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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설운동장, 그 추억과 미래 사이

▲ 곽병창 우석대 교수
그 날 아침에는 학교엘 가지 않았다. 공설운동장에서 교련실기대회가 있는 날이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학교 가는 시간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 위아래 교련복 챙겨 입고 버스에 올라탔을 것이다. 요대와 각반은 교련복 차림의 마지막 완성이었다. 그 두 가지가 빠지면 그저 헐렁한 군복 흉내의 건달 같았지만, 허리에 요대를 철컥 차고 각반을 바짝 동여매는 사이에 우리는 제법 군인다워졌다. 멀리 책에서만 보던 학도병 생각이 나기도 했을 것이다. 전주시내의 모든 고등학교가 공설운동장에 모여서 그 동안 갈고 닦은 군사훈련 솜씨를 자랑하고 경쟁하는 날이었다. 남자들은 목총을 들고 ‘찔러 찔러 뒤로 돌아 길게 찔러’ 외치며 총검술을 하고, 여고생들은 들것과 부목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저희들끼리 붕대를 감았다 풀었다 했다. 전쟁이 곁에 있는 듯했지만 우리는 마냥 즐거웠다.

 

많은 사람이 어울려 즐기던 곳

 

그리고 또 어느 날인가는 세계적인 부흥목사 빌리 그레이험을 보러 그 자리에 모였고 전주시민 수만 명과 함께 이 불쌍한 민족을 구원해달라며 통성기도를 했다. 그렇게 영험 있는 분의 인도로 그 정도 외치면 통일도 머지않을 것 같았다.

 

또 정말로 운이 좋은 어느 날은 국가대표 축구팀이 화랑과 충무 팀으로 나뉘어 경기하는 것을 직접 보기도 했다. 우측 터치라인을 따라 돌파하던 김진국 선수가 텔레비전에서 볼 때보다 더 작고 빠르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기억은 시간 순으로 펼쳐지는 게 아니고 공설운동장에서는 체육행사만 펼쳐진 게 아니다. 때로 그 자리는 정치가들의 유세현장이기도 했고 가수들의 콘서트장이기도 했다. 어느 날은 축제의 메인 싸이트였고, 또 어느 날은 팔달로를 따라 펼쳐지는 퍼레이드의 집결지이자 해산지이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설익은 첫사랑을 만난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도 그 근처 어디쯤의 버스 안에서 황혼의 로맨스가 싹트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모든 기억들 가운데에서 가장 결정적인 것은 야구장에서의 어느 날이다. 승부는 격렬했고 관중석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 날 야구장의 모습이 갑자기 오래 된 극장으로 보였다. 아 이건, 사진으로만 보던 고대 그리이스 극장의 모습 그대로 아닌가? 반원형의 관중석은 그 시절의 말굽형(horse-shoe shaped) 객석이고 경기장은 오케스트라라 불리던 연기공간이었던 것이다. 포수 뒤편의 관중석 자리만 무대배경이 된다면 영락없는 그 시절의 극장 꼴이었다. 그러고 보니 스타디움, 콜로세움, 오디토리움이 모두 비슷한 뿌리말로부터 나왔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지금의 투수 마운드 언저리는 제단(altar)이 있던 자리이다.

 

저 공간은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시민들이 모여서 스스로의 몸으로 무엇인가를 공들여 만들어 내고 그를 바라보며 집단으로 갈구하고 즐기던 자리였다. 그렇다면 축제의 뿌리도 결국 이런 공간으로부터 뻗어 나온 것 아닌가? 오늘날 어딜 가나 가장 많은 사람이 가장 격렬한 방식으로 동시에 한 자리에 모여 아우성을 치며 노는 자리가 경기장인 건 다 사연이 있는 셈이다.

 

시민축제 상상 공간으로 됐으면

 

그렇다. 예나 지금이나 운동장은 그냥 운동장이 아니다. 모두가 제 살기에만 바쁘고 제 가족만 생각하는 세상에서 운동장은 여전히 여럿이 어울려 노는 자리이고 함께 꿈을 꾸는 공간이다. 저 자리가 끝 모를 욕망의 소비 공간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제는 도시 한 복판이 된 이 공간은 그 자체로 시민축제의 상상공간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야구장 같은 콘크리트 구조물을 아이들이 구석구석 들락거리는 거대한 우주선으로 바꿔줄 수만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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