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참사 영화 '공동정범' 잊지 말라고, 기억하라고 망각에 저항하라는 표현
9년이 지났다. 새해를 맞이하여 이런 저런 계획을 세우는 와중에 아침부터 절망적인 소식을 접하고 그날은 하루종일 술을 마셨다. 21세기에도 진압을 이유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게 도무지 이해가 안갔다.
엊그제 용산참사를 다룬 영화 ‘공동정범’을 봤다. 거대한 적을 상정한 다른 다큐와 달리 용산 철거민과 연대 했던 사람들의 균열이 주가 되는 내용이다. 개발과 철거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미시사라고 해두는게 낫겠다.
어쨌거나 경찰 무전기에서 말하듯이 그들은 격렬한 진군들이었고 검찰에 기소될 땐 공동정범이 됐다. 외부에서 봤을 땐 국가폭력이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으나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그들 나름대로 잘잘못을 가르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상처였던 2009년 1월이었다.
근 십 년이 지나고 있지만 여전히 비슷한 상처가 만연하다. 강정이 그랬고, 세월호가 그랬다. 어쩌면 한국 현대사는 이런 상처의 관통일지도 모른다. 대추리도 있었고 한진중공업도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지척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한탄이 우리를 움직이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 모든 게 가장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살기 위하여! 아름다움과 숭고함이 아닌 그저 살기 위하여 사람들은 투쟁을 했고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렀다.
어쩌면 그 ‘살기 위하여’ 자체가 숭고함이 아닐까 싶다. 내 뜻대로 태어나지 않았으나 내 뜻대로 살아갈야 할 이유와 권리를 그들은 비명으로 대신했는지도 모른다. 작년에 제주 4·3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 과정에서 고통이 엄습했다. 그 시대와 세대를 겪어보지 않았던 21세기의 시민도 고통이 스멀스멀 올라왔을 정도인데 그 참혹한 현장을 겪어야 했던 생존자들은 어땠을까. 영화를 완성하고 반성했던 게 다시는 내가 겪어보지 못했던 현장과 사건을 함부로 다루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이었다. 살기 위해 살아가는 것들을 밟고 죽였던 현대사를 겪어야 했다. 밀고를 하고 복수를 하고 밟아야만 살아갈 수 있었던 이 비극의 현장을 그린다는 게 창작자의 입장에선 고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원경이 아닌 현미경으로 그들의 상처를 관찰하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 공동정범의 창작자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쉽지 않았을 이야기와 그림을 덤덤하게 그려내가는 이 영화는 쉽게 상처를 봉합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어쩌면 계속해서 잊지 말라고, 기억하라고, 망각에 저항하라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생존과 연명을 위해 우리는 노동을 하고 끼니를 때우고 잠을 잔다.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실행했을 뿐인데 잔인한 폭력앞에 속수무책이다.
뻔히 피해자들의 상처가 보임에도 우리는 구원과 용서를 당위라는 단어로 덮어버리려고 한다. 어떻게 백주대낮에 총검에 찔린 광주시민들에게 이제 그만 용서를 하라고 할까. 모든 매체가 실시간으로 보여준 가라앉는 배의 피해자들에게 이제 그만 할 때도 되지 않았냐고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정범’의 후반에서 이충연씨의 눈물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절망에 무뎌진 우리에게 연대의 대오와 망각에 저항하는 것. 그리고 진짜 공동정범은 영화 속 그들이 아니라는 것. 오랜만에 관람을 권하는 영화 한편을 봤다.
이 글을 쓰는 와중에 곳곳에서 화재 소식이 들려 용산 참사를 다룬 공동정범에 관한 글을 쓰는게 망설여졌다.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며 안전에 관한 법률과 제도가 정착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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