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이 어울려 즐기던 곳
그리고 또 어느 날인가는 세계적인 부흥목사 빌리 그레이험을 보러 그 자리에 모였고 전주시민 수만 명과 함께 이 불쌍한 민족을 구원해달라며 통성기도를 했다. 그렇게 영험 있는 분의 인도로 그 정도 외치면 통일도 머지않을 것 같았다.
또 정말로 운이 좋은 어느 날은 국가대표 축구팀이 화랑과 충무 팀으로 나뉘어 경기하는 것을 직접 보기도 했다. 우측 터치라인을 따라 돌파하던 김진국 선수가 텔레비전에서 볼 때보다 더 작고 빠르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기억은 시간 순으로 펼쳐지는 게 아니고 공설운동장에서는 체육행사만 펼쳐진 게 아니다. 때로 그 자리는 정치가들의 유세현장이기도 했고 가수들의 콘서트장이기도 했다. 어느 날은 축제의 메인 싸이트였고, 또 어느 날은 팔달로를 따라 펼쳐지는 퍼레이드의 집결지이자 해산지이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설익은 첫사랑을 만난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도 그 근처 어디쯤의 버스 안에서 황혼의 로맨스가 싹트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모든 기억들 가운데에서 가장 결정적인 것은 야구장에서의 어느 날이다. 승부는 격렬했고 관중석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 날 야구장의 모습이 갑자기 오래 된 극장으로 보였다. 아 이건, 사진으로만 보던 고대 그리이스 극장의 모습 그대로 아닌가? 반원형의 관중석은 그 시절의 말굽형(horse-shoe shaped) 객석이고 경기장은 오케스트라라 불리던 연기공간이었던 것이다. 포수 뒤편의 관중석 자리만 무대배경이 된다면 영락없는 그 시절의 극장 꼴이었다. 그러고 보니 스타디움, 콜로세움, 오디토리움이 모두 비슷한 뿌리말로부터 나왔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지금의 투수 마운드 언저리는 제단(altar)이 있던 자리이다.
저 공간은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시민들이 모여서 스스로의 몸으로 무엇인가를 공들여 만들어 내고 그를 바라보며 집단으로 갈구하고 즐기던 자리였다. 그렇다면 축제의 뿌리도 결국 이런 공간으로부터 뻗어 나온 것 아닌가? 오늘날 어딜 가나 가장 많은 사람이 가장 격렬한 방식으로 동시에 한 자리에 모여 아우성을 치며 노는 자리가 경기장인 건 다 사연이 있는 셈이다.
시민축제 상상 공간으로 됐으면
그렇다. 예나 지금이나 운동장은 그냥 운동장이 아니다. 모두가 제 살기에만 바쁘고 제 가족만 생각하는 세상에서 운동장은 여전히 여럿이 어울려 노는 자리이고 함께 꿈을 꾸는 공간이다. 저 자리가 끝 모를 욕망의 소비 공간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제는 도시 한 복판이 된 이 공간은 그 자체로 시민축제의 상상공간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야구장 같은 콘크리트 구조물을 아이들이 구석구석 들락거리는 거대한 우주선으로 바꿔줄 수만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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