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봉리산성에서 만난 ‘도량형’ 이야기”
고향인 장수군에서 30여년을 공직자로서 일해왔고, 이제 퇴직이 얼마 남지 않았다.
퇴직을 앞둔 지금 돌이켜보면, 장수군은 행정의 대상이기 이전에 오랜 역사와 자산을 품은 공간이라는 생각이 더욱 커진다. 현장에서 만나는 돌 하나, 흙 한 줌, 작은 유물 하나가 지역의 가치와 정체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역사유산은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 무엇이 특별한지 살피고 이를 어떻게 보존하며 지역의 이야기로 연결할 것인지가 더욱 중요하다.
장수의 역사적 특성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땅과 물의 가치다. 장수는 금남호남정맥에 위치한 고산 분지이며 금강의 발원지 뜬봉샘을 품고 있다. 이는 자연지리적 의미를 넘어 물길을 따라 사람과 문물이 이동하고 지역 간 연결이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둘째, 자원과 기술의 흔적이다. 장수에는 다수의 고대 제철 유적이 남아 있다. 쇠를 생산하고 활용한 흔적은 이 지역이 생산과 교류의 기반을 갖춘 곳이었음을 시사한다. 제철 유적은 당시 생활상과 경제 활동, 기술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셋째, 여러 시대의 흔적이 중첩돼 있다는 점이다. 장수에서는 선사시대부터 가야, 백제, 신라, 이후 시대에 이르는 흔적이 확인된다. 다양한 시대층이 한 지역 안에서 함께 나타난다는 점은 장수 역사의 연속성과 입체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장수의 역사성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 중 하나가 최근 발굴된 삼봉리산성이다.
일반적으로 산성은 군사적 방어시설로 인식되지만 실제로는 사람과 물자가 모이고 관리되는 복합 거점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이곳에서 확인된 도량형의 흔적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도량형은 길이, 무게, 부피를 재는 기준과 도구를 의미한다. 이는 사회의 공정성과 질서를 유지하는 제도적 장치다. 거래를 공정하게 하고 조세를 합리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동일한 기준이 필요하다. 삼봉리산성에서 도량형의 흔적이 보인다는 것은 이곳이 사람과 물자의 이동, 관리와 통제가 이뤄지던 장소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제 필요한 것은 발굴 이후의 체계적 대응이다.
첫째, 연구 성과를 주민 눈높이에 맞춰 쉽게 설명해야 한다. 전문가의 분석은 중요하지만 주민이 이해할 수 있어야 유산의 가치가 지역사회 안에서 살아난다.
둘째, 보존 계획을 정교하게 수립해야 한다. 유적은 공개와 활용이 필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훼손을 최소화할 수 있는 관리 체계가 병행돼야 한다.
셋째, 전시와 해설은 중심 주제를 분명히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측정과 질서’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삼는다면 삼봉리산성, 교역, 제철, 금강 수계의 연결성을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넷째, 교육과 주민 참여를 확대해야 한다. 학교 답사, 시민 해설, 마을 기록 활동 등은 국가유산을 ‘우리의 역사’로 체감하게 하는 중요한 통로다.
마지막으로 개발과 보존의 갈등은 싸움이 아니라 조정이라고 생각한다.
현장에서 늘 부딪히는 문제가 그거였다. “지킬 거냐, 만들 거냐”라는 질문은 너무 단순하다. 지켜야 할 구역과 활용할 구역을 나누고 경관과 길을 잘 설계하면 둘 다 살릴 수 있다. 큰 걸 무리하게 끌어오기보다 장수만의 깊이를 살리는 게 더 오래 간다.
이제 내가 하던 업무도 내년엔 후임자가 할 것이다.
바라는 게 하나 있다. 장수의 역사가 ‘어렵고 먼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나 이해하고 자랑할 수 있는 ‘우리 이야기’가 되었으면 한다.
삼봉리산성의 도량형은 그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재는 일은 기술이지만 결국 서로를 믿기 위해 만든 약속이다. 장수의 역사를 잘 다듬어 나간다는 건, 그 약속을 오늘의 말로 다시 세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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