는 인체의 원초적 곡선인 누드를 배경으로 문자를 배치해 인간의 관계와 생명력을 은유한다. 문자가 신체적 실체와 결합했을 때 발생하는 긴장감을 마주할 수 있다. 이적요는 붓질 대신 바느질이라는 수행적 노동을 택해 문자에 촉각적인 질감을 부여했다. 이희춘의 ‘머무는 것들’은 한글과 한문, 사람의 형상을 융합해 문자의 평면성을 입체적 서사로 전환한다. 서예가 송하진과 최동명은 전통서법의 경계를 허물어 자유롭고 거친 회화적 필치를 드러내어 서예의 새로운 영토를 제안한다. 이기전은 ‘물’이라는 소재를 통해 문자의 조형적 환영을 극대화했다. 실제로 캔버스 위에 투명한 에폭시 액체를 떨어트려 물방울의 굴절과 일렁이는 그림자를 구현한 작업은 문자가 조명 아래에서 입체적으로 부유하는 듯한 시각적인 경험을 선사한다. 이러한 시도는 디지털 텍스트가 지운 문자의 물성을 회복하려는 의도이자 한글이 가진 기하학적 과학성을 예술적 보편성으로 끌어올리려는 조형적 실험이라 할 수 있다. 이기전 관장은 “추상이든 구상이든 우리가 평소에 보는 어떠한 형상들인데, 한글이라는 문자(주제)를 그림으로 표현해냈다는 것이 관람객들에게 신선하게 다가갈 것”이라며 “한글이 지닌 심미적인 가치와 정체성 그리고 장르 간의 융합을 눈으로 마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 낭독과 클래식이 만나 시민들에게 ‘착하고 순한 위로’를 건네는 공연이 열린다. 박태건 시인과 클래식 연주팀 ‘Tutti 앙상블’이 함께하는 낭독 공연 ‘당신에게 건네는 착하고 순한 위로’가 오는 15일 오후 3시 학산숲속시집도서관에서 개최된다. 시 낭독과 클래식 선율, 인문학적 해설이 어우러지는 이번 공연은 총 3부로 구성된다. 박 시인은 “시를 어렵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지만, 본래 시는 인간의 감정을 나누기 위해 존재했던 것”이라며 “일반적인 시 강연 형식에서 벗어나 음악과 함께하는 공연을 통해 시민들이 시를 보다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고 기획 배경을 설명했다. 이어 그는 “음악은 감정을 즉각적으로 전달하는 예술”이라며 “작곡가들이 음악 속에 담아낸 상실과 슬픔, 사랑의 감정은 시와도 맞닿아 있다. 이를 함께 연결하면 시와 음악 모두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공연에서는 박 시인의 시집 <고려인만두>에 수록된 작품들이 중심으로 소개된다. 시집 속 ‘우스또베’, ‘고래’, ‘근황’ 등 디아스포라와 유랑, 생태와 존재에 대한 질문을 담은 시편들이 바흐와 포레, 히사이시 조 등의 음악과 함께 낭독될 예정이다. 1부 ‘당신의 둥글고 단단한 시간’에서는 어머니들의 굽은 손가락과 삶의 주름 속에 숨겨진 떨림을 이야기하며, 오월의 열매처럼 시고도 달콤한 생의 기억을 돌아본다. 이어지는 2부 ‘눈물과 고독이 스며든 자리’에서는 역사가 기록하지 못한 타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중앙아시아의 차가운 빗돌 아래 잠든 고려인들의 애환을 담은 시와 클래식 선율의 만남이 깊은 울림을 전할 예정이다. 또한 정주(定住)의 욕망을 넘어선 유목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자유를 향한 갈망을 함께 조명한다. 마지막 3부 ‘숲에서 부는 착하고 순한 바람’에서는 예술가의 정치의식과 생태적 사유를 다룬다. 박 시인은 “권력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으며, 변화의 과정 속에서 자기 자신 역시 변화의 대상이 돼야 한다”는 문학적 소신을 바탕으로, 존재의 본질을 응시하고 서로의 삶을 다독이는 연대의 마음을 전할 계획이다. 박 시인은 “사랑 역시 결국 또 다른 사람에게로 향하는 여행이라고 생각한다”며 “바흐의 사라방드처럼 상실의 감정을 담은 음악과 가곡들을 시와 연결해 공연을 구성했다”고 말했다. 이어 “원래 시는 소리에서 출발했지만 어느 순간 ‘보는 시’, ‘생각하는 시’가 되면서 사람들과 멀어진 측면이 있다”며 “이번 공연은 시를 다시 소리와 호흡의 자리로 되돌려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그는 또 “아름다움은 언제나 우리 주변에 있지만 바쁜 일상 속에서 그것을 느낄 여유를 잃고 살아간다”며 “숲속 도서관으로 걸어가는 길에서 바람과 나뭇잎의 흔들림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위로와 치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이번 프로그램은 일반 시민 20명을 대상으로 진행되며, 참여 신청은 전주시립도서관 누리집을 통해 가능하다. 자세한 사항은 전화(063-230-1857)로 문의하면 된다.
