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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시민의 혈세로 운영되는 전주시립교향악단(이하 전주시향)의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 자리가 4개월째 공석으로 방치되면서 조직 운영 마비와 내부 갈등 심화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전주시가 후임 선발 절차를 미루는 사이, 피해는 고스란히 시민들의 문화 향유권 침해로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9일 전북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지난 2022년부터 전주시향을 이끌어온 성기선 예술감독(상임지휘자)이 지난해 12월31일 임기 만료로 사임했다. 성 전 감독은 임기 만료 2달 전부터 연임 의사가 없음을 밝혔으나 시는 후임 선발을 위한 모집 공고조차 내지 않았다. 전주시향은 올해 6월까지 객원지휘자 체제로 운영하겠다는 방침이지만, 심각한 행정공백을 야기하고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통상 교향악단 공연은 대관 및 협연자 섭외를 위해 최소 6개월 전 공연계획을 세우지만 전주시향은 하반기 프로그램 일정도 확정하지 못했다. 올해 상반기 공연 횟수(5회)도 지난해 상반기 공연 횟수(16회)에 비해 3분의 1로 줄면서 거의 방치된 상태다. 선임 지연 배경에는 지난해 발생한 인사권 관련 내홍이 원인으로 꼽힌다. 예술감독의 자질을 문제 삼는 익명의 탄원서가 시의회에 접수되면서 인사 잡음이 일었다. 이 과정에서 시의회와 외부의 비판이 쏟아졌고 시에서는 신규 임용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또한 교향악단 내부에서 발생한 갈등이 전주시인권위원회 판단과 지방노동위원회 및 중앙노동위원회의 부당해고 판정으로 이어졌고, 현재 민사소송으로까지 진행 중인 사안이다. 전주시립예술단사업소는 예술감독(지휘자) 선임에 앞서 조직 운영에 대한 종합 점검이 우선이라는 입장이다. 권정혜 팀장은 “지난해 의회 지적사항이나 인권 문제 등 조직 내부의 갈등이 있었던 만큼 바로 예술감독(지휘자)을 뽑기보다는 조직을 안정화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며 “단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와 인권교육 등을 진행한 후에 선임 절차를 밟을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시의 이 같은 설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예술감독(지휘자) 선임과 조직 정비는 별개로 병행돼야 할 사안임에도 시가 4개월째 모집 공고 조차 내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에 가깝다는 비판이다. 권 팀장은 “하반기 공연계획 수립이 촉박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운영의 차질을 인정하면서도 선임 시기나 방법에 대해서는 “내부 검토 중"이라는 답변만 되풀이했다. 전주시향 소속 한 예술단원은 “오케스트라는 강력한 리더십 아래 움직이는 생물과 같다. 지휘자가 없으니 권리 권한을 쥔 행정 인력들이 본질을 외면한 채 조직을 흔들고 있다”며 “전임 예술감독(지휘자)가 올해 상반기 일정까지 확정해 놓은 채 떠났다는 사실은 시가 후임자를 조속히 뽑을 의지가 없었음을 입증하는 명백한 증거”라고 성토했다.
보랏빛을 유난히 애정하는 언니가 있다. 보라색 가방과 원피스는 물론, 머플러와 양산, 양말과 장갑까지 그녀의 일상은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다. 또한 제비꽃, 무스카리, 마편초, 라일락, 아스타, 붓꽃처럼 짙은 남보라 꽃들이나 등나무꽃, 오동꽃처럼 은은한 보라의 결을 지닌 꽃들을 즐겨 찾는다. 이제 보라색을 마주할 때마다 그 언니가 떠오르고, 자기 삶을 묵묵히 개척해 온 그녀의 묵직한 시간까지 함께 떠오르곤 한다. 얼마 전, 황숙 수필가의 《보랏빛 예찬》을 마주한 순간, 그 언니를 떠올리게 하는 보랏빛의 세계 속으로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수필가 황숙은 우리가 살아내는 일상을 ‘빨강과 파랑의 혼합으로 태어난 보라색’에 비유한다. ‘좋아서 하는 일과 책임으로 하는 일이 동아줄처럼 꼬여 이루어진 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버거운 순간들을 참고 견디다 보면 그 끝에 쌉쏘롬하면서도 달큼한 보랏빛이 스며든다’고 말한다. 이 비유는 삶이 단순히 고통이나 기쁨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감정과 경험이 어우러져 깊어지는 과정임을 설득력 있게 드러낸다. 저자의 이러한 시선은 독자에게도 자기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종종 좋아하는 일만 하며 살 수 없다는 이유로 현재의 삶을 버겁게만 여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속에는 기꺼이 선택한 기쁨과 어쩔 수 없이 감당해 온 책임이 함께 얽혀 있다. 어쩌면 삶이란 어느 한쪽의 색으로만 이루어질 수 없듯이 서로 다른 감정과 생각들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엮어질 때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저자는 여러 대학에서 한글과 한국문화를 가르치며, 자국민은 물론 외국인에게도 한글의 우수성과 한국문화의 깊이를 전하고자 심혈을 기울였다. 이러한 경험은 글 전반에서 단단한 사명감으로 드러난다. 특히 여러 실학자 가운데에서도 홍대용에 대한 저자의 관심은 각별하다. 홍대용의 중국 여행기인 《을병연행록》에 심취하고, 프라하의 천문시계를 마주할 때나, 슬로베니아를 여행하는 길에서도 조선의 실학자 홍대용의 흔적을 찾고 그의 업적을 기리며 이어가려는 모습에서 그 애정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만약 홍 선생의 혼천의와 나경적의 시계를 조합하고, 정학유의 ‘농가월령가’를 훈민정음으로 적어 첨성대 모양으로 세운다면…”이라는 저자의 상상에는, 세계적 유산인 한글에 대한 애정과 과학적 사유로 새로운 학문의 지평을 열었던 실학자의 정신을 따르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보랏빛 예찬》은 단순히 하나의 색을 이야기하는 글이 아니라, 삶의 결을 바라보게 하는 책이다. 화려하지 않아도 깊어질 수 있고, 빠르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보랏빛에 빗대어 조용히 일깨운다. 어쩌면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서서히 익어가는 보랏빛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은 읽고 난 뒤에도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삶을 한 번 더 돌아보게 만드는 따뜻한 지침서이다. 이진숙 수필가는 전직 국어교사이며 201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부문에 당선했다. 최명희문학관에서 14년간 “혼불” 완독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우리 이제 다시 피어날 시간》 오디오북과 《나는 오늘도 괜찮다》 수필집을 발간했다.
