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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은 외피로, 지역은 구색으로?…전주국제영화제, 전주만의 색 잃었나

제27회 전주국제영화제가 개막을 보름 앞두고 ‘전주다움’이라는 색을 잃고 있다는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됐다. 민성욱‧정준호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대중성 확장을 명분으로 보폭을 넓히고 있지만, 정작 내부에서는 독립영화의 정신과 지역 영화 생태계가 고사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어서다. 이러한 우려는 지난달 31일 열린 상영작 발표 기자회견에서 가시화됐다. 당시 현장에서는 영화제가 오랜 기간 독립 예술영화의 보루로서 지지를 받아왔으나 최근 몇 년간 대중성 강화에 치중하며 기존의 색깔을 잃어가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이에 대해 영화제 조직위는 “올해 선정된 주요 작품이 외형적으로 화제성을 띠고 있으나, 이면에는 영화제가 추구해온 독립적 가치가 자리잡고 있다”고 일축했다. 조직위는 구체적인 예로 개막작 <나의 사적인 예술가>를 들었다. 윌렘 대포와 그레타 리라는 화려한 출연진을 내세웠지만, 그 이면에는 미국 독립영화계의 실험적 정신이 살아있는 작품이며 배우들 역시 낮은 개런티로 참여해 독립영화의 가치에 공감했다는 설명이다. 또한 저예산으로 제작된 실험영화들을 조명하는‘가능한 영화’ 섹션을 신설했다는 점을 강조하며 대중성은 어디까지나 독립영화라는 본질에 알리기 위한 전략일 뿐임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지역 영화인들의 시선은 냉담하다. 영화제가 내세우는 대중성이라는 전략이 지역 창작자들에게는 소외와 배제의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북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 영화인은 “전주국제영화제가 독립이라는 고유의 모토를 잃고 외연 확장에만 매몰된 것이 사실”이라며 “지역 영화섹션은 영화제의 명분 유지를 위한 구색 맞추기용 쇼케이스로 전락했다. 차라리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하는 게 낫다”고 꼬집었다. 실제로 영화인들이 느끼는 박탈감은 구체적인 보상체계 불균형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14일 영화제 조직위에 따르면 지역영화 지원 관련 사업은 크게 △지역 공모 △전주랩 △골목상영 △지역영화 쇼케이스 등으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전북과 전주 영화인을 대상으로 하는 지역공모 섹션 ‘J비전상’ 등의 상금은 100만원 수준에 불과하다. 타 부문의 수상상금이 1000만원 단위인 것과 대조적이다. 전주시 예산을 기반으로 하는 영화제가 공적인 책무를 다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에 대해 영화제 조직위는 지역 공모를 통해 선정된 작품이 한국경쟁부문에 진출할 경우 더 큰 시상의 기회가 주어지며 ‘전주랩’ 등을 통해 제작지원금과 멘토링을 꾸준히 제공하고 있다는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한 상금 격차와 실제 전주에서 활동하는 영화인의 비중이 줄어드는 현실로 인해 ‘로컬 없는 로컬 섹션’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지역 영화인의 소외와 독립정신의 공동화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영화제가 주장하는 대중성이라는 외피가 독립영화와 지역 창작자라는 뿌리를 보호하는 방패가 되지 못한다면, 이름만 전주국제영화제일 뿐 여타 지자체 축제들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도킹텍프로젝트 협동조합 김형준 이사장은 “전주라는 도시에 남을 예술적 자신이 무엇인지 모두가 한 번쯤 고민해 볼 때”라며 “영화제가 대중이라는 유인책보다 지역과 독립이라는 본질에 대해 실질적이고 논리적인 답변을 내놓아야 한다”고 제언했다.

  • 영화·연극
  • 박은
  • 2026.04.14 17:07

수만 가닥 한지로 빚은 인고의 결… 차종순 작가가 건네는 ‘휴식'

1990년대 화려한 색채를 뿜어내는 유화 작업으로 화단의 주목을 받았던 차종순(71) 작가는 서구적 재료 너머 ‘한지’라는 소재에 천착하기 시작했다. 그의 행보는 단순히 작업 재료를 바꾸는 차원에 머물지 않았다. 예원예술대학교에 한지문화연구소를 설립하고 학제 개편을 주도하며 한지 예술의 현대화를 위한 학술적 기틀을 닦는데 수십년의 세월을 바쳤다. 이제 그는 복잡한 기교를 덜어내고 한지 본연의 질감 속에 ‘치유’와 ‘명상’의 가치를 담아내는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서울 청담 셀리닉 갤러리에서 초대 전시 ‘차종순의 휴(休)’를 열고 있는 그를 지난 8일 전주 오스스퀘어에서 만났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예술적 화두인 ‘休(휴)’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자리다. 아원고택과 오스갤러리에서 차 작가의 작품을 접한 셀리닉의원 원장은 그의 작품에서 얻은 정서적 회복을 환자들과 공유하고 싶다고 제안하며 만남이 성사됐다. 그의 작업은 예술적 노동을 넘어선 고행이자 수행에 가깝다. 한지를 아주 가늘게 꼬아 수만 가닥의 줄기를 만든 뒤, 이를 캔버스 위에 한 올씩 겹겹이 쌓아 올린다. 하루 10시간 이상 이어지는 반복적이고 고단한 과정에 대해 작가는 “한 가닥씩 붙여 나가는 몰입의 시간은 스님들의 명상과 닮아 있다”고 설명했다. 인고의 과정 끝에 탄생한 작품에는 창작자의 집중력이 투영된 명상적 에너지가 깃들기 마련이다. 최근 작품들은 이처럼 치열한 공정을 거쳐 정갈한 미니멀리즘으로 귀결된다. 한지 장판지의 투박하면서도 따뜻한 질감은 복잡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잠시 멈춰서 숨을 고를 것을 권유한다. 특히 이번 전시를 위해 한국의 전통 가구인 반다지에 그림을 접목하는 새로운 시도를 더했는데, 의료 공간을 문화의 장으로 전환하기 위한 세심한 기획이다. 전시장 한편에서는 작가의 작업 세계를 담은 영상이 상영되며 각 작품에 배치된 QR코드를 통해 SNS와 연동되어 상세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소통 방식도 도입했다. 그는 “내 작품이 거대한 우주 속에서 점 하나에 불과한 인간의 존재를 자각하게 하고 일상의 시름을 잠시나마 덜어내는 통로가 되기를 소망한다”며 ”수만 번의 손길이 닿은 한지 결 위에서 관객들은 비로소 바쁜 걸음을 멈추고 각자의 본질과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오는 12월 27일까지 이어지며 오픈식은 26일 오후 3시에 열릴 예정이다.