C.S. 루이스는 영화로도 제작된『나니아 연대기』의 작가로 이름이 잘 알려져 있다. 북아일랜드 태생의 작가는 어린 시절 북유럽 신화와 초자연적인 이야기를 좋아했으며, 19세 때 1차 세계대전에 자원입대해 복역하던 중 부상을 입기도 했다. 이런 경험이 환상소설에 자연스레 녹아들었을 것이다. 『나니아 연대기』는 작가가 오십 대에 출간한 시리즈물이다. 그에 비해『순례자의 귀향』은 삼십 대 초반에 쓴 첫 소설이며, 무신론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뒤에 쓴 자전적 소설이다. 은유와 비유로 가득한 난해하고도 복잡한 책의 후기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소회를 밝혔다. ‘이 책의 모든 내용이 자전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저는 제 인생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이야기를 하려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길 위에 선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퓨리타니아에서 태어난 소년 존은 어느 날 부모의 손에 이끌려 큰 돌집에 사는 집사를 만나러 간다. 집사는 온 땅의 주인인 지주님의 규칙에 대하여 말해 준다. 규칙을 어기면 전갈과 뱀이 우글거리는 검은 구덩이에 던져진다는 말에 두려움을 느낀 존은 규칙의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존은 우연히 숲의 끝자락, 서쪽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섬을 보게 되고 그곳을 향한 열망을 키워나간다. 지주님의 해고 통지를 받은 외삼촌이 동쪽 개천 너머에 있는 산으로 떠난 뒤 존은 숲속에서 갈색 여자를 만나고, 섬을 향한 목마름을 욕망으로 치환시킨다. 죄, 즉 갈색 여자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자, 존은 잊고 있던 달콤한 갈망을 떠올리고 집을 떠난다. 섬을 찾아 서쪽으로 향하는 순례 여정은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과 단테의 『신곡』을 닮았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와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에서도 어떤 깨달음이나 보물을 찾아 길을 떠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C.S. 루이스는 이름 붙일 수 없는 그 무엇, 아무리 애써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하고 아쉬운 그 무엇을 찾기 위해 ‘대중적 실재론에서 철학적 관념론으로, 관념론에서 범신론으로, 범신론에서 유신론으로, 유신론에서 기독교’에 이르는 지난한 길을 걷는다. 그리고 마침내 찾게 된 그 갈망에 기쁨(joy)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존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존은 ‘스릴’이라는 시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계몽 선생을 만나 평소 궁금해하던 것을 묻는다. “어쩌다 사람들은 지주가 있다고 믿게 되었을까요?” 계몽 선생이 답한다. “지주는 집사들의 발명품일세.” 덧붙여 집사들은 현대과학에 대한 지식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마음을 짓누르던 부담에서 벗어난 존은 작은 언덕에 올라서서 “지주가 없다”고 외친다. 그때 미덕이 다가온다. 존은 미덕에게 규칙을 지킬 필요가 없어졌고, 새총으로 새를 쏘아도 간섭할 이가 없어졌다고 말한다. 미덕은 새를 쏘고 싶은지 묻는다. 새총을 만지작거리던 존은 곧 아니라고 대답한다. 존은 미덕과 여행을 계속한다. 시대정신의 땅에서 두 사람은 프로이트에 갇혀 있다가 이성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그곳을 벗어난다. 그러나 거대한 협곡이 그들을 막아선다. 둘은 협곡으로 내려가는 길을 찾기 위해 북쪽으로도 가고 남쪽으로도 간다. 그들 앞에 나타난 무지와 교만과 세속적 교양과 관대와 지혜들이 무모한 여행을 만류하지만, 존은 역사라는 이름의 은자에게 인류 사상의 변천사를 배우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협곡을 건너 마더 커크(Mpther. Kirk)가 있는 곳에 당도한다. 존은 먼저 온 순례자들과 함께 바다를 바라본다. 존은 과연 섬을 보았을까? “세상은 둥글어요. 당신은 세상을 반 바퀴 돌았어요. 저 섬은 산이에요. 말하자면 산 반대편이고, 실제로는 섬이 아니지요.” 안내자의 말에 의하면 그 섬은 외삼촌이 올라간 산의 이면이었다. 존은 퓨리타니아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귀향길은 같지만 다른 길이었고, 존은 처음으로 세상의 진정한 모양새를 보게 된다. 황보윤 소설가는 전북일보와 대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저서로는 소설집 <로키의 거짓말>, <모니카, 모니카>, 장편소설 <광암 이벽>, <신유년에 핀 꽃>이 있다.
누구나 어린 시절 까닭없이 스스로가 작아지거나 가파른 산길을 홀로 걷는 듯한 막막함을 마주하곤 한다. 때로는 타인의 날 선 괴롭힘 앞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기억이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기도 한다. 박서진 작가의 신간 동화 <글자 먹는 고양이 용기의 맛>(보랏빛소어린이)은 바로 이러한 마음의 그늘진 지점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유년 시절 겪었던 자신의 아픈 기억을 담담히 꺼내어 지금 이 순간에도 홀로 떨고 있을 아이들에게 다정한 위로의 손길을 내민다. 작품의 주인공 고양이 둥이가 건네는 핵심의 가치는 ‘함께’라는 글자이다. 작가는 함께라는 글자에서 ‘따뜻한 밥 냄새 같은 맛’이 난다고 정의한다. 든든하게 배를 채워주는 그 맛이 결국 내면의 ‘용기’를 끌어올린다는 통찰은 독자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달한다. 무서운 상황에서도 한 발을 내딛게 하고 주먹을 불끈 쥐게 하는 힘이 결국 타인과의 든든한 연대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유려한 문체로 보여준다. 박 작가는 2002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로 당선된 이후 다양한 활동을 펼치며 독자들과 깊게 소통해 온 중견 작가다. 이번 신작에서도 작가 특유의 문장력과 홍그림 작가의 생동감 넘치는 일러스트가 조화를 이루어 ‘글자를 맛본다’는 독창적인 상상력을 극대화했다. 특히 작가의 말에서 언급된 “괴롭힘 당하던 작가를 대신해 목소리를 높여준 친구”의 일화는 단순한 허구를 넘어 진심 어린 연대의 기록을 뒷받침한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독자들에게 용기를 내라고 설득하지 않는다. ‘함께’라는 글자를 가슴에 품고 자신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나아가기를 권유한다. 결국 이 책은 글자를 통해 마음의 허기를 채우는 과정을 기록한다. 때문에 작가의 진심이 투영된 든든한 문장들이 외로운 이들의 속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치유와 정화의 시간을 제공한다. 글을 쓴 박서진 작가는 2014년 <고민 있으면 다 말해>로 푸른문학상을 받았다. 그동안 <고양이가 된 고양이> <끝내자고 고백해> <만나자는 약속보다 로그인이 더 편해!> 등을 펴냈다. 삽화 작업을 한 홍그림 작가는 <조랑말과 나> <잠이 오지 않는 밤>을 쓰고 그렸으며 <열살 달인 최건우> <출동 고양이 요원 캣스코> 등에 그림을 그렸다.
