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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문만 열면 기다렸다는 듯 밖으로 달려 나가는 고양이 ‘용용이’를 데리고 텃밭이 있는 옥상으로 갔다. 용용이는 분주하게 채소 사이를 다니며 냄새를 맡더니 잎을 먹기도 했다. 그런데 애플수박에 한눈을 판 사이, 갑자기 우당탕탕 소리가 났다. 블루베리 나무 주위에 둘러놓은 망 안으로 용용이가 들어간 것이다.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는 바람에 화분이 쓰러져 흙이 쏟아졌고, 나무와 그물이 엉켰다. 서둘러 달려갔지만, 그사이 용케 빠져나온 용용이는 냅다 계단으로 내달렸다. 뒤쫓아 가 보니 소파 위에 앉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애처롭게 올려다보는 고양이를 보고 있자니 동화 『호호당 산냥이』의 말썽꾸러기 고양이 산냥이가 떠올랐다. 산냥이는 호약산에 있는 호호당약방에서 호호할멈과 산다. 호호할멈은 한 번 맡은 냄새를 몽땅 기억하는 산냥이에게 약초를 캐오라고 시킨다. 산냥이는 캐오라는 방아풀 대신에 깻잎을 따오면서 온갖 핑계를 댄다. 한 번도 산 밖으로 나가보지 못한 산냥이는 호시탐탐 밖으로 나갈 기회를 엿본다. 호호할멈이 볼일을 보러 산 아래, 마을로 내려간 사이 산냥이는 하늘다람쥐 오람이와 함께 호호당약방에 들어간다. 그리곤 할머니가 귀하게 여겨 아끼는 냄새 버섯으로 호약산을 휘젓고 다니는 사람들을 내쫓는다. 산으로 돌아온 호호할멈은 배탈이 난 산 아래 호약마트 주인에게 주려고 냄새버섯을 찾는다. 모른다고 발뺌을 하던 산냥이는 결국 진실을 털어놓았고 호호할멈은 깻잎이라도 따오라고 호통을 친다. 고양이 산냥이는 호기심이 많고 자신감이 넘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는 일마다 엇나가 실수투성이다. 계획은 빗나가고, 심부름은 꼬이고, 좋은 뜻으로 한 일은 더 큰 소동으로 번진다. 산냥이는 겉으로는 호약산과 호호당을 벗어나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지만, 속으로는 버려진 자신을 거두어 기른 호호 할멈에게 버림받을까 두렵다. 호호 할멈은 이런 천방지축 산냥이를 호되게 나무라지 않고 기다려준다. 그리고 산냥이의 속마음을 헤아려 사랑으로 품어준다. 나는 고양이 산냥이가 펼치는 한바탕 모험도 좋았지만, 산냥이의 실수를 바라보는 호호 할멈의 눈길에 더 마음이 갔다. 계속 실패하고 사고를 치는 산냥이를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는 할멈의 모습을 보며 문득 ‘나 역시 누군가의 기다림 덕분에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는 실수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들 덕분에 살아가는 것 같다. 옥상에서의 사건 이후 용용이는 문을 열어도 밖으로 발을 내밀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마도 길에서 떠돌 때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떠올라 겁이 나는 듯했다. 호호 할멈이 산냥이를 기다린 것처럼, 누군가의 기다림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는 것처럼 우리 용용이에게도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한 듯하다. 장은영 동화작가는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통일 동화 공모전 우수상, 남도의병 콘텐츠 공모전 스토리 부분 대상, 전북아동문학상과 불꽃문학상을 수상했고 아르코문학창작기금(발표지원)을 받았다. 저서로는 <광대특공대>, <역사와 문화로 보는 도시 이야기 전주>, <책 깎는 소년>, <으랏차차 조선 실록 수호대>, <열 살 사기열전을 만나다> 등이 있다. 그리고 <책 깎는 소년>이 6학년 1학기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었다.
전주는 문학의 도시다. 수많은 작가의 시선이 머물렀고, 그 문장들은 지금도 골목과 풍경 속에 여운을 남기고 있다. 양귀자의 단편소설 「한계령」도 그렇게 전주를 품은 작품이다. 연작소설집 『원미동 사람들』(문학과지성사·1987)에 실린 이 소설은 고향 전주의 철길 동네를 배경으로 돌아갈 수 없는 시간과 기억을 조용하고도 깊게 그려낸다. 경기도 부천시 원미동에 사는 작가인 화자는 이십오 년 만에 유년 시절 친구 박은자의 전화를 받는다. 찐빵집 딸이었던 은자는 이제 경인 지역 밤무대에서 활동하는 가수 ‘미나 박’이 되어 있었다. 전화 한 통은 두 여자의 삶을 가로지른 세월을 불러내고, 화자는 기억을 더듬어 자연스레 기린봉이 보이던 철길 동네, 레일 위로 반짝이던 햇살, 하천 너머 저탄장으로 걸어 들어간다. 가난했지만 그 시절의 공기는 선명하고, 소설 속 전주는 낭만과 삶의 냄새가 뒤섞인 공간으로 되살아난다. 그러나 이 소설은 단순한 재회담에 머물지 않는다. 화자는 은자의 간곡한 청에도 선뜻 발걸음을 옮기지 못한다. 기억 속 은자를 현실에서 마주치는 순간, 소중하게 간직해 온 유년의 풍경이 훼손될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다. 은자는 화자에게 친구를 넘어 사라진 고향으로 향하는 마지막 표지판이었다. 소설의 제목이자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노래 <한계령>은 이 작품의 주제를 압축한다. 화자는 마침내 클럽을 찾아 그 노래를 듣는다.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그 선율 위로 큰오빠의 지친 뒷모습이, 아스팔트 아래 묻힌 흙냄새가,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 겹쳐 든다. 양귀자는 격동의 산업화 시대를 지나며 수많은 한국인이 경험한 고향 상실을 절제된 언어로 포착한다. 고향은 지도 위에 그대로 존재하지만, 마음속 고향은 이미 사라져 버렸다. 그것이 이 소설이 건네는 뼈아픈 깨달음이다. 이 아픔은 오늘날에도 낯설지 않다. 재개발로 지워지는 동네, 온라인으로 대체되는 골목 상권, 빠르게 변하는 도시 풍경 앞에서 많은 사람이 여전히 ‘내 고향은 어디에 있는가?’를 묻기 때문이다. 화자는 담담하게 고백한다. “누구라 해도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었다. 고향은 지나간 시간 속에 있을 뿐이니까.”(338쪽) 그러나 고향은 소멸하지 않는다. “보이는 것들은, 큰오빠까지도 다 변하였지만, 상상 속의 은자는 언제나 같은 모습이었다.”(338쪽) 그 사실 하나가 화자를 버티게 한다. 기린봉은 오늘도 전주 하늘 아래 그 자리에 있고, 레일 위로 미끄러지던 햇살은 이 소설 속에서 영원히 반짝인다. 기억 속 사람이 곧 고향이다. 그를 잊지 않는 한, 고향도 우리 안에 머문다. 최기우 극작가는 200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소설)로 등단했다. 희곡집 <상봉>, <춘향꽃이 피었습니다>, <은행나무꽃>, <달릉개>, <이름을 부르는 시간>, 어린이희곡 <뽕뽕뽕 방귀쟁이 뽕 함마>, <노잣돈 갚기 프로젝트>, <쿵푸 아니고 똥푸> 등을 냈다.