  • 전시·공연
  • 박은
  • 2026.04.12 13:41

[안성덕 시인의 ‘풍경’] 오래된 사진

마음 따라 몸 못 가니 노곤합니다. 늦은 점심상을 물린 일 없는 해동냥에 까무룩 낮잠입니다. 무릉(武陵) 고을 어부 아니어도 그만 길을 잃습니다. 눈 없는 발이 낯선 듯 낯익은 복사골에 찾아듭니다. 왁자한 차부 지나 개울, 폴짝 건너려니 반짝 피라미가 뒤채네요. 가만 담아보려 두 손을 담그는데 아직 물이 차고요. 무질러 보리밭 길을 갑니다. 발목에 흠씬 초록 물이 들 것 같습니다. 종다리 높이 떠 뉘 집 몇째냐, 묻는 듯 종달거리고요. 삼태기에 안긴 마을, 인기척 없는 사촌네 마당 가 뽕나무는 잎 틔우지 않았고, 당숙 어른네 뒤꼍 대밭은 푸릅니다. 반쯤 열린 양철 대문을 들어섭니다. 저녁거리를 챙기는지 어머니 정짓간에 달각거리고, 할머니 방에선 또록또록 양글었다는, 네 살에 홍진으로 죽었다는 성천이 성이 까르르거립니다. 어머니 뱃속에도 없을 나는 가만 토방에 앉습니다. 생울타리 산당화 붉고 대문간에 아버지 들어섭니다. 한 손에 소고삐 또 한 손에 작대기를 든 아버지의 지게가 참 가뿐하네요. 둥그렇게 둘러앉을 저녁상은 못 보았습니다. 아니 웬 잠꼬대, 아내가 끌끌댑니다. 사진 한 장 참 희미하네요. 어미 닭 꽁무니에 졸졸대던 병아리 다 어디 가고 쓰러진 집에 개나리만 노랗습니다.

  • 문화일반
  • 기고
  • 2026.04.11 07:25

의재 김도영, 서울 인사동 한국미술관 초대 개인전 성황

의재(義齋) 김도영 예원예술대 미술문화 복지학과 교수의 초대 개인전이 서울 인사동 한국미술관에서 성황리에 마무리됐다. 이번 전시는 ‘의재 김도영의 지어지서전(止於至書展)’이라는 제목으로 지난 1일부터 7일까지 미술관 2층에서 열렸으며, 서예와 문인화 등 총20여 작품이 출품 돼 서예의 전통적 미감과 작가의 개성적인 필치를 선보였다. 특히 올해 회갑을 맞은 작가를 기념해 마련된 초대 개인전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더했다. 먹의 농담과 여백의 미를 살린 작품들은 고전 서풍의 깊이를 보여주는 동시에 절제된 구성과 힘 있는 필획으로 관람객들의 호응을 얻었다. 전통 서예의 정신성을 바탕으로 작가가 꾸준히 이어온 창작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자리였다는 평가다. 이번 전시와 동일한 기획은 올해 가을 전주에서도 열릴 예정이며, 신작 또한 함께 공개될 계획이다. 김도영 교수는 “창작 세계가 부족하다고 느껴 전시를 주저하기도 했지만 뜻깊은 자리에 초대돼 영광스럽다”며 “전북의 문화자산 가운데 하나인 서예의 가치를 지역에서 선보이게 될 가을 전시를 계기로 호남 서맥을 잇는다는 사명감으로 더욱 정진하겠다”고 밝혔다.

  • 전시·공연
  • 전현아
  • 2026.04.09 17:33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신임 원장에 김승수 전 전주시장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원장에 김승수(57) 전 전주시장을 임명했다고 9일 밝혔다. 임기는 3년이다. 김승수 신임 원장은 전주시장 및 (사)전국책읽는도시협의회 초대 회장을 지내며, 지역 출판 생태계 활성화와 책 문화 확산에 힘써왔다. 특히 전주시장 재임 당시 전주를 ‘책의 도시’로 선포한 바 있으며, 독서 문화 확산과 지역서점 활성화를 위해 전주책사랑포인트 ‘책쿵20’을 도입하고 도서관 기반시설을 구축하는 등 다양한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21년 한국출판인회의가 주최하는 ‘올해의 출판인’ 특별상을 받았다. 최휘영 장관은 “신임 원장이 쌓아온 출판·독서 정책과 행정 경험을 바탕으로 변화하는 환경에 대응해,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역할을 재정립하고 출판 생태계를 세심히 살펴 ‘케이-콘텐츠’의 뿌리인 출판문화산업이 재도약하고 책 문화가 활성화되도록 힘써주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은 출판문화산업의 진흥·발전을 효율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2012년에 설립된 출판 전담 지원기관으로서, 출판 제작과 유통, 수출과 독서 등 출판 생태계 전반에 이르는 다양한 지원 책무를 수행하고 있다.