봄은 시를 읽게 하는 계절일까. 이맘때쯤이면 유독 시집들이 서점 매대에 오른다. 봄 하면 떠오르는 것을 단순한 몇 가지로 간추리기 어려워서일까. 봄에 펴낸 시집은 유난히 각양각색이다. 수많은 시집들 중에 부안 변산에서 평생 흙을 일궈온 박형진 시인이 새 시집 <시의 부엌>(애지)을 펴냈다. 1984년부터 유기농사를 지으며 “땅에 대고 절하다 보니 어찌어찌 시를 쓰게 됐다”는 박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농경적 사유를 바탕으로 정직한 노동의 감각을 62편의 시로 엮어냈다. 사람과 자연과 뭇 생명이 교감하며 생동하는 순박한 시편들이 마치 오랜만에 고향에 온 듯한 잔잔한 울림을 선사한다. 시인에게 농사와 시는 분리되지 않는다. 등단 이후 30여 년간 10남매의 막내로서 그리고 네 자녀의 아버지로서 땅을 지켜왔다. 진실한 마음이 깃든 선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땀의 가치를 글로 표현한 그의 시에는 자연의 정기와 사람의 온기가 교차한다. “집이 낡아간다/ 지은 지 이십여 년 만에/ 차양이 떨어지고/ 마루가 삐걱대고/ 흙담 한 켠이 헐어진다// 나도 낡아간다/ 집보다 더 오래된 집은/ 지붕머리가 하얗게 세어지고/ 눈앞이 흐려지고/ 꿈에서도 이빨이 빠진다//(…중략…)// 지금은 잠이나 자고 싶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지”(‘나는 낡은 것이 좋다’ 부분) 이처럼 삶의 구석으로 밀려나 있는 존재들을 불러내는 시인은 사라져 간, 잊고 지냈던 것들에게 다정한 안부를 묻는다. 그리고 고향의 질박한 삶과 일상의 시간들을 진솔하게 복원해낸다. 자식을 키워낸 부모의 헌신과 평생을 농사로 살아온 노동의 숭고함이 결국은 ‘생명을 돌보는 일’이라는 하나의 본질로 수렴되는 과정을 담백한 필치로 그려낸다. 김용택 시인은 추천글을 통해 “박형진은 내가 좋아한 사람이다”라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오랜 세월 사용한 마을 말을 버리지 않고 그 말로 시를 쓴다”며 “모항 바닷가 작은 오두막 ‘시의 집 한 채’는, 그 존재가 막강한 아름다움이다”라고 밝혔다. 1958년 부안군 변산에서 10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시인은 1984년 결혼 후 변산에 정착하여 세 딸과 아들 하나를 기르는 자식농사와 함께 유기농사를 평생의 업으로 삼아왔다. 땅을 일구는 정직한 노동 속에서 시적 영감을 발견한 그는 1992년 ‘창비’ 봄호에 작품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저서로는 시집 <바구니 속 감자 싹은 시들어가고>, <콩밭에서> <밥값도 못하면서 무슨 짓이랑> <내 왼쪽 가슴 속의 밭> 등이 있다.
고하 최승범 선생이 50여 년 동안 발행해 온 계간지 <전북문학>의 전통을 잇고 있는 고하최승범문학기념사업회가 통권 302호 봄호를 발간했다. 이번 호는 김태우 작가의 글 ‘고하 시조시 읽기’로 문을 연다. 김 작가는 최승범 시인의 작품 ‘꿈길’을 중심으로 기행 시의 특성과 시적 상상력을 조명한다. 그는 “최승범 시인이 몽골 울란바타르에서 열린 제7차 아시아 시인 회의에 참가하기로 결심한 뒤 꾼 꿈을 소재로 집필한 작품”이라며 “몽골 여행은 단순한 체험의 기록을 넘어 시적 대상화 과정을 거친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분석했다. “어디서 일어오는/ 바람인가 삽상한/ 어린시절 고향도 같고/ 마을 앞 어귀를 나섰을 뿐인데/ 이 몸을/ 돌고 스쳐가는/ 달기만 한 바람이여/ 두리번거리자 바람결에/ 들려오는 노랫소리/ -여기 살고 싶어라/ 연푸름한 빛의 초원/ (중략) 내 발길 이윽고/ 아, 눈앞 펼쳐진/ 초원의 바다인가/ 장히 넓은 사막인가/ 눈 비벼/ 자세히 살피려/ 눈을 뜨니/ 꿈길이었어”라는 구절은 낯선 공간에 대한 동경과 시적 환상을 동시에 드러낸다. 이어지는 ‘재미난 시 읽기’에서는 양병호 전북대 교수가 세 편의 작품을 해설한다. 양 교수는 조명제 시인의 ‘첫눈’을 통해 첫사랑의 기억을 환기하는 은유를 짚고, 노유섭 시인의 ‘그저 아득하리라’에서는 삶의 여정을 사색하는 서정성을 읽어낸다. 박지학 작가의 ‘백색 주석’에 대해서는 불길한 겨울의 분위기 속에서 언어의 모호성을 탐구하는 작품으로 해석했다. 엽편소설 코너에는 서철원 작가의 ‘새벽 강’이 실렸으며, 四於堂 최남규의 한시 감상에서는 두보의 ‘모옥위추풍소파가(茅屋爲秋風所破歌)’를 다뤘다. 이 밖에도 회원들의 신작 시 80여 편과 수필 20여 편이 함께 수록됐다. 윤수하 작가의 문학론 <한하운 시의 ‘길’과 내면의 상처 치유>는 한하운 시 세계의 정신적 지향과 치유적 의미를 세밀하게 조명한다. 고하최승범문학기념사업회는 ‘전북문학’ 발간을 비롯해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공동으로 고하최승범문학상 백일장 개최, 1주기 추모제 진행, 300호 특집호 간행, 고하문학관 운영 자문 등을 이어왔다. 앞으로도 고하문학선집 발간, 유고시집 출간, 시비 건립, 「전북문학」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 등 다양한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서예가 산민(山民) 이용의 예술적 생애와 철학을 집대성한 전시도록 <산민 이용 서예전>이 세상에 나왔다. 이번 도록은 오는 24일부터 29일까지 한국소리문화의전당에서 열리는 20번째 개인전을 기념하여 제작됐다. 도록에는 1988년부터 2025년까지 38년간 이어진 작가의 서예 인생을 연대기별로 기록했다. 3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는 총 265점의 작품이 수록되어 산민서예의 변천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2022년부터 2025년까지 최근 3년간의 작업 결과물을 비롯해 노자의 철학을 시각화한 ‘노자 섹션’도 담겨 있다. 노자 섹션에는 금문(金文)과 사자성어를 활용한 해석이 돋보이며 작가가 오랜 시간 천착해온 고전 해석의 깊이를 확인할 수 있다. 도록 후반부에는 1988년부터 2022년까지의 주요 구작(舊作) 65점이 수록됐다. 초기 필치부터 전성기의 유려한 서체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예술적 실험과 성장을 입체적으로 담아내어 서예 연구자 및 애호가들에게 사료적 가치를 제공한다. 시각적인 완성도도 눈에 띈다. 흑색 바탕에 금박으로 ‘산민(山民)‘을 새긴 표지는 묵직한 서업(書業)의 무게감을 보여준다. 내부 도판은 작품의 질감과 낙관의 선명도를 최대한 살려 인쇄됐다. 각 작품에는 한문 원문과 함께 국문 해석을 함께 넣어 독자들의 이해도를 높였다. 산민(山民) 이용 선생은 고대문자인 금문(金文)을 현대적인 조형미로 재해석하여 한국서예의 지평을 넓힌 서예가다. 400m에 달하는 법화경 전문 사경을 완수하는 등 예술적 집념을 작품을 통해 나타내고 있다. 