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자는 ‘사람의 마음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감정’이라는 우리말 사전의 풀이를 틀림없이 봤으리라. 몇 번을 봐도 집히는 게 없으니 질문했을 터. 재미있는 것은 이 책의 다음 대목이다. ‘만약 아무도 묻지 않는다면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 그런데 그것을 물어온 사람에게 설명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모른다.’
의식은 오랫동안 그 의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정의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행복한 사전〉이라는 일본영화는 단어의 뜻을 어떻게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단어의 의미를 알고 싶다는 것은 누군가의 마음을 정확히 알고 싶다는 뜻일 것이다. 그것은 타인과 연결되고 싶은 욕망이다. 세상은 극적으로 변화하면서 새로운 말과 개념이 계속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런 가운데 단어는 생겨나기도 소멸하기도 살아있는 동안 의미가 변하기도 하는데, 의미가 모호해서야 되겠느냐는 것.
영화는 대형 출판사 후미진 방에서 종이사전 만드는 작업에 몰두하는 다섯 사람을 조명한다. 편집자 ‘마지메’(마츠다 류헤이 분)와 ‘마사시’(오다기리 조 분) 그리고 감수 역 ‘마츠모토’(카토 고 분)가 주역이다. 프로젝트명은 ‘대도해’(大渡海. 바다를 건너는 배라는 뜻)이다. 풀자면 ‘사전(辭典)은 너른 바다에 떠 있는 한 척의 배이고, 인간은 사전이라는 배로 바다를 건너고 자신의 마음을 적확히 표현해 줄 말을 찾는다’는 것. 21C형 새로운 사전 만들기 작업은 이렇게 닻을 올린다. 시기는 1995년. 핸드폰이 출시되고 인터넷시대가 활짝 열리는 상황에서 시도하는 종이사전 만들기 작업이다. 시대착오적 발상이란 지적이 적지 않다. 제작 기간이 오래 걸리고, 돈도 되지 않고…. 회사 경영진은 계륵이 되어버린 이 사업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다. 멤버 중 마사시는 아예 홍보팀으로 자리를 바꾼다.
감수자가 구성원에게 ‘오른쪽’에 대한 뜻풀이를 해보라고 한다. ‘서쪽을 바라보고 섰을 때 북쪽’, ‘시계의 문자판 1시에서 5시까지 있는 쪽’, ‘숫자 10에서 0이 있는 쪽’ 등의 답이 나온다. 어떤 의견을 게재해야 할까. 우리 사전에는 ‘북쪽을 향했을 때 동쪽과 같은 쪽’이라고 되어있다. 마츠모토가 말한다. 우리의 일은 단어의 뜻을 풀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용례(用例)를 수집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 다양한 용례를 수집하여 같이 싣도록 합시다.
용례 수집을 위해 여학생들이 많이 찾는 패스트 푸드 점에 모인다. 한 학생이 ‘BL’ 이란 말을 꺼내자 모두가 깔깔거리며 웃는다. BL이라. Boys Love(동성애)라는 답을 얻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수집 카드 용례 난에 이 내용이 기재된다.
일식 요리사인 마지메의 아내 ‘카구야’(미야자키 아오이 분)는 남편의 일을 존중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어느 날 그녀가 주방용 칼 만드는 곳으로 남편을 안내한다. ‘가스미’란 칼 앞에 선다. “이 칼은 강철과 연철을 붙여서 만드는데, 강철 부분이 날이 돼요. 그런데 강철과 연철의 경계가 안개 낀 듯 흐릿해서 가스미(안개)라는 이름이 붙었대요.”
안개를 가슴에 품고 온 마지메는 그날 밤 흰 물마루를 보다 물속 깊이 가라앉는 자신의 환영을 보게 된다. 깊은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자기를 보면서 책무가 지독하게 무거움을 실감한다. 외무사원처럼 용례를 수집하고 마치 우리나라 독서실을 연상하게 하는 편집실 한쪽에서 수험생처럼 일하는 그의 모습이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마츠모토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사전 완성을 눈앞에 둔 시점이다. 임종 직전 그는 감사의 예를 갖춘다. ‘감사라는 단어 이상의 단어는 없는지 저 세상이 있다면 거기서 용례 채집을 해 볼 생각입니다.’ 일에 대하여, 사람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이렇게 감사할 수 있다니…. 장례식 뒤 마지메는 마츠모토의 집 위로 방문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바다와 마주한다. 잔잔한 바다, 자기 인생의 주제가 되어버린 바다 저 끝에서 흰 물마루가 솟고 옆으로 검은 배 한 척이 지나간다. 그가 목청껏 소리를 지를 것만 같다. 마치 영화 〈러브레터〉 여주인공이 설원에서 산정을 바라보며 “잘 지내고 있어요?”라고 외치던 것처럼. 그러나 그는 넓은 바다를 가슴에 품고 묵묵히 서있다.
마지메 등 뒤로 15년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안개와 배와 사전이 자꾸 나타난다. 가슴이 먹먹하고 몸이 붕 뜬 것 같다. ‘영화적 고양’(Cinematic Elevation)이다.
한국영상영화치료학회 전북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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