  • 문학·출판
  • 전현아
  • 2026.04.09 17:32

전주시향 지휘자 공백 4개월...손놓은 전주시 피해는 시민이

전주시민의 혈세로 운영되는 전주시립교향악단(이하 전주시향)의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 자리가 4개월째 공석으로 방치되면서 조직 운영 마비와 내부 갈등 심화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전주시가 후임 선발 절차를 미루는 사이, 피해는 고스란히 시민들의 문화 향유권 침해로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9일 전북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지난 2022년부터 전주시향을 이끌어온 성기선 예술감독(상임지휘자)이 지난해 12월31일 임기 만료로 사임했다. 성 전 감독은 임기 만료 2달 전부터 연임 의사가 없음을 밝혔으나 시는 후임 선발을 위한 모집 공고조차 내지 않았다. 전주시향은 올해 6월까지 객원지휘자 체제로 운영하겠다는 방침이지만, 심각한 행정공백을 야기하고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통상 교향악단 공연은 대관 및 협연자 섭외를 위해 최소 6개월 전 공연계획을 세우지만 전주시향은 하반기 프로그램 일정도 확정하지 못했다. 올해 상반기 공연 횟수(5회)도 지난해 상반기 공연 횟수(16회)에 비해 3분의 1로 줄면서 거의 방치된 상태다. 선임 지연 배경에는 지난해 발생한 인사권 관련 내홍이 원인으로 꼽힌다. 예술감독의 자질을 문제 삼는 익명의 탄원서가 시의회에 접수되면서 인사 잡음이 일었다. 이 과정에서 시의회와 외부의 비판이 쏟아졌고 시에서는 신규 임용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또한 교향악단 내부에서 발생한 갈등이 전주시인권위원회 판단과 지방노동위원회 및 중앙노동위원회의 부당해고 판정으로 이어졌고, 현재 민사소송으로까지 진행 중인 사안이다. 전주시립예술단사업소는 예술감독(지휘자) 선임에 앞서 조직 운영에 대한 종합 점검이 우선이라는 입장이다. 권정혜 팀장은 “지난해 의회 지적사항이나 인권 문제 등 조직 내부의 갈등이 있었던 만큼 바로 예술감독(지휘자)을 뽑기보다는 조직을 안정화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며 “단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와 인권교육 등을 진행한 후에 선임 절차를 밟을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시의 이 같은 설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예술감독(지휘자) 선임과 조직 정비는 별개로 병행돼야 할 사안임에도 시가 4개월째 모집 공고 조차 내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에 가깝다는 비판이다. 권 팀장은 “하반기 공연계획 수립이 촉박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운영의 차질을 인정하면서도 선임 시기나 방법에 대해서는 “내부 검토 중"이라는 답변만 되풀이했다. 전주시향 소속 한 예술단원은 “오케스트라는 강력한 리더십 아래 움직이는 생물과 같다. 지휘자가 없으니 권리 권한을 쥔 행정 인력들이 본질을 외면한 채 조직을 흔들고 있다”며 “전임 예술감독(지휘자)가 올해 상반기 일정까지 확정해 놓은 채 떠났다는 사실은 시가 후임자를 조속히 뽑을 의지가 없었음을 입증하는 명백한 증거”라고 성토했다.

  • 문화일반
  • 박은
  • 2026.04.09 17:20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진숙 수필가-황숙 ‘보랏빛 예찬’

보랏빛을 유난히 애정하는 언니가 있다. 보라색 가방과 원피스는 물론, 머플러와 양산, 양말과 장갑까지 그녀의 일상은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다. 또한 제비꽃, 무스카리, 마편초, 라일락, 아스타, 붓꽃처럼 짙은 남보라 꽃들이나 등나무꽃, 오동꽃처럼 은은한 보라의 결을 지닌 꽃들을 즐겨 찾는다. 이제 보라색을 마주할 때마다 그 언니가 떠오르고, 자기 삶을 묵묵히 개척해 온 그녀의 묵직한 시간까지 함께 떠오르곤 한다. 얼마 전, 황숙 수필가의 《보랏빛 예찬》을 마주한 순간, 그 언니를 떠올리게 하는 보랏빛의 세계 속으로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수필가 황숙은 우리가 살아내는 일상을 ‘빨강과 파랑의 혼합으로 태어난 보라색’에 비유한다. ‘좋아서 하는 일과 책임으로 하는 일이 동아줄처럼 꼬여 이루어진 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버거운 순간들을 참고 견디다 보면 그 끝에 쌉쏘롬하면서도 달큼한 보랏빛이 스며든다’고 말한다. 이 비유는 삶이 단순히 고통이나 기쁨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감정과 경험이 어우러져 깊어지는 과정임을 설득력 있게 드러낸다. 저자의 이러한 시선은 독자에게도 자기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종종 좋아하는 일만 하며 살 수 없다는 이유로 현재의 삶을 버겁게만 여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속에는 기꺼이 선택한 기쁨과 어쩔 수 없이 감당해 온 책임이 함께 얽혀 있다. 어쩌면 삶이란 어느 한쪽의 색으로만 이루어질 수 없듯이 서로 다른 감정과 생각들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엮어질 때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저자는 여러 대학에서 한글과 한국문화를 가르치며, 자국민은 물론 외국인에게도 한글의 우수성과 한국문화의 깊이를 전하고자 심혈을 기울였다. 이러한 경험은 글 전반에서 단단한 사명감으로 드러난다. 특히 여러 실학자 가운데에서도 홍대용에 대한 저자의 관심은 각별하다. 홍대용의 중국 여행기인 《을병연행록》에 심취하고, 프라하의 천문시계를 마주할 때나, 슬로베니아를 여행하는 길에서도 조선의 실학자 홍대용의 흔적을 찾고 그의 업적을 기리며 이어가려는 모습에서 그 애정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만약 홍 선생의 혼천의와 나경적의 시계를 조합하고, 정학유의 ‘농가월령가’를 훈민정음으로 적어 첨성대 모양으로 세운다면…”이라는 저자의 상상에는, 세계적 유산인 한글에 대한 애정과 과학적 사유로 새로운 학문의 지평을 열었던 실학자의 정신을 따르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보랏빛 예찬》은 단순히 하나의 색을 이야기하는 글이 아니라, 삶의 결을 바라보게 하는 책이다. 화려하지 않아도 깊어질 수 있고, 빠르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보랏빛에 빗대어 조용히 일깨운다. 어쩌면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서서히 익어가는 보랏빛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은 읽고 난 뒤에도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삶을 한 번 더 돌아보게 만드는 따뜻한 지침서이다. 이진숙 수필가는 전직 국어교사이며 201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부문에 당선했다. 최명희문학관에서 14년간 “혼불” 완독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우리 이제 다시 피어날 시간》 오디오북과 《나는 오늘도 괜찮다》 수필집을 발간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6.04.09 09:47

낡아가는 것들에 건네는 다정한 안부, 박형진 시집 ‘시의 부엌’