최명표 문학평론가가 편찬한 <전북지역신문 문예기사목록>(신아출판사)은 지역문학 연구의 토대를 구축하고 사라져가는 지역언론자료의 가치를 재조명하기 위한 작업물이다. 자료집은 단순히 기사 목록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지역의 기록을 보존하고 인문학적 연구환경을 개선하려는 저자의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총 4권으로 구성된 자료집은 편자의 전공인 문예면을 중심으로 제1권부터 제3권은 전북일보(1952~1989)를 다루고 있다. 제4권은 군산신문과 삼남일보, 전북매일 기사를 합쳐서 엮었다. 편자는 책 머리말에서 “활자가 천대받는 세상이다. 세상이 디지털화되어가는 추세 속에서 활자의 수명은 재촉받고 있다”며 "예로부터 전주는 완판본과 태인본으로 유명한 활자의 고장이다. 학문 연구에 소용되는 기초 자료의 확보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라고 책 발간에 대해 밝혔다. 책을 편찬한 최 문학평론가는 정읍 출생으로 전북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수료했다. 전북아동문학상, 방정환문학상, 이재철아동문학평론상 등을 받았다. 그동안 <해방기사 문학연구> <전북지역사문학연구> 등을 펴냈으며 <유진오 시전집> <신문으로 읽는 식민지 전북>(1~5권) 등의 편서를 출간했다.
‘2026 석정문학제’ 전주 행사가 5월 19일부터 6월 2일까지 3차례에 걸쳐 마무리됐다. 이번 행사는 신석정 시인의 문학적 성취를 기리고, 현대문학이 삶에 던지는 가치를 시민들과 공유하고자 마련됐다. 지난달 19일 신일교회 교육문화관에서 열린 1차 행사는 소재호 시인의 문학 강연이 이뤄졌다. 소 시인은 석정 시인의 작품세계 기저에 존재하는 노장사상을 규명하며 "석정은 유·불·선이 합응하는 거대한 민족의식 토대 위에서 동서고금의 문학을 아우른 위대한 정신적 지평을 완성했다”고 평가했다. 이어 진행된 ‘석정 컬로퀴엄’에서는 장조카 신 조영원장의 회고를 비롯해 표순복 시인, 박귀덕 수필가의 발표를 통해 석정의 삶과 문학, 수필세계를 다각도로 재조명했다. 지난달 26일 신일교회 교육문화관에서 진행된 2차 행사에서는 박해람 시인이 ‘인간이라는 정속’을 주제로 강연을 펼쳤다. 박 시인은 세대 간의 세태 변화를 인정하고 각자의 삶의 속도를 존중하며 시를 바라보는 관점을 명쾌하게 짚어냈다. 참석한 시민들은 관계 속에서 자신의 속도를 되돌아보는 뜻깊은 시간이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지난 2일 전주의 한 음식점에서 열린 마지막 3차 행사는 허영자 시인이 ‘문학과 우리들의 삶’이라는 주제로 강연에 나섰다. 이날 행사에는 석정문학회 김영 시인을 비롯해 전북일보 윤석정 사장 등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허 시인은 덕수궁 석어당의 나뭇결에서 발견한 한국미의 본질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전하며 소멸의 운명이 지닌 극치의 아름다움을 탐미적 관점으로 풀어냈다.
‘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이라니 일단 제목만 들어도 관심이 간다. 주제가 다양하니 소설처럼 차례대로 읽을 필요가 없다. 눈길이 먼저 닿는 부분부터 읽어도 아무 부담이 없다. 나는 후추에 가장 먼저 관심이 갔다. 한때 금보다 더 비싼 향신료로 명성을 떨치던 바로 그 향신료다. 그 귀한 후추를 구하기 위해 나선 항해가 인류에게 신세계를 열었음은 다들 안다. 대항해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황금시대를 만들었고, 원주민들에게는 지옥의 문을 열었다. 이후 강대국들이 자원과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해 아메리카와 동남아로 진출하면서 침탈의 역사가 이어졌다. 어쩌면 이 모든 일은 만약 유럽에서 후추가 풍부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식물에 관한 개별 정보만이 아니라 유래를 포함해서 그것이 인류 문명사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하는 데 있다. 여기에 식물에 관한 깨알 같은 정보까지 담았다. 스토리가 더해지면서 정보는 지식에 머물지 않고 이야기로 살아난다. 식물의 역사가 함께 펼쳐지면서 책은 단순한 지식서의 범위를 넘어선다. 어떤 식물들은 한 시대를 관통하면서 동서양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현재도 우리가 함께하고 있다. 차만 해도 그렇다. 소설 <삼국지>의 앞부분은 유비가 어머니를 위해 차를 구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중국 황실에서만 마시던 차가 대중화되고, 다시 홍차를 거쳐 미국 독립운동의 시발점이었던 보스턴 차 사건까지 이어졌다는 걸 생각하면 실로 장편 대서사시를 읽는 느낌이다. 우리가 잘 아는 ‘차마고도’의 출발도 차의 교역에서 비롯한다.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우리에게 익숙한 차가 동서양의 역사에 어떻게 영향력을 행사했는지가 한눈에 그려진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토마토였다. 지금은 세계 장수식품으로 꼽히는 토마토가 유럽에 전파된 이후에도 2세기 동안 냉대받았다는 사실은 이채롭다. 심지어 토마토는 유럽 사람들에게 악마의 식물로 불리기도 했다. 홀대받던 토마토는 이탈리아의 파스타와 피자, 그리고 다양한 요리에 쓰이는 식재료로 자리 잡으며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식품으로 거듭났다. 이 책이 매력적인 이유는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정보가 곳곳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야채와 채소의 구분법이나 케첩의 유래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서야 케첩이 어떤 과정을 거쳐 식탁에 오르게 되었는지 알았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뜻밖의 사실 앞에서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간밤에 태풍 때문에 이곳 다카마쓰에는 비바람이 몰아쳤다. 문득 식물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식물의 역사는 우리 삶의 또 다른 역사이기도 하다. 이 책은 식물에 대한 단순한 소개를 넘어, 인간이 식물과 함께 어떻게 성장하고 살아왔는지를 보여 준다. 한 권의 책을 따라가다 보면 세상을 보는 시야가 조금 넓어진다.
