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 라디오 특집 방송에서 사회자가 가족에 대하여 정의해 보라고 한다. “피요”, “가여운 족쇄”, “행복한 천형”…. 많은 말이 스프링처럼 튀어나온다.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에마 봄베크’의 책 《가족에 미쳐라》에 나오는 명구가 소개된다.
‘각자의 방문을 잠그고 살다가도 어려운 일이 닥치면 모두가 힘을 합쳐 서로를 지켜주는 그런 특별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보이지 않는 끈, 오랜 부재와 무관심이라는 가뭄을 견디어 내면서도 해마다 어김없이 싹을 틔우는 다년생 식물, 그것이 가족이다.’
라디오를 끄고 자동차 창문을 여니 훈풍이 온몸을 휘감는다. 5월의 대지가 사랑의 기운으로 가득하다. 다년생 식물이 쑥쑥 자라 피톤치드보다 더한 항균물질을 뿜어내는 것 때문이겠지. 어느 상담사례 발표회 자리에서 주재자가 한 말이 떠오른다. 5월에는 ‘May i help you?’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라는 문장 하나로 살자고. 5월(May)이니까.
때맞춰 개봉한 영화 〈약장수〉를 보는데, 요양병원에 계신 어머니가 떠올라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머니가 약장수 물건 파는 곳에라도 나갈 수 있는 몸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정 붙일 곳 없는 독거할머니 ‘옥님’(이주실 분)이 집 근처에 차려진 홍보관에 나가면서 사는 재미를 느낀다는 내용이다. 아들은 유능한 검사요, 딸은 잘나가는 미용실 사장님이다. 그런데도 옥님은 소형아파트에서 홀로 밥 먹고 홀로 잠잔다. 대검찰청에서 장한 어머니 표창을 받던 날에도, 기다리고 기다리던 생일에도 남매는 어머니와 밥을 먹어주지 않았다.
어느 날 아들이 집에 온다. 식탁에 앉지도 않았는데 휴대전화기 벨이 울린다. 아들은 중요한 일이 있다며 황급히 돌아선다. 옥님의 말이 현관에서 메아리 된다. “아범아, 안 바쁠 때 두 시간만 놀아다오.”
떴다방에서 신입사원으로 일하는 ‘일범’(김인권)이 아들 역할을 대신한다. 기꺼이 미역국을 끓인다. 같이 먹어주고 노래까지 불러준다. 옥님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다. 떴다방 사장 ‘철중’(박철민 분)이 말한다. “세상 어떤 자식이 맨날 엄마들한테 노래하며 재롱떨어줘?”
옥님과 일범은 모자(母子) 같은 관계로 발전한다. 아껴주고, 챙겨주고. 일범의 판매실적이 저조하자 옥님은 자신의 CT 촬영 예약금까지 빼내 물건을 사준다. 판매 압력이 커지자 급기야 수백만 원짜리 물건을 떠안게 되는 옥님.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딸을 찾아가지만, 딸은 엄마가 아들만을 위하며 평생을 살아왔지 않느냐고 공박한다.
난치병을 앓고 있는 딸 치료비를 만들어야만 하는 일범의 마음은 항상 급하다. 옥님이 반품하고 말 것이라며 비아냥거리는 철중에게 일범은 만일 그 상품이 반품되면 월급을 포기하겠다며 배수진을 친다. 시간이 자꾸 흐른다. 절규와도 같은 일범의 춤판이 이어진다. 할머니들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쓰고 시리고 서러운 공기가 홍보관을 지배한다. ‘목숨 걸고 물건을 팔아야 한다.’고 외치는 철중의 말이 일범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힌다.
며칠 전 영화마당에서 만난 황동혁 감독은 자신의 영화 〈수상한 그녀〉와 〈도가니〉에 현재 97세 된 친할머니를 출연시켰다며 가족의 연대와 항상성을 강조했다. 가족치료 이론에 의하면 가족 항상성이란 ‘가족체계 역시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가족 내외의 환경에 적응하면서 일관성을 유지 하고자 하는 기능을 가진다.’고 되어 있다.
영화는 가족체계 틀이 무너진 옥님 가족과 돈의 절박함 앞에서 몸부림치는 일범 가족을 조명하며 일관성이 유지 되겠느냐고 묻는다.
옥님이 쓰러진다. 불 꺼진 방에서 가늘게 떨다 절명한다. CT를 찍지 않았고, 반품관계로 옥신각신 하다가 기력이 소진한 탓으로 보인다. 일범이 제일 먼저 현장을 목격한다. 시신을 수습하기보다 서랍부터 뒤지는, 옥님의 금반지를 빼기 위해 칼을 집어 드는 일범의 눈에서 불이 튄다.
오늘도 뉴스에서 떴다방 이야기가 심층 보도된다. 영화는 실제 떴다방에 다니는 어르신들을 모시고 촬영했다고 하는데, 질서정연하게 앉아 티 없이 웃는 모습이 너무 편해 보였다. 이분들에게 물건 값과 웃음이 어떤 의미인지?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어버이의 말없는 말이 암시하는 바를 알면서도 그냥 지나치는 일은 없어야겠다. 5월이니까.
한국영상영화치료학회 전북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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