봄은 시를 읽게 하는 계절일까. 이맘때쯤이면 유독 시집들이 서점 매대에 오른다. 봄 하면 떠오르는 것을 단순한 몇 가지로 간추리기 어려워서일까. 봄에 펴낸 시집은 유난히 각양각색이다. 수많은 시집들 중에 부안 변산에서 평생 흙을 일궈온 박형진 시인이 새 시집 <시의 부엌>(애지)을 펴냈다. 1984년부터 유기농사를 지으며 “땅에 대고 절하다 보니 어찌어찌 시를 쓰게 됐다”는 박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농경적 사유를 바탕으로 정직한 노동의 감각을 62편의 시로 엮어냈다. 사람과 자연과 뭇 생명이 교감하며 생동하는 순박한 시편들이 마치 오랜만에 고향에 온 듯한 잔잔한 울림을 선사한다. 시인에게 농사와 시는 분리되지 않는다. 등단 이후 30여 년간 10남매의 막내로서 그리고 네 자녀의 아버지로서 땅을 지켜왔다. 진실한 마음이 깃든 선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땀의 가치를 글로 표현한 그의 시에는 자연의 정기와 사람의 온기가 교차한다. “집이 낡아간다/ 지은 지 이십여 년 만에/ 차양이 떨어지고/ 마루가 삐걱대고/ 흙담 한 켠이 헐어진다// 나도 낡아간다/ 집보다 더 오래된 집은/ 지붕머리가 하얗게 세어지고/ 눈앞이 흐려지고/ 꿈에서도 이빨이 빠진다//(…중략…)// 지금은 잠이나 자고 싶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지”(‘나는 낡은 것이 좋다’ 부분) 이처럼 삶의 구석으로 밀려나 있는 존재들을 불러내는 시인은 사라져 간, 잊고 지냈던 것들에게 다정한 안부를 묻는다. 그리고 고향의 질박한 삶과 일상의 시간들을 진솔하게 복원해낸다. 자식을 키워낸 부모의 헌신과 평생을 농사로 살아온 노동의 숭고함이 결국은 ‘생명을 돌보는 일’이라는 하나의 본질로 수렴되는 과정을 담백한 필치로 그려낸다. 김용택 시인은 추천글을 통해 “박형진은 내가 좋아한 사람이다”라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오랜 세월 사용한 마을 말을 버리지 않고 그 말로 시를 쓴다”며 “모항 바닷가 작은 오두막 ‘시의 집 한 채’는, 그 존재가 막강한 아름다움이다”라고 밝혔다. 1958년 부안군 변산에서 10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시인은 1984년 결혼 후 변산에 정착하여 세 딸과 아들 하나를 기르는 자식농사와 함께 유기농사를 평생의 업으로 삼아왔다. 땅을 일구는 정직한 노동 속에서 시적 영감을 발견한 그는 1992년 ‘창비’ 봄호에 작품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저서로는 시집 <바구니 속 감자 싹은 시들어가고>, <콩밭에서> <밥값도 못하면서 무슨 짓이랑> <내 왼쪽 가슴 속의 밭> 등이 있다.

  • 문학·출판
  • 박은
  • 2026.04.08 17:50

봄과 함께 즐기는 고하 최승범 선생의 문학, 전북문학 통권 302호 발간

고하 최승범 선생이 50여 년 동안 발행해 온 계간지 <전북문학>의 전통을 잇고 있는 고하최승범문학기념사업회가 통권 302호 봄호를 발간했다. 이번 호는 김태우 작가의 글 ‘고하 시조시 읽기’로 문을 연다. 김 작가는 최승범 시인의 작품 ‘꿈길’을 중심으로 기행 시의 특성과 시적 상상력을 조명한다. 그는 “최승범 시인이 몽골 울란바타르에서 열린 제7차 아시아 시인 회의에 참가하기로 결심한 뒤 꾼 꿈을 소재로 집필한 작품”이라며 “몽골 여행은 단순한 체험의 기록을 넘어 시적 대상화 과정을 거친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분석했다. “어디서 일어오는/ 바람인가 삽상한/ 어린시절 고향도 같고/ 마을 앞 어귀를 나섰을 뿐인데/ 이 몸을/ 돌고 스쳐가는/ 달기만 한 바람이여/ 두리번거리자 바람결에/ 들려오는 노랫소리/ -여기 살고 싶어라/ 연푸름한 빛의 초원/ (중략) 내 발길 이윽고/ 아, 눈앞 펼쳐진/ 초원의 바다인가/ 장히 넓은 사막인가/ 눈 비벼/ 자세히 살피려/ 눈을 뜨니/ 꿈길이었어”라는 구절은 낯선 공간에 대한 동경과 시적 환상을 동시에 드러낸다. 이어지는 ‘재미난 시 읽기’에서는 양병호 전북대 교수가 세 편의 작품을 해설한다. 양 교수는 조명제 시인의 ‘첫눈’을 통해 첫사랑의 기억을 환기하는 은유를 짚고, 노유섭 시인의 ‘그저 아득하리라’에서는 삶의 여정을 사색하는 서정성을 읽어낸다. 박지학 작가의 ‘백색 주석’에 대해서는 불길한 겨울의 분위기 속에서 언어의 모호성을 탐구하는 작품으로 해석했다. 엽편소설 코너에는 서철원 작가의 ‘새벽 강’이 실렸으며, 四於堂 최남규의 한시 감상에서는 두보의 ‘모옥위추풍소파가(茅屋爲秋風所破歌)’를 다뤘다. 이 밖에도 회원들의 신작 시 80여 편과 수필 20여 편이 함께 수록됐다. 윤수하 작가의 문학론 <한하운 시의 ‘길’과 내면의 상처 치유>는 한하운 시 세계의 정신적 지향과 치유적 의미를 세밀하게 조명한다. 고하최승범문학기념사업회는 ‘전북문학’ 발간을 비롯해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공동으로 고하최승범문학상 백일장 개최, 1주기 추모제 진행, 300호 특집호 간행, 고하문학관 운영 자문 등을 이어왔다. 앞으로도 고하문학선집 발간, 유고시집 출간, 시비 건립, 「전북문학」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 등 다양한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 문학·출판
  • 전현아
  • 2026.04.08 15:54