“끈질긴 의지로/ 수직의 담벼락을 기어오르는/ 너는 담쟁이/ 조금도 몸을 굽히지 않는/ 꼬장꼬장한 담벼락의/ 거친 맨살을 붙들고 올라간다/ 비바람도 뜨거운 햇살도/ 너는 할 수 없다고 막아선다/ 담쟁이는/ 달팽이처럼 느린 걺으로/ 날마다 조금씩 기어오르면 된다고 한다/ 담벼락 한 모퉁이에서 시작된/ 가능으로 번져가는 희망/ 무슨 대단한 걸 하겠냐던 차가운 시선이/ 모두 사라졌다/ 담쟁이는/ 작은 손으로 높은 담벼락을 쉼 없이 기어오르며/ 초록 물결의 희망을 앞세우고 나아간다”(시 ‘작은 손으로 말하는 희망’ 전문) 이금희 시인이 첫 시집 <작은 손으로 말하는 희망>(신아출판사)을 펴냈다. 총 5부로 구성된 이번 시집에는 110여 편의 시가 수록됐다. 시인은 화려한 수사나 난해한 비유 대신 일상에서 길어 올린 소박하고 담백한 언어로 삶과 희망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독자들은 쉽고 편안한 문장 속에서 시인이 전하는 따뜻한 위로와 공감을 만날 수 있다. 시인은 ‘시인의 말’을 통해 “슴슴하고 투박하게 호흡을 얻은, 잘 여물지 못한 인생 하나를 시로 옮겼다”며 “등 떠민 이의 손길이 고마워 부끄러운 얼굴을 가까스로 내민다”고 밝혔다. 이어 “내 인생에 함께 시가 된 모든 분과 사랑하는 남편, 자녀들, 그리고 나의 하나님께 이 책을 올려 드린다”고 덧붙였다. 전남 장성 출신인 이 시인은 현재 전주에 거주하며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유인실 문학평론가가 평론집 <풍경과 시선 그리고 재현>(수필과비평사)을 펴내며, 현시대 작가들의 작품을 바탕으로 문학을 바라보는 새로운 사유의 계기를 제시한다. 이번 평론집은 그동안 문학 잡지와 시집, 수필집 등에 발표했던 글들을 묶은 것으로, 현시대 작가들의 텍스트를 중심으로 문학의 원리와 의미를 탐색하고자 한 작업이다. 이를 통해 유 평론가는 오늘날 문학이 지닌 다양한 미학적 지향과 시대적 맥락을 살피며 문학적 감수성에 대한 비평적 시야를 확장한다. 특히 이번 평론집이 공통적으로 주목하는 지점은 ‘풍경과 시선’이라는 문제의식이다. 오늘날 과학기술과 물질문명의 급속한 발전 속에서 공동체적 가치와 생명에 대한 감각이 점차 약화되고 있지만, 문학은 여전히 인간과 세계, 개체와 공동체의 관계를 성찰하며 생명의 원리를 탐구하는 장르로 기능해 왔다. 이에 따라 이 책은 서로 다른 시기에 발표된 글들을 묶어냈음에도 개체와 전체의 관계를 생명의 관점에서 읽어내고자 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이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책은 총 3부로 구성됐다. 1부에서는 문학 잡지 권두언에 발표했던 글들을 중심으로 오늘날 문학이 직면한 여러 질문을 다룬다. 2부에서는 소재호·김대곤·노용무·이경아·이목윤·김회권·손경숙·이문석의 시를 대상으로 서정의 형식과 문학적 상상력의 재현 방식을 살핀다. 3부에서는 허상문·박영득·신창선·피귀자·최선욱·박귀덕의 수필을 중심으로 풍경과 기억이 재현되는 양상을 고찰한다. 유 평론가는 책머리에서 “이 글들은 서로 다른 매체와 시기에 발표된 것이기에 하나의 단일한 관점으로 완전히 수렴되지는 않지만, 풍경과 시선, 재현이라는 공통된 문제의식을 통해 각 작품에 내재한 다양한 의미망과 시대적 맥락을 읽어내고자 했다”며 “개별 텍스트의 분석과 이론적 성찰 사이를 오가며 문학의 미학적 가치와 존재 의미를 탐색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이어 “이러한 시도가 얼마나 설득력 있게 이뤄졌는지는 결국 독자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이번 평론집이 문학을 바라보는 새로운 사유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유 평론가는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7년 <문예연구> 시 부문 당선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2017년 <수필과비평> 평론 부문 당선으로 평론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시집으로는 <신은 나에게 시간을 주었다>, <바람은 바람으로 온다>, <나는 지금 빛과 어둠의 계단 앞에 서 있다> 등이 있으며, 공저로는 <환상, 실재 그리고 문학>,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글쓰기> 등이 있다. 현재 전북대학교와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에 출강하고 있으며, <수필과비평>과 <문학인신문>의 주간을 맡고 있다.
