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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100)백제인의 취향과 솜씨

이토록 아름다운 유리병
왕궁리에 남겨진 백제의 시간
어디든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

왕궁리 오층석탑 유리사리병 /사진제공 = 국립익산박물관
왕궁리 오층석탑 유리사리병 /사진제공 = 국립익산박물관

7.7cm 높이의 작은 <유리제 사리병> . 긴 목에 아름답고 유려한 곡선이 흐르는 몸체의 녹색 유리가 뿜어내는 빛이 영롱하다. <유리제 사리병> 에는 여덟 잎의 연꽃 봉오리 모양의 금제 마개가 꽂혀 있고 <유리제 사리병> 이 안전하게 놓이도록 네모난 받침을 붙여 놓은 <금제사리병받침> 은 연꽃이 피어난 모양의 <금제연화대좌> 와 함께 어우러져 더욱 기품있고 조화롭다.

천상(天上)의 아름다움이라 칭해지는 녹색 <유리제 사리병> 은 백제 무왕 시기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이다. <유리제 사리병> 은 찬연한 금빛 순금으로 만들어진 <금제사리함> 에 모셔져 있다. 부처님을 상징하는 가장 성스러운 대상으로 숭상되는 사리를 유리병에 직접 담은 이유로는 당시 유리가 금보다 더 귀했기 때문이다. 사리를 봉안하는 사리기들은 당대 최고급의 재료와 최고의 기법을 이용해서 만들었으며, 불탑에 사리를 봉안할 때 사용하는 용기, 공물, 부장품과 함께 귀중한 사리를 담아 보관하고 장엄(莊嚴)하던 사리장치를 ‘사리장엄구’로 칭한다.

 

왕궁리 오층석탑의 옛사진과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사진제공 = 국립익산박물관
왕궁리 오층석탑의 옛사진과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사진제공 = 국립익산박물관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는 1965년 왕궁리유적에 있는 왕궁리 오층석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으며, 이듬해 문화재청으로부터 국보 제123호로 지정되었다. 일제강점기의 사진 자료를 통해 오래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당시에도 석탑 기단부가 토단에 매몰된 상태로 기울어진 모습이 마치 피사의 사탑 같은 느낌이다. 조속한 복원이 필요하다는 공론이 일어 1965년 10월부터 해체복원 공사가 진행되었고, 석탑의 해체 작업 중 1층 옥개석 상면과 기단부 심초석에서 사리장엄구가 확인되었다.

옥개석 상면 동쪽 사리공에는 <유리제 사리병> 을 안치한 <금제사리내함> 이 < 금동사리외함> 내에 있었고, 서쪽 사리공에는 금강경판이 봉안된 <금동경판내함> 이 자리했다. 그리고 사리공 바닥에는 실로 꿴 오색영롱한 유리구슬이 발견되었다. 기단 내부의 심초석에는 ‘品’자 형의 방형 사리공 3개가 확인되었는데, 동편의 사리공에서는 광배와 대좌를 갖춘 <금동여래입상> 과 불교 의식 때 흔들어 소리를 내는 <청동요령> 이 발견되었고, 북편의 사리공에는 향류로 보이는 흑색 유편과 철편이 수습되었으나 서편의 사리공은 비어 있어 아쉽게도 도난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를 비롯한 백제의 사리장엄구로는 <익산 미륵사지 사리장엄구> 그리고 <부여 왕흥사지 사리장엄구> 가 전해진다. 577년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해 사찰을 세웠다는 명문이 있는 왕흥사지 사리병은 가장 이른 시기에 조성된 백제의 사리장엄구로 민무늬이다. 반면,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639년에 왕실의 안녕을 위해 백제 왕후가 사리를 봉안했다는 사리봉영기와 함께 나온 금제사리병은 뚜껑부터 몸체 전체에 연꽃무늬와 넝쿨무늬 등이 화려하게 새겨져 있다.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의 제작 시기는 백제, 통일신라, 고려에 이르기까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금제사리내함> 표면은 미륵사지 금제사리병과 비슷한 연꽃무늬 등이 같은 백제 장인의 솜씨로 착각할 정도로 흡사하다. 특히, 불경을 새긴 <금강경판> 은 다른 곳에서 발견된 적이 없는 희귀한 유물로, 금강경의 내용을 19판에 새겨 한 첩으로 만들었다. 각각의 판에는 17행 17자가 새겨져 있는데 사경체의 문자로 금강경을 눌러 찍은 것이 뚜렷하며, 은판에 금도금을 한 것으로 경판의 글씨체를 분석한 결과 백제 무왕대로 제작 시기를 추정하는 단서가 되었다.

 

고지도와 왕궁리 유적 출토 유물과 공방지 /사진제공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고지도와 왕궁리 유적 출토 유물과 공방지 /사진제공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왕궁리 오층 석탑이 자리한 ‘왕궁리유적(사적 제408호)’은 전북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일대로 예로부터 왕검이, 왕금성, 왕궁평이라 불렸다. 왕궁의 흔적과 관련된 지명이 연상되지만, 여러 문헌에서 이미 폐사된 터에 탑만 남아있는 왕궁리사지로 기록이 되어 있고 고지도에서도 석탑으로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이는 왕궁리유적이 궁성으로 사용되다가 사찰로 바뀐 것을 보여주는 흔적으로, 왕궁리유적은 백제 무왕 시기의 궁성 유구와 백제 말에서 통일신라 시대의 사찰 유구로 구분이 되고 있다.

궁성 내부에는 건물지 등과 정원유적이 확인되었으며, 특히, 서북편에서는 대규모의 공방 시설과 함께 화장실 유구가 확인되었다. 공방 시설은 왕궁에서 필요한 물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한 곳으로, 공방지에서는 금, 유리, 동제품을 만들기 위해 제련과 용해 작업을 하면서 불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붉은색 소토와 노지, 폐기장과 석벽시설과 관련 유물 등이 확인되었다. 이는 아름다운 공예품을 비롯한 <유리제 사리병> 도 백제인의 뛰어난 솜씨로 직접 제작하였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기품있는 <왕궁리 오층석탑의 사리장엄구> 를 일컬어 미술사학자 최순우(1916-1984)는 “호사스럽고 다양해야만 정성이 들었다거나 또 아름답다는 속된 솜씨가 아니라 목욕제계하고 기도하면서 만든 청순한 아름다움이 이것을 지배하고 있다”고 하였다. 백제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솜씨를 극찬한 것이다.

국립익산박물관 외부와 내부 전시모습
국립익산박물관 외부와 내부 전시모습

석탑에 갇혀있다 나타난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는 타임캡슐처럼 많은 이야기를 건네주며 우리를 백제의 시간으로 안내해 준다. 국립중앙박물관을 거쳐 국립전주박물관에 보관했던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는 2020년 국립익산박물관이 생기면서 55년 만에 고향 익산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행방이 궁금한 <유리제 사리병> 에 담겨 있던 16립의 사리는 보수를 마친 1966년 왕궁리 오층석탑 안에 봉안되었고 그 중 5립은 부석사 삼층석탑에 분안(分安)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마땅히 어디든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는 금강경의 구절이 울림을 전해온다. 천년이 넘는 시간이 잠겨있는 왕궁리유적에서는 켜켜이 쌓인 백제의 흔적을 오롯이 찾아내는 연구와 발굴이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 수고로운 모든 손길에 감사를 보내며 국립익산박물관을 찾아 백제인들의 세련된 취향과 솜씨를 만나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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