또한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의 기틀을 마련했고, 총감독을 역임하는 등 한국서예 세계화와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연극계가 꾸준한 창작 활동에도 불구하고 지역을 대표할 만한 장기 공연 레퍼토리를 확보하지 못하며 산업적 경쟁력 강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지적이다. 행정의 지원 구조 한계와 더불어 연극계 내부의 기획 전략 부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7일 전북연극협회와 도내 연극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현재 지역에서 3년 이상 장기 공연되는 작품은 사실상 전무한 것으로 파악됐다. 전북자치도에는 창작극회, 무대지기, 작은소리와동작 등 오랜 역사를 지닌 23개 정극단이 활동 중이며 ‘천사는 바이러스’, ‘할머니의 레시피’ 등 자체 레퍼토리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지역 대표 브랜드 공연으로 안착시킨 사례는 드문 실정이다. 상당수 극단이 매년 신작 제작에 집중하면서 작품이 축적되지 못하고 단발성 공연으로 소진되는 구조가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장에서는 일차적인 원인으로 관객 규모의 한계를 꼽는다. 도내 공연 관람층이 일정 수준에 머물러 있어 동일 작품을 반복 상연할 경우 수요가 빠르게 소진된다는 것이다. 한 연극 관계자는 “지역 관객만을 대상으로 할 경우 2~3년 내에 관람 수요가 바닥을 드러낸다”며 “현 구조에서는 같은 작품을 장기간 유지하며 수익을 창출하기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지원 제도 역시 레퍼토리 형성을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대부분의 공모사업이 신작 초연 중심으로 설계되면서 기존 작품을 재정비하고 완성도를 높여 재공연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제한된다는 지적이다. 반복 공연을 통한 작품성 제고보다 매년 새로운 제작 실적을 요구하는 구조가 형성되면서 창작 역량이 축적되기 어려운 환경이 이어지고 있다는 의견이다. 다만 연극계 내부에서도 전략 부재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다. 상업적 유통을 염두에 둔 제작 시도가 많지 않았고, 장기적으로 반복 공연이 가능한 대표작을 만들겠다는 목표 설정이 부족했다는 평가다. 상업극 제작이 현실적으로 어려워서라기보다 이를 시도하려는 관심과 투자 의지가 충분히 형성되지 못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작품성과 예술적 가치에 집중해 온 창작 환경 속에서 관객 확대 전략이나 유통 구조에 대한 고민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다는 지적이다. 이에 도내 연극인들은 브랜드 공연의 형성을 위해 외부 관객 유입과 함께 행정 지원 방식의 구조 개선, 창작 주체의 전략 변화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지역 연극계에서 활동 중인 기획자 A씨는 “현재는 제작비 대부분이 초연에 집중돼 재공연이나 타 지역 진출로 이어지기 어려운 구조”라며 “단년도 제작 지원에서 벗어나 작품 축적과 유통, 타 지역 진출까지 고려하는 중장기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지역 관객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관광 콘텐츠와 연계한 공연 유통 구조를 구축하고, 외부 관람객을 유입할 수 있는 경쟁력 있는 콘텐츠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제언했다.
전주문화재단이 2026 생활밀착형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 ‘가가호호(家加好好)’의 추진 계획을 7일 밝혔다. 재단은 지난해 프로그램 ‘유형 다각화’를 통해 예술교육 기반을 확장한 데 이어, 올해는 ‘가족 유형의 다각화’를 핵심 키워드로 설정하고 보다 폭넓은 가족 구성원을 예술 교육 현장으로 끌어들일 계획이다. 특히 혈연 중심의 기존 가족 개념에서 벗어나 비친족·비혈연 관계까지 포괄하는 ‘새로운 가족’ 발굴에 주력한다. 함께 거주하거나 정서적 유대를 공유하는 관계라면 예술교육의 주체로 인정한다는 취지다. 이에 따라 위탁가정 아동, 비혼 1인 가구, 동거 가구 등을 대상으로 하는 ‘가족 발굴형’ 프로그램을 신설했다. 동거 가구의 경우 ‘예비부부’ 등 유연한 명칭을 활용해 사회적 인식을 고려한 접근도 병행한다. 이번 사업은 단순 체험을 넘어 연구 기반의 예술교육 모델을 도입한 점에서도 주목된다. 재단은 지난 5년간 협력 관계를 이어온 전북대 아동학과와 함께 ‘돌봄연구형’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교수진 자문과 전공생 참여를 통해 프로그램 기획부터 운영, 경과 분석까지 체계적인 관리가 이뤄질 예정이다. 교육 공간 역시 시민의 일상으로 확장된다. ‘공동체라디오 전주 FM’과 ‘여성생활문화공간 비비’, 남부시장 내 복합문화공간 ‘모이장’ 등 지역 거점 공간을 활용해 작곡, 창작, 관계 형성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재단은 공간별 특성과 지역 이슈, 보유 장비를 적극 반영해 생활 밀착형 예술교육을 구현할 계획이다.
국대호‧ 강민기 작가가 ‘색(色)’을 매개로 서로 다른 차원의 예술적 사유를 공유하는 2인전 ‘차원의 채집: 採集’을 공간 허이재에서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회화의 질감과 조각의 구조가 만나는 접점을 탐구하며 2차원과 3차원의 경계를 넘나드는 두 작가의 독창적인 작업세계를 조명하는 데 집중한다. 국대호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시·공간의 응축을 담은 작품을 선보인다. 기존의 평면적 스트라이프 작업을 넘어 물감의 밀도와 속도감으로 변주해 다채로운 질감을 캔버스에 구현했다. 작가에게 색은 시각적 요소만이 아니다. 여행지에서의 인상이나 유년의 풍경처럼 언어로 형언하기 어려운 기억의 파편들을 특정한 색채로 치환하여 캔버스 위에 층층이 채집해 나간다. 조각가 김민기는 회화를 조각하다 라는 개념의 스컬페인팅을 통해 평면의 붓 터치를 3차원 입체 공간으로 조성했다. 작가는 개별적인 붓 터치 유닛을 입체적으로 구축하며 현대인의 불안하고 모호한 감정 상태를 시각화했다. 예술가로서 창작의 희열과 그 이면에 존재하는 불안이라는 대립적 감정을 색채 덩어리로 표현해 관람객들에게 감정의 궤적을 마주하게 한다. 국대호·강민기 작가는 회화와 조각이라는 서로 다른 매체를 다루지만 ‘색’이라는 공통의 언어를 통해 인간의 내면과 기억을 탐구한다. 평면에서 깊이를 찾아내고, 입체에서 회화성을 입히는 두 작가의 만남은 관람객에게 차원을 넘나드는 감각의 순환을 제안한다. 전시는 5월 2일까지.
