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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거울 속의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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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숙 수필가.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다. 일단 눈으로 보면 확인이 된다.

 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고 확정할 수도 없다. 앎과 인식의 첫 단계가 바로 보는 것. 거울에 비춤과 거울이 다시 되비추는 것이다. 이를 '미러링'이라 한다. 몽골에서의 시간은 초원과 야생과 사람에 대한 미러링의 경험이었다. 단체생활을 가장 오래 해본 여행길, 열악한 환경에서 한솥밥을 먹고 같이 자고, 움직이면서 사람들의 거울로 내가 대비되어 비쳤다. 그동안 무지로 차폐되었던 것들이 내 앞에서 파다닥 깨어나 거울처럼 나타났다.

여행은 대면의 시간, 타자를 만나고 시공간을 만나는 일이다. 길든 관습에서 벗어나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길트기 행위이다. 보고, 듣고, 즐기고, 사귀기 위하여 인간은 여행이란 채널을 가동하는지도 모르겠다. 서로의 민낯을 보는 데는 여행만큼 좋은 것이 없다.

나와 다른 것을 접하면서 나를 객관화시켜 볼 기회이다. 타지에서의 삶은 일 상의 가면이 벗겨지기 쉽다. 지극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낯익은 사람의 낯선 모습, 천사가 되기도 하고 비호감이기도 했다. 타자의 부 정성과 변모가 경험을 만들어 낸다. 먼발치에서 피상적으로 좋게만 보였던 사람이 그것이 아님을 보았고, 나름 선입견을 품고 있었던 사람이 내 좁은 편견이었음도 알겠다.

선입견으로 오류를 범한다. 선입견은 안개의 눈이다. 적당히 포커 페이스 하는 일상의 사람들, 그건 진실을 숨긴 얼굴이다. 그러나 일상 의 바깥에서는 몸의 실체를 만나기 일쑤이다. 그래서 여행은 언제나 익숙한 것에서부터의 일탈이다. 사람을 만나는 일은 실험일 수 있다. 나는 노점상 앞에서나, 고위 간부 앞에서나 똑같은 인성과 태도를 지니는지? 그럴싸한 분장으로 내 본성을 감추지는 않았는지? 나는 내 관점에 규정지어 놓고 동전의 양면처럼 한쪽만 보아도 얼마짜리인지 다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데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사람을 알고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주름 까지  펼쳐보는 일이 아닐까? 아름다운 마네킹 뒷면에 수많은 핀이 꽂혀있듯이 뒷면의 숨겨져 있는 것까지 다 읽어내야 제대로 그 사람을 본 것이다.

 사람들이 보고 이해하고, 받아들임으로써 나의 속성을 알게 되고 나는 성장해갈 수 있으리라.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보듯 타인에 비친 나를 본다. 거울은 외면뿐 아니라 내면의 상태를 비추는 창이기도 하다.

거울을 단순히 사물 그러니까 물리적 세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유리막 정도로 간주하면 그 사람은 거울을 모르는 사람이다. 나 스스로는 제대로 볼 수 없지만, 타인을 거울에 비추어 그 거울 속에서 나를 들여다보는 일은 나를 성찰하는 작업이다. 외출할 때 거울 앞에서 화장한다. 밖에서도 한두 번은 거울을 본다. 그 봄은 외관의 매무새를 확인하는 것으로 그친다. 내면은 별로 점검하지 않았다. 진실을 마주하자. 내·외면 모두를 들여다 보는 거울 보기를 하자. 타인의 거울에 나의 단면을 속속들이 비추어 보자. 거울아, 거울아 나를 훤히 비춰다오. 몽골 여행을 통해 커다란 거울 하나 선물 받았다.

 

△이정숙은 정읍에서 출생했다. <수필과비평>으로 등단했으며, 국제PEN한국본부 전북지역위원회장과 온글문학회, 가톨릭문우회, 문예가족, 한국미래문화연구원 회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지금은 노랑신호등> <내 안의 어처구니> <꽃잎에 데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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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숙 #거울 속의 거울 #금요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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