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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5일의 마중'] 기다림은 인류가 희망을 품고 사는 이유

우리 인간들은 살면서 부딪히는 중요한 문제들에 말이 아니라 삶으로 전 생애로 대답한다

우리 삶에서 기다림은 어떤 의미일까. 대상 부재의 불공평 속에서 수은등처럼 떨어야 하는 존재의 애달픔은 어느 모로 보나 여북하다. 타협의 여지가 없어 더 그렇다. 비켜 지나가는 세월에 하소연이라도 해야 할까. 어느 가수는 ‘무엇을 기다리나/ 무엇을 바라는가.’ 하며 비우기를 종용했고, 어떤 시인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라며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일각 여삼추(一刻 如三秋), 안절부절 못하고 애태우는 마음을 어찌하라고…….

 

기다림을 요리하는 데 있어 영화만큼 능수능란한 매체도 없는 것 같다. 영화는 세상의 수많은 기다림을, 또 과거· 현재· 미래의 그 많은 시간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쥐락펴락 할 수 있는 재주가 있기에 빛의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봄날은 간다> 라는 영화는 매일 오후 기차역에서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치매 할머니를 조명한다.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되는 이 할머니의 마중은 기필코 할아버지를 만나야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있어 모델링의 대상이 된다. 금방이라도 헛기침하며 나타나 손을 덥석 잡을 것 같은 남편 모습을 상상하며 관객은 숨을 죽인다. 시간의 불연속성, 그 비정함이 기다림의 범주에 포함되는 이유다.

 

2014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영화 <5일의 마중>도 기다림이 주제다. 영화를 연출한 ‘장 예모’ 감독은 자신도 중국의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낯선 시골에서 시간의 단절을 경험했다며 ‘기다림은 인류가 희망을 품고 사는 이유’라고 말했다.

 

영화는 감독이 경험한 문화대혁명을 시대적 배경으로 한다. 대학교수인 ‘루엔스’(진 도명 분)와 중학교 교사인 ‘펑완위’(공리 분)는 슬하에 ‘단단’(장 예문 분)이라는 딸 하나를 둔 정 깊은 부부다. 이야기는 루엔스가 반 혁명분자로 몰려 투옥되면서 급물살을 탄다. 영화는 그가 옥살이한 20년이란 세월에 대하여 설명하지 않는다. 그 이전 행복했던 시절을 끌어다 현재 시점에 꿰매어 붙이고 20년을 봉합해 버린다.

 

어느 날 루엔스가 탈옥을 단행한다. 체포조가 뒤따를 것이라 뻔히 알면서도 아내를 만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의 몸은 체념으로 가득하다. 혁명을 예찬하는 학교 발레 공연에서 주인공을 하고 싶어 안달하는 딸 단단의 신고로 부부는 상면도 못하고 헤어진다. 남편인 줄 뻔히 알면서도 잠긴 문을 열지 못한 펑완위의 찢어지는 마음을 누가 알 수 있으랴.

 

시간이 흘러 문화대혁명이 끝난다. 출옥한 루엔스가 집으로 돌아온다.(歸來, 영화의 원제) 그의 발길이 마치 유턴하는 차량처럼 보인다. 자리를 박차고 뱅글뱅글 돌더니 종종걸음을 놓는다. 그런데 그가 그토록 가고 싶어 하는 집에는 ‘심인성 기억장애’로 기억 상실증을 앓고 있는 아내가 기다리고 있다. 그녀가 루엔스를 알아보지 못한다. 남은 기억 세 가지는 딸애가 루엔스를 신고했다는 사실, 루엔스의 젊은 시절 모습, 5일에 도착한다는 루엔스의 편지내용 등이다. 그녀는 방문 위에 ‘문 잠그지 말 것’이라고 종이에 써 붙였다. 문을 열지 못했던 그날 이후 방문을 잠그지 않고 생활한 것이다. 아내와 자신이 각각 기다려온 20년은 아내의 기억이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는 루엔스만의 기다림으로 전환된다.

 

의사는 ‘데자뷔’(처음 접하게 되는 사물이나 풍경 또는 사건인데도 예전에 보았던 것처럼 느껴지는 것)현상을 설명하며 심리치료를 권한다. 예컨대 같이했던 장소, 편지, 사진, 영화, 음악, 책 등을 활용하여 기억의 복원을 꾀하라는 것. 루엔스는 피아노 연주와 편지 읽어 주기 방법을 주로 사용한다. 그의 피아노 연주는 편지 읽을 때 마다 배경음악으로 나와 춤춘다. 궤짝 안에 한가득 들어있는 저 편지가 20년을 지켜줬구나. 구구절절한 편지글이 피아노곡과 함께 객석에 빗물처럼 파고든다. 기다림은 단단에게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아이가 공연하는 극장객석은 의자 하나가 비어있다. 카메라는 끝내 나타나지 않을 엄마의 자리를 클로즈업한다. 홍위병이란 이름으로 혁명을 찬동하던 철부지 아이들 세상은 그렇게 오버랩 된다.

 

펑완위는 끝까지 루엔스를 알아보지 못한다. 지금도 그들은 매월 5일이 되면 어김없이 기차역으로 함께 나가 루엔스를 기다린다. 뫼비우스 띠처럼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와 어김없이 경적을 울리는 저 기차는 단절 없음의 상징 아닌지. 영화는 옥살이, 치매, 기억상실증까지도 생을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강조한다.

 

망명 작가로 유명한 헝가리의 문호 ‘산도르 마라이’는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가득 품고 언제나 모국어로 책을 출간했다고 한다. 《열정》이라는 작품에서 그는 빛처럼 강렬한 명구 하나를 선사한다. “우리 인간들은 살면서 부딪히는 중요한 문제들에 말이 아니라 삶으로, 전 생애로 대답한다.”라고.

 

한국영상영화치료학회 전북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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