학자로서의 집념과 예술가의 호흡이 만나 3000년의 침묵을 깨우는 생명력으로 부활했다. 40년간 고문자(古文字)의 뿌리를 추적해온 최남규(65) 전북대학교 명예교수의 작품전이 오는 11일까지 전주 오브제갤러리에서 열린다. 본래 글자는 사물의 그림자이자 세계를 향한 가장 정직한 묘사였다. 인류가 바위나 뼈 위에 최초의 선을 새겼을 때, 그것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간절한 기원이자 지독한 관찰의 산물이었다. 이번 전시는 문자가 추상적인 기호로 굳어지기 전의 생명력을 복원해낸 현장으로 갑골문(甲骨文)과 금문(金文) 해독에 매진해온 최 교수의 학문적 궤적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6일 전시장에서 만난 최 교수는 학자로서의 냉철한 분석을 내려놓고 고대 문자가 지닌 원초적인 아름다움에 대해 역설했다. “문자의 자원을 알면 문자가 지닌 특성을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설명처럼, 산을 보고 산(山)이라 쓰고 거북을 보고 구(龜)라 썼을 때의 직관적인 조형성이 그의 붓끝과 칼끝을 통해 예술로 승화됐다. 최 교수는 고문자의 본질을 ‘그림의 연장’으로 정의한다. 사물의 특징을 포착한 그림에서 시작된 문자가 시간이 흐르며 간략해져 지금의 형태가 되었다는 논리다. 그는 “그림이 문자가 되기 전의 단계가 바로 고문자”라며 “본격적인 생략이 이뤄지기 전의 고문자에는 문자성뿐만 아니라 강렬한 회화성이 공존한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에서 관람객들이 마주하는 것은 단순한 글자가 아니라, 고대인이 세상을 바라보던 시선이 담긴 하나의 화폭인 셈이다. 전시된 50여 점의 작품들은 전서와 예서, 행서, 초서 등 다양한 서체를 넘나든다. 단정한 예서(隸書)에서는 학자의 단단한 골격이 느껴지고 유려한 행초서(行草書)에서는 정형화된 틀을 벗어던진 자유로운 사유가 읽힌다. 자칫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고문자이지만, 글자가 담고 있는 본연의 의미를 관람객들이 시각적으로 공감할 수 있도록 깊이 있게 풀어냈다. 최 교수는 이번 전시를 ‘40년 연구한 고문자에 대한 정성어린 기록’이라고 표현했다. 학문적 성취라는 결과물을 넘어 자신이 평생 연구한 문자에 대한 정중한 예우라는 의미이다. 예술적 허용이라는 이름 아래 왜곡될 수 있는 문자의 원형을 그는 학자의 고집으로 지켜냈다. 그러면서도 단단한 골격 위에 입혀진 서각의 깊이와 서예의 필치는 파격적이다. 또한 나무의 결을 살려 문자를 새기고 감각을 덧입히는 과정은 고문학이 현재까지도 호흡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향후 인문학 아카데미를 통해 고전과 서예를 잇는 공부를 이어가겠다는 포부도 전했다. 그는 “한자는 오랜 훈련이 필요해 거리감이 생기기 쉽지만, 그 근원을 알면 우리 문화의 깊이를 만나는 소중한 통로가 된다”며 “고문자가 현대의 예술로 소통할 수 있도록 남은 생도 붓을 놓지 않겠다”고 말했다.
사십 년 넘게 붓을 잡아온 서예가의 필력이 화선지라는 익숙한 경계를 넘어 캔버스라는 여백과 만났다. 안뜰 김영희(77) 작가가 평생 천착해온 서예의 정신을 캔버스 위로 옮겨 심은 이유는 명확하다. 지난 3일 전주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내 자식조차 거실에 걸어두지 않는 그림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살아있는 전통이겠느냐”는 뼈아픈 자문을 던졌다. 오는 7일부터 12일까지 교동미술관 본관에서 열리는 개인전 ‘매화향기 봄바람 타고’는 박제된 서예를 현대인의 일상으로 복원해내려는 작가의 치열한 법고창신(法古創新)의 기록이다. 작가가 10년 전부터 시도한 변화는 지극히 논리적인 통찰에서 시작됐다. 아파트라는 현대적 거주공간에서 전통 액자와 화선지가 공간과 불협화음을 내며 외면받는 현실을 직시한 결과다. 그는 서구적 재료인 캔버스를 선택하되 그 위에 흐르는 정신만큼은 정통 서예의 운필(運筆)을 고수했다. 붓 끝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느라 안구 실핏줄이 세 번이나 터졌을 만큼 몰입했고, 재료의 변화를 넘어 전통의 생명력을 동시대로 확장하기 위해 분투했다. 재료라는 옷은 갈아입었을지언정 그 속에 자신의 필력을 온전히 표현해내기 위해서였다. 52점의 작품이 걸리는 이번 전시에는 손녀에게 선물했던 그림을 다시 빌려와 내놓은 각별한 사연도 담겨 있다. 작품 ‘가을 언덕 위에 머묾’은 동일한 구도로 다시 그리려 해도 당시의 필치가 재현되지 않아 결국 원본을 다시 청해왔을 만큼, 매 순간의 작업에 진심을 쏟는다. 초등학교 교사 시절 잡았던 붓이 평생의 동반자가 된 이후 국전 초대작가와 심사위원을 지내며 서예의 정점에 올랐으나, 그는 여전히 2주에 한 번씩 진주에 계신 스승을 찾아가 자신의 서법을 점검받는다.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배움과 고민을 멈추지 않는 엄격한 자기검열은 그의 작품세계를 지탱하는 가장 단단한 바탕이다. 작가는 인생의 굴곡을 매화에 담아낸다. 혹독한 추위를 견뎌야 가장 맑은 향기를 내뿜는 매화처럼, 삶의 고난을 딛고 일어선 이들에게 따뜻한 위안을 건네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다. 사라져가는 서예를 걱정하며 퇴직 후에도 아이들에게 붓 잡는 법을 가르쳤던 그의 사명감은 이제 캔버스라는 새로운 형식을 통해 대중과 깊게 호흡한다. 작가는 “학문과 예술은 산을 넘으면 또 다른 산이 나오지만, 그 고비를 넘으려는 희망이 나를 계속 젊게 만든다”며 환하게 웃어보였다. 전통의 문법을 유지하면서도 매체의 확장을 통해 현대적 공간과의 접점을 찾으려는 작가의 시도는 이번 전시를 통해 구체화됐다. 박제된 과거가 아닌, 동시대의 일상 속에서 호흡하는 예술로서의 전통이 나아갈 방향을 담담히 보여준다.
봄이 와 꽃 필까요? 꽃이 피어 봄일까요? 그런데 왜 꽃은 꽃인 걸까요? 눈가는 데마다 꽃이련만 집집 활짝 더 피어나라고 작년에 왔던 꽃장수가 제비보다 먼저 돌아왔습니다. 봄노래만 부르고 싶은 우리네 심사 헤아려서, 날마다 꽃길만 걷고 싶은 우리 마음 꼭 짚어서 꽃 속에 묻혀 꽃인 듯 살라 꽃 팔러 왔습니다. 춘서(春序), 해마다 꽃 피는 순서 변하지 않는다던 백낙천의 <춘풍(春風)>은 틀렸습니다. 세상 탓에 매화, 개나리, 진달래, 벚꽃의 차례가 달력과 어긋납니다. 차례대로 왔다 순서대로 가지 않고 우르르 피었다가 와르르 지고 말아 꽃 없는 날이 많습니다. 부디 세상과 엇갈림 없어라, 꽃 없는 날 없어라, 꽃 장수는 왔네요. 오가며 공으로 구경했었지요. 향기만 훔쳐 가는 꽃값 안 주는 벌 나비처럼 말고 오늘은 팬지, 비올라, 튤립, 히아신스 두어 분 들여놓겠습니다. “일편화비감각춘(一片花飛減却春)”, 꽃잎 하나 떨어져도 봄이 간다고 두보(杜甫)가 <곡강(曲江)>에서 읊었지요. 하루라도 꽃 없는 날 없도록, 하루라도 봄 아닌 날 없도록, 내 안 곳곳 피우겠습니다.
