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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 살아있다는 것은 실감이다

27세 되던 1997년에 칸 영화제에서 신인상을 받은 일본 국적의 촉망받는 여류감독, 그녀의 이름은 가와세 나오미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이혼하고, 키워준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외톨이로 세상을 떠돌았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영화는 항상 우울하고 죽음에 대하여 지순(至順)하다. 자연히 그녀의 카메라는 치유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다. 영화마다 자연을 재료로 삼는 것은 순응성 때문 아닌가 싶다. 〈수자쿠〉, 〈사라소주〉등에는 고향 나라현의 아름다운 풍경이 담겼고, 〈너를 보내는 숲〉에는 어느 낯선 고장의 울창한 숲이 들어갔다.

 

어느 날 그녀가 바다로 눈을 돌린다. 거기서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라는 영화를 빚어낸다. 배경은 다르지만 여기서도 그녀는 육지의 풍경이나 숲에 대고 던지던 질문을 그대로 이어 던진다.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이죠?”

 

사실 이에 대한 답은 ‘너를 보내는 숲’에서 내놓은 바 있다. 살아있다는 것은 첫째 밥을 먹고 반찬을 먹는 것이다. 둘째 살아있는데도 살아있다는 느낌이 안 드는 것이다. 후자의 뜻이 아리송하다. 이는 위장이 아닌 마음의 문제로 비어있는 것을 말한다. 공(空)이 아닌 허(虛). 이를테면 사람이 서로 손을 잡을 때 느껴지는 에너지. 그것을 실감이라고 한다. 살아있다는 것은 실감이다.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 이 영화의 원제는 ‘두 번째 문’이다. 감독은 이 문에 대하여 ‘세상을 여는 장치다.’라고 말한다. ‘바다는 서핑과 하나, 여자는 남자와 하나, 무당은 신과 하나라며. 그리고 부연한다. 바닷속에 장시간 있는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바다에 있는 생물들에게는 육지가 죽음이다.’

 

카메라는 8월 대보름 축제가 한창인 ‘아마미’ 섬을 비춘다. 고등학생인 카이토(무라카미 니지로 분)가 산책하다가 바닷가에서 등에 용 문신을 한 건장한 남자의 시체를 발견한다. 섬이 발칵 뒤집힌다. 서핑, 낚시, 자살 등 추측이 난무한다. 이혼 후 이 섬에 정착한 엄마와 살기 위해 동경에서 온 어린 학생에게 바다는 무서운 곳으로 각인된다. 한편 여고생 쿄코(요시나가 준 분)는 무당을 하다가 암을 앓고 있는 엄마 이사의 상태가 좋지 않아 전전긍긍한다. 이 학생은 교복을 입은 채 바닷물 속으로 뛰어 들어가 수영하는 것으로 마음을 달랜다.

 

태풍 전야에 두 개의 사건이 발생한다. 하나는 쿄코의 엄마 이사가 신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특이하게도 이 자리에는 마을 사람 대부분이 참석하여 노래하고 춤을 추며 떠나는 엄마를 기쁘게 해준다. 또 하나는 엄마가 바람을 피웠다며 카이토가 엄마에게 들이댄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엄마는 말없이 자리를 떠나 버린다. 태풍이 불어 닥친다. 온 섬을 집어삼킬 듯한 기세다. 엄마는 필시 파도에 휩쓸리고 말았을 것이다. 불안에 떨던 카이토는 온 섬을 돌아다니며 엄마를 찾는다.

 

소년과 소녀가 만난다. 멘붕 상태인 그들은 서로 몸을 밀착시킨다. 허허로움을 떨치자니, 실감하자니 더 달라붙을 수밖에 없다. 영화는 허둥대는 청춘을 향해 용기를 북돋아주는 말을 들려준다.

 

“살면서 기쁨은요. 가슴에 손을 얹고 기분 좋은 것을 선택할 때 솟아난답니다.” 결국, 카이토는 엄마가 일하는 식당으로 달려가 품에 안긴다. 두 사람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진다. 여기서 영화는 카이토의 아빠도 등에 용 문신을 했다는 사실, 또 타투 작가란 사실까지 알려주지만, 엄마가 불륜을 저질렀는지, 또 처음 바닷가에서 발견된 시체가 엄마의 연인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것이 엄마의 다른 문이라면 무엇이라 말해야 할까. 쿄코의 엄마가 죽음으로 다른 문을 열었던 것처럼….

 

영화는 쿄코 아빠를 통해 바다의 실감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서핑은 먼 바다에서 생긴 파도의 마지막 부분을 받아들이는 거야. 사람의 정(情)도 이어지는 파도와 같지. 엄마에너지의 원천은 먼 바다에서 만들어진 물결과 같아. 아빠는 마지막까지 그 기운을 받고 살아온 거야.”

 

바다가 무서워 얼씬도 하지 않던 소년은 소녀의 손을 잡고 그 속으로 들어간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청춘이 심해로 헤엄쳐 내려간다.

 

《인생수업》의 저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시간과 죽음에 대하여 아주 의미 있는 말을 남겼다. ‘흔히 탄생을 삶의 시작으로, 죽음을 삶의 끝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탄생과 죽음은 연속선상의 두 지점일 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시간의 연속선상에서 또 하나의 문을 열기 위해 버둥거리고 있는지 모른다. 바람 불고 파도치는 바다, 그 속‘심해’로 헤엄쳐 들어가야만 두 번째 문의 열쇠를 구할 수 있으리라. 인간에게서 그것은 심연(深淵)이고 무의식이지 싶다.

 

한국영상영화치료학회 전북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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