사물의 성질이나 상태를 나타내는 품사인 ‘형용사’. 명사처럼 대상을 규정하지도, 동사처럼 행동을 설명하지도 않지만 삶의 결을 가장 섬세하게 드러내는 언어다. 이러한 형용사를 통해 인간과 삶을 성찰한 수필집이 출간됐다. 허정진 수필가의 신간 <형용사로 삶을 묻다>(수필과비평사)가 독자들을 만난다. 이번 수필집은 빠르게 정답을 요구하는 시대 속에서 삶을 단정 짓기보다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작가의 사유를 담았다. 책 제목에 사용된 ‘형용사’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허 작가는 머리말에서 “형용사는 느슨하고 흐물흐물하다. 알고 보면 그게 다양성이다”라며 “인간의 삶만큼 복잡다단하고 각양각색인 것도 없다. 맵싸하고 텁텁하고 새틈하고 담박한 품사가 형용사”라고 적었다. 이어 “명사는 정답을 요구하고 부사는 줏대가 없는 것 같다”며 “삶이 그렇게 쉬운 것도 어려운 것도, 만만한 것도 뻣뻣한 것도 아닌 듯싶다. 그래서 형용사로 물어보고 싶었다”고 밝혔다. 작가는 이번 책을 통해 삶과 인간에 대한 탐구를 논리나 이념, 윤리와 미학의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는다. 오히려 타인의 시선과 기준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를 살아가는 방법, 그리고 누구나 삶 속에서 마주하는 상처와 흔들림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책 곳곳에는 일상의 사소한 풍경과 기억,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녹아 있으며, 이를 통해 독자들에게 위로와 성찰의 시간을 건넨다. 수록된 글들은 삶의 다양한 순간들을 담담하면서도 깊이 있는 문장으로 풀어낸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발견한 의미와 인간관계에 대한 통찰, 자연과 계절을 바라보는 감성적 시선이 어우러져 읽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책은 모두 4부로 구성됐다. ‘제1부 나비, 다시 읽다’를 시작으로 ‘제2부 모탕, 그 이름만으로도’, ‘제3부 마음의 나침반을 따라가다’, ‘제4부 미틈달, 그 길목에서’에 이르기까지 총 40여 편의 수필을 담았다. 각 글은 서로 다른 소재를 다루지만 결국 삶과 사람에 대한 애정이라는 공통된 주제로 이어진다. 허 작가는 책에서 “어변성룡(魚變成龍)을 꿈꾸던 젊은 시절에는 선한 마음으로 산다는 것이 시시해 보였는데, 나이가 들어 보니 그것보다 더 대단하고 멋있는 일도 없는 것 같다”고 고백한다. 치열한 경쟁과 성취를 좇던 시절을 지나 결국 인간다움의 가치를 되새기게 된 작가의 깨달음이 담긴 대목이다. 경남 함양 출신인 허 작가는 단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으며, 2017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부문 당선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이후 천강문학상, 신격호샤롯데문학상, 등대문학상, 김포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꾸준한 작품 활동을 이어왔다. 수필집으로는 <꿈틀, 삶이 지나간다>, <시간 밖의 시산으로>, <삶, 그 의미 속으로> 등이 있다.
수필가 권남희는 이런 생각이 들 때면 오히려 더 그렇게 쓰려고 했다. 든든한 울타리가 되었던 문학적 관계망이 흔들렸던 시절, 20대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추억, 시집살이를 하면서 겪었던 감정 등에 대해서도 숨김없이 썼다. 문학은 나이 들어가는 자신에게 선물과 같은 벗이기 때문이었을까. 최근 수필집 <다정함의 종말 에이!>(소후출판사)를 펴낸 그는 작가의 말을 통해 “문학은 자기 인생을 다지며 나가는 길이기에 끝이 없다”고 고백한다. 수필집 <다정함의 종말 에이!>는 2022년 하반기 이후 발표했던 원고들을 정리해 엮은 책이다. 표제작 ‘다정함의 종말 마일리지와 마을살이’를 비롯해 50여편의 수필들은 작가의 내면적 성찰과 사회적 비판 의식이 담겨 있다. 책에는 수필을 즐겨 있는 독자라면 흥미롭게 읽을 만한 이야기들도 담겼다. 2010년 작고한 전숙희 수필가와의 일화부터 여성 차별이나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 ‘이제 앞으로 글을 못 쓰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의 불안과 슬럼프를 딛고 다시 글을 쓰기까지의 마음가짐도 인상적이다. “글을 쓰기 위해 앉으면 보고 들었던 모든 일을 다 쓸 수 있을 것 같았던 호연지기는 사라지고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다. 마음먹기 달렸다는 말도 허세라는 걸 깨닫는다. 도깨비도 수풀이 있어야 모인다는데 책꽂이를 살피고 컴퓨터를 열어 파일을 확인해도 별 게 없다. 나의 종자 회사는 개점휴업이기 때문이다. 꾸준하게 보듬지 않은 이유로 글씨seed들이 없다”(57p) 오랜 기간 수필 문단을 지켜온 저자는 일상의 사소한 사건을 흡입력 있는 필치로 써내려가며 독자들에게 읽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담백한 어조와 위트는 무거울 수 있는 사회적 문제 등도 유쾌하게 풀어내 끝까지 읽을 수 있도록 유도한다. 전주에서 태어난 권남희 수필가는 1987년 <월간문학> 수필 부문에 당선되면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장,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 등을 맡고 있다. 그동안 수필집 <어머니의 만자> <시간의 방 혼자 남다> <목마른 도시> 등을 펴냈다. 대한민국예술인문화대상, 한국수필문학상 등을 받았다.
정양 시인(1942~2025.5.31)이 생전 그토록 사랑했던 대지와 나무 아래, 그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다시 모였다. 지난 30일 오전 김제시 공덕면 마현리 816-1 은행나무 앞에서 정양 시인 추모 시회 ‘보리누름에 산들바람’이 열렸다. 전북작가회의와 전북문인협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행사에는 유족과 신흥고‧우석대 제자들, 그리고 평소 시인과 문학적‧인간적 교류를 나눴던 문인 50여명이 참석했다. 이날 시회는 묵념과 눈물 대신 고인이 살아생전 소망했던 다정한 온기로 가득했다. 전북작가회의 정동철 회장은 “시회는 본래 한량들이 모여 시를 쓰고 낭송하며 노는 자리”라며 “오늘 이 자리에 앉아서 슬픈 표정만 짓기 보다는 선생님께서 생전에 좋아하셨던 대로 재밌게 어우러지는 자리가 됐으면 좋겠다”라고 격식 없는 인사말을 건넸다. 그의 말처럼 단상에 오른 문인들은 저마다 가슴에 품어둔 정양 시인의 호방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꺼내놓았다. 고인을 친형처럼 따랐다는 소재호 시인은 “정양 선생님은 이미 우리에게 전설이 되신 분”이라며 “생전에 ‘양이 형’ 하며 뒤를 따라다녔던 기억이 아직도 선한다”라고 회상했다. 뒤이어 이병천 소설가는 정양 시인의 시 세계와 삶을 주변에 그늘을 내어주는 ‘산그늘’에 비유하며 스승이자 선배였던 고인을 회고했다. 단순한 회상을 넘어 고인의 문학적 업적을 체계적으로 계승하고 보존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제안도 나왔다. 한국작가회의 강형철 이사장은 “현대문학사에서 정양 선생님을 빼놓고서는 인간 날 것 그대로의 삶에 기초한 시, 대지 자체와 맞닿아 있는 시를 쓰는 분을 찾아볼 수 없다”고 짚으며 “안타까운 마음에만 머물지 말고 고인의 문학세계를 기리는 ‘정양 기념사업회’ 구성을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시간 가량 진행된 시회는 고인이 남긴 시편과 그를 향한 마음으로 채워졌다. 장현우 시인이 정양 시인의 시 ‘내 살던 뒤 안에’를 읊었고, 김유순 시인과 박태건 시인이 각각 정양 시인에게 바치는 헌시를 차례로 낭송했다. 시회는 유족 대표인 자녀 정범 씨의 감사 인사와 이병초 시인의 재회 인사를 끝으로 마무리됐다. 슬픔 대신 소박한 어우러짐을 소망했던 시인의 뜻에 따라 이날 마현리 은행나무 아래에는 눈물 대신 시구와 다정한 온기가 자리했다. 청보리가 익어가는 보리누름의 계절, 대지의 시인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들판에 남긴 가장 ‘정양’다운 추모의 풍경이었다.