새로운 리더십 전환을 맞은 한국소리문화의전당(이하 전당)이 도민의 문화예술 향유 기회 확대를 위한 운영 방향을 제시했다. 지난달 취임한 이승필 전당 신임 대표는 2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예술 활성화를 위한 ‘2026년 운영계획’을 발표했다. 전당은 ‘예술·대중·지역’ 3가지 가치를 중심으로 기획사업 브랜드 ‘아트숲’을 운영하며 공연 61건, 전시 4건, 교육 및 기타 4건, 상설공연 1건 등 총 70건 규모의 프로그램을 추진한다. 이 대표는 전당을 전북의 핵심 문화예술 인프라로 도약시키기 위해 △서비스·안전 수준 제고 △자체 공연 콘텐츠 경쟁력 강화 △인적자원 역량 강화 △시설 미래 경쟁력 확보 등 4대 핵심과제를 제시했다. 특히 개관 25년을 맞은 전당의 시설 노후화에 대응하기 위한 중장기 개선 필요성을 강조하며, 공간 인프라와 콘텐츠, 인력 역량, 안전·서비스 등 전반의 경쟁력을 높여 도민이 편안하게 찾는 문화공간으로의 역할을 강화할 방침이다. 공연 사업은 △거장전 △스테이지원더 △기획자의 눈 △소리연리지 △가족누리 등 5개 분야로 구성됐다. 거장전에서는 6월 국립발레단 ‘백조의 호수’를 선보이며, 기획자의 눈에서는 윤별발레컴퍼니 창작발레 ‘갓’, M발레단 ‘돈키호테’, 올라비올라 사운드 ‘B to B with 바리톤 길병민’ 등이 예정됐다. 대중성과 화제성을 고려한 스테이지원더 분야에서는 ‘임재범 40주년 콘서트’,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LIVE TOUR’ 등을 마련했다. 지역 예술인과 협업하는 소리연리지 분야에서는 ‘전북특별자치도 All Festa 시즌5’와 ‘K-POP 아카데미 쇼케이스’를 운영하며 지역 문화생태계 활성화를 도모한다. 가족누리에서는 백희나 작가 원작 뮤지컬 ‘알사탕’과 ‘숲속 100층짜리 집’을 선보여 어린이 관객층 확대를 추진한다. 전시는 배리어프리 기획전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를 비롯해 청년작가 야외조각전Ⅳ ‘7ing:칠링’, 여름방학 특별전 ‘앤서니 브라운전: 마스터 오브 스토리텔링’ 등을 통해 접근성과 대중성을 강화할 계획이다. 예술교육은 유아부터 초등학생 고학년까지 맞춤형 프로그램 ‘소리터? 놀이터!’, ‘예술놀이터 SORI’ 등을 운영한다. 전당은 문화가 있는 날 프로그램 ‘월드콘(월간 드림 콘서트)’과 전주를 제외한 도내 13개 시·군을 순회하는 ‘찾아가는 예술극장’을 통해 지역 간 문화 격차 해소에도 나선다. 이 대표는 “전당이 세계적 공연을 유치하는 동시에 지역 예술이 외부로 확장되는 플랫폼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며 “시설 개선과 콘텐츠 경쟁력 강화를 병행해 도민 문화향유권 증진에 기여하겠다”고 말했다.
『밍키』라는 책을 받아 든 순간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보자기를 어깨에 두른 채 엄마의 로션 병을 들고 요술공주 ‘밍키’ 주제가를 부르며 온 집 안을 뛰어다니는 여자아이의 모습. 작가는 이야기라는 술법으로 독자를 홀려 그가 만든 세계로 초대한다. 언니의 유산으로 받게 된 돈가방에 ‘밍키’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인물의 이야기. 소유했다고 믿었으나 ‘내 것’일 수 없는 것들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삶에 대해 질문하게 하는 표제작 「밍키」도 인상적이었지만, 유독 여운이 남았던 작품이 있다. 「대원의 소원」은 작가의 능청과 이야기꾼으로서의 탁월함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딸의 결혼식에 손잡고 들어가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해온 대원이라는 남자가 등장한다. 콘서트에 처음 간 대원이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아 온몸에 힘이 쭉 빠져” 있는 상태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는 공연장에 앉아 있기까지 꽤 험난한 과정을 통과해야 했다. 동료 택시 기사의 딸에게 도움받아 어렵사리 팬카페에 가입하고, 공연 표도 구할 수 있게 된 대원. 내친김에 그에게 ‘예은님’의 팬으로서 주의할 점과 교양 있게 공연 관람하는 법도 전수받는다. 행복감에 젖어 콘서트 날만 기다리던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닥친다. 하필 딸의 결혼식과 공연 날짜가 겹친 것. 그는 딸의 결혼식과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에 가는 걸 모두 성공하기 위해 물샐틈없는 작전을 전개한다. 주례사 시간을 줄이기 위해 자신이 직접 주례를 맡고, 여분의 옷을 미리 챙겨놓고, 동료에게 기차 시간에 늦지 않도록 역까지 자기를 데려다줄 것을 미리 부탁해 두었다. 전주에서 용산역까지, 기차에서 내려 공연장까지 가는 방법을 시간대별로 모두 계획해 두었다. 오전 10시 결혼식과 저녁 8시 공연 사이 그는 무대 위 연주자처럼 분주하다. 대원의 투박함과 소란스러움이 귀여워 보이는 것은 아내의 부재를 견디는 대원의 시간을 작가가 그려놓았기 때문이다. 상실을 경험한 이들이 감당해야 하는 일상의 훼손.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이 의식처럼 통과해야 하는 환멸과 치욕. 재기 발랄한 젊은 작가의 위트로 반짝이는 소설집 같지만, 묵직하고 먹먹한 목소리가 스며있어 이야기는 힘을 갖는다. 작가는 일상의 균열과 관계의 변화에서 시작된 감정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포착하는 능력을 지녔다. 『밍키』에 수록된 8편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평범하다. 어디엔가 살고 있을 것 같은 사람들, 우리의 이웃이거나 친구이거나 건너 건너 아는 사람일지 모를 인물들이 그의 소설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얼핏 보면 나와는 무관한 일처럼 보이지만 실핏줄처럼 얇고 가는 관계망 속에서 당신과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작가가 직조해 낸 이야기 속에서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자고 일어났더니 뿔이 생긴 「뿔 있으세요?」는 또 어떤가. 「뿔 있으세요?」에서 화자는 오빠의 결혼 상대를 소개받는 자리에서 제 몸에 이상한 일이 생겼음을 알게 된다. 엉덩이, 정확하게 꼬리뼈 부근에 뿔이 난 것이다. 이 뿔 때문에 화자와 화자의 주변에 한바탕 소동 아닌 소동이 벌어진다. “엉덩이에 힘을 바짝 주었다. 종일 허리를 펴고 앉았다고 등에 힘이 생긴 것 같았다.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당장 없앨 수도 없다면 일단 이 뿔과 사는 방법을 먼저 터득하면 될 일이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는 것이다.”_ 「뿔」 부분 최아현 작가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그에게 계속 ‘뿔’이 있었으면 좋겠다. 남들에게 드러내서 보여줄 수도 없고 불편과 고통도 따르니 작가는 괴롭겠지만, 어쩐지 그 불편과 고통으로 인해 그가 다른 이들과는 다른 눈과 귀를 갖게 되었을 것 같다. “체급 차이가” 분명한 이 세계와 대적해 “엉덩이에 힘을 바짝 주”고 허리를 펴고 앉아 “그렇게 스스로 경험(글)을 쌓아나가면” 그의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는 즐거움이 될 테니까. 요술봉을 가진 손으로, 이야기를 계속, 계속, 써주기를. 김정경 시인은 2013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시 「검은 줄」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지은 책으로 시집 『골목의 날씨』가 있다.