서예가 산민 이용의 38년 서업(書業) 집대성…20번째 개인전 도록 발간

서예가 산민(山民) 이용의 예술적 생애와 철학을 집대성한 전시도록 <산민 이용 서예전>이 세상에 나왔다. 이번 도록은 오는 24일부터 29일까지 한국소리문화의전당에서 열리는 20번째 개인전을 기념하여 제작됐다. 도록에는 1988년부터 2025년까지 38년간 이어진 작가의 서예 인생을 연대기별로 기록했다. 3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는 총 265점의 작품이 수록되어 산민서예의 변천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2022년부터 2025년까지 최근 3년간의 작업 결과물을 비롯해 노자의 철학을 시각화한 ‘노자 섹션’도 담겨 있다. 노자 섹션에는 금문(金文)과 사자성어를 활용한 해석이 돋보이며 작가가 오랜 시간 천착해온 고전 해석의 깊이를 확인할 수 있다. 도록 후반부에는 1988년부터 2022년까지의 주요 구작(舊作) 65점이 수록됐다. 초기 필치부터 전성기의 유려한 서체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예술적 실험과 성장을 입체적으로 담아내어 서예 연구자 및 애호가들에게 사료적 가치를 제공한다. 시각적인 완성도도 눈에 띈다. 흑색 바탕에 금박으로 ‘산민(山民)‘을 새긴 표지는 묵직한 서업(書業)의 무게감을 보여준다. 내부 도판은 작품의 질감과 낙관의 선명도를 최대한 살려 인쇄됐다. 각 작품에는 한문 원문과 함께 국문 해석을 함께 넣어 독자들의 이해도를 높였다. 산민(山民) 이용 선생은 고대문자인 금문(金文)을 현대적인 조형미로 재해석하여 한국서예의 지평을 넓힌 서예가다. 400m에 달하는 법화경 전문 사경을 완수하는 등 예술적 집념을 작품을 통해 나타내고 있다. 또한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의 기틀을 마련했고, 총감독을 역임하는 등 한국서예 세계화와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 문학·출판
  • 박은
  • 2026.04.08 15:54

전북 연극계, 장기 공연 실종⋯산업화 기반 마련 시급

전북특별자치도 연극계가 꾸준한 창작 활동에도 불구하고 지역을 대표할 만한 장기 공연 레퍼토리를 확보하지 못하며 산업적 경쟁력 강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지적이다. 행정의 지원 구조 한계와 더불어 연극계 내부의 기획 전략 부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7일 전북연극협회와 도내 연극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현재 지역에서 3년 이상 장기 공연되는 작품은 사실상 전무한 것으로 파악됐다. 전북자치도에는 창작극회, 무대지기, 작은소리와동작 등 오랜 역사를 지닌 23개 정극단이 활동 중이며 ‘천사는 바이러스’, ‘할머니의 레시피’ 등 자체 레퍼토리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지역 대표 브랜드 공연으로 안착시킨 사례는 드문 실정이다. 상당수 극단이 매년 신작 제작에 집중하면서 작품이 축적되지 못하고 단발성 공연으로 소진되는 구조가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장에서는 일차적인 원인으로 관객 규모의 한계를 꼽는다. 도내 공연 관람층이 일정 수준에 머물러 있어 동일 작품을 반복 상연할 경우 수요가 빠르게 소진된다는 것이다. 한 연극 관계자는 “지역 관객만을 대상으로 할 경우 2~3년 내에 관람 수요가 바닥을 드러낸다”며 “현 구조에서는 같은 작품을 장기간 유지하며 수익을 창출하기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지원 제도 역시 레퍼토리 형성을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대부분의 공모사업이 신작 초연 중심으로 설계되면서 기존 작품을 재정비하고 완성도를 높여 재공연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제한된다는 지적이다. 반복 공연을 통한 작품성 제고보다 매년 새로운 제작 실적을 요구하는 구조가 형성되면서 창작 역량이 축적되기 어려운 환경이 이어지고 있다는 의견이다. 다만 연극계 내부에서도 전략 부재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다. 상업적 유통을 염두에 둔 제작 시도가 많지 않았고, 장기적으로 반복 공연이 가능한 대표작을 만들겠다는 목표 설정이 부족했다는 평가다. 상업극 제작이 현실적으로 어려워서라기보다 이를 시도하려는 관심과 투자 의지가 충분히 형성되지 못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작품성과 예술적 가치에 집중해 온 창작 환경 속에서 관객 확대 전략이나 유통 구조에 대한 고민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다는 지적이다. 이에 도내 연극인들은 브랜드 공연의 형성을 위해 외부 관객 유입과 함께 행정 지원 방식의 구조 개선, 창작 주체의 전략 변화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지역 연극계에서 활동 중인 기획자 A씨는 “현재는 제작비 대부분이 초연에 집중돼 재공연이나 타 지역 진출로 이어지기 어려운 구조”라며 “단년도 제작 지원에서 벗어나 작품 축적과 유통, 타 지역 진출까지 고려하는 중장기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지역 관객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관광 콘텐츠와 연계한 공연 유통 구조를 구축하고, 외부 관람객을 유입할 수 있는 경쟁력 있는 콘텐츠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제언했다.

  • 문화일반
  • 전현아
  • 2026.04.07 17:47

전주문화재단, 2026 생활밀착형 문화예술교육 ‘가가호호’ 본격 추진

전주문화재단이 2026 생활밀착형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 ‘가가호호(家加好好)’의 추진 계획을 7일 밝혔다. 재단은 지난해 프로그램 ‘유형 다각화’를 통해 예술교육 기반을 확장한 데 이어, 올해는 ‘가족 유형의 다각화’를 핵심 키워드로 설정하고 보다 폭넓은 가족 구성원을 예술 교육 현장으로 끌어들일 계획이다. 특히 혈연 중심의 기존 가족 개념에서 벗어나 비친족·비혈연 관계까지 포괄하는 ‘새로운 가족’ 발굴에 주력한다. 함께 거주하거나 정서적 유대를 공유하는 관계라면 예술교육의 주체로 인정한다는 취지다. 이에 따라 위탁가정 아동, 비혼 1인 가구, 동거 가구 등을 대상으로 하는 ‘가족 발굴형’ 프로그램을 신설했다. 동거 가구의 경우 ‘예비부부’ 등 유연한 명칭을 활용해 사회적 인식을 고려한 접근도 병행한다. 이번 사업은 단순 체험을 넘어 연구 기반의 예술교육 모델을 도입한 점에서도 주목된다. 재단은 지난 5년간 협력 관계를 이어온 전북대 아동학과와 함께 ‘돌봄연구형’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교수진 자문과 전공생 참여를 통해 프로그램 기획부터 운영, 경과 분석까지 체계적인 관리가 이뤄질 예정이다. 교육 공간 역시 시민의 일상으로 확장된다. ‘공동체라디오 전주 FM’과 ‘여성생활문화공간 비비’, 남부시장 내 복합문화공간 ‘모이장’ 등 지역 거점 공간을 활용해 작곡, 창작, 관계 형성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재단은 공간별 특성과 지역 이슈, 보유 장비를 적극 반영해 생활 밀착형 예술교육을 구현할 계획이다.

