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중순 국회 대정부 질문장을 웃음바다로 만든 전라도 사투리 「거시기」!
대선 불법 정치 자금에 연루돼 수감 중인 정치인들에 대한 사면론을 제기하는 한 여당 의원이 웃으면서 “장관께서 건의하면 좀 거시기 한지?” 라고 직접 표현하기 어려운 대목을 「거시기」로 얼버무리니 의원석에 앉아있던 여야 의원들도 모두 따라 웃었다. 답변에 나선 장관도 웃으며 “거시기라는 말은 잘 모르겠지만 저도 거시기에 대해 생각해 보겠다.” 라고 대답했다. 그 날 국회 방청객들도 틀림없이 함께 웃었을 것이니 개그 프로그램 방청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필자도 TV뉴스를 보면서, 신문을 읽으면서 웃었듯이 많은 시청자와 독자들도 웃었을 것이다. 국민들이 국회 때문에 웃어본 적이 과연 몇 번이나 있을까? 욕설과 비난, 삿대질과 고성으로 소란스럽기만 했던 국회를 모처럼만에 웃음바다가 되게 한 전라도 사투리 3글자 「거시기」- 참 거시기한 힘이 있는 것 같다.
사전을 찾아보니 「거시기」를 대명사로 사용할 때는 「말하는 도중에 사람이나 사물의 이름이 얼른 떠오르지 아니할 때 그 이름 대신으로 내는 말」이고, 감탄사로 쓰일 때는 「말하는 도중에 갑자기 말이 막힐 때 내는 군말」이라고 쓰여 있다.
어디에나 써도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말 「거시기」의 용도는 무한하다. 무엇인지 말문이 막히고 말면 항용으로 누구나 허물없이 두루뭉술하게 「거시기」로 얼버무리지만 마음에서 마음으로 통하는 신통력이 있다. 이제 「거시기」는 전라도나 전라도 출신만이 쓰는 사투리에서 전국적인 표준어(?)가 되었다.
고향출신 서정주 시인의 「거시기의 노래」라는 시가 있다.
<팔자 사난 거시기가 옛날 옛적에 대국으로 조공가는 뱃사공으로 시험 봐서 뽑히어 배타고 갔네. 삐그덕 창피하지만 아무렴 세 때 밥도 얻어먹으며 거시기, 저 거시기…….> 8연으로 된 이 시에는 주인공 이름대신 「거시기」로 표현한 곳이 5번, 후렴「거시기, 거시기, 저 거시기…….」가 24번, 총 29번의 「거시기」가 나온다. 거시기가 쏜 화살이 운 좋게 마귀를 쓰러뜨렸고, 덕택에 용왕딸 얻어 오순도순 살았다는 해피엔딩이어서 좋았다. 팔자>
60년대 중반 신병 내무반 신고식 때의 일화가 생각난다. 신고식이 고약하다는 것은 익히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강심장이라 해도 긴장되고 겁먹어서 부동자세를 해도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리고, 목은 타들어 가고, 눈앞은 아롱거리고, 현기증이 나기 때문에 제 정신이 아니다. 격식에 따른 신고가 끝나면 짓궂은 질문으로 골탕을 먹이고 괴롭힌다. (이것이 신고식의 하이라이트)
“너 고향이 어디야? / 전라도 입니다!”
“인마! 전라도가 다 네 고향이야? / 전라도 거시기 입니다!”
“이 XX! 거시기가 어디야? / 저 거시기 입니다.”
급하고 겁나서 거시기만 연발해 그 후 거시기 이병이 되었다.
「거시기」는 사용하는 때와 장소, 상황에 따라 뜻이 다르지만 다 통한다. “「거시기」가 뭐여?” 라고 딴전 부리면 알면서도 괜히 능청떠는 것이다. 싸움만 하던 국회를 웃긴 「거시기」는 대한민국 사투리 중에서 가히 대표적이라 할 수 있고 국민들이 모두 통할 수 있어 표준말(?) 수준까지 올랐으니 무형 문화재 급이라 할 수 있다.
「거시기」는 토속적이고 된장냄새가 난다. 「거시기」에는 인정이 있고 정감이 넘친다. 웃음바다를 만든 「거시기」의 힘. 우리들에게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주는 「거시기」를 비롯한 사투리를 연구하고 보존하는 일 또한 고향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일이다.
/은희현(제주 문화방송 전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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