유종인 수필가가 희수를 맞아 자신의 삶을 기록한 수필집 <쑥배 반바지>(수필과비평사)를 출간했다. 이번 수필집은 저자가 유년 시절의 기억부터 청소년기의 언어, 가족과의 인연과 제자·동료들과의 관계를 성찰적인 시각으로 복원해 낸 결과물이다.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수준을 넘어 현재 자신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담백한 어조로 풀어낸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글 밭에서의 희로애락을 맛보는 게 무엇보다 잘한 일이라고 여기며 잠을 설친 날도 있었다”며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글과 함께 삶의 미래를 꿈꾸는 글 속 여행의 기쁨이 큰 보람이 있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러면서 “글쓰기를 통해 작가도 되었고 멈추지 않고 하나씩 다듬으며 글과 함께 지내온 삶의 길을 잘 선택한 듯하다”고 덧붙였다. 책은 개인적 서사를 넘어 국내외 여행지에서 얻은 사연 등 세상을 향한 확장된 시선을 보여준다. 특히 음악을 전공한 저자의 이력이 문장에 자연스러운 리듬을 부여하고 있으며, 화려한 기교 대신 수식어를 덜어낸 문체로 삶의 무게를 진솔하게 전달한다. 1950년 정읍에서 출생한 저자는 진주교대와 전주사대 음악학사, 전북대 음악석사 학위를 받았다. 전주효정중학교 교장을 역임했고 2015년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했다. 아람수필, 교원문학, 우리문학, 전북수필, 전북문인협회 회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2회 우리문학 수필 부문 본상을 수상했으며 저서로는 수필집 <그날의 합창>이 있다.
많은 독자에게 ‘소나기’, ‘학’ 등의 작품으로 친숙한 황순원 작가는 간결하고 절제된 문체,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자연 묘사로 한국 문학사에 금자탑을 쌓았다. 이처럼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황순원 문학의 정수를 담은 단편선집이 잇달아 출간되며 국내 문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황순원 작가의 탄생 111주년을 맞아 출판사 ‘학 북스’는 핵심 명작을 엄선한 <황순원 대표 단편선>을 비롯해 시대를 뛰어넘는 깊은 서정성과 감동을 전하는 <황순원 단편선집 1>, <황순원 단편선집 2> 등 총 3권을 동시에 펴냈다. ‘학 북스’는 황순원 작가의 손자가 발행인을 맡고 있으며, 작가의 삶과 문학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출판사다. 황순원기념사업회장 안영 소설가는 “모든 것을 다 말하지 않고 행간의 의미를 곱씹게 하는 황순원 특유의 여백의 미를 최대한 원본의 느낌 그대로 살리고자 했다”며 “이번 선집에 담긴 따뜻한 인간애와 생명 존중 사상, 깊은 서정성이 오늘의 독자들에게도 순수한 감동을 전할 것”이라며 이번 선집에 대해 설명했다. 선집은 작가의 111번째 탄생을 기념해 세월이 흘러도 바래지 않는, 맑고 투명한 언어의 결을 세 권의 책에 정성스럽게 담아낸 것으로, 그의 문학적 발자취를 의미 있게 되짚는다. 척박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깊은 울림을 전할 것으로 기대된다. 교과서와 기존 선집을 통해 널리 알려진 작품뿐 아니라 그동안 쉽게 접하기 어려웠던 단편소설들도 다수 수록돼 문학사적 가치와 소장 가치를 높였다. <황순원 대표 단편선>은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주요 명작들을 엄선해 수록한 책이다. 나란히 출간된 <황순원 단편선집 1·2>는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면서도 작품집 절판 등의 이유로 자주 접하기 어려웠던 단편들을 모아 소장 가치를 한층 높였다. 황순신 발행인은 “학처럼 고고하게 순수문학을 지켜온 작가의 숭고한 발자취를 온전히 보존하고자 ‘학 북스’를 설립했다”며 “이번 출간을 시작으로 장편소설 7편과 시 104편 등 황순원 문학세계를 재조명하고 널리 알리는 것이 목표”라고 전했다. 김종회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촌장은 추천사를 통해 “20세기 한국 순수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황순원은 지금도 여전히 수발하고 의연한 거목과 같은 존재”라며 “그의 소설은 인간의 정신적 아름다움과 순수성, 인간 존엄에 대한 깊은 존중에서 출발했고 이를 흔들림 없이 지켜왔다”고 평했다. 이어 “황순원은 순수문학의 범주에 머무르지 않고 가장 한국적인 정서와 이야기를 가꿔낸 대표적 문인이며, 항일 저항 의지를 담은 문학정신과 좌우 이념의 대립 속에서도 균형 잡힌 시선을 견지하며 시대의 증인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며 “이번 선집을 계기로 황순원이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국민 작가로서 K-리트러처를 통해 세계 문단에서도 더욱 널리 자리매김하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어떤 이름은 그 존재만으로 견고한 울타리가 된다. 한국시단에서 ‘김용택’이라는 이름 뒤에 늘 그림자처럼 따라붙던 섬진강 시인이라는 수식어가 그랬다. 그것은 시인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훈장인 동시에 그를 가두는 안온한 경계이기도 했다. 최근 김용택 시인이 펴낸 시집 <그날의 초록빛>(창비)은 그가 평생 일궈온 거대한 울타리를 스스로 허물고 나간 한 창작자의 치열하고도 정직한 모험이 담겨 있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자신이 오랫동안 다듬어온 과거의 문법을 과감히 ‘낡은 거울’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 거울의 표면을 깨뜨리고 나아가 거울 밖 미지의 생명들이 뿜어내는 가공되지 않은 파동에 온몸을 맡긴다. 시인은 노련함에 기대는 대신 낯설고 예민한 감각으로 세상을 다시 읽는다. 과거의 성취가 주는 지루함과 작별하고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언어들로 44편의 시를 완성해냈다. 이는 기성 문단에서 확고한 위치를 점한 시인이 내뱉을 수 있는 가장 용기 있는 고백일지도 모른다. “마을회관에서 점심을 먹었다/ 내가 마을에 들고 나는 흔적이 없을 때까지/ 나는 마을을 걷고, 걷고, 걷고 또 걸어 회관 문턱을 넘어/ 마을 공동밥상 앞에 앉았다/ 공부는 떠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는 것이어서/ 내 모든 공부가, 아는 것이, 지식이/마을에서 소용없어지고,/ 나는 그렇게/마을이 공인한 마을의 일원이 되었다/(…중략…)/ 나는 눈물을 짓는다/슬퍼서가 아니다/ 하루의 경제적 경영 범위에 따른/ 몸의 고졸한 움직임들이/ 그토록 아름답다”(‘고졸한 경제행위’ 부분) 시인이 마주한 세계는 조급하지 않다. 억지로 해석하거나 재단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는 자연의 순리 앞에 무릎을 꿇고 생의 진실을 겸손하게 응시한다. 무거운 세상을 균열내는 것은 강력한 힘이 아니라 끝내 꺾이지 않는 부드러움이라는 사실을 맑은 언어로 증명해낸다. 그런 의미에서 <그날의 초록빛>은 노년의 완숙미를 뽐내는 결과물이 아니다. 오히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생의 첫 초록을 목격한 소년의 설렘으로 가득하다. 생에 대한 경외심을 잃지 않는 한 삶은 언제든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다. 나희덕 시인은 해설을 통해 “섬진강을 따라 오롯이 흘러온 김용택의 시적 생애가 이제 지구의 드넓은 대지에 이르렀다”며 “그의 시에는 여전히 싱그러운 흙이 묻어 있고 생명의 물기가 남아 있다”고 헌사했다. 그러면서 “‘나는 퀴퀴하게 낡은 나의 거울에서 나간다’라는 노익장의 선언은 자못 비장하기까지 하다”며 그가 보여준 문학적 탈피에 경의를 표했다. 1948년 임실에서 태어난 김 시인은 1982년 21인 신작 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섬진강 1’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시집 <섬진강>, <맑은 날>, <그 여자네 집>과 동시집 <콩, 너는 죽었다> <너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은하수를 건넜다> 등을 통해 문학의 지평을 넓혀왔다.
