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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88) 전설의 춤꾼, 명무 조갑녀

명무 조갑녀 /사진=남원시 제공
명무 조갑녀 /사진=남원시 제공

‘명무(名舞)’는 춤에 기예가 뛰어난 유명한 사람을 말한다. 명무라 불리는 전설의 춤꾼으로는 조선말 임금의 총애를 받으며 관직까지 하사받은 곡성 출신 이장선(1866-1939)이 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제자로 ‘춤은 조갑녀’라 극찬을 받은 남원 출신 조갑녀(1923~2015)가 있다.

조갑녀는 1923년 1월 남원에서 조기환의 큰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조기환은 일제식 명칭으로 남원권번이라 칭했던 남원국악원의 악기선생이고, 고모 조기화는 이름난 남원권번 춤선생으로 자연스레 가풍의 영향을 받은 조갑녀는 7살에 남원권번에 입적하였다. 조기환은 어려서부터 춤에 남다른 딸의 재능을 귀하게 여기며 유능한 선생에게 교육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러다 당시 격조 있는 궁중의 춤 선생으로 이름난 이장선을 남원으로 청해 동기들과 함께 춤을 배우게 하였는데, 이장선은 ‘이 아이 몸에 춤이 들어있다’고 하며 별도로 조갑녀에게 춤을 사사하였다.

조갑녀는 9살의 나이에 1회 춘향제에 참석했고 2회부터는 선배들과 함께 춤을 추었다. 이후 4회부터 한동안 춘향제는 조갑녀의 승무로 막을 열었다. 13세에는 승사교 준공행사에서 승무를 추며 맨 처음 다리를 밟고는 다리 가운데에서 북을 치며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결혼 전까지 영숙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다.

제80회 춘향제 헌화와 행사초청 살풀이춤, 좌측사인은 딸 정명희 씨와 함께 헌화
제80회 춘향제 헌화와 행사초청 살풀이춤, 좌측사진은 딸 정명희 씨와 함께 헌화

또한, 1938년 남원의 국악 발전에 뜻있는 사람들에 의해 ‘남원권번 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장학생을 선발했는데, 조갑녀는 첫해인 16세부터 19세까지 3년 내내 장학생으로 뽑히고 재능을 인정받으며 ‘춤, 하면 역시 조갑녀!’란 극찬을 받았다. 지금으로 치면 유명 연예인으로 화려한 활동을 한 그녀였지만,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예기로서의 삶에 회의를 느꼈다. 이후, 19세에 호남의 큰 부자이자 남원권번 주식회사의 주주였던 한성물산 사장 정종식과 혼인하면서 모든 활동을 접고 열두 명의 자식을 둔 평범한 어머니의 삶을 살았다.

결혼 후에는 어려서부터 춤추었던 부분이 가족에게 누가 될까 염려하여 조용히 지내다, 광한루원 내 완월정이 완공된 1971년 춘향제 때 지인과 남편의 적극적인 권유로 축하공연 무대에서 승무를 추었고, 1976년 춘향제 때는 살풀이춤을 추었다. 이후 그녀의 춤은 전설의 춤으로만 화자되었는데, 광한루원 앞에서 교통사고를 당하고는 주변의 염려와 권유로 춤추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남기고 86세인 2007년에 살풀이춤을 추며 재기하여 2010년과 2011년 춘향제에 살풀이춤으로 감동적인 무대를 선보였다.

‘무대에 서 있기만 해도 그 자체가 춤’이라는 조갑녀의 살풀이춤은 수건을 들지 않고 맨손으로 추는 춤인 까닭에 ‘민살풀이춤’이라고 불린다. 원래 살풀이춤은 예기들이 추던 춤으로 맨손으로 추었다가 이후 천을 들면서 오히려 천을 들지 않는 살풀이춤을 보기 힘들어서인지 그리 이름이 붙었다. 그녀가 천을 들고 추지 않는 이유는 거추장스러워서라 한다. 그저 춤은 마음이고 몸으로 마음이 표현되는 것이니 군더더기처럼 느껴지고 성가셨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녀의 춤은 마음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감정을 그대로 실어 즉흥적으로 추는 춤이다. 무대에 가만 올라 악사를 응시하고는 울리는 음악을 지그시 누른다. 그리고는 치맛자락 번갈아 다스리고 한 손으로 휘어잡고 버선발을 살짝 보이고 천천히 손을 올리며 무겁게 움직인다. 모든 몸짓을 설레며 기다리게 한 오 분 정도의 춤사위는 시간을 누르고 다스리며 깊은 여운을 이어간다. 그녀의 삶이 모두 담긴 듯한 춤은 아슴하고 먹먹하고 웅숭깊다.

날아갈 듯 가벼이 움직이는 여흥의 춤이 아닌 ‘법도 있는 무거운 춤’이다. 조갑녀 명무가 마지막으로 춤을 춘 무대는 소리꾼 장사익의 공연이었다. 장사익은 “말수 적은 선생님은 큰 산 같고 바위 같은 분”이라 말하고 “무거운 그 산과 바위에 꽃이 피어나고 지듯이 그렇게 담담하고 황홀하고 놀라운 감동을 건네는 큰 어른으로 자신은 말 같은 노래로 선생은 몸짓 같은 춤으로 예술적 교감을 나누었다”고 했다.

무겁게 춘 조갑녀의 춤은 화려한 기교나 큰 움직임이 없이도 ‘속이 꽉찬 춤’으로 전설이 되었다. 평상시의 생활에서도 공연에서도 그녀는 흰색의 한복을 평생 입었다. 단아하고 깨끗함을 사랑한 그녀가 입은 한복에서도 삶의 태도가 가늠된다. “춤은 곧 마음으로 그 속에 희로애락이 있는 것이여. 그러니 춤은 무거워야 깊은 맛이 나고 가치가 있는 게지”라며 조갑녀는 “춤은 참 맹랑한 것”이라 했다.

“맹랑하단 것은 함부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춤은 내 몸으로 추는 것이지만, 절대 내 마음대로 안되는 것이여” 딸이자 제자인 정명희에게는 “자신을 믿고 죽기 살기로 연습하고 인역춤(본인춤)으로 만들려면 뼛속까지 박히게 춰라. 마음으로 춰라. 내 춤은 곧 내 마음이다. 늘 마음을 크게 먹고 좋은 마음을 가져야 춤이 좋다”고 당부했다 한다. 

가락을 절제하고 응집된 에너지로 힘 있게 보여준 춤은 그대로 많은 이들에게 위안이 되었다. 2015년 4월 1일 세상을 떠난 명무 조갑녀의 위패는 남원국악의 성지에 모셔졌으며, 생전 머물렀던 한옥인 ‘금남관’은 ‘조갑녀살풀이명무관’으로 이름붙여진 전시관으로 개조되어 명무의 흔적을 새겨 놓았다. 

조갑녀 살풀이 명무관
조갑녀 살풀이 명무관

‘조갑녀살풀이명무관’ 마당을 들어서면 어머니의 마음을 품은 장독이 눈에 들어온다. 많은 예술인들과 베풀어야 할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베풀었던 그 마음이 깃든 곳은 “너무 애쓰지 마라”며 다독이듯이 찾는 이들의 지친 마음을 위로한다. 특히나 어려운 시절은 보내고 있는 우리 모두를 위한 명무의 살풀이를 청하며 질기고 힘든 맥을 풀어내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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