“목표가 없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평생을 정교한 계획과 질서 속에서 붓을 잡아온 화백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역설적이다. 1940년 김제에서 태어난 한국 수묵채색화의 거장 벽경(壁景) 송계일 화백이 10년 만에 고향에서 초대전을 선보인다. 다음달 7일까지 청목미술관에서 열리는 ‘벽경 송계일 초대전’은 60여년간 ‘전통의 현대화’라는 화두를 놓지 않았던 화백의 조형실험이 도달한 현재를 가늠하는 자리다. 12일 청목미술관에서 만난 송 화백은 “지금까지는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그림을 그렸지만 앞으로는 무계획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다”라며 “우연적인 작업을 통해 필연적인 작품을 만드는 데 시간을 할애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수십 년간 목표를 향해 치열하게 내달리다 보니, 때로는 스스로의 표현이 지루하고 딱딱하게 느껴졌던 탓이다. 이번 초대전에서 선보이는 신작 33점은 먹의 번짐과 스며듦, 색채의 확장과 조화를 통해 자연이 지닌 생명의 에너지를 구현하는 데 집중했다. 우주의 기본 질서인 음양오행을 바탕으로 ‘광대무변(廣大無邊)’의 세계를 먹과 채색의 물성으로 풀어냈다. 특히 바탕에 먹을 짙게 깔고 그 위에 색을 올리는 화백만의 독창적인 기법은 한국화에 유례없는 묵직한 무게감과 깊은 심연을 부여한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주제를 사유하고 실체를 확인하는 데만 수개월, 실제 완성까지 근 1년을 쏟아붓는 그의 작업 방식은 고행에 가까운 수행이다. 이번 신작들 역시 그러한 인고의 시간을 견뎌낸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송 화백은 화가로서의 명성을 넘어 전북 미술의 기틀을 세운 ‘설계자’이기도 했다. 전남대 교수 시절, 예술대학이 없던 전북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직접 교육부를 설득하며 전북대학교 예술대학 승인을 이끌어냈고 전북도립미술관 건립에도 헌신적인 힘을 보탰다. “몸은 광주에 있어도 마음은 늘 전주에 있었다”는 그의 고백은 고향을 향한 지독하고도 순수한 애정의 기록이다. 그는 평생을 지탱해온 철저한 계획성으로부터의 작별하겠다고 선언했다. 우연 속에서 필연을 발견하는 문인화적 세계, 즉 어떤 목적도 두지 않는 ‘무(無)목표의 자유’로 나아가겠다는 의지다. “큰 길에는 문이 없다(大道無門)”는 사상을 가슴에 품고 평생 화단의 경계에서 ‘문제적 작가’로 살아온 화백은 원로의 자리에 안주하기보다 미답의 영역을 탐구하는 모험가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앞으로 매일 문인화를 한 점씩 그리려 한다”라며 “화가가 그림을 안 그릴 수는 없으니 습관처럼 문인화를 그려서 새로운 장르와 세계를 후배들에게 제시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수묵의 깊은 울림과 채색의 생명력이 조화를 이룬 이번 전시는 어쩌면 화백이 평생 쌓아온 성취를 내려놓고 마주한 가장 자유롭고 진솔한 고백이 될 것이다.
전북 지역서점 11곳이 생애주기별 독서문화 거점으로 거듭난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한국서점조합연합회가 이달부터 오는 10월까지 전국 지역서점 200곳에서 운영하는 생애주기별 독서문화활동 지원 사업 ‘인생독서×인생서점’에 도내 지역서점 11곳이 선정됐다. 이번 사업은 지역서점에서 다양한 문화활동을 통해 ‘인생의 독서 습관’을 기르고 자신만의 ‘인생서점’을 만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업이다. 참여 서점들은 어린이, 청소년, 성인, 어르신 등 생애주기별 특성을 반영한 맞춤형 독서문화 프로그램을 직접 기획·운영한다. 지난달 진행한 공모를 통해 프로그램 기획의 독창성과 다양성, 지역별 신청 비율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참여 서점 200곳을 선정했으며, 선정 서점에는 문화활동 운영비와 서점주 활동비 등 최대 600만 원을 지원한다. 올해 선정된 프로그램은 단순한 독서 모임이나 강연을 넘어 책 읽기 이후의 경험을 확장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지역서점 서가 탐험, 토론, 글쓰기, 생애 기록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책에 대한 흥미를 높이는 것이 특징이다. 전주에서는 ‘물결서사’가 시니어를 대상으로 전주 노송동 ‘꽃글씨’ 워크숍을 진행하며, ‘소소당’은 성인과 시니어를 위한 ‘처음이지, 어른 – With Book’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또 ‘책보책방’은 성인과 시니어를 대상으로 ‘나의 삶을 읽고, 다시 쓰는 시간’을, ‘호남문고’는 전 연령층이 참여하는 ‘문장수집소: 체험형 독서 팝업’을 선보인다. 이 밖에도 익산에서는 ‘기찻길옆골목책방’, ‘수록’, ‘원서점’ 등 3곳이 선정됐으며, 군산에서는 ‘봄날의산책’과 ‘한길문고 나운점’, 남원에서는 ‘살롱드마고’, 고창에서는 ‘책방해리’가 참여해 생애주기별 맞춤형 독서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할 예정이다. 각 서점의 상세 프로그램 정보와 일정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독서인’과 한국서점조합연합회의 ‘서점온(ON)’ 누리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북특별자치도를 대표하는 무용인들의 축제가 오는 17일 오후 7시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에서 화려한 막을 올린다. 사단법인 대한무용협회 전북특별자치도지회(이하 전북무용협회)가 주최·주관하는 제35회 전북무용제는 단순한 공연의 연속을 넘어 전북 무용의 역사와 흐름을 축적해 온 무대다. 특히 오는 10월 서울에서 개최될 전국 무용제로 이어지는 전북 대표 작품을 선발하는 관문으로서 지역 무용계의 예술성과 경쟁력을 동시에 확인하는 장이 될 전망이다. 올해 무용제는 전통과 현대, 그리고 인간의 근원적 생존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세 팀의 경연 작품과 품격 있는 초청·축하 공연으로 구성됐다. 먼저 박수로현대무용단(안무 정승준)은 현대인의 멈출 수 없는 가속된 일상을 다룬 ‘V1’을 선보인다. 끊임없이 울리는 알림 속에서 선택의 여지 없이 다음 단계로 밀려가는 도시인의 움직임을 통해, 이륙의 순간이 아닌 이미 되돌릴 수 없게 된 이후에도 계속되는 삶의 관성을 현대무용 특유의 역동적인 신체 언어로 풀어낸다. 