제27회 전주국제영화제가 예산 감축이라는 산업적 위기 속에서도 ‘영화적 본질’과 ‘대안적 창의성’을 정면으로 내세우며 새로운 도약을 선언했다. 자본의 논리에 매몰되지 않고 독립영화 고유의 실험정신으로 돌파구를 찾겠다는 의지다. 31일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에서 열린 상영작 발표 기자회견에는 윤동욱 조직위원장 권한대행과 민성욱·정준호 공동집행위원장, 문석·문성경·김효정 프로그래머가 참석해 올해의 청사진을 밝혔다. 이 자리에서 정준호 공동집행위원장은 “국가 전체적인 세수 감소로 영화계가 어려운 여정을 걷고 있지만, 적은 예산을 쥐어짜서라도 내실 있는 프로그램을 준비했다”며 자본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영화제의 가치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는 전 세계 54개국에서 온 237편(해외 140편·국내 97편)의 상영작을 확정했다. 특히 전체 작품 중 81편이 세계 최초로 공개되는 ‘월드 프리미어’로 선정되며 전주국제영화제가 창작자들에게 신뢰받는 플랫폼임을 입증했다. 개막작은 비평가 출신 거장 켄트 존슨 감독의 <나의 사적인 예술가>가 선정되어 예술가들의 허영과 두려움을 우화적으로 그려낸다. 폐막작은 2024년 12.3 내란 사태 직후 남태령에서의 긴박한 대립을 2030 여성들의 시선으로 담아낸 김현지 감독의 다큐멘터리 <남태령>이다. 전작 <어른 김장하>를 통해 따뜻한 울림을 전달한 김현지 감독은 폐막작 <남태령>에서 시대적 아픔을 재기발랄한 감각으로 풀어내 영화제가 지향하는 동시대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번 영화제에서 가장 주목할 지점은 올해 정식 신설된 ‘가능한 영화’ 섹션이다. 고비용 제작환경에 매몰되지 않고 기술적 발전과 창의성만으로 일구어낸 대안적 사례들을 조명함으로써, 영화는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예술이라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문성경 프로그래머는 “산업이 강요하는 조건이 아닌 다른 환경에서도 영화가 탄생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창작의 핵심은 자본이 아닌 창의성에 있음을 강조했다. 이러한 흐름은 투자 위축으로 극영화 제작이 침체된 상황에서 적은 예산으로도 명쾌한 메시지를 담아낸 다큐멘터리들이 한국경쟁 부문에서 압도적인 약진을 보인 현상과도 궤를 같이한다. 특별전과 부대행사도 풍성하다. 1960년대 뉴욕 언더그라운드 거장들을 다룬 ‘뉴욕 언더그라운드 더 매버릭스’와 배우 안성기의 연기세계를 재조명하는 ‘조금 낯선 안성기를 만나다’가 관객을 기다린다. 동시에 유니버셜 픽쳐스와 협업한 ‘슈퍼마리오 인 갤럭시 전주’, 올해로 12회째를 맞는 ‘100필름100 포스터’의 극장 문화 대담 프로그램도 기대를 모은다. ‘올해의 프로그래머’ 변영주 감독은 자신이 직접 큐레이션한 고전과 동시대 작품들을 통해 관객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예정이다. 이번 영화제는 민성욱·정준호 공동집행위원장의 연임이 결정된 이후 처음으로 대중 앞에 서는 무대인 만큼, 지난 3년간 구축해온 운영의 연속성과 조직적인 결속력이 한층 견고해진 모습이다. 정준호 위원장은 집행위원장의 역할을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에 비유하며 "중동 전쟁 여파로 급등한 항공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한항공과 에어로케이 등 민간기업으로부터 직접 후원을 받기 위해 열심히 발로 뛰고 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민성욱 위원장 역시 “(연임에 대해)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며 “프로그래머들이 엄선한 작품들이 관객들과 최상의 상태로 만날 수 있도록 정준호 집행위원장과 함께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전북특별자치도가 자체 보유한 전통문화 콘텐츠를 강조하며 ‘K-컬처의 수도’라 자부하고 있지만, 정작 이를 뒷받침할 실질적인 콘텐츠 산업 성적표는 처참한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미래 먹거리인 방송 영상과 디지털 분야에서 전국 최하위권에 머물고 있어, 산업 생태계 조성을 위한 특단의 대책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발간한 ‘2024년 기준 콘텐츠산업조사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도내 방송·영상 산업(독립제작사 제외) 사업체 수는 고작 11개에 불과했다. 이는 전국 총 1151개 사업체 중 단 1%에 그치는 수치다. 그나마도 대부분이 기존 방송사의 지역국 형태임을 고려하면, 순수 민간 제작 역량은 사실상 ‘제로’에 가깝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는 지리적 여건이 유사한 강원(19개)이나 전남(14개)과 비교해도 현저히 낮은 수치다. 지역의 서사를 영상 콘텐츠로 가공해 외부로 확산시킬 ‘엔진’ 자체가 꺼져 있는 셈이다. 이로 인해 한지, 판소리 등 전북의 우수한 원천 소스들은 디지털 콘텐츠로 전환되지 못한 채, 지역 내 소규모 행사용으로만 소비되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다. 미래 산업인 애니메이션과 디지털 솔루션 분야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보고서에 따르면 전북은 이 분야에서 업체 수를 산출하기 어려울 정도로 저변이 얇으며, 어렵게 버티고 있는 소수의 사업체마저도 해를 거듭할수록 줄어들고 있다. 기술력을 요하는 캐릭터 개발이나 게임 제작 업체가 적다 보니, 도내 대학에서 배출된 청년 인재들은 일자리를 찾아 수도권으로 떠나고 있다. 실제 전국 애니메이션 산업 종사자는 2022년 6373명에서 2024년 6832명으로 꾸준히 증가했지만, 전북은 같은 기간 39명에서 19명으로 ‘반토막’이 난 것으로 확인된다. 기업 규모의 영세성도 고질적인 문제다. 도내 콘텐츠 기업의 80% 이상은 종사자 1~4명 규모의 소기업으로 밝혀졌다. 매출을 견인할 대형 업체는 대부분 수도권에 쏠려 있고, 도내 업체들은 정부 지원금에 의존하며 근근이 버티는 실정이다. 전문가들은 지역이 전통 콘텐츠에만 고집할 게 아니라, 이를 담아낼 ‘디지털 그릇’부터 만들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도내 콘텐츠 업계 종사자 A 씨는 “콘텐츠 산업 발전은 단발성 지원 사업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라며 “실속 있는 기획으로 매출을 일으킬 수 있는 강소 기업과 이들을 체계적으로 뒷받침할 기관의 협력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현재 지역 내 사업체 수가 너무 적다 보니 지원금 예산 규모 자체도 타 지역에 비해 적게 배정되는 실정”이라며 “지역 영세 업체들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실질적인 로드맵 마련이 절실하다”고 덧붙였다.
