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 비평』 봄호에 실린 고은 선생의 시가 사람들 입에 올랐다. 「껍데기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시는 '…껍데기는 가라//저 60년대 후반 이래/아직껏/껍데기는 가라/껍데기는 가라/입 열면/마구 나와버리는/이 뜨거운 것//허나 어찌 껍데기 없이/내 알맹이 온전히 살아 있으리오/어찌 껍데기 내칠수록/내 엄하고 가련한 알맹이 함부로 내치는 일 아니리오'하다가 결국 '껍데기는 오라 어서'로 마무리짓고 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신동엽의 시 「껍데기를 가라」를 염두에 두고 쓴 시로, 그 시절의 껍데기와 이 시절의 껍데기가 어떻게 달리 인식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38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를 '껍데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한 시인 신동엽.
요즘 젊은 세대들은 동명이인의 개그맨은 잘 알아도 민족시인 신동엽에 대해서는 잘 모를 것이다. 충남 부여 태생이지만 전주사범학교를 나온 신동엽은 1959년에 등단하여 10년 남짓 작품활동을 하다가 시집 한 권 변변히 펴내지 못한 채 짧은 생애를 마쳤지만, 오히려 사후에 더 큰 관심을 받고 민족시인의 반열에 올랐다.
특히 80년대 이후 민족, 민중, 민주 운동과 함께 그의 시는 민족의 현실을 일깨워주는 굳은 결기와 감수성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의 삶은 그의 결기대로 쉽게 흘러가지만은 않았다. 6.25 이후 부여에 인공이 선포되자 신동엽은 민주청년동맹 선전부장으로 이른바 공산당에 협력했다. 부여가 수복된 후에는 처형을 피해 산으로 올라갔고, 나중에는 그러한 삶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국민방위군으로 들어가지만 이른바 '국민방위군 사건'(국민방위군 고급장교들이 국고금과 군수물자를 착복, 9만여 명에 이르는 방위군이 굶어죽거나 얼어죽은 사건)이 터져 집으로 귀환하는 도중, 극도의 굶주림과 고통 속에서 날로 먹은 참게 때문에 간디스토마균에 감염, 몇 년 후 간암으로 타계한다.
민족이 양편으로 나뉘어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형태의 삶을 견디지 못했던 신동엽은 어느 한편에 가담하는 것 자체를 야만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서사시 「금강」을 집필한 것도 민족사의 큰 물줄기로 과거와 미래를 온전히 기억하고, 또한 그것을 바람직한 모습의 하나로 통합하고 말겠다는 굳은 의지의 천명이었던 것이다.
그가 타계한 지 36년. 문화관광부에서 정하는 이달의 문화인물로 신동엽 시인이 선정됐다. 부여군에서는 4월 9일부터 15일까지 신동엽 시인을 기념하는 다양한 문화행사를 펼치고 문인으로는 최초로 『신동엽 문학도록』을 발간할 예정이라고 한다. 시인의 크기와 무게에 비하면 다소 늦은 감도 없잖아 있지만, 문화인물 선정을 계기로 신동엽의 시 정신이 더 널리 알려졌으면 한다. 그가 남기고 간 시와 사랑과 혁명에 대한 고백은 아직도 깊은 울림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내 일생을 시로 장식해 봤으면. 내 일생을 사랑으로 채워 봤으면. 내 일생을 혁명으로 불질러 봤으면. 세월은 흐른다. 그렇다고 서둘고 싶진 않다.'
/김선경(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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