이어 뉴앙스아트컴퍼니(안무 김동훈)는 한국적 정서가 짙게 깔린 ‘바리여 바리여’를 무대에 올린다. 세상에 버려진 상처를 안고도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저승으로 향하는 바리의 여정을 그린다. 원망과 사랑이 뒤섞인 감정의 층들을 섬세한 한국무용 사위로 표현하며, 고통 속에서도 다시 몸을 일으키는 인간의 강인한 의지를 전달할 예정이다. 마지막 경연팀인 하이댄스퍼포먼스(안무 주슬아)는 ‘n번째 빛’이라는 주제로 생명의 진화를 탐구한다. 35억 년 동안 이어져 온 세포의 이동과 생체 전기 신호, 그리고 작용과 반작용의 굴레를 기하학적인 움직임으로 형상화했다. ‘살다’를 넘어 ‘잘 살다’로 나아가려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무대 위에 던진다. 경연의 열기를 더할 화려한 부대 공연도 준비되어 있다. 초청 공연으로는 국가무형유산 태평무 이수자인 김승애가 ‘십이체장고춤’을 통해 우리 춤의 격조 높은 우아함을 선사한다. 또 색소포니스트 고민석(Kenny-Go)이 ‘A.P.T’, ‘붉은 노을’ 등 대중적인 곡들을 연주하며 관객들과 호흡하는 흥겨운 축하 무대를 꾸민다. 노현택 전북무용협회 지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춤은 인간의 몸을 통해 시대와 감정을 전달하는 가장 근원적인 예술”이라며 “실력 있는 안무가들과 차세대 무용인들이 어우러진 이번 무대가 관객들에게 깊은 울림을 전하고 전북 무용예술 발전의 지속적인 동력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제27회 전주국제영화제가 독립·실험영화의 확장성과 영화축제로서의 현장성을 동시에 드러내며 열흘간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는 지난 8일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에서 결산 기자회견을 열고 올해 영화제 운영 성과와 프로그램 결산 내용을 발표했다. △골목상영부터 ‘가능한 영화’까지…축제성과 정체성 잡았다 제27회 전주국제영화제는 독립·대안영화 중심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동시에 시민 참여형 부대행사를 확대하며 ‘체류형 영화축제’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올해 영화제는 ‘우리는 늘 선을 넘지’를 슬로건으로 총 54개국 236편의 작품을 선보였다.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과 CGV전주고사, 메가박스 전주객사 등 5개 극장 21개관에서 총 610회 상영이 진행됐으며, 7일 기준 누적 관객 수는 6만9365명, 좌석 점유율은 82.1%를 기록했다. 특히 올해 가장 눈에 띈 변화는 신규 섹션 ‘가능한 영화’의 신설이다. 지난해 특별전과 동명 도서 ‘가능한 영화를 향하여’에 대한 관객 호응을 바탕으로 정규 섹션으로 확대 편성하면서 독립영화와 대안적 제작 방식의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조명했다. 해당 섹션은 평균 예매율 90% 이상을 기록하며 관객들의 높은 관심을 입증했다. 부대행사 역시 영화제의 외연을 넓혔다. 영화의거리와 한옥마을 일대에서 열린 ‘골목상영’은 8일간 총 4175명의 관객이 찾았으며, 일부 회차는 역대 최다 관객 수를 기록했다. 특히 전주중앙교회 광장 상영에는 하루 최대 555명이 몰렸다. 또 ‘100 Films 100 Posters’ 전시는 약 8000명의 관람객을 기록했고, 영화제 굿즈샵은 역대 최고 매출을 경신했다. 일부 상품은 조기 품절됐으며, 오픈 전부터 긴 대기 줄이 이어지기도 했다. △안성기 특별전부터 차이밍량 마스터클래스까지…거장과 실험영화 조명 올해 전주국제영화제는 한국영화의 역사와 세계 영화사의 실험정신을 아우르는 특별전과 프로그램 이벤트를 통해 관객들에게 보다 깊이 있는 영화 경험을 제공했다. 먼저 올해 초 별세한 배우 안성기의 작품세계를 조명한 ‘특별전: 조금 낯선 안성기를 만나다’에서는 대표 출연작 7편을 상영하며 한국영화사 속 배우 안성기의 연기 궤적과 의미를 되짚었다. 또 ‘홍콩귀환: 시네마+아방가르드’, ‘뉴욕 언더그라운드-더 매버릭스’, ‘게스트 시네필: 페라 포르타베야’ 등 특별전을 통해 기존 상업영화 중심 영화사에서 상대적으로 조명받지 못했던 실험영화와 아방가르드 흐름도 집중적으로 소개했다. 관객과 영화인을 연결하는 프로그램 이벤트도 활발하게 운영됐다. 올해 영화제에서는 총 269회의 클래스·GV·무대인사 프로그램이 진행됐고, 국내외 게스트 754명이 참여했다. 특히 차이밍량 감독과 마이크 피기스 감독이 참여한 마스터클래스는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차이밍량 감독은 행사 중 ‘행자’ 시리즈 차기작을 전주에서 촬영할 계획이라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 이와 함께 ‘전주톡톡’, ‘영화로의 여행’ 등 강연·토크 프로그램도 확대 운영됐다. 올해의 프로그래머로 선정된 변영주 감독은 자신의 연출작과 영화 인생에 영향을 준 작품들을 소개하며 관객과 소통했다. △“독립영화 정체성 사수하고 대중적 확산 주력할 것” 취임 4년 차를 맞은 민성욱·정준호 공동집행위원장은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그간의 소회와 함께 영화제의 미래 비전을 제시했다. 두 공동집행위원장은 ‘독립영화의 정체성 사수’라는 공통된 목표 아래, 내실 있는 행정 지원과 대중적 추진력을 결합해 전주국제영화제의 새로운 30년을 준비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먼저 정준호 위원장은 “지난 3년은 내가 진정한 영화인인가를 스스로 질책하며 반성한 시간이었다”며 “전주국제영화제는 창작자들이 열정을 모아 선보이는 순수한 시장판인 만큼, 이들의 잔뿌리가 큰 나무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독립영화가 대중과 거리를 둘 필요는 없다”며 LCC(저비용항공사) 기내 상영 협업이나 대형 극장 내 독립영화 전용관 확대 등 외연 확장을 위해 발로 뛰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민성욱 위원장은 영화제의 내실을 다지는 하드웨어 구축과 행정적 비전을 제시하며 궤를 같이했다. 민 위원장은 영화제의 숙원 사업인 ‘전주 독립영화의 집’ 건립을 향후 성장의 핵심 동력으로 꼽으며 “전주시와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건립이 차질 없이 추진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영화제 30주년 즈음 완공될 이 공간은 단순한 건물을 넘어 영화인들이 상시 교류하는 독립영화의 성지이자 전주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될 것”이라며 안정적인 인프라 구축을 통한 정통성 강화를 약속했다.
