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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처럼 살지 말아라

박지연

옛날 사진들은 크기가 아주 작아서 확대경을 가지고 밝은 곳에서 비춰 보아야 겨우 분별할 수가 있다. 나의 유년 시절의 사진을 보면 운동회 날에 어머니가 달리기를 하는 사진이 있는데 한복에 다가 고무신을 신고 맨 뒤에서 뒤뚱뒤뚱 달리는 모습은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고 왠지 목이 메게도 한다.

어렸을 적 이야기라서 기억마저 희미하지만, 어머니는 한복을 만들어 딸들에게 입히셨는지 묵은 사진첩에는 온통 한복을 입고 있는 모습뿐이었다. 내가 어머니와 떨어져 서울에서 학교 다닐 무렵 어머니는 한 달이면 어김없이 상경하시어 내가 지내는 모습도 보시고 이곳저곳을 함께 다니곤 했는데 어머니가 가장 좋아했던 곳은 동대문 시장이었다. 장날처럼 사람이 많아 구경거리도 좋다는 이유였다.

나는 어머니가 서울에 계시는 동안은 강의가 끝나면 고장 집으로 달려와야 했다. 어머니는 서울에 오시면 빠르면 사나흘, 때로는 일주일은 족히 계시다 가시곤 했다. 그 기간에 외출은 생각지도 못하고 어머니와 함께 보내야 했는데 나는 이유 없이 짜증을 부리기도 하고 집으로 내려가시길 은근히 기다리곤 하였다.

그런 딸 마음도 모른 채 어머니는 미도파백화점에 구경을 가서 분홍색이 잘 어울린다며 예쁜 옷을 사주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옷을 입은 딸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시곤 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생각해보니 왜 나는 어머니의 옷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하는 회한이 밀려온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럽고 가슴이 터질 듯 아프기만 하다.

다음 날, 어머니와 창경원에 벚꽃 구경을 갔는데 일요일이라서 사람들이 붐볐고 날씨마저 몹시 무더웠다. 어머니는 갈증이 나셨는지 사이다 두 병을 사오라고 하셨다. 그 시절 나는 친구들과 생맥주를 자주 마셨던 터라 사이다 두 병 값이면 맥주 한 병 값하고 같으니 맥주를 마시자고 했다. 그러자 한심한 듯 나를 쳐다보시던 어머니의 그 슬픈 눈빛을 잊지 않고 있다.

어머니가 내려가시는 날이면 어머니는 고쟁이에서 꺼낸 돈을 쥐어주시며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사 먹으라는 당부도 하신다. 섭섭한 생각은 잠시뿐, 나는 새장 속에서 튕겨 나온 새처럼 훨휠 날개를 폈다. 이런 철없는 생활은 내가 서울에 머무는 동안 계속 되었는데 어머니는 내가 주는 눈치도 모르고 그저 보따리 속에 자식 먹일 것만 챙겨 오시곤 하셨다.

어머니는 늘 그러셨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속담처럼 집안에 크고 작은 일들이 언짢게 일어나면 언제나 자기 탓이라고 가슴을 쓸어안고 사셨던 우리 어머니. 내가 어머니가 되고 딸을 출가시키고 난 지금에서야 어머니의 가슴이 보이는 너무도 철이 더디 든 딸이 되어버렸다.

한때는 어머니처럼 살지 않으려고 멋도 부려 보았지만 나 또한 어머니를 닮 서인지 맵시도 나지 않아 아예 편하게 지내편이 익숙하다. 외출이라도 하는 날이면 멋 좀 부리라며 핀잔이던 남편도 이젠 포기했는지 무덤덤하다. 새삼스레 어머니가 더욱더 보고 싶고 그리워진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으면 이런 내 모습을 보고 뭐라고 말씀하셨을까? “너는 나처럼 살지 말고 멋도 부리고 예쁘게 하고 다녀라.” 라고 내 손을 잡으며 말씀하셨을 것이다. 내가 우리 딸들에게 하는 이야기처럼.

△ 박지연은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 월간잡지 기자, 교사로 퇴직하여 우석대평생교육원에서 ‘문예창작’강의를 했다. 전북여류문학회장 역임. 풍남문학상, 전라시조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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