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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강에는 은자가 산다’⋯30년 전주 문화의 삶 건져 올리는 ‘은자전’

30년 동안 전주 예술인들의 아지트로 자리해 온 술집 ‘새벽강’ 거쳐간 전주의 문화사 재조명

은자전 홍보물. /사진=독자

“새벽강에는 은자가 산다.”

전주의 오래된 술집 새벽강을 설명할 때 가장 자주 소환되는 문장이다. 그러나 이 말은 단지 주인 강은자 씨 한 사람을 가리키지 않는다. 1990년대부터 새벽강에 드나든 예술가와 청년, 방랑자와 기웃거리던 단골들의 기억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낸 ‘한 시대의 공기’를 뜻한다.

지난 6일 개막해 오는 14일까지 전주 남부시장 로컬공판장 모이장에서 열리는 ‘은자전(隱者展)’은 바로 그 축적된 시간들을 처음으로 한데 펼쳐 보이는 자리다. 한 술집의 소장품을 넘어, 30년 넘게 전주 예술 생태를 관통해온 공동체의 기억을 드러내는 전시다.

△ 38년의 시간, 231점의 작품…새벽강이라는 ‘아카이브’

새벽강을 찾은 예술인들과 주인 강은자 씨의 사진. /사진=독자

이번 전시는 시작부터가 하나의 이야기다. 1993년, 재수생 후배였던 박진희 작가의 그림을 “그냥 안쓰러워서” 사준 것이 새벽강 소장품의 출발이었다. 이후 2025년까지 이어진 강은자의 그림 사랑은 어느새 91명의 작가, 231점의 작품 컬렉션이 됐다.

어려운 젊은 작가들의 작업을 응원하며 사준 그림들, 가게에서 김밥을 싸주자 감사의 뜻으로 건네받은 그림, 술과 우정 속에서 오간 선물까지. 이 모든 것이 새벽강이라는 공간에 켜켜이 쌓여 하나의 역사로 남았다. 기획자 유대수 작가는 “술자리에서 농담처럼 ‘은자전을 하자’고 이야기했는데, 그날 쓴 메모 한 장이 11년을 지나 현실이 됐다”며 “새벽강이 언제 문을 닫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올해 꼭 하자고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 “새벽강이 키운 사람들”…예술 생태의 비밀스러운 허브

새벽강에서 펼쳐졌던, 지역 예술인들 모임 자료사진. /사진=독자

1990년대 남노송동에서 시작해 장소를 옮기며 38년간 전주의 예술가들을 품어온 새벽강은 연극·풍물·문학·미술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들던 공간이었다.

“혼자 가도 반드시 누군가와 어울리게 되는 기묘한 술집”, 유 작가가 설명한 새벽강의 풍경은 한 시인의 말처럼 “전주의 예술적 기운이 농축된 곳”에 가까웠다.

새벽까지 이어지던 토론, 굿판과 즉흥 공연, 돈 없는 예술가에게 ‘그냥 내주던’ 안주, 실패와 고민을 털어놓던 밤들. 새벽강은 단순한 술집이 아니라 전주의 ‘비공식 예술학교’이자 지역 문화의 허브였다.

시인 박남준, 화가 박민평, 소설가 안도현, 음악인 전인권·나윤선, 영화감독 진모영 등 수많은 예술인이 이곳을 거쳐 갔다.

△ ‘한 사람의 생애’가 아니라 ‘한 공동체의 연대기’

‘은자전’은 강은자 개인의 소장품전처럼 보이지만, 기획자들은 “전시의 주인공은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유 작가는 “강은자는 가능하게 한 매개였을 뿐. 30년 동안 그곳을 드나들며 서로를 위로하고 키워낸 사람들, 그들이 만든 관계가 전시의 핵심이다”고 말했다.

그 말처럼 이번 전시는 회화·판화·소품 231점 외에도 편지, 사진, 장식물, 포스터, 영상 등 새벽강을 드나든 이들이 남긴 흔적을 모두 펼쳐 보이는 아카이브형 전시다.

‘새벽강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마음과 시간을 모아 준비했고, 그 과정 자체가 한 공동체의 연대기를 다시 쓰는 일이었다.

△ 문을 닫으며 여는 축제

새벽강 외관. /사진=독자

강은자 대표는 최근 몇 년 사이 “이젠 그만하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 최근들어 MZ세대 맛집으로 바뀐 지금의 새벽강에서는 예전처럼 밤새 술판을 벌이는 풍경도 보기 어렵다.

그는 “남이 해주는 안주에 술 먹으며 놀러 다니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그렇기에 이번 전시는 어쩌면 ‘소장품을 병풍 삼아 한 번 더 모여 놀자’는 초대장이자, 한 시대가 문을 닫기 전에 남기는 마지막 인사처럼 느껴진다.

△ 지역문화의 한 장면을 붙잡는 일

새벽강 소장품전 홍보물. /사진=독자

‘은자전’은 새벽강이라는 한 술집을 통해 지난 30여 년간 전주 예술 생태가 어떻게 흘러왔는지 보여주는 드문 기회다. 강은자가 모은 그림 231점은 사실 한 개인의 취향을 넘어서 전주의 문화사를 비추는 입체적 기록이다.

유대수 작가는 말했다.

“새벽강에서 술 마시고 울고 웃고 춤추던 그 시간들이 사실은 전주의 문화사였다는 걸 이번 전시가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이 전시의 의미입니다.”

‘새벽강에는 은자가 산다.’

오래도록 사랑받았던 이 문장이 이제 전시로 되살아난다.

전현아 기자

전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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