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정 상경이 성행하던 70~80년대 우리나라 서울역이 떠오른다. 수많은 청춘이 상경과 낙향을 쉴 새 없이 반복하던 곳. 그때 남산 타워 아래 명동과 필동의 새벽은 구인과 구직인파로 북새통이 벌어졌다. 일자리를 얻지 못한 사람들의 한숨소리는 기적 소리에 섞여 빈 하늘을 찔렀다. 허기진 자들의 밤은 길었으리라.
일본영화 〈심야식당〉을 보는데 영화 〈도쿄타워〉가 말하는 도쿄와 그때 내가 본 서울의 새벽이 묘한 대비를 이루며 다가왔다. 그 사람들 지금 잘살고 있을까? 눈물로 때웠을 국밥 그릇이 눈에 아른거렸다. 사멸된 시간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다니. 이 기억을 어디에 써야 하나.
영화 심야식당도 주인공의 내레이션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업시간은 밤 12시부터 아침 7시경까지. 손님이 오느냐고? 그게, 꽤 온다니까!” 도시의 밤을 깨우는지 지키는지 모를 식당 간판이 올라간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식당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간다. 열 평정도 되는 홀이 꽉 찬다. 어미에게 먹이를 달라고 목청껏 소리를 지르는 새끼 새들처럼 이들은 저마다 목청을 돋우며 자기 음식을 주문한다.
주인 이름은 ‘마스터’(코바야시 카오루 분). 왼쪽 눈두덩 위로 칼이 지나간 흉터가 있어 과거를 묻고 싶게 한다. 그가 취급하는 주 메뉴는 돼지고기 된장국 정식, 문어 소시지, 계란말이 등이다. 하지만 손님이 원하는 음식이면 무엇이든 다 만들어준다.
영화는 인기메뉴 세 가지에다 몇 가지 사이드 메뉴를 첨가하여 선보인다. 인기 메뉴에는 에피소드가 하나씩 달려있다. 처음은 ‘마밥’이야기다.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한 아가씨 ‘미치루’(타베 미카코 분)가 허기를 못 이겨 마밥과 몇 가지 음식을 주문해서 먹은 뒤 속칭 먹튀를 단행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그녀는 식당에서 잡일 하는 것으로 감사의 마음을 표시한다. 다음은 ‘나폴리탄’이란 이탈리아 음식이야기다. 한 갑부의 후처로 살던 미모의 여인은 나폴리탄을 즐겨 먹는다. 철판 용기 바닥에 달걀을 풀어 익히고, 숙주나물에 양파를 볶아 섞은 후 삶은 스파게티를 담고, 그 위에 토마토소스를 입힌 후 열을 적당히 가한 음식 말이다. 어느 날 갑부가 급사하고 유산을 못 받게 되자 매일 식당에 와서 신세타령 하다가 나사공장 영업사원으로 일하는 한 청년과 사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상속을 받게 되자 그 청년을 가차 없이 차버린다. 배신이다. 다음은 쓰나미로 부인을 잃은 ‘겐조’(츠츠이 미치타가 분)가 즐겨 먹는 ‘카레라이스’다. 새로운 사랑을 찾아 동경으로 날아온 그는 밤마다 카레라이스를 먹는다. 심야의 구애에 감동한 여인 ‘아케미’는 다음에 시골로 찾아가겠다며 그때 카레를 만들어 가겠다고 약속한다. 다시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는 톡 쏘는 맛(파, 양파, 향료가 든 카레가루)이 필요하다는 뜻이지 싶다.
단골손님들은 누군가가 바닥에 슬쩍 놓고 간 유골함 처치문제를 놓고 고민하는데, 마음씨 착한 마스터는 절에 안치하고 제까지 올린다. 주인이 찾아가는 것으로 끝을 맺지만 단골손님들이 유골함에 대고 예를 표하는 게 이채롭다. 외로움에 치를 떠는 노총각, 50대 게이바 사장, 나이 든 스트리퍼, 조폭 간부…. 계란말이에다 사케 한잔, 밤을 잊은 자들의 향연은 날마다 계속된다.
계절이 한 바퀴 돌고 겨울이 온다. 영화는 서치라이트를 비치 듯 도쿄 시내를 쭉 훑는다. 배고픈 사람, 배 아픈 사람, 자는 사람, 잠 못 드는 사람, 밥 먹는 사람…. 카메라는 심야식당 옆 파출소에 가서 멈춘다. ‘코구레’(오다기리조 분)라는 경찰관이 눈을 맞으며 서 있다. 새벽 시간까지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파출소를 찾는 사람에게 길 안내 하는 사람. 도쿄를 위해, 밤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 이 사람이야말로 밥 먹고 기운 차려야 할 것 같은데, 식당 출입을 하지 않는다.
심야식당에 가면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 내가 원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일이 잘 풀릴 것 같다. 도피처이자 안식처다. 영화는 이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카모메 식당〉의 주먹밥, 〈달팽이 식당〉의 석류로 만든 카레와 버터라이스, 〈안경〉의 매실장아찌, 〈스시장인: 지로의 꿈〉의 예술품 스시, 〈리틀포레스트 : 여름과 가을〉의 토마토소스 등이 떠오른다. 회가 동한다. 자꾸 말하고 싶어진다.
명동 구직시장에서 일자리 찾던 사람들, 서울에 배척당해 빈속으로 낙향한 사람들. 어느 곳에선가 지금 치맥 먹으며 그때를 이야기 하고 있는지 모른다.
한국영상영화치료학회 전북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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