겨울엔 무명 여름엔 모시였습니다. 석유에서 뽑아낸 합성섬유 나이롱이 나오기 전까지는요. 모시풀의 속껍질을 벗겨내 태모시를 만들었지요. 손톱과 이로 째고 한 올 한 올 침을 발라 허벅지에 비벼 이어 붙였지요. 광주리의 모시실, 꾸리를 감을 때면 자주 엉켜 난감했었지요.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붉은 강낭콩 한 줌 더 뿌렸고요. 언제 엉켰었냐는 듯이 꾸리 꾸리 잘도 감겼고요. 날기와 바디 촘촘 실을 끼워 풀을 먹이는 매기를 거쳐 베틀에 올렸습니다. 북통에 넣은 꾸리가 씨줄이 되었지요. 실오리 같은 고샅을 빠져나온 지 어언 반백 년입니다. 사통팔달 넓고 빨라진 길을 달립니다. 경기장 사거리 빨강 신호등에 걸린 사이 아련한 옛날이 주마등처럼 흘러가네요. 씨줄 날줄, 엉키지 않고 자동차가 오갑니다. 저 빨강 금세 파랑으로 바뀌겠지요. 행여 뒤처질세라 나는 또 차고 나갈 테고요. 서두르는 길이 꼬이기도 했습니다만, 그 옛날 어머니가 이골이 나게 쪼개고 이어 붙인 모시실 위에 뿌린 붉은 강낭콩 덕에, 내 앞길 크게 엉키지 않았습니다. 잠시 이정표도 살펴라, 신호등이 붉게 붙잡습니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이야기를, 끝내 보게 만드는 것이 제 영화입니다.” 제27회 전주국제영화제 특별전 ‘조금 낯선 안성기를 만나다’의 일환으로 상영된 <부러진 화살> GV가 열린 지난 6일 현장. 늦은 밤까지 객석을 지킨 관객들 앞에서 정지영 감독은 특유의 단호한 어조로 배우 안성기와의 오랜 인연부터 영화가 사회와 맞서는 방식까지 담담히 풀어냈다. 이번 특별전은 올해 초 세상을 떠난 안성기 배우를 기리기 위해 마련됐다. 정 감독은 “안성기 배우는 흥행배우이면서도 독립·예술영화를 위해 기꺼이 헌신한 사람이었다”며 “부러진 화살 역시 그런 작품 중 하나”라고 말했다. 두 사람의 인연은 1990년 개봉한 <남부군>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안성기는 시나리오도 없이 원작만 읽고 출연을 결정했다고 한다. 정 감독은 “배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캐릭터를 연기하느냐”라며 “안성기는 정치적 입장보다도 평생 한 번 만날 수 있을까 말까 한 인물을 연기하고 싶어 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제작된 <하얀 전쟁> 역시 안성기의 제안에서 시작됐다. 그는 베트남전을 다룬 원작 소설을 직접 권했고, 결국 영화화까지 이어졌다. 정 감독은 “안성기는 스스로를 비정치적 인간으로 두려 했지만, 배우로서 욕심나는 역할에는 누구보다 솔직했다”고 말했다. 본인의 13년의 공백 끝에 만든 <부러진 화살>의 제작 비화에 대해 정 감독은 “처음에는 독립영화 수준의 제작비로 찍으려 했다”며 “그렇게 주연 배우를 고민하던 중, 누군가 ‘이 작품은 반드시 안성기가 해야 한다’고 말해 찾아갔고, 안성기가 하루 만에 출연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당시 영화는 약 5억 원대 저예산으로 제작됐지만 340만 관객을 돌파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정 감독은 “사법부와 기득권 구조를 정면으로 건드리는 영화라 투자자들이 두려워했다”며 “안성기가 합류한 뒤에야 비로소 영화의 규모가 커질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안성기의 연기 방식에 대해 “큰 틀만 설명해주면 배우 스스로 캐릭터를 완성했다”며 “박원상, 이경영 등 배우들이 서로 연기 경쟁을 벌이면서도 호흡은 완벽하게 맞았다”고 말했다. GV 말미, 그는 다시 안성기를 떠올렸다. “안성기 배우가 세상을 떠났을 때 한국에 없어서 장례식에 가지 못했다”며 잠시 말을 멈춘 정 감독은 “나중에 수목장을 찾아가 마음속으로 한마디 했다. ‘언젠가 나도 가면 거기서 다시 만나자’”라고 말했다.
제27회 전주국제영화제의 폐막작으로 선정된 영화 <남태령>은 지난 2024년 12월, 남태령 고개를 가득 메운 시민들의 연대와 광장의 감각을 스크린 위로 옮긴 작품이다. 김현지 감독은 전작 <어른 김장하>를 통해 한 인물의 삶을 조명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남태령’이라는 공간과 그곳을 통과한 사람들의 마음을 기록했다. 영화는 2024년 12월 전봉준투쟁단의 상경 투쟁과 이를 지켜본 시민들이 만들어낸 연대의 순간을 따라간다. 제27회 전주국제영화제의 폐막을 하루 앞둔 7일, 전주의 한 카페에서 마주한 김 감독의 시선은 날카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독히 다정했다. 감독은 남태령의 밤을 두고 “만화경 같은 무지개 색깔로 기억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모든 색깔이 한데 섞여 검은색이나 흰색으로 통합되는 것이 아니라, 빨강·파랑·노랑의 고유한 빛이 각자의 모습을 유지한 채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며 “서로 다른 존재들이 부딪히고 스치면서 만들어낸 현장의 에너지가 마치 만화경 같았다”고 설명했다. 특히 동학농민운동의 정신이 깃든 전주에서, 농민들의 상경 투쟁기를 담은 이 영화가 세계 최초로 공개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그리스 신화의 수미상관이 완성되는 듯한 기분이었다”며 “전봉준투쟁단의 이야기를 전주에서 처음 선보인다는 사실 자체가 상징적으로 다가왔다”고 소회를 밝혔다. 이번 작품은 SNS와 유튜브 라이브, 시민들이 직접 촬영한 영상 등 디지털 아카이브를 적극 활용했다. 기존 다큐멘터리 문법에서 벗어난 방식이다. 김 감독은 “제 목소리만으로는 그 현장을 정리할 수 없었다”며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기록한 방식 그대로 전달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영화는 거대한 정치적 분석보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과 발언, 서로를 돌보는 장면들에 집중한다. 시민들이 핫팩과 음식, 난방버스를 보내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순간들은 영화의 중요한 축이 된다.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2030세대의 응원봉과 농민들의 트랙터가 한 공간에서 만나 만들어낸 낯선 풍경이다. 김 감독은 이를 두고 “사람이 사람의 고독을 알아본 순간”이라고 표현했다. 투쟁적이고 과격하게만 보였던 농민들의 깊은 외로움과 고독을 젊은 여성들이 먼저 발견하고 곁을 내어주던 순간, 감독은 대면의 힘이 혐오를 녹이는 장면을 목격했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조차 익숙하지 않았던 한 노년 농민이 젊은 세대와 밥상을 나누며 편견을 허물어가는 과정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갈등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현장에서 발생한 연대의 힘은 감독 자신의 고민과도 맞닿아 있다. 김 감독은 나이가 들수록 세상이 적과 아군으로 단순하게 나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체감하게 됐다고 말했다. 성별과 세대, 지역 갈등이라는 표면 아래 존재하는 소외와 계급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결국 남태령의 출발점이 됐다는 설명이다. 끝으로 김 감독은 <남태령>이 일회적인 영웅담이나 신화로 남기보다, 관객들이 일상으로 돌아가 타인과 대면하는 하나의 ‘태도’로 남길 소망했다. 비록 세상은 영화 한 편으로 바뀌지 않을지라도, 남태령을 거쳐 간 이들이 “우리가 어떻게 연대하는지 이미 해봐서 안다”고 말할 수 있는 효능감, 그 연대의 기억이 우리를 조금은 덜 외롭게 만들 것이라는 믿음이다. 가장 낮은 곳의 목소리를 모아 가장 높은 울림을 만들어내는 김현지 감독의 카메라는, 오늘도 사람과 공동체의 온기를 향해 흐르고 있다.