한국문학의 근대성과 보편성을 탐구하며 전북 평단의 위상을 높여온 이보영 문학평론가(전북대학교 명예교수)가 지난 27일 별세했다. 향년 93세. 1933년 전주에서 태어난 이씨는 전북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전남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6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비평 ‘연화의비의(秘義)-김동리론’이 당선됐으며 같은 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서 ‘추상미술과 인간’으로 미술평론 부분에 당선되기도 했다. 이후 모교인 전북대 교수로 재직하며 영문학자이자 한국문학 비평가로서 지역 평단을 이끄는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 씨의 비평 철학은 식민지 시대를 관통한 한국적 특수성을 전제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는 작품을 단순히 분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텍스트를 분석하는 ‘자세히 읽기’를 통해 문학 속에 내재된 역사적 의미를 길어올리는 데 탁월한 역량을 보여줬다. 특히 국권침탈기의 문학을 ‘난세의 문학’이라 규정하고, 당시 작가들이 일제라는 거대한 타자를 의식하며 근대적 리얼리즘을 어떻게 구현했는지 규명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이러한 비평적 관점은 한국문학사의 주요 작품들을 재평가하는 성과로 이어졌다. 그는 이광수의 <무정>에 내재된 친일적 성향과 몰정치성을 날카롭게 비판했고, 염상섭 소설 연구에 천착하며 학술적 기틀을 다졌다. 주요 저서로는 <식민지시대문학론>, <한국근대문학의 의미>, <이상의 세계>, <염상섭 문학론> 등이 있으며 <오스카 와일드 예술평론>, <톨스토이와 도스트예프스키> 등을 번역했다. 이 씨는 중앙 문단에만 머물지 않고 지역 작가들의 작품세계에도 관심을 쏟으며 전북문학의 가치를 높이는 데 앞장섰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북특별자치도가 친일 잔재 청산이라는 시대적 과제 앞에 납득하기 어려운 ‘행정적 이중잣대’를 보이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지역 예술계에는 자생력 부족 등을 이유로 지원금 삭감의 칼을 휘두르면서도, 정작 도 스스로 청산대상으로 규정한 인물들의 선양사업에는 공적자금을 투입하며 정책적으로 자기부정에 빠진 모습이기 때문이다. 전북도는 지난 2020년 ‘친일 잔재 전수조사 및 처리방안 연구용역’을 통해 도내 친일 잔재 133건을 직접 규명했다. 해당 보고서에는 가미카제 특공대를 미화하는 등 친일 행적이 뚜렷한 인물들을 명백한 청산대상으로 분류하며 행정적 대응의 근거를 마련했다. 하지만 현재 도에서 추진하는 사업 중에는 도 스스로 내놓은 조사 결과와는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이는 실정이다. 실제 올해 전북문화관광재단 지원사업에서 도내 시·군 문인단체 대다수는 자생력 부족 등을 이유로 탈락했다. 반면 청산 대상으로 지목된 인물을 기리는 특정 단체는 선정돼 공적자금을 지원받게 됐다. 재단 측은 “기획안 내용이 우수하고 제자들에게까지 연좌제를 적용하기 어렵다”고 설명했지만, 행정이 규정한 청산 대상사업에 스스로 공적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모순은 피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이를 두고 가치 판단의 문제를 넘어 행정원칙의 일관성이 무너진 부분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공적 공간의 역사적 감수성 결여도 심각하다. 국립전주박물관에서는 최근까지 친일 행적이 뚜렷한 인물의 작품을 비판적 주석 없이 예술성만 강조해 전시해왔다. 교육적 가치를 우선해야 할 국립기관이 과오는 은폐한 채 심미적 가치만 부각하는 것은 관람객에게 왜곡된 역사관을 심어줄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해당 콘텐츠는 지역 예술계의 거센 항의 끝에 지난 2024년 삭제됐다. 지자체의 행태는 더욱 직접적이다. 군산시에서 운영하는 채만식문학관은 2명의 공무원이 상주하며 1년에 1억3000만원의 예산이 투입되는 상황이다. 군산의 ‘백릉길(채만식)’이나 고창의 ‘인촌로(김성수)’ 등 친일인사의 호를 도로명주소로 고수하는 현실은 행정의 역사적 감수성 수준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지점이다. 최기우 작가는 30일 전북일보와의 통화에서 “언어를 짜깁기해 만든 미사여구에 무슨 사상이 담겨 있겠느냐"며 “삶과 철학이 무너진 작가의 작품을 예술이라는 명분으로 보존하는 행태를 당장 멈춰야 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친일 문인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그늘에 가려진 다른 소중한 문인들을 지우고 묻어버리는 행위”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전북도 관계자는 “순수하게 예술적 측면으로 봤을 때는 그들의 성과를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며 “과거에 대한 행적은 비판해야겠지만, 행정에서 예술 창작에 대한 기회까지 박탈하는 것도 우려스러운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친일과 관련해서는) 논의와 공감대 형성을 통해 차근차근 접근해야 할 측면이 있다. 앞으로 관련 사안은 개선해 나가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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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향토문화연구회 '조선시대의 전주부윤과 판관'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