도로 위 수북하게 떨어진 은행, 얽혀버린 연줄을 푸는 아들과 어머니, 전깃줄 위에 빼곡하게 앉아있는 까마귀떼까지…. 김유석 시인의 디카 시집 <내가 더 아플지 몰라>(도서출판 작가)에는 카메라 렌즈와 시어를 나란히 놓아 우리가 무심코 지나쳐온 풍경에 천천히 다가간다. 디카시는 디지털 카메라로 포착한 이미지에 짧은 시를 덧붙이는 장르다. 시각적 이미지에 간결하면서도 참신한 사유를 잇대어 난해한 현대시의 틈새에서 독자층을 형성해오고 있다. 시집 <내가 더 아플지 몰라>는 초창기부터 20여 년 동안 틈틈이 적어온 김 시인의 디카 시 묶음이다. 자연한 모습부터 부조리, 삶에 대한 연민과 성찰에 이르기까지 소소한 풍경과 일상의 흔적 속에 놓인 존재의 아픔을 60여 편의 시로 이야기한다. “쇠 한 근과 솜 한 근의 차이//같은 무게를 얹어도//삶이란 시소는 한쪽으로 기울 때가 있지//무거움을 얹어 눈금을 달기 때문, 얹힌 무게를//조금씩 덜어 수평을 이루는 저울도 있어”(‘천칭(天秤)’ 전문) “젊을 땐 몰랐지//얽기보다/ 푸는 일이 더 겨운//연(緣) 줄”(‘얼레’ 전문) 시인은 경쾌한 어조와 특유의 유머로 시 자체를 은유한다. 특히 대여섯 문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시들은 평범한 사람이나 퇴색한 사물들의 이면에 숨은 비밀을 발견해 시 읽기의 즐거움을 선물한다. 시인의 눈과 카메라를 통해 존재와 기억, 시간과 관계성까지 엿볼 수 있다. 시인은 김제 출생으로 198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199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됐다. 2013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부문으로 당선됐다. 그동안 시집 <상처에 대하여> <놀이의 방식> <붉음이 재 몸을 휜다>, 동시집 <왕만두> 등을 출간했다. 제9회 디카시 작품상을 받았다.
박서진 작가의 동화 『글자 먹는 고양이/보랏빛소어린이』 2탄이 ‘용기의 맛’이라는 부제를 달고 출간됐다. 1탄과 마찬가지로 주인공은 ‘둥이’라는 고양이다. 둥이는 실제로 작가가 키웠던 고양이다. 지금은 저 세상으로 떠났지만 동화 속 캐릭터로 되살아나 어린이에게 진정한 말맛을 전해주고 있다. 4년 전 출간된 『글자 먹는 고양이』 1탄은 많은 독자의 선택으로 지금도 승승장구 중이다. 그러니 2탄 출간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독자들은 이 작품에서 어떤 맛을 보았을까? 그 맛에는 어떤 힘이 내재되어 있을까? 주인공 둥이는 글자를 읽을 줄 아는데다 뜻까지 이해하는 사고형 고양이다. 게다가 혀로 글자를 핥아서 단어의 힘이 필요한 대상에게 전달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졌다. 글자의 맛을 혀로 핥아서 전해준다는 참신한 발상도 인상적이자만 주인공 둥이의 사랑스러운 활약이 책을 단숨에 읽게 만든다. 어딘가에 ‘고양이가 글자 좀 읽는 게 뭐 대순가’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사랑스러운 삽화까지 더해져 책을 읽는 기쁨을 배가시킨다. 뚱뚱한 집고양이 둥이의 탄생을 알린 『글자 먹는 고양이』 1탄은 글자의 맛을 느끼는 둥이를 통해 어린이들에게 독서의 힘을 이야기 한다. 2탄은 우연히 집 밖으로 나간 둥이가 길고양이 상상고양이와 친구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은수를 만나는 내용이다. 둥이는 ‘용기’와 ‘함께’라는 언어의 온기를 전하며 흥미진진한 모험을 한다. “글자에는 글자가 가지고 있는 힘이 있다는 사실이에요. 숨을 깊이 들이 쉬듯 글자를 읽으면서 그 뜻을 깊이 새기면 저절로 글자의 힘이 내 가슴에 새겨지는 것 같았지요.” p.21 둥이와 달리 우리는 어떠한가? 사람들은 뒤처지지 않으려 비속어와 줄임말을 쉽게 따라 쓴다. 또 책보다 짧은 영상에 익숙해지다보니 사용하는 어휘가 적어지고 표현력도 현저히 부족해졌다. 어떤 단어는 제대로 된 뜻도 모른 채로 남이 쓰니까 따라 쓰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어떤 단어를 사용해야 할까? 가볍게 소비되는 말에 익숙해질수록 우리의 표현도 점점 얕아진다. 이럴 때일수록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단어 사용이 절실하다. 그런 단어는 말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듣는 사람까지 가치있게 만든다. 의심된다면 지금 ‘사랑’, ‘용기’, ‘행복’, ‘함께’라는 단어를 상대에게 전해보자. 오늘 박서진 작가의 『글자 먹는 고양이2 (용기의 맛)』의 둥이처럼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좋은 단어를 수집해 보는 건 어떨까. 또한 마음에 드는 단어 하나쯤 마음에 품어 보는 것도 좋겠다. 재기발랄한 주인공 둥이가 펼치는 글자의 맛은 2탄에 이어 시리즈로 꾸준히 이어질 예정이라고 한다. 덕분에 우리 아이들은 따뜻한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배우고 또 배우게 될 것이다. 아이들이 정말 부럽다.
