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길에 입문하면서 손가방을 들고 다니며 새내기대학생 행세를 했었다. 그러나 허세도 잠시뿐이었다. 수업 자료며 글벗들의 신간을 받고 보니 한 아름이다. 어찌할까 망설이던 중 용도가 다양한 가방이 굴러들었다. 어느 날 출강하는 K의 낡은 가방을 보고서 반 강제로 선물한 것인데, 그와 정년을 함께 하고서 돌아온 것이다. 가방을 들고 처음 집을 나서려니 왜 그런지 쑥스럽고 어색하기만 했으나 이제는 어엿해졌으며 생각부터 행동까지도 학생의 자세로 틀이 잡혔다.
가방과 첫 인연은 초등학교 때 무명천에 물들인 보자기에 출발한다. 당시만 해도 책을 둘둘 말아 허리나 등에 질끈 동여매고 다니던 책보였다. 그리고 가방을 갖고 다니는 사람은 반 아이들 중 손 꼽을 정도였다. 선생이나 수리조합장 아들 정도였는데 내 기억에는 이웃집 순이의 가방이 지금까지 가억에 남는다.
연분홍색 가방은 너무 아름다워 부럽기도 하고 시샘이 나서 몰래 감추어 골탕 먹인 기억은 지금도 깨소금 같은 추억이다. 그렇게도 부러웠던 가방을 3학년 가을 학기에 할머니께서 선물로 사 주셨다.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지 품고 잠들 때도 있었고, 책을 넣었다 꺼내기를 몇차례 반복하기도 했다.
되돌아보면 할머니의 금쪽같은 용돈으로 마련해 주셨는데, 책 보다는 딱지나 딱총 등 놀이 용품들을 넣고 다녔으니 할머니는 얼마나 섭섭하셨을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책가방은 우리 곁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이제 핸드폰 속에 모든 정보가 들어 있어 손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핸드폰, PC에 전화번호 각종 기념일 특별히 기록해야 될 여러 사항들을 저장하면 된다. 문명의 이기는 읽고 쓰고 기억해야 할 인간들의 수고를 보관하고 있어 필요시마다 제공해준다. 이러한 편의적 사고에 빠져 들어 가방의 용도를 잊어버린 것이다.
가방은 누구에게나 널리 쓰이는 생활용품이다. '가방 크다고 공부 잘하냐?' 라는 비아냥거림이나 가방끈이 길다, 짧다는 등 배움을 가방끈에 비유햇던 속어도 있다. 가방의 쓰임새는 각기 다르다. 내게는 싫건 좋건 초등학교부터 대학에 들어 갈 때까지 책가방, 서류가방, 여행용 캐리어로 익숙했지만 군인에게는 따불백, 여성들은 핸드백으로 다양하게 쓰였다. 바람이 있다면 이러한 가방 속에 읽을거리 하나쯤 넣고 다니면서 여가를 선용하면 어떨까 싶다.
시작은 늦었으나 심기일전하며 할머니의 뜻을 가방에 담아가며, 삶의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는 수련(修鍊)의 보고(寶庫)로 삼고 싶다. 일찍이 철이 들었더라면 할머니의 넉넉한 웃음을 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후회로 온 몸이 후끈 거린다. 늦은감은 있지만 내 곁에 다시 돌아온 가방은 인연인가 싶어, 물려받은 도자기와 미술품을 함께 고완품으로 남겨 둘까 하는 생각이다.
어색한 교복을 맞춰 입은 예비 중학교 시절, 몸은 자라도 아직 마음은 여린 고등학교 시절, 성인인 대학시절도 장차 나갈 사회에서는 미약한 존재들이다. 이런 시절 어린아이가 곧 제 몸만 한 가방을 메고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몸과 마음이 자라 이 사회를 지키는 구성원이 되었다. 가방, 세상 무엇도 이보다 큰 것은 없다. 다른 세상으로 한 발씩 내디딜 작지만 강한 가방을 다시 멘 나를 응원고 싶다.
가방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나의 밥이었다. 이제 다시 돌아온 나의 가방을 열심히 메고 다니며 나의 일생을 정리하고 싶다.
곽창선은 국민건강보험공단 지사장을 역임했으며 <표현 문학> 신인상으로 문단에 나와 현재 표현문학회, 신아 작가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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