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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메아리] 가슴으로 떠나는 여행 - 김관식

김관식(자인산부인과원장)

 

여름 초입에 소음이 복잡한 거리를 지나며 어떤 해 겨울의 기억을 떠올렸다. 크리스마스 즈음이 되어야 한해 모든 시험일정이 마무리 되었던 학창시절, 그때 일을 생각하면 세상은 참 포근하다고 느껴지며 가슴이 따뜻해진다. 그 추억의 온기를 쬐면 각박한 요즈음 세상 속에서도 따스한 불씨가 여전히 우리의 주위에 살아있을 거라고 느낀다.

 

학생증이나 책을 담보로 막걸리 사발을 기울일 수 있었던 25년 전, 마지막 시험을 치른 12월 말쯤 일행 몇 명은 계획 없는 계획에 합의하였다. 전주역으로 가서 일행이 가진 모든 현금을 모아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 편도표를 끊어 무작정 가기로 한 것이다. 가진 현금을 모두 계산해보니 순천까지 갈 수 있었다. 객실좌석이 좌우로 배치된 완행열차에서 덜컹거리는 진동을 느끼며 차창으로 비치는 산과 들을 바라보는 일이란 요즈음 경험하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도착한 순천역을 내려섰을 때 느꼈던 생소함은 여행의 결말에 의해 각인돼 지금도 뇌리에 생생하다. 그것은 마치 사과를 생각하면 입안에 침이 고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여행자는 낯선 풍경을 찾아 여행을 다닐 거라고, 소중한 여행에는 그 느낌이 남는 것이라고 그 후로는 여행의 목적을 그렇게 나름대로 정리하곤 했다.

 

순천에 도달했을 때 다음 목적지는 벌교로 연장되었다. 무일푼으로 벌교행 버스에 올라 한참을 달리다, 안내양에게 사정을 해보았으나, 도중에 하차를 당하게 되어 빈 논 가득한 벌판에 떨궈졌다. 멀리 남향의 언덕배기가 눈에 띄었고 몇몇 인가가 옹기종기 모여 굴뚝에서 연기를 뱉어내고 있었다. 별도리 없이 춥고 배고픈 몸을 추스려 마을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논 사이 길을 더듬어 마을 가까이 도착했을 때 기와집과 초가집이 나란히 눈에 들어왔으나 일행은 넓은 마당에 지붕이단정히 정리된 초가집을 선택했다. 그 댁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두 내외분이 계셨는데 낯선 방문객을 너무도 살갑게 맞아 손주 대하듯 반겨주셨다. 매우 시장하고 지친터라 내어주신 국과 밥을 남김없이 먹고나니 어르신의 말씀은 이랬다. 연말에 낯선 젊은이 여럿이 우리집을 찾은 것은 예삿일이 아니며 우리 마을에는 낯선 손님이 찾아오면 후하게 대접하고 따뜻한 물로 머리를 감게하는 풍속이 있으니 사양하지말고 더운 물에 머리를 감고 가라는 말씀이셨다. 그리고는 큰 무쇠솥에 장작불로 물을 데워주시는 것이다. 그렇게 낯선 고장에서 밥을 먹은 후 머리를 감고 시내버스비까지 받아 들고 환송을 받았던 적이 있다. 결국 원하던 바다를 보지 못했으나 소중한 추억을 안고 돌아오게 되었다.

 

과연 그 마을에는 그런 풍속이 있었던일까. 시험을 끝낸 일행의 초라한 몰골이 측은하여 맘편히 먹고 씻고가라는 배려의 말씀은 아니었을까. 그 마을의 따스한 풍속은 배려 자체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한참 후 언젠가 근처를 더듬어보았으나 어딘지 찾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주변이 개발되어 마을은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따스한 기억을 들춰볼 때마다 항상 감사가 앞선다. 그래서 먼 초가집 풍경은 꼭 받아야할 사람에게 보내야 하지만, 보낼 길이 없어 간직하고 있는 오랜된 연하엽서 속 그림처럼 가슴 속에 한가롭게 남아 있다.

 

/김관식(자인산부인과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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