돈을 버는 법이나 늙지 않는 법에 대한 담론은 차고 넘치지만 정작 축적된 삶의 시간을 어떻게 누릴 것인가에 대한 답은 부재한 시대다. 이와 다르게‘취향대로 놀기 위해 기꺼이 배운다’는 자세로 삶의 무게추를 생산에서 향유로 옮겨온 이가 있다. 은퇴 후 비로소 찾아온 생의 여백을 색연필로 채워나가는 이운초 작가다. 그가 2022년 말부터 3년 동안 소소한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신간 <60에 다시 쓰는 색연필 그림일기>(신아출판사)를 펴냈다. 책 속에는 치열했던 일터를 떠나 마주한 여유와 낭만이 가득하다. 저자는 탁 트인 완주의 자연 속에서 보낸 호젓한 세월을 뒤로한 채 전주로 이사 오던 날의 풍경을 그려내거나, 아이슬란드 여행에 대한 추억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했다. 저자가 기교 없이 소박한 색연필로 그려낸 그림과 글은 가볍게 읽히면서도 묘한 여운을 전한다. 그는 요즘 안분지족의 여생을 즐겁게 설계 중이라고 고백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크레파스를 쥐고 스케치북과 씨름하던 순수한 감정으로 돌아가, 하루를 정성껏 채색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일기를 완성할 때마다 느끼는 뿌듯함은 은퇴가 상실이 아닌 새로운 창조의 시간으로 뒤바꾼 노년의 건강한 삶의 방식을 보여준다. “부끄럽지만 3년 동안의 이야기를 보여드린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 책은 독자들에게 매일의 일상을 어떻게 대면하고 기록할 것인가에 대한 다정한 질문을 던진다. 치열한 사회적 역할을 내려놓고 새로운 생의 길목에 선 이들에게 잔잔한 사색의 기회를 제공한다.
문장의 멋이 살아있는 유인봉 시인이 시집 <가벼움도 가끔은 슬플 때가 있다>(인간과문학사)를 펴냈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감정을 앞세우지 않고 삶을 진실한 언어로 그려낸다. 3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세계의 아늑한 풍경을 담백한 필치로 담아낸다. 특히 삶의 고비마다 마주한 고독과 기쁨을 한 장면으로 붙들어 세우는 시편들은 시인이 얼마나 공들여 시를 빚어냈는지를 보여준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지나간 세월의 기억 속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시인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삶에 대한 연민의 정서와 선명한 외로움을 마주하게 된다. 적막하게 늙어버린 마을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내거나, 추억이 된 유년 시절의 풍경을 떠올려낸다. "쓸쓸하게 적막하다// 늙어버린 마을/ 한때 꽉 찬 적 있었다// 보릿고개를 넘던 춘궁기에도/ 골목마다 아이들 함성이 넘쳐나고//들녘마다 고단한 허리를 펴주던 농요가/ 질펀하게 울려 나던 시절//(…중략…)//햇살조차 늙어버린 담벼락 아래// 노인과 빈집만이 서로의 기침소리를/ 빌려쓰고 있다”(‘노인과 빈집’ 부분) 시인은 생의 쓸쓸함만을 노래하지는 않는다. 우연의 순간에 문득 생겨나고 움직이고 사라지는 존재들의 근원을 파고들거나, 탄생과 소멸을 거듭하는 생의 내밀한 풍경을 다채롭게 그려내 독자들을 풍요로운 상상의 세계로 인도한다. 김동수 시인은 발문에서 “시인의 시는 말보다 깊은 자리에서 존재를 응시한다”라며 “덜어낼수록 선명해지는 삶의 진실을 드러내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번 시집은 고뇌와 축복이 함께 빚어낸 조용하고도 빛나는 결실”이라고 덧붙였다. 원광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한 시인은 제2회 장수문학상에서 시 ‘벽에 꽃이 피다’가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저서로는 시집 <바람 부는 들판에서> <벼랑 끝에 사는 새는 울지 않는다> <바람은 혼자 울지 않는다> 등이 있다. 장수문인협회, 전북시인협회, 전북문인협회 회원이다.
전북특별자치도문학관이 주최하는 ‘문학광장’이 26일 오후 2시 정읍시립중앙도서관에서 열린다. 이번 문학강연은 ‘시적 전회(轉回), 시 무엇을 쓰나?’를 주제로 진행되며, 계간 <아라쇼츠> 주간인 안성덕 시인이 강연자로 나선다. 정읍 출생인 안 시인은 지난 200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시집 <몸붓>, <달달한 쓴맛>, <깜깜>을 펴냈으며, 디카에세이 <손톱 끝 꽃달이 지기 전에>를 출간했다. 안 시인은 2025년 제15회 김구용 시문학상과 제5회 작가의 눈 작품상, 제8회 리토피아문학상, 제9회 아라작품상 등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이번 강연에서는 현대 시 창작의 흐름과 시적 사유의 변화, 시를 통해 포착하는 삶의 감각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다.
