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잠실 석촌호수 부근에 눈에 잘 띄지않는 하나의 비가 있다. 사적 제101호인 삼전도비다. 조선 인조가 청나라 홍타이지 앞에서 무릎을 꿇은채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렸다는 소위 삼배구고두례를 행한 치욕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비문이다. 1636년 병자호란과 그 이듬해 삼전도의 굴욕을 승자인 청나라 시각에서 미화한 것이다. 동일한 내용을 만주 문자, 몽골 문자, 한문으로 새겨놓은 매우 특이한 사료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냉정하게 보면 당시 조선왕조가 화를 자초한 측면이 다분하다. 절체절명의 상황속에서 지도부의 판단 잘못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너무나 잘 보여준다. 사실 척화파의 명분은 차고 넘쳤다. 불과 얼마전 임진왜란때 나라가 결딴나기 직전에 구해 준 명나라를 배신하는 건 누가봐도 배은망덕한 일이었다. 그런데 “기울고 있는 명나라 편을 들었다가는 욱일승천의 기세로 떠오르는 청나라의 보복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라는 주화파의 주장은 너무나 무섭게 현실이 됐다. 나라를 거덜낸 조선왕조는 망하는게 상식이고, 집권층이 도륙당하는게 마땅할텐데 막상 굶어죽고, 맞아죽고, 노예로 끌려가고, 수탈당한 이들은 이름없는 숱한 백성이었다. 이후 조선은 청의 속국이 됐고 명목상으로나마 조선이 자주국으로 인정된 것은 260여년이 지난 뒤 청일전쟁을 마무리하는 시모노세키 조약이었다. 청과의 주종관계가 끊어지면서 한반도의 주인은 결국 일제가 됐다.
구태여 장황하게 옛 일을 거론하는 이유가 있다. 시대가 바뀌었을뿐 요즘 관세협정을 무기로 한 미국의 횡포는 냉엄한 국제질서의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명분과 이념의 벽을 걷어내고 철저히 국익과 실용주의에 입각해 세련된 협상을 이끌어내는가 여부에 대한민국의 명운이 달렸다. 지극히 범위를 좁혀 전북에 국한해도 사안이 크고작을뿐 마찬가지다. 요즘 지역사회를 뜨겁게 달구는 화두는 바로 완주-전주 통합 문제다. 찬성측이나 반대측 모두 지역발전과 보다 나은 삶을 강조한다. 하지만 동일한 사안을 두고 전혀 다른 해법이 나오는 것은 바로 서 있는 위치가 다르고, 정치적 셈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결론이 나더라도 전주나 완주주민, 조금 더 크게보면 전북도민들이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받는다는 거다. 완주군민을 대상으로 한 공식, 비공식적인 여론조사 결과에 대해 찬반측의 해석은 크게 엇갈린다. 통합 찬성측은 “현재 찬반이 엇비슷한데 샤이 찬성표가 많기에 주민투표로 가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는 반면, 반대측은 현재 반대여론이 2배 이상 높다는 조사 결과를 제시한다. 현실을 보자. 완주를 기반으로 한 선출직 공직자, 즉 국회의원, 군수 후보군, 도의원이나 기초의원 후보군 중 통합에 찬성하는 이는 이서에서 군의원을 준비중인 A씨 한명이며 나머지는 모두 반대라고 한다. 또한 막상 주민투표에 들어가면 반대측은 유권자를 동원할 수 있는 반면, 찬성측은 차량으로 실어나르는 등 실제 행동을 하는 것은 어렵다고 한다. 결국 이런 정황을 감안하면 이번에도 통합은 쉽지 않아 보이는데 중요한 변수는 지금부터 이어질 여론의 추이다. 찬성측이건, 반대측이건 대부분 내년 지방선거나 차기 국회의원 선거를 염두에 둔 행보임엔 분명한데 과연 대다수 완주지역 주민들의 속내는 어느쪽으로 기울고 있을지 궁금하다. 물론, 어떤 결정을 하든 그 결과는 고스란히 전북도민과 완주군민이 짊어져야 할 몫이다.
위병기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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