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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눈 내리는 날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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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날이면 누구에게나 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다. 무슨 생각이 나느냐는 질문이다. 나이, 남녀, 태어나고 성장한 곳, 삶의 터전, 생활 방식과 취향에 따라 답이 다를 것이다. 난 펄펄 눈이 오는 날이면 몸과 맘이 포근해지는 고향 생각이 난다. 옛 가족과 작은 집, 친구와 마을 사람들, 산천과 들판이 내 가슴에 정情으로 차곡차곡 쌓여 있어 그럴 게다.

겨울밤이 깊어지려면 얼마나 남았을까? 골목, 집 앞 도로, 아파트 울타리 뒤 인도에 눈발이 흩날린다. 자동차 눈을 쓸고 앞 유리와 보닛(bonnet)을 골판지로 덮어 사방에서 밀어닥칠 센 눈바람을 막았다. 어릴 적 눈이 내리면 문구멍으로 밖을 내다보듯 몇 번 현관문을 열어봤는지 모른다. 대낮같이 쌓인 환한 눈발을 보고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눈을 떠보니 새벽 네 시 반, 눈은 내리다 잠을 잔 것 같은데 소복소복 쌓여 있었다. 좀 기다리다 영상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다. 눈이 기도회에 나온 교우들의 발길을 막았는지 찬양 소리가 작게 들렸다. 내 맘과 귀는 찬송과 말씀, 기도보다 눈이 쌓인 밖에 가 있었다.

앞집에 잠을 깨울까 봐 눈을 이층계단부터 부삽으로 조심조심 긁어내리고 비로 쓸어 대문 밖으로 퍼냈다. 먼저 앞집 대문까지 쓸어 며칠 전에 눈 내린 날 빚을 갚으리라 생각하며 대문 밖에 나와 굽은 허리를 폈다. 눈은 어느새 앞집 김 사장님도 새벽잠을 일찍 깨웠는지 눈을 쓸며 나온 게 아닌가? 인사를 나누며 함께 골목을 쓸었다. 운동경기 패자처럼 마음이 언짢았다. 집 앞 인도를 같이 쓸었다. 김 사장님은 아파트 뒤 인도까지 쓸어주었다.     

옆집 박 과장님도 앞서 싸리비를 들고 나왔다. 자기 집 앞과 인도를 쓸었다. 소리 높여 이른 아침 인사를 나누었다. 박 과장님 옆집에 사는 장 선생님도 인도를 쓴  뒤에 아들 출근차의 눈을 쓸며 인사를 했다. 도로 건너편 님도 집 앞이 도로지만 싸리비를 들고나오길 은근히 기다렸다.

느닷없이 삼십 년 넘게 이웃사촌의 정을 나누며 살다 이사 간 홍 선생님도 생각이 났다. 어릴 때 여덟 살 위면 벗을 하며 말을 놓았다. 홍 선생님은 더 나이 차이가 나지만 눈이 내렸다 하면 질세라 금세 싸리비 소리와 인人기척도 없이 쓸고 들어가 버리기가 일쑤였다. 새 이웃 김 사장님도 미안할 정도로 눈 내리는 날 아침이면 더 부지런하다.

우리는 이웃이 없어져 가는 도시 문화에 묻혀 살고 있다. 눈 내린 날 아침에 이웃 남정네가 넷이서 눈을 쓸며 인사를 나눈 건 이사 오고 처음이다. 서른세 해 만에 만난 정경이라 추억거리로 그려두고 싶다. 오늘 아침엔 어릴 적 눈 내린 고향, 아름다운 풍경인 겨울왕국이 세워졌다. 밤새 쌓인 눈이 내 맘에 고향처럼 포근한 정을 느끼게 했다. 남은 겨울도 들사평 마을에 두어 번 더 밤새 눈이 펑펑 내렸으면 좋겠다.

△ 정석곤은 관촌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해 <대한문학> 수필 등단했다. 안골은빛수필문학회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전북문인협회 회원으로 <풋밤송이의 기지개> 등 수필집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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