짧은 인연 그리고 긴 이별. 이것이 내가 만난 박경원 시인과의 인연이다. 한 번도 만난 적 없이 차령문학에 원고 청탁을 받고 발표한 시간이 전부였다. 박경원 시인이 199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2001년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기까지 우리의 인연은 닿을 수 없는 거리가 있었다. 슬프다. 유고 시집을 받고 읽으면서 왜 시 편편마다 아픔이 서려 죽음을 예고하는지 가슴이 저렸다. 짧은 시간은 가까웠는데 그리움은 아직 멀었다 세상 모든 어둠들의 고향이 그 곳엔 있다 했습니다 등잔불 밑 깊은 졸음의 누이와 일찍 잠들면 눈썹이 희어질 탈고 안 될 전설이 그 곳엔 있다 했습니다 더 깊이 어두워져야 더 맑게 떠오를 태양과 누군가 고운 새 신처럼 닦아놓은 달력의 첫 이야기들이 그 곳엔 있다 했습니다 문은 잠그지 않아도 됩니다 발소리를 지우며 다녀갈 검은 복면의 꿈들도 새벽이 되면 푸른 길몽으로 바뀔 그곳, 오늘은 바로 그대가 그대의 낡은 이름으로 돌아와 청노새 하나 갈아타고 떠날 그리움의 맨 마지막 날이기 때문입니다 ㅡ (「그믐 전문」) 가고픈 꿈이 있다면 어디를 꿈꾸었을까요? 먼 추억의 집으로 시인은 발걸음을 옮깁니다. 일찍 잠들면 안되는 전설이 있는 곳, 꿈속에서 만나고 싶어 했던 이야기들은 이미 달력의 첫 이야기들이 되었네요. 더 깊이 잠들어야 만날 고향의 아이들과 소문들이 아직은 바람으 로 떠도는 곳이지요. 누군가 꿈속에서든 찾아오라는 귀엣말로 문은 잠그지 않습니다. 다 녀갈 사람들과 이야기들의 꿈. 깨어나면 허전함보다는 푸른 길몽이 환한 햇살을 비출 것만 같은 곳이지요. 그대가 비로소 돌아온 후에야 청노새 타고 떠날 그리움처럼. 그 마지막 날 에 우리는 만날 수 있을까요? 고향의 그리움이야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이니 하나쯤 안고 살아가는 게 현대인의 고통 이라면 고통이겠지요. 시인은 수원에서 소설가의 꿈을 키우다 준기(현 수원시협 회장)형의 조언으로 시인의 길을 걷게 되었지요. 유난히 담배를 좋아했던 시인은 담뱃불 같은 열정을 시 속에 햇살 환한 추억의 집을 풀어 놓고 연기처럼 사라졌지요. 어느 날 받은 부고는 또 하나의 시인을 잃었다는 것 뿐. 시인은 이미 죽음을 예고하고 있었지요. 단편적으로 시 속으로 들어가 보면 나비, 먼지, 흰빛, 햇빛 등 많은 시어들을 쓰고 있었음에도 우리는 알지 못했지요. 얼마나 아픈 생각들 이 시인을 고뇌 속 갈림길에 서게 했을지 짐작이 가지요. (「먼지사랑」)을 보면 추억은 시인 의 자폐적 감성마저 순수한 먼지에 의해 “사랑해”라는 말로 흐려지지요. 하고픈 말을 다 하 지 못하고 그리움과 함께 청노새를 타고 떠나간 시인이어서 아팠지요. 휴식에 든 산은 무겁다 잎새 몇 개로 구름의 행방을 짐작하던 골짜기도 긴 잠의 거름을 삭인다 서로의 관계를 내줘야 더 푸르게 다가온 계절들 곧고 단단한 힘으로 성장의 마지막 부피를 늘이던 것들이 뜨거운 숨을 몰아쉬고 오늘은 문득 마음의 한 끝이 이월, 혹은 베티쯤의 나무들을 헤아리게 됩니다 그 곳을 넘어올 거대한 봄을 생각하면 마음은 벌써 제비꽃이라도 환생하고 싶어집니다 그게 산이겠지요 오늘은 문득 ㅡ (「칩거 전문」) 산, 그리고 정처 없는 구름과 휴식, 환생하고 싶은 마음과 산이라는 말은 산에 들고 싶어하는 시인의 심리적 작용이 시어에 숨어 있다고 생각했지요.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어쩌면 자신을 비우는 일일 것이니 천천히 비워놓고 간 짧은 시인 의 생이 쓰네요. 외로이 홀로 걸었을 길에 동행이 되지 못한 아픔이 있어 이 시집으로 세상 의 끈을 놓고 청노새타고 타박타박 떠나가길 바라네요. 영원한 칩거에 들기를 기원하면서요. 박경원시인의 시어들이 아직 가슴을 찌르네요. 아마 오랫동안 우리 생의 추억을 깨우쳐 줄까요? 박복영 시인은 1997년 월간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2014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조 부문, 2015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기도 했다. 그는 ‘작가의 눈’ 시 작품상과 여순10·19평화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작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저서로는 시집 <아무도 없는 바깥> 등 6권과 시조집 <그늘의 혼잣말을 들었다> 등 2권이 있으며, 현재 전북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20회 바다문학상 대상(해양수산부장관상) 수상자로 강성재(65·여수) 시인이 선정됐다. 본상은 장금식(65·서울) 수필가가 차지했으며, 평생 문학에 헌신한 문인에게 수여하는 ‘찾아주는 바다문학상’은 소재호(81) 시인에게 돌아갔다. 20회를 맞이한 바다문학상은 전북일보사와 국제해운이 공동 주최하는 가운데, 올해부터 최고상이 해양수산부 장관상으로 격상되면서 문학상으로서의 위상이 한층 높아졌다. 바다문학상 심사위원단은 지난 19일 최종 심사를 열고 예심을 통과한 후보작들을 검토한 끝에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수상작을 낙점했다고 밝혔다. 지난 4월 한 달간 진행된 공모에는 총 569명이 1401편의 작품을 출품하여 뜨거운 문학적 긴장감을 보여줬다. 대상을 차지한 강성재 시인은 ‘용골’이라는 작품을 통해 바다라는 거대한 자연을 내밀한 기억과 역사적 상흔으로 연결하는 시적 명징성을 보여줘 심사위원들에게 큰 호평을 이끌어냈다. 심사위원들은 “바다의 이미지를 정교한 언어로 포착하여 인간 존재의 단면을 깊이 있게 담아낸 문학적 창의성이 돋보인다”고 평했다. 본상 수상작인 장금식 수필가의 ‘바다, 어두워짐과 밝아짐 사이’는 삶을 바라보는 담백한 시선과 유연한 문체가 돋보였다는 평가다. 심사위원들은 “바다라는 공간을 단순한 지리적 배경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삶의 섭리와 사유를 이끄는 은유로 확장하며 수필 본연의 미학적 완성도를 보여주었다”고 밝혔다. 찾아주는 바다문학상은 소재호 시인에게 돌아갔다. 소재호 시인은 1984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한 후 전북문인협회 회장과 전북예총 회장, 석정문학관장 등을 역임하며 전북 문단의 위상을 크게 높인 공로를 인정받았다. 올해 바다문학상 심사에는 신달자·양병호·김동수·강연호·장교철·송희(시 부문), 백봉기·김저운·김형중(수필 부문) 등 문단의 중견 문인들이 참여했다. 심사 기준은 문학적 창의성과 사유의 유연성, 바다와의 연관성 등이다. 지난 11일 진행된 예비심사에서 선별된 작품들이 최종 본선에서 경합을 벌였으며, 심사위원들은 장시간 논의 끝에 이견 없이 당선작을 결정했다는 후문이다. 시상식은 오는 7월 1일 오후 4시 한국소리문화의 전당 국제회의장에서 열리며 수상자들에게는 상금과 상패가 수여된다.
