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으로 여행하는 사람들은 어떤 목적이 있는 것일까. 불편, 두려움, 막연함, 야릇함까지 더해져 고단할 텐데, 이를 감수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영화에게 물었다. 영화는 ‘얻기 아니면 버리기.’ 일 것이라고 답한다. 일탈도 모험도 충동도 동인(動因)이 있지 않겠느냐며. 미국영화 <레인맨> 은 소식도 모르고 지내던 형제가 만나 여행하면서 잃었던 우애를 되찾는다. 홍콩영화 <해피 투게더> 는 슬픔을 버리는 곳으로 지구의 땅 끝이라 불리는 아르헨티나 최남단 ‘우수아이아’의 한 등대를 지목한다. 그곳에 가는 ‘창’이란 사나이는 친구 ‘아휘’의 슬픔까지 녹음해서 들고 가서 사방에 뿌린다. 해피> 레인맨>
여기 또 한 사람이 플랫폼에 서 있다. <리스본 행 야간열차> 를 타기 위해서다. 이름은 ‘그레고리우스’(제레미 아이언스 분). 고전문헌학 교사인 그는 아침 출근길에 다리 난간에서 강으로 뛰어내리려는 한 여인을 구하는데, 그녀는 빨강 코트와 책 한 권 그리고 리스본행 열차표 한 장을 남기고 사라진다. 스위스 베른에서 포르투갈 리스본 까지, 예기치 않았던 열차여행이 시작 된다. 리스본>
여인은 어디로 간 것일까. 책장을 넘기며 생각에 잠겨있던 그레고리우스가 깜짝 놀라며 자세를 바꾼다. 수많은 경구로 가득한 책을 보고 순식간에 매료된 것이다. “저자의 삶이 너무 특별해서 내 인생이 의미가 없이 느껴져요….” 그는 리스본에 도착하자마자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이 책의 주인공 ‘아마데우스 프라두’(잭 휴스턴 분)를 찾기 위해 안간힘을 쏟는다. 거리에서 가벼운 충돌로 안경이 깨지는 사고를 당하고, ‘마리아나’(마르티나 게덱 분)라는 안과 의사를 만나게 된다. 검안경을 끼고 두리번거리다 뻘쭘해진 그가 의사에게 묻는다. “내가 지루해 보이죠?” 답이 없다. “인생은 정해진 대로 사는 것인 줄 알았어요.”라고 말하는 그에게 새로운 안경이 끼워진다.
“베러(Better)!”
“내 삶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자문하던 그다. 자신의 앞길을 밝혀줄 새로운 눈을 얻게 되었으니 이야말로 개안(開眼) 아닌가. 삶의 모멘텀이 여기 있다.
책은 1974년 포르투갈의 ‘카네이션 혁명’을 다뤘다. 독재자 ‘살라자르’에게 항거하기 위해 봉기한 혁명 전사들의 총에 시민들이 카네이션을 달아줬다는 데서 유래한 명칭. 이때 숨어서 항거한 레지스탕스 주력 멤버 중에 ‘아마데우스’, ‘조지’, ‘주앙’, 그리고 여 전사 ‘스테파니’(멜라니 로랑 분)가 있다.
스테파니는 레지스탕스의 비밀을 총괄하는 미모의 여성이다. 정부군이 포위망을 좁혀오자 남자 대원 몇몇이 그녀를 없애자며 달려든다. 잡히면 불고, 불게 되면 모두가 희생된다는 것이 이유다. 사면초가에 빠진 그녀에게 달려간 것은 아마데우스였다. 아마데우스가 말한다. “오직 너와 나만 존재하는 새로운 세계로 갈 거야. 나는 책을 쓰고, 너와 나만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창조할 거야. 가능한 한 멀리 강을 따라올라 갈 거야. 과거로, 미래로, 그리고 마지막의 맨 처음으로.” 스테파니가 묻는다. “나는 뭘 하지?” “나랑 공유하면 돼. 같은 공기, 같은 느낌, 같은 맛.” 그러나 그녀는 준비가 덜 됐다며 가슴 벅찬 사랑을 포기하겠다고 말한다. “내가 줄 수 있는 것보다 당신은 많은 것을 원해.” 그들은 그렇게 헤어진다.
명문가에 태어나 의사로, 레지스탕스로, 저술가로 번듯하게 살아온 아마데우스는 동맥류로 요절한다.
그레고리우스는 요양원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는 주앙(마리아나의 삼촌임)을 만나 책 속의 궁금증을 푼다. 스테파니는 아주 기품 있게 늙어가고 있었다. 왜 아마데우스 곁을 지키지 않았는지…? 그레고리우스는 책을 건네주고 마리아나와 마주 선다. “부인과는 왜 헤어졌어요?”라는 질문에 “거만한 아내지만…. 그녀는 아마 내가 지루해서 떠난 것 같아요.”라고 답한다. 기차 출발 5분 전, 마리아나가 말한다. “여기 머물지 않으시겠어요? 저는 당신이 지루하지 않아요.” 남자의 눈에서 광채가 난다.
책은 아마데우스의 여동생이 오빠의 일기를 원용하여 100권을 펴냈다. 그중 한 권이 베른 의 한 서점에서 팔렸다. 자살을 시도한 여인은 살라자르의 손녀였다. 책을 통해 할아버지의 만행을 알게 되자 가책으로 일을 벌인 것이었다.
책을 펴낸 여동생이 그레고리우스에게 물었다. “왜 인생에 과거를 끌어들이죠?” 영화는 이 부분에 대한 답을 내레이션으로 처리한다. ‘마지막의 맨 처음’이라고, 또 ‘그곳으로 돌아와야만 다시 찾는 것도 있다.’라고.
리스본은 내 안에 있음을, 원하는 세상을 보기 위해서는 수시로 안경을 바꿔 끼워야 함을 영화가 조곤조곤 말해 준다. 과외 받듯, 책장 넘기듯 보는 영화다. ‘삶의 결정적인 순간은 항상 드라마틱하거나 크게 다가오지 않는다.’라는 경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한국영상영화치료학회 전북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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