제27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올해 처음 선보인 ‘가능한 영화’ 섹션은 제작 방식과 창작 환경의 다양성을 확장하려는 시도로 주목받고 있다. 영화는 반드시 거대한 자본과 산업 구조 속에서만 만들어져야 한다는 통념을 넘어, 보다 개인적이고 친밀한 조건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문제의식이 이번 섹션의 출발점이다. 이 같은 지향을 가장 또렷하게 드러낸 작품 중 하나가 파스칼 보데 감독의 다큐멘터리 <많다, 말이>다. 지난 4일 메가박스 전주객사 10관에서 상영 후 진행된 관객과의 대화(GV)에는 감독이 직접 참석해 작품의 출발과 연출 의도를 설명했다. 보데 감독은 영화의 주인공 ‘암르’를 “6년 넘게 알고 지낸 이웃”이라고 소개하며 “같은 동네에서 촬영한, 매우 개인적인 관계에서 시작된 이야기”라고 밝혔다. 프랑스에서 17년을 살았지만 여전히 언어 장벽에 갇혀 있는 인물을 통해 이주민의 현실을 포착했다는 설명이다. 관객들은 특히 언어와 체류 문제를 둘러싼 설정에 주목했다. 감독은 “그는 밝고 유머 감각이 있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체류 문제로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 있다”며 “그 모순적인 지점이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이어 “제스처와 바디랭귀지로 소통하는 모습이 인간적으로 다가왔고, 그 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영화를 시작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작품은 체류 허가를 둘러싼 행정 절차를 주요 축으로 삼지만, 단순한 제도 비판에 머물지 않는다. 보데 감독은 “복잡한 절차 자체보다 그것이 한 인간의 감정과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가 더 중요했다”며 “주인공을 피해자로만 그리지 않으려 했다”고 강조했다. 이날 현장에서는 주인공의 현재 상황에 대한 질문도 이어졌다. 감독은 “최근 2년짜리 체류 허가를 받았지만 여전히 장기 체류를 위한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상태”라며 “오랜 시간 한 사회에 머물고 있음에도 임시적인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전했다. 이날 GV는 ‘가능한 영화’ 섹션이 지향하는 바를 그대로 드러냈다. 거창한 서사나 자본이 아닌, 한 개인의 삶과 관계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어떻게 영화로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제27회 전주국제영화제가 지난 5일 전북대 삼성문화회관에서 시상식을 열고 제18회 전주프로젝트 수상작을 발표했다. 이번 전주프로젝트는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1월까지 진행된 공모를 통해 접수된 총 270편 가운데 18편을 선정했다. 수상 결과, ‘전주랩’ 2차 기획개발비 지원작에는 이형직 감독의 <나자레, 나자레, 나자레>(가제), 반시안·윤재호 감독의 <내 남자친구에 관하여>, 최정은 감독의 <조용한 유산> 등 3편이 선정됐다. 음향 마스터링을 지원하는 ‘JICA상’은 반시안·윤재호 감독의 <내 남자친구에 관하여>와 최세담 감독의 <파도 위에서 춤추는 여자>가 수상했다. 디지털 색보정 지원이 주어지는 ‘전주영화제작소상’은 조한나 감독의 <여>와 최정은 감독의 <조용한 유산>이 받았다. 상금 1000만 원과 캐스팅 옵션을 지원하는 ‘전주캐스트상’에는 이다영 감독의 <다시 만난 우리>가 선정됐다. K-DOC CLASS 부문 ‘SJM문화재단 러프컷 부스터’는 고두현 감독의 <안경, 안경들>이 차지했다. 전주프로젝트 부문에서는 해외영화제 출품용 영어 자막 제작을 지원하는 ‘푸르모디티상’에 이다영 감독의 <다시 만난 우리>와 최정은 감독의 <조용한 유산>이 이름을 올렸다. 색보정 비용 할인 혜택이 주어지는 ‘DVcat상’은 변성빈 감독의 <산의 손뼉>과 이상문 감독의 <주름>이 수상했다. 국내 작품의 해외 배급을 지원하는 ‘워크인프로그레스’ 부문에서는 이상문 감독의 <주름>이 선정돼 배급지원금 500만 원을 받게 됐다. 또한 후지필름코리아 후원으로 진행된 전주랩 단편 ‘2차 제작지원금’ 부문에는 얀은경 감독의 <섬광>이 선정됐으며, ‘현물지원’ 부문에는 송진경 감독의 <틈에>와 양 감독의 <섬광>이 이름을 올렸다. 전주프로젝트 ‘다큐멘터리 포커스상’은 최세담 감독의 <파도 위에서 춤추는 여자>가 수상했다.
제27회 전주국제영화제 전주시네마프로젝트 상영작 <리틀 라이프>가 관객과의 대화를 통해 작품의 의미와 제작 배경 등을 진솔하게 풀어냈다. 지난 3일 오후 8시 메가박스 전주객사 10관에서 열린 상영 후 GV에는 김용천 감독과 배우 박수아, 김혜원 양이 참석해 관객들과 소통하는 시간을 가졌다. 전주시네마프로젝트는 저예산 장편영화 제작 활성화를 위해 전주국제영화제가 직접 투자에 참여하는 프로그램이다. 영화제의 역할을 단순 상영에 그치지 않고 제작과 인재 발굴로 확장해 온 대표 사업으로, 지난 26년간 제작된 작품들은 세계 주요 영화제와 시네마테크, 미술관 등에서 꾸준히 소개되고 있다. 올해 프로젝트는 한국과 해외 작품 각 한 편을 선정했으며, 그 중 국내작인 <리틀 라이프>는 다수의 단편을 연출해 온 김용천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작품은 비극적인 사건 이후 삶의 균열을 겪는 아이들을 중심으로, 고통의 재현보다 관계와 몸의 표현을 통한 회복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영화는 부모의 비극적 사건에서 홀로 살아남은 열한 살 소녀 은하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하던 은하는 일시 보호소에서 만난 보라와 친구가 되며 처음으로 위로를 경험한다. 두 사람은 ‘물고기 춤’이라는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어가지만, 보라가 다시 가족에게 돌아가게 되면서 이별을 맞는다. 이후 상실감에 빠진 은하에게 이모 자영이 새로운 선택을 제안하며 이야기는 또 다른 국면을 맞는다. 이날 GV에서 김 감독은 영화의 제작 계기에 대해 “아이들의 춤을 기록하는 작업을 하던 중 아동 관련 비극적인 사건 뉴스를 접하게 됐다”며 “만약 그 아이가 살아 있었다면 평범하게 춤추고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지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됐다”고 밝혔다. 이어 “비슷한 사건을 연이어 접하면서 이를 영화로 풀어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덧붙였다. 또 그는 “현실에서는 아이들이 자신의 삶을 선택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며 “영화 속에서는 그 불가능한 선택을 가능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이를 통해 관객들이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길 바랐다”고 연출 의도를 설명했다. 제목 ‘리틀 라이프’에 대해서는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삶이라도 그 안에서 점차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싶었다”며 “세 인물이 머물 곳을 찾지 못한 채 이동하는 여정을 하나의 로드무비 형식으로 담았다”고 말했다. 아역 배우들과의 작업 방식에 대해서는 “아이들을 속이지 않고 상황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했다”며 “대사를 교정하기보다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감정과 표현을 살리는 데 집중했다”고 밝혔다. 배우 박수아 양은 주인공, 은하 역에 대해 “전반적으로 슬픔을 안고 있는 인물이지만 친구 ‘보라’를 잃는 순간 특히 큰 감정을 느꼈을 것”이라며 “질문을 받는 장면들이 많아 감정적으로 어려웠다”고 털어놨다. 김혜원 양은 보라에 대해 “어른들이 하지 못하는 말을 대신하는 인물”이라며 “영화 속에서 ‘여기 와야 할 건 우리가 아니라 어른들’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가장 인상 깊었다”고 전했다. 한편 김 감독은 차기작으로 관계 속 ‘중독’을 주제로 한 작품을 구상 중이라며 “사랑과 도박 등 다양한 관계 속에서 다시 삶을 회복해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싶다”고 밝혔다.