  • 문화일반
  • 전현아
  • 2026.04.07 14:45

색을 매개로 다른 차원의 예술적 사유를 공유하다

국대호‧ 강민기 작가가 ‘색(色)’을 매개로 서로 다른 차원의 예술적 사유를 공유하는 2인전 ‘차원의 채집: 採集’을 공간 허이재에서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회화의 질감과 조각의 구조가 만나는 접점을 탐구하며 2차원과 3차원의 경계를 넘나드는 두 작가의 독창적인 작업세계를 조명하는 데 집중한다. 국대호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시·공간의 응축을 담은 작품을 선보인다. 기존의 평면적 스트라이프 작업을 넘어 물감의 밀도와 속도감으로 변주해 다채로운 질감을 캔버스에 구현했다. 작가에게 색은 시각적 요소만이 아니다. 여행지에서의 인상이나 유년의 풍경처럼 언어로 형언하기 어려운 기억의 파편들을 특정한 색채로 치환하여 캔버스 위에 층층이 채집해 나간다. 조각가 김민기는 회화를 조각하다 라는 개념의 스컬페인팅을 통해 평면의 붓 터치를 3차원 입체 공간으로 조성했다. 작가는 개별적인 붓 터치 유닛을 입체적으로 구축하며 현대인의 불안하고 모호한 감정 상태를 시각화했다. 예술가로서 창작의 희열과 그 이면에 존재하는 불안이라는 대립적 감정을 색채 덩어리로 표현해 관람객들에게 감정의 궤적을 마주하게 한다. 국대호·강민기 작가는 회화와 조각이라는 서로 다른 매체를 다루지만 ‘색’이라는 공통의 언어를 통해 인간의 내면과 기억을 탐구한다. 평면에서 깊이를 찾아내고, 입체에서 회화성을 입히는 두 작가의 만남은 관람객에게 차원을 넘나드는 감각의 순환을 제안한다. 전시는 5월 2일까지.

  • 전시·공연
  • 박은
  • 2026.04.07 14:28

3000년의 침묵 깨운 붓끝…최남규, 40년 고문학 연구 예술로 피어나다

학자로서의 집념과 예술가의 호흡이 만나 3000년의 침묵을 깨우는 생명력으로 부활했다. 40년간 고문자(古文字)의 뿌리를 추적해온 최남규(65) 전북대학교 명예교수의 작품전이 오는 11일까지 전주 오브제갤러리에서 열린다. 본래 글자는 사물의 그림자이자 세계를 향한 가장 정직한 묘사였다. 인류가 바위나 뼈 위에 최초의 선을 새겼을 때, 그것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간절한 기원이자 지독한 관찰의 산물이었다. 이번 전시는 문자가 추상적인 기호로 굳어지기 전의 생명력을 복원해낸 현장으로 갑골문(甲骨文)과 금문(金文) 해독에 매진해온 최 교수의 학문적 궤적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6일 전시장에서 만난 최 교수는 학자로서의 냉철한 분석을 내려놓고 고대 문자가 지닌 원초적인 아름다움에 대해 역설했다. “문자의 자원을 알면 문자가 지닌 특성을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설명처럼, 산을 보고 산(山)이라 쓰고 거북을 보고 구(龜)라 썼을 때의 직관적인 조형성이 그의 붓끝과 칼끝을 통해 예술로 승화됐다. 최 교수는 고문자의 본질을 ‘그림의 연장’으로 정의한다. 사물의 특징을 포착한 그림에서 시작된 문자가 시간이 흐르며 간략해져 지금의 형태가 되었다는 논리다. 그는 “그림이 문자가 되기 전의 단계가 바로 고문자”라며 “본격적인 생략이 이뤄지기 전의 고문자에는 문자성뿐만 아니라 강렬한 회화성이 공존한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에서 관람객들이 마주하는 것은 단순한 글자가 아니라, 고대인이 세상을 바라보던 시선이 담긴 하나의 화폭인 셈이다. 전시된 50여 점의 작품들은 전서와 예서, 행서, 초서 등 다양한 서체를 넘나든다. 단정한 예서(隸書)에서는 학자의 단단한 골격이 느껴지고 유려한 행초서(行草書)에서는 정형화된 틀을 벗어던진 자유로운 사유가 읽힌다. 자칫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고문자이지만, 글자가 담고 있는 본연의 의미를 관람객들이 시각적으로 공감할 수 있도록 깊이 있게 풀어냈다. 최 교수는 이번 전시를 ‘40년 연구한 고문자에 대한 정성어린 기록’이라고 표현했다. 학문적 성취라는 결과물을 넘어 자신이 평생 연구한 문자에 대한 정중한 예우라는 의미이다. 예술적 허용이라는 이름 아래 왜곡될 수 있는 문자의 원형을 그는 학자의 고집으로 지켜냈다. 그러면서도 단단한 골격 위에 입혀진 서각의 깊이와 서예의 필치는 파격적이다. 또한 나무의 결을 살려 문자를 새기고 감각을 덧입히는 과정은 고문학이 현재까지도 호흡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향후 인문학 아카데미를 통해 고전과 서예를 잇는 공부를 이어가겠다는 포부도 전했다. 그는 “한자는 오랜 훈련이 필요해 거리감이 생기기 쉽지만, 그 근원을 알면 우리 문화의 깊이를 만나는 소중한 통로가 된다”며 “고문자가 현대의 예술로 소통할 수 있도록 남은 생도 붓을 놓지 않겠다”고 말했다.

