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일반기사

[27. 화장] 살아 있는 것은 저렇게 확실하고 가득 찬 것!

중년의 삶은 방광서 요도 끝까지 뻥 뚫려 힘차게 쏟아져 내리는 소변 줄기처럼 막힘이 없어야 한다

 

남자 나이 50대 중반이 되면 어떤 모습이 될까. 어느 자동차 광고에 나오는 신사의 중후함과 영화 <뉴욕의 가을> 속 리차드 기어의 은발과 영화 <황금 연못> 에 나오는 헨리폰다의 절제된

 

위를 머릿속에 그리며 상상했다.

 

막연함이 간과한 것은 어깨를 누르는 세월의 고초였다. 원숙함이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 또한 실수였다. 감당. 내가 그 나이를 지나면서 집어 든 단어였다. 나이를 따라온 수많은 일이 칡넝쿨처럼 엉켜 있었기에. 야속하게도 세상은, 나이는 이를 능히 견뎌내라고 압박하는 것이었다.

 

영화 <화장> 을 보면서 남자주인공 ‘오상무’(이름 아니고 직함. 안성기 분)에게 동일시되어 눈을 뗄 수 없었다. 55세 남자의 힘없는 눈 놀림과 늘어진 어깨라니. 내 것보다 훨씬 무거워 보였다.

 

유명 화장품회사의 마케팅담당 상무로 일하고 있는 그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다. 고가의 단독주택에 별장까지 소유하고 있어 경제적으로도 편해 보인다. 슬하에 딸이 하나 있는데 결혼을 앞두고 있다. 그는 지금 두 가지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 하나는 자신의 전립선 비대증 악화로 소변을 받아내고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내의 뇌종양이 재발하여 또 수술한 것이다.

 

이 남자, 회사 일 마치면 부지런히 병실로 달려가 아내의 병시중을 든다. 머리를 빡빡 깎고 피골이 맞닿은 채로 침대에서 통증을 호소하는 아내의 곁을 지키는 일이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끔 교대해서 도와주는 처제도 간호인을 쓰라며 성화지만 그는 대꾸도 하지 않는다. 아내가 자주 설사를 한다.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고 찔끔거리니 치워야 하는 횟수도 많다. 유제품과 독한 약물이 섞인 변은 악취가 심해 참기 어려울 정도다. 남자는 묵묵히 물수건으로 닦아내거나 화장실로 안고 가 처치한다.

 

수면제 힘을 빌려 아내가 잠들면 서랍 속에서 소주병과 마른안주를 꺼내 든다. 침대에 기대어 졸다가 여명을 맞는다. 게슴츠레 뜬 눈에 들어온 세상은 고요 속 혼돈이다. ‘병실 유리창 밖으로 여름의 새벽이 밝아오고 있다. 빌딩 사이로 새벽은 멀리 울트라 마린블루의 하늘을 펼쳐놓고 있다.’

 

어느 날 그의 회사에 ‘추은주’(김규리 분)라는 여사원이 입사한다. 유리창 너머에서 일하는 그녀가 오상무의 눈에 들어온다. 둥근 어깨와 어깨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과 그 머리카락이 두 뺨에 드리운 그늘이 의심할 수 없이 뚜렷하고 완연하다. 연모의 감정이 솟아난다. 간절하다. 그의 머리에서 시가 만들어진다. ‘저의 부름이 닿지 못하는 자리에서 당신의 몸은 햇빛처럼 완연했습니다. 제가 당신의 이름과 당신의 몸으로 당신을 떠올릴 때 저의 마음속을 흘러가는 이 경어체의 말들은 말이 아니라, 말로 환생하기를 갈구하는 기갈이나 허구일 것입니다.’

 

그의 시에 화답하듯 추은주는 날로 예뻐졌고, 역동적으로 다가왔다. ‘아, 살아있는 것은 저렇게 확실하고 가득 찬 것이로구나….’ 사랑의 너울은 그렇게 오상무 속으로 밀려들어 가고 있었다.

 

아내가 하늘나라로 떠난다. 이른 새벽, 하늘이 열리기 전이다. 오상무는 딸에게 전화하고 비뇨기과로 소변을 빼러 간다. 추은주가 문상을 온다. 화장기 짙은 얼굴, 목덜미로 흘러내리는 선에 생명력이 가득하다. 오상무의 눈길이 한 곳에만 머문다.

 

영화 제목 ‘화장’은 중의적 의미가 있다. 火葬과 化粧. 앞은 아내의 것이고 뒤는 추은주의 것이다. 오상무는 후자의 제품을 만드는 회사의 중역이다. 플래시백은 병든 아내의 화장기 없는 민낯을 자주 비춰준다. 숨이 끊긴 아내는 화장(火葬)을 통해 스러지고 생동의 추은주는 화장(化粧) 하고 날아든다.

 

오상무의 장딴지에 찬 비닐로 된 오줌 주머니를 본다. 방광에서 요도 끝까지 뻥 뚫려 힘차게 쏟아져 내려야 할 소변 줄기가 그곳에 정체되어 있다. 50대 중반의 공전하는 삶은 저렇게 방광에서 막혀 흐르지 못하는 오줌과도 같은 것인지.

 

영화 속 오상무의 얼굴은 포커페이스다. 영화 내내 그는 한 번도 표정을 바꾸지 않는다. 와인 한 병 품에 끼고 시내를 방황할 때도, 그토록 그리워하던 추은주가 이별인사를 하러 별장에 왔을 때도…. 표정의 근거가 궁금하다. 삶의 회한인지, 자기연민인지, 세상을 향한 시위인지 알 수 없다.

 

외국어 제목 는 프랑스의 유명 화장품 브랜드로 ‘활기를 되찾다’라는 뜻을 가졌다고 한다. 그의 56세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소생할 수 있을까? 추은주는 소생의 판타지이지 싶다.

 

※일부 인용구를 ‘김훈’소설 《화장》에서 가져옴.

 

한국영상영화치료학회 전북지부장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100
최신뉴스

정치일반李대통령, 국회 초당적 협력 요청... “단결과 연대에 나라 운명 달려”

국회·정당인공태양(핵융합)이 뭐길래..." 에너지 패권의 핵심”

국회·정당“제2중앙경찰학교 부지 남원으로”

정치일반전북도청은 국·과장부터 AI로 일한다…‘생성형 행정혁신’ 첫 발

정치일반전북 ‘차세대 동물의약품 특구’ 후보 선정…동물헬스케어 산업 가속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