제27회 전주국제영화제가 영화의 역사와 미학을 확장하는 강연 프로그램으로 관객과의 접점을 넓혔다. 지난 3일 CGV전주고사에서 열린 ‘영화로의 여행’은 단순한 상영을 넘어 영화사의 이면을 탐색하는 자리로 마련됐다. 이날 강연은 ‘사적 혁명, 공적 공간: M+ 아시아 아방가르드 필름 컬렉션’을 주제로, 홍콩 현대미술관 M+의 큐레이터 샤넬 콩이 참여해 아시아 실험영화의 맥락과 의미를 짚었다. 샤넬 콩은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아시아 각국에서 제작된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를 중심으로,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변동 속에서 탄생한 작품들을 소개했다. 그는 “아시아 영상 예술의 역사는 여전히 충분히 조명되지 않았다”며 “큐레이토리얼 연구와 복원, 국제적 협력을 통해 공백을 메우는 것이 M+의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프로그램은 한국, 대만, 필리핀 등지에서 계엄령 시기 제작된 작품들을 통해 ‘저항의 이미지’를 조망했다. 특히 한옥희 감독의 <무제 77-A>는 카메라와 신체를 무기로 삼아 가부장적 질서와 검열에 맞선 실험영화로 주목받았다. 1970년대 한국 최초의 여성영화 집단 ‘카이두 클럽’을 중심으로 활동한 한옥희의 작업은 남성 중심 영화 산업에 균열을 낸 사례로 평가된다. 또 대만 작가 천제런의 <기능장애 No.3>는 공공 시위가 금지된 시대, 거리 퍼포먼스를 통해 정치적 메시지를 드러낸 작품이다. 필리핀 감독 닉 데오캄포의 <혁명은 노래 후렴처럼 돌아온다>는 개인의 기억과 역사적 사건을 교차시키며,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흐름을 담아냈다. 강연에서는 이들 작품이 단순한 영화가 아닌 ‘행위’이자 ‘기록’으로 기능한다는 점도 강조됐다. 예술가들은 검열과 통제 속에서 신체와 도시 공간을 매개로 저항을 수행했고, 이는 아방가르드 영화의 중요한 축을 형성했다는 설명이다. 샤넬 콩은 “많은 작품이 보존의 한계로 잊혀질 위기에 놓여 있다”며 “복원과 재상영을 통해 새로운 영화사 속에서 재맥락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실제로 이번 상영작 상당수는 M+의 복원 프로젝트를 통해 디지털화돼 공개됐다. 관객과의 대화에서는 아방가르드 영화의 접근성과 이해에 대한 질문도 이어졌다. 이에 대해 그는 “미디어테크와 국제 상영 프로그램을 통해 누구나 작품을 접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며 “다양한 형식과 서사를 통해 관객과의 접점을 넓혀가겠다”고 말했다.
제27회 전주국제영화제가 지난 달 29일 개막해 열흘간의 여정을 이어가는 가운데, 지난 4일을 기점으로 반환점을 돌았다. 관객 호응 속에 순항하고 있다는 평가와 함께, 현장에서는 아쉬운 부분도 적지 않게 감지된다. 영화제 중반부를 맞아 현재까지의 성과와 분위기, 과제를 짚어본다. △ 수치로 본 ‘순항’…좌석·굿즈·골목상영 모두 상승세 영화제 측 집계에 따르면 개막 이후 5일간(4월 29일~5월 3일) 좌석 점유율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약 3% 증가했다. 총 324회 상영 중 278회가 매진되며 높은 관람 열기를 입증했다. 굿즈 판매 역시 두드러진 성장세를 보였다. 전년 대비 27.2% 증가했으며, 금속 배지와 키링, 에코백, 스트링백, 티셔츠 등이 인기를 끌었다. 공식 굿즈 판매처에는 오픈 전부터 평균 100명 안팎의 대기줄이 형성됐고, 어린이날 연휴가 낀 지난 2일에는 최대 120명까지 몰리며 ‘오픈런’ 현상이 이어졌다. 도심 곳곳에서 진행된 ‘골목상영’도 흥행을 견인했다. 4일간 총 9회 상영에 2809명이 찾았고, 회차당 평균 300명 이상이 관람했다. 치평주차장과 풍남문, 전주중앙교회 광장 등 생활 밀착형 공간에서의 상영이 관객 접근성을 높였다는 평가다. △ 거리 위에서 완성된 영화제…자발적 참여가 만든 ‘낭만’ 올해 영화제의 또 다른 풍경은 공식 프로그램 밖에서 발견됐다. 영화제에 출품하지 않은 창작자들이 거리에서 직접 제작한 영화 포스터를 판매하며 관객과 만났고, 영화의거리 일대는 자연스러운 교류의 장으로 확장됐다. 지난 4일 낮, CGV 전주고사 앞에서는 가수 조준호의 깜짝 버스킹이 펼쳐져 발길을 멈추게 했다. 별도의 무대 없이도 관객이 모이고, 음악과 영화가 어우러지는 장면은 영화제 특유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또 영화의거리 곳곳에서는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플래카드와 전단지가 눈에 띄었고, 객사 일대 편집숍에서는 자체적으로 영화제 관련 프로그램을 기획·운영하는 등 민간 차원의 참여도 활발했다. 조직위원회 중심의 행사 운영을 넘어, 시민과 창작자가 함께 만들어가는 ‘확장된 영화제’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볼거리는 줄었다”…집중화 전략, 해법일까 한계일까 반면 행사 구성에 대한 아쉬움도 적지 않다. 올해 영화제는 전주영화의거리와 문화공판장 작당 등을 중심으로 주요 프로그램을 집중 배치하면서 동선은 한층 간결해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관객 입장에서는 이동 부담이 줄고, 핵심 공간에 밀집된 분위기를 체감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변화로 읽힌다. 다만 이러한 집중화 전략이 곧바로 ‘풍성한 볼거리’로 이어지지는 않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과거 전주시 전역으로 확장되며 다양한 장소에서 펼쳐졌던 프로그램과 비교할 때, 올해는 체감 콘텐츠가 오히려 줄어든 것 아니냐는 반응이다. 결국 질문은 여기에 닿는다. 행사 공간이 넓어야만 볼거리가 많아지는 것인가. 혹은 제한된 공간 안에서도 얼마나 다층적인 콘텐츠를 채워 넣느냐가 더 중요한 것은 아닌가. 현재의 운영 방식은 효율성과 밀도를 택한 대신, 관객이 머무르며 즐길 수 있는 ‘층위의 다양성’에서는 다소 아쉬움을 남겼다는 평가가 뒤따른다. △ 반복되는 주차·통제 문제…현장 대응은 여전히 과제 고질적인 교통·안전 문제도 여전히 드러났다. 영화의거리 일대는 행사 기간 내내 차량 정체가 반복됐고, 보행자와 차량이 뒤엉키는 위험 상황도 목격됐다. 특히 이른 아침부터 관객이 몰리는 현실과 달리, 차량 통제 인력 투입은 오전 10시 이후에 이뤄지면서 현장 대응의 공백이 발생했다. 자원봉사자 ‘지프지기’가 통제에 나섰지만, 시간대별 관람객 흐름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운영이라는 지적이다. 주차 공간 부족 역시 불편을 키웠다. 영화제 접근성이 높은 영화의거리 인근에 차량이 집중되면서 방문객들의 불만이 이어졌고, 일부 관람객은 상영 시간에 맞추지 못하는 사례도 발생했다.