  • 전시·공연
  • 박은
  • 2026.04.06 17:41

화선지 넘어 시대의 여백으로…안뜰 김영희가 증명한 ‘살아있는 전통’

사십 년 넘게 붓을 잡아온 서예가의 필력이 화선지라는 익숙한 경계를 넘어 캔버스라는 여백과 만났다. 안뜰 김영희(77) 작가가 평생 천착해온 서예의 정신을 캔버스 위로 옮겨 심은 이유는 명확하다. 지난 3일 전주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내 자식조차 거실에 걸어두지 않는 그림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살아있는 전통이겠느냐”는 뼈아픈 자문을 던졌다. 오는 7일부터 12일까지 교동미술관 본관에서 열리는 개인전 ‘매화향기 봄바람 타고’는 박제된 서예를 현대인의 일상으로 복원해내려는 작가의 치열한 법고창신(法古創新)의 기록이다. 작가가 10년 전부터 시도한 변화는 지극히 논리적인 통찰에서 시작됐다. 아파트라는 현대적 거주공간에서 전통 액자와 화선지가 공간과 불협화음을 내며 외면받는 현실을 직시한 결과다. 그는 서구적 재료인 캔버스를 선택하되 그 위에 흐르는 정신만큼은 정통 서예의 운필(運筆)을 고수했다. 붓 끝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느라 안구 실핏줄이 세 번이나 터졌을 만큼 몰입했고, 재료의 변화를 넘어 전통의 생명력을 동시대로 확장하기 위해 분투했다. 재료라는 옷은 갈아입었을지언정 그 속에 자신의 필력을 온전히 표현해내기 위해서였다. 52점의 작품이 걸리는 이번 전시에는 손녀에게 선물했던 그림을 다시 빌려와 내놓은 각별한 사연도 담겨 있다. 작품 ‘가을 언덕 위에 머묾’은 동일한 구도로 다시 그리려 해도 당시의 필치가 재현되지 않아 결국 원본을 다시 청해왔을 만큼, 매 순간의 작업에 진심을 쏟는다. 초등학교 교사 시절 잡았던 붓이 평생의 동반자가 된 이후 국전 초대작가와 심사위원을 지내며 서예의 정점에 올랐으나, 그는 여전히 2주에 한 번씩 진주에 계신 스승을 찾아가 자신의 서법을 점검받는다.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배움과 고민을 멈추지 않는 엄격한 자기검열은 그의 작품세계를 지탱하는 가장 단단한 바탕이다. 작가는 인생의 굴곡을 매화에 담아낸다. 혹독한 추위를 견뎌야 가장 맑은 향기를 내뿜는 매화처럼, 삶의 고난을 딛고 일어선 이들에게 따뜻한 위안을 건네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다. 사라져가는 서예를 걱정하며 퇴직 후에도 아이들에게 붓 잡는 법을 가르쳤던 그의 사명감은 이제 캔버스라는 새로운 형식을 통해 대중과 깊게 호흡한다. 작가는 “학문과 예술은 산을 넘으면 또 다른 산이 나오지만, 그 고비를 넘으려는 희망이 나를 계속 젊게 만든다”며 환하게 웃어보였다. 전통의 문법을 유지하면서도 매체의 확장을 통해 현대적 공간과의 접점을 찾으려는 작가의 시도는 이번 전시를 통해 구체화됐다. 박제된 과거가 아닌, 동시대의 일상 속에서 호흡하는 예술로서의 전통이 나아갈 방향을 담담히 보여준다.

  • 전시·공연
  • 박은
  • 2026.04.05 16:35

예술·대중·지역 가치 담은 청사진⋯한국소리문화의전당 4대 과제 발표

새로운 리더십 전환을 맞은 한국소리문화의전당(이하 전당)이 도민의 문화예술 향유 기회 확대를 위한 운영 방향을 제시했다. 지난달 취임한 이승필 전당 신임 대표는 2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예술 활성화를 위한 ‘2026년 운영계획’을 발표했다. 전당은 ‘예술·대중·지역’ 3가지 가치를 중심으로 기획사업 브랜드 ‘아트숲’을 운영하며 공연 61건, 전시 4건, 교육 및 기타 4건, 상설공연 1건 등 총 70건 규모의 프로그램을 추진한다. 이 대표는 전당을 전북의 핵심 문화예술 인프라로 도약시키기 위해 △서비스·안전 수준 제고 △자체 공연 콘텐츠 경쟁력 강화 △인적자원 역량 강화 △시설 미래 경쟁력 확보 등 4대 핵심과제를 제시했다. 특히 개관 25년을 맞은 전당의 시설 노후화에 대응하기 위한 중장기 개선 필요성을 강조하며, 공간 인프라와 콘텐츠, 인력 역량, 안전·서비스 등 전반의 경쟁력을 높여 도민이 편안하게 찾는 문화공간으로의 역할을 강화할 방침이다. 공연 사업은 △거장전 △스테이지원더 △기획자의 눈 △소리연리지 △가족누리 등 5개 분야로 구성됐다. 거장전에서는 6월 국립발레단 ‘백조의 호수’를 선보이며, 기획자의 눈에서는 윤별발레컴퍼니 창작발레 ‘갓’, M발레단 ‘돈키호테’, 올라비올라 사운드 ‘B to B with 바리톤 길병민’ 등이 예정됐다. 대중성과 화제성을 고려한 스테이지원더 분야에서는 ‘임재범 40주년 콘서트’,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LIVE TOUR’ 등을 마련했다. 지역 예술인과 협업하는 소리연리지 분야에서는 ‘전북특별자치도 All Festa 시즌5’와 ‘K-POP 아카데미 쇼케이스’를 운영하며 지역 문화생태계 활성화를 도모한다. 가족누리에서는 백희나 작가 원작 뮤지컬 ‘알사탕’과 ‘숲속 100층짜리 집’을 선보여 어린이 관객층 확대를 추진한다. 전시는 배리어프리 기획전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를 비롯해 청년작가 야외조각전Ⅳ ‘7ing:칠링’, 여름방학 특별전 ‘앤서니 브라운전: 마스터 오브 스토리텔링’ 등을 통해 접근성과 대중성을 강화할 계획이다. 예술교육은 유아부터 초등학생 고학년까지 맞춤형 프로그램 ‘소리터? 놀이터!’, ‘예술놀이터 SORI’ 등을 운영한다. 전당은 문화가 있는 날 프로그램 ‘월드콘(월간 드림 콘서트)’과 전주를 제외한 도내 13개 시·군을 순회하는 ‘찾아가는 예술극장’을 통해 지역 간 문화 격차 해소에도 나선다. 이 대표는 “전당이 세계적 공연을 유치하는 동시에 지역 예술이 외부로 확장되는 플랫폼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며 “시설 개선과 콘텐츠 경쟁력 강화를 병행해 도민 문화향유권 증진에 기여하겠다”고 말했다.