전북 출신의 국제조세 전문가로 공직과 학계를 아우르며 활약해 온 김명준 전 서울지방국세청장(현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이 최근 ‘국제조세론’ 전면개정판(삼일인포마인)을 출간했다. 지난 2021년 초판 발행 이후 5년 만이다. 이번 개정판은 급변하는 국제조세 환경을 반영해 인공지능(AI)이 일상화된 디지털 경제 시대의 국제조세체계 개혁(BEPS 2.0)과 글로벌최저한세, 역외탈세 대응 등 최신 이슈를 폭넓게 조명했다. 한편으로는 촘촘해진 조세회피 방지망을 피해 안전한 절세 전략을 짜야 하는 납세자의 고민을, 다른 한편으로는 해외거래 정보의 한계를 넘어 정교한 과세 논리를 개발해야 하는 과세당국의 난관을 균형 있게 다루며 해법을 제시했다는 평이다. 이 책이 지닌 가장 큰 차별성은 저자의 독보적인 이력에서 비롯된다. 김 전 청장은 행시 37회로 공직에 입문한 뒤 주OECD대표부 세무주재관, 서울지방국세청 국제거래조사국장, 국세청 조사국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다국적기업 세무조사를 직접 기획하고 집행하며 “어떻게 과세하는가”를 가장 잘 아는 실무 권위자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실전 지침을 집대성한 셈이다. 김 전 청장은 2020년 퇴임 이후에도 학술 활동을 이어가며 학계와 실무를 넘나들고 있다. 서울시립대 세무전문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최근에는 “국제적 B2B 용역거래의 부가가치세 납세의무”라는 논문으로 한국국제조세협회가 수여하는 2025년 국제조세 학술상을 받기도 했다. 저자는 이번 개정판에서 이전가격 과세 분야를 별도로 분권화했다. 조만간 한층 더 깊이 있는 내용을 담은 별도 전문서적으로 출간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아이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마법 같은 동시집이 세상에 나왔다. 이준관 시인이 펴낸 <별나라 문구점>(고래책빵)은 평범한 일상을 상상의 세계로 탈바꿈시키는 따뜻한 시선을 읽을 수 있다. 동시집에는 표제작인 ‘별나라 문구점’을 비롯해 80여편의 동시가 수록되어 있다. 책 속에서 ‘별나라 문구점’은 단순히 학용품을 판매하는 공간이 아니다. 그곳의 물건들은 문구 본연의 기능을 넘어 상상의 힘을 만나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시인은 아이들에게 단순한 물건이 아닌 꿈과 희망이 담긴 별을 선물하며 아이들의 일상을 반짝이게 한다. 동시집의 가장 큰 특징은 주변의 흔하고 익숙한 대상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깊은 호흡이다. 시인은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고 호기심 가득한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사물을 바라본다. 이 때문에 편편마다 녹아 있는 해맑은 눈빛과 따뜻한 시선이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여기에 상상과 현실의 경계를 부드럽게 이어붙여 독자들이 마치 한 편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듯이 자연스럽게 시에 몰입하도록 유도한다. 시집은 1부 별나라문구점, 2부 월요일이 좋아, 3부 단짝친구들, 4부 엄마 손잡고, 5부 개울물 등으로 구성됐으며 김천정 작가의 삽화로 시각적인 즐거움과 작품의 깊이가 한층 견고해졌다. 저자는 머리말을 통해 “어린이로 돌아가는 일이 가장 어렵다”고 고백하며 “그럼에도 어린이로 돌아가려고 골목길 아이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아파트 아이들과 만나기도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어린이로 돌아가는 일은 언제나 즐겁고 행복하다. 어린이로 돌아가 어린이의 마음을 담아 쓴 시를 모아 동시집으로 펴냈다”고 덧붙였다. 시인은 1949년 정읍에서 태어나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서 동시로 당선됐다. 1974년에는 박목월이 창간한 문예지 ‘심상’에서 시 부문 신인상을 받으며 시와 동시를 동시에 쓰고 있다. 펴낸 책으로는 동시집 <씀바귀꽃> <내가 채송화꽃처럼 조그마했을 때> <쥐눈이콩은 기죽지 않아>, 시집 <가을 떡갈나무 숲> <부엌의 불빛> 등이 있다. 초등학교 국어교과서 2학년 1학기에 동시 ‘오늘’이,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시 ‘딱지’가 실렸다. 방정환문학상, 소천아동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올해로 등단 58년이 된 오세영 시인이 신작 시집 <세상이 어두워지고 있다>(서정시학)를 출간했다.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역임하며 문예를 학문의 대상으로 탐구하며 오랜 시간 독자적인 시 세계를 다져온 시인의 사유가 한층 깊어졌다. 시학의 이론과 개념을 토대로 인문학적 성찰을 시 속에 녹여내는 시인은 삶과 죽음, 자연과 인간 사이를 가로지르는 세계관의 깊은 통찰과 사유를 진솔한 언어로 펼쳐 보인다. 60여 편의 시가 실린 이번 시집은 툭 터놓듯 담백한 문장으로 이어지며 편편이 담긴 사유의 무게는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인연과 인연이 실처럼 얽히고설켜/윤회하는 중생이라고들 하더라만/(…중략…)/그럳하. 언어란/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일말의/전류// 내 노년 들어 청력이 약해지니/ 주위에서 자꾸/귀가 어둡다고 구박들을 하더라만/(…중략…)/ 난들 어찌할 수 있으랴”(‘어둡다는 것’ 부분) 시인은 시집에서 인간의 오만함을 꼬집고 “난들 어찌할 수 있으랴”라고 자조적인 진술을 하지만 덤덤하게 말한다. 그는 자신만의 속도로 살아가면서 매일 세상을 마주하게 되니 산다는 게 좋은 일이라고 감각한다. 일상 속 소박한 만족감이 돋보이는 시편들은 ‘산다는 것’ 자체로 이미 충만하다는 통찰을 담고 있다. 무감각한 사회에서 자신의 마음이 어떠한 모양을 하고 있는지조차 흐릿해지는 때에 시인의 정갈한 언어는 고요한 세계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시집에는 간혹 “인간은 평등한 것일까”('인간론 15')와 같은 관념적이고 철학적인 주제들도 담겨 있다. 인문학적인 시선을 통해 시인은 독자들에게 사회 부조리를 이야기한다. 추상적인 글감임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난해한 은유 대신 직설적이고 일상적인 문장으로 독자들의 가슴을 파고든다. 그렇게 자아를 성찰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겸허하게 그려내 큰 울림을 전한다. 오 시인은 시집 발문에서 “이 생은 과학적 진실이 아닌 바로 사랑과 같은 모순의 진실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라며 “우리는 그것을 시라고 부른다”고 밝혔다. 1942년 전남 영광에서 출생한 시인은 광주와 전주 등지에서 성장했다. 서울대학교 문리과학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다. 시집 <시간의 뗏목> <봄은 전쟁처럼> <등불 앞에서 내 마음 아득하여라> 등을 펴냈으며 목월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받았다.
[안성덕 시인의 ‘풍경’]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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