전주국제영화제를 대표하는 토크 프로그램 ‘전주톡톡’이 올해도 관객과의 접점을 넓히며 의미 있는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영화와 영화의 경계를 넘어 다양한 콘텐츠의 뒷 이야기를 풀어내는 이 프로그램은 가벼운 형식 속에서도 창작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아내며 호응을 얻고 있다. 올해 ‘전주톡톡’은 전주 지역 유일의 향토 영화관인 ‘전주시네마타운’에서 진행됐다. 지역 극장이 지닌 역사성과 상징성을 바탕으로 영화제 관객뿐 아니라 지역 주민들과의 소통을 강화하고, 문화적 연대를 확장하는 자리로 마련됐다. 지난 3일 열린 ‘전주톡톡 9 – 전주메이커스: 빛나는 포스터란 말이죠’에서는 영화 포스터 디자인을 주제로 한 직업 탐구형 토크가 펼쳐졌다. ‘처음 만나는 영화의 얼굴’로 불리는 포스터의 제작 과정과 그 안에 담긴 고민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날 행사에는 디자인 스튜디오 ‘빛나는’의 박시영 대표가 게스트로 참여하고, 영화웹진 ‘리버스’ 차한비 기자가 모더레이터를 맡아 대화를 이끌었다. 박 대표는 포스터를 단순한 홍보물이 아닌, 관객의 감정과 만나는 매개로 규정했다. 그는 “포스터는 영화의 내용을 설명하기보다 영화를 본 뒤 관객이 느끼는 감정을 시각적으로 풀어내는 작업”이라며 “개인적인 감상이 오히려 더 큰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상업 영화 포스터 제작 과정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제약을 창작의 중요한 요소로 짚었다. 배우, 예산, 시각적 조건 등 한계 속에서 관객과의 접점을 찾아가는 과정이 일종의 퍼즐과 같다는 설명이다. 그는 “표현할 수 있는 요소가 부족할수록 관객과의 연결 방식을 더 치밀하게 고민하게 된다”고 강조했다. 좋은 포스터의 기준에 대해서는 ‘관객 중심’을 꼽았다. 창작자의 의도만을 앞세운 결과물이 아닌, 보는 이와의 관계를 형성하는 이미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디자인 환경의 변화에 대한 의견도 제시됐다. 박 대표는 인공지능(AI)에 대해 “새로운 도구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면서도 “기초적인 역량이 갖춰진 뒤 활용해야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기술이나 트렌드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욕망과 감정”이라며 “다양한 경험을 통해 시야를 넓히는 것이 결국 설득력 있는 작업으로 이어진다”고 덧붙였다. 이번 ‘전주톡톡’은 영화 포스터라는 익숙한 매체를 통해 창작의 본질을 짚고,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창작자가 가져야 할 태도를 되짚는 자리로 마무리됐다.
제27회 전주국제영화제의 특별 프로그램 ‘전주와이드토크’가 지난 4일 오전 CGV전주고사 3관에서 열렸다. 이날 현장에서는 <지축의 밤>을 연출한 장건재 감독과 배우들이 참석해 작품의 제작 과정과 비하인드 스토리를 관객과 공유했다. 평일 오전 시간대임에도 객석을 가득 채운 관객들은 상영 직후 이어진 대화에서 적극적으로 질문을 던지며 높은 관심을 보였다. 사회를 맡은 차한비 기자는 “촬영 현장을 배경으로 두 영화가 교차하는 구조가 인상적”이라며 대화를 이끌었다. 작품은 서로 다른 두 감독이 각자의 연애를 영화로 옮기는 과정을 따라가며,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허문다. 특히 두 촬영팀이 우연히 마주치는 장면과 결말부의 여운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장 감독은 “영화 속 마지막 장면은 ‘춘분’이라는 제목처럼 서로 다른 시간이 만나는 순간을 담은 것”이라며 “눈이 오길 바라는 마음 역시 영화가 품은 기다림의 감정”이라고 설명했다. 독립 영화의 촬영 현장을 배경으로 삼은 이유에 대해서는 “같은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순간을 그리고 싶었다”며 “영화를 찍는 사람들이 다른 촬영팀을 우연히 만난다면 어떤 감정일지 상상에서 출발했다”고 밝혔다. 현장 작업 방식에 대한 질문도 이어졌다. 배우들은 “리허설을 충분히 거친 뒤 촬영에 들어가 현장에서의 자유도를 일부 열어두는 방식이었다”며 “실제 촬영팀처럼 몰입해 작업했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일부 배우들이 감독과 스태프로도 참여한 점이 언급되며, 영화의 ‘공동 창작’ 성격이 강조됐다. 극 중 주요 배경으로 등장하는 지축역에 대해서 장 감독은 “특별히 찾은 장소라기보다 일상적으로 관찰해온 공간”이라며 “신도시의 과거와 현재가 겹쳐 있는 풍경이 영화의 정서와 맞닿아 있었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전주와이드토크는 후지필름코리아의 제작 지원으로 완성된 작품을 중심으로, 영화와 기업의 협업이 창작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조명하는 자리로 마련됐다. 장 감독은 “영화가 특별한 이야기를 하기보다, 잘 드러나지 않았던 순간들을 섬세하게 담고 싶었다”며 “관객 각자가 느낀 감정이 다음 작업의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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