  • 문화일반
  • 전현아
  • 2026.04.02 17:53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정경 작가-최아현‘밍키’

『밍키』라는 책을 받아 든 순간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보자기를 어깨에 두른 채 엄마의 로션 병을 들고 요술공주 ‘밍키’ 주제가를 부르며 온 집 안을 뛰어다니는 여자아이의 모습. 작가는 이야기라는 술법으로 독자를 홀려 그가 만든 세계로 초대한다. 언니의 유산으로 받게 된 돈가방에 ‘밍키’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인물의 이야기. 소유했다고 믿었으나 ‘내 것’일 수 없는 것들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삶에 대해 질문하게 하는 표제작 「밍키」도 인상적이었지만, 유독 여운이 남았던 작품이 있다. 「대원의 소원」은 작가의 능청과 이야기꾼으로서의 탁월함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딸의 결혼식에 손잡고 들어가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해온 대원이라는 남자가 등장한다. 콘서트에 처음 간 대원이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아 온몸에 힘이 쭉 빠져” 있는 상태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는 공연장에 앉아 있기까지 꽤 험난한 과정을 통과해야 했다. 동료 택시 기사의 딸에게 도움받아 어렵사리 팬카페에 가입하고, 공연 표도 구할 수 있게 된 대원. 내친김에 그에게 ‘예은님’의 팬으로서 주의할 점과 교양 있게 공연 관람하는 법도 전수받는다. 행복감에 젖어 콘서트 날만 기다리던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닥친다. 하필 딸의 결혼식과 공연 날짜가 겹친 것. 그는 딸의 결혼식과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에 가는 걸 모두 성공하기 위해 물샐틈없는 작전을 전개한다. 주례사 시간을 줄이기 위해 자신이 직접 주례를 맡고, 여분의 옷을 미리 챙겨놓고, 동료에게 기차 시간에 늦지 않도록 역까지 자기를 데려다줄 것을 미리 부탁해 두었다. 전주에서 용산역까지, 기차에서 내려 공연장까지 가는 방법을 시간대별로 모두 계획해 두었다. 오전 10시 결혼식과 저녁 8시 공연 사이 그는 무대 위 연주자처럼 분주하다. 대원의 투박함과 소란스러움이 귀여워 보이는 것은 아내의 부재를 견디는 대원의 시간을 작가가 그려놓았기 때문이다. 상실을 경험한 이들이 감당해야 하는 일상의 훼손.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이 의식처럼 통과해야 하는 환멸과 치욕. 재기 발랄한 젊은 작가의 위트로 반짝이는 소설집 같지만, 묵직하고 먹먹한 목소리가 스며있어 이야기는 힘을 갖는다. 작가는 일상의 균열과 관계의 변화에서 시작된 감정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포착하는 능력을 지녔다. 『밍키』에 수록된 8편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평범하다. 어디엔가 살고 있을 것 같은 사람들, 우리의 이웃이거나 친구이거나 건너 건너 아는 사람일지 모를 인물들이 그의 소설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얼핏 보면 나와는 무관한 일처럼 보이지만 실핏줄처럼 얇고 가는 관계망 속에서 당신과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작가가 직조해 낸 이야기 속에서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자고 일어났더니 뿔이 생긴 「뿔 있으세요?」는 또 어떤가. 「뿔 있으세요?」에서 화자는 오빠의 결혼 상대를 소개받는 자리에서 제 몸에 이상한 일이 생겼음을 알게 된다. 엉덩이, 정확하게 꼬리뼈 부근에 뿔이 난 것이다. 이 뿔 때문에 화자와 화자의 주변에 한바탕 소동 아닌 소동이 벌어진다. “엉덩이에 힘을 바짝 주었다. 종일 허리를 펴고 앉았다고 등에 힘이 생긴 것 같았다.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당장 없앨 수도 없다면 일단 이 뿔과 사는 방법을 먼저 터득하면 될 일이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는 것이다.”_ 「뿔」 부분 최아현 작가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그에게 계속 ‘뿔’이 있었으면 좋겠다. 남들에게 드러내서 보여줄 수도 없고 불편과 고통도 따르니 작가는 괴롭겠지만, 어쩐지 그 불편과 고통으로 인해 그가 다른 이들과는 다른 눈과 귀를 갖게 되었을 것 같다. “체급 차이가” 분명한 이 세계와 대적해 “엉덩이에 힘을 바짝 주”고 허리를 펴고 앉아 “그렇게 스스로 경험(글)을 쌓아나가면” 그의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는 즐거움이 될 테니까. 요술봉을 가진 손으로, 이야기를 계속, 계속, 써주기를. 김정경 시인은 2013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시 「검은 줄」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지은 책으로 시집 『골목의 날씨』가 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6.04.01 19:07

성찰적 시각으로 풀어낸 유종인 수필집 ‘쑥베 반바지’

유종인 수필가가 희수를 맞아 자신의 삶을 기록한 수필집 <쑥배 반바지>(수필과비평사)를 출간했다. 이번 수필집은 저자가 유년 시절의 기억부터 청소년기의 언어, 가족과의 인연과 제자·동료들과의 관계를 성찰적인 시각으로 복원해 낸 결과물이다.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수준을 넘어 현재 자신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담백한 어조로 풀어낸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글 밭에서의 희로애락을 맛보는 게 무엇보다 잘한 일이라고 여기며 잠을 설친 날도 있었다”며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글과 함께 삶의 미래를 꿈꾸는 글 속 여행의 기쁨이 큰 보람이 있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러면서 “글쓰기를 통해 작가도 되었고 멈추지 않고 하나씩 다듬으며 글과 함께 지내온 삶의 길을 잘 선택한 듯하다”고 덧붙였다. 책은 개인적 서사를 넘어 국내외 여행지에서 얻은 사연 등 세상을 향한 확장된 시선을 보여준다. 특히 음악을 전공한 저자의 이력이 문장에 자연스러운 리듬을 부여하고 있으며, 화려한 기교 대신 수식어를 덜어낸 문체로 삶의 무게를 진솔하게 전달한다. 1950년 정읍에서 출생한 저자는 진주교대와 전주사대 음악학사, 전북대 음악석사 학위를 받았다. 전주효정중학교 교장을 역임했고 2015년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했다. 아람수필, 교원문학, 우리문학, 전북수필, 전북문인협회 회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2회 우리문학 수필 부문 본상을 수상했으며 저서로는 수필집 <그날의 합창>이 있다.

  • 문학·출판
  • 박은
  • 2026.04.01 17:43
문화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