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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향에서] 부탄이 던진 질문, 전북은 어떻게 답할 것인가

전북과 도내 지자체의 비전을 보면 경제성장, 기업·미래산업 유치, 일자리 만들기 등 익숙한 구호가 대부분이다. “전주, 다시 전라도의 수도로!”, “시민이 함께하는 자립도시 군산”, “전북권 4대 도시로 웅비하는 김제” 등을 내세우며 강한 경제, 성장도시, 세계축제도시 등을 표방한다. 그러나 전북의 현실은 17개 광역시도 중 재정자립도가 가장 낮고, 수도권에서 거리가 멀며, 인구도 적고 감소하는 추세이다. 16개 광역시도를 상대로 한 기업유치와 성장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어려운 여건이다. 그렇다면 문제의식을 달리 해야 하지 않을까? ‘전북을 경제와 산업 측면에서 얼마나 크게 성장시키느냐’가 아니라 ‘전북의 여건에서 전북 사람으로 어떻게 더 잘 살 수 있느냐’를 묻는 것이다. 역사도시 전주와 근대도시 익산, 항구도시 군산과 평야도시 김제, 임산물이 풍부한 무(주)진(안)장(수) 등이 지닌 서로 다른 정체성, 지리산·덕유산과 새만금, 비빔밥, 동학농민혁명 등이 켜켜이 쌓아 온 생활환경과 삶의 양식을 바탕으로 미래 설계를 해야 한다. 성장과 경쟁 위주가 아닌 삶의 질과 행복을 중심에 두는 행정이 필요하다. 부탄은 그 가능성을 보여 준다. 인구는 전주보다 조금 많은 80만명 정도이고 면적은 남한의 1/3정도인 히말라야 산악국가 부탄은 국내총생산(GDP:Gross Domestic Product)이 아니라 국민총행복(GNH:Gross National Happiness)을 국가 목표로 삼는다. GNH는 ①지속가능하고 공정한 사회·경제 발전, ②환경 보전, ③전통문화 보존과 계승, ④좋은 거버넌스라는 네 기둥을 중심으로 설계되었다. 부탄 정부는 심리적 웰빙, 건강, 시간 활용, 교육, 문화 다양성과 회복력, 좋은 거버넌스, 공동체 활력, 생태 다양성과 회복력, 생활수준 등 9개 영역에 1백30여 개 이상의 세부 지표를 정해 정기적으로 행복조사를 실시하고, 각 지역과 계층의 행복 수준과 격차를 면밀히 분석한다. 모든 법안과 개발계획은 사전에 ‘행복 영향 평가’를 받으며, 조사결과는 예산 배분과 제도 개선의 기준이 된다. 물론 전북이 따라야 할 모범이 부탄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성장은 수단이고 국민 행복이 궁극의 목적’이라는 철학, 그리고 그 목적을 계량화해 행정 전 과정에 반영하는 방식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전북 역시 산업을 육성하더라도 일자리의 안정성과 삶의 질을 함께 고려하도록 지표를 설계할 수 있다. 또 한옥마을과 판소리, 산과 갯벌과 논을 보여주기식 관광 재료가 아니라 다음 세대에 물려줘야 할 자산이라는 관점에서 활용 계획을 세울 때, 경제와 함께 역사·문화·생태·지역공동체도 살릴 평가 체계를 만들 수 있다. 읍·면 단위까지 생활환경, 문화·여가, 돌봄·복지, 주민 자치 등을 종합한 ‘전북형 행복지수’를 만들어 이를 예산 편성의 기준으로 삼는 것도 상상해 볼 수 있다. ‘전북특별자치도가 가는 길이 대한민국이 가는 길’이라면, 그 길은 그럴싸한 구호가 적힌 현수막 나부끼는 길이 아닌 사람과 산업, 역사와 자연이 조화를 이루며 도민의 행복을 키워 가는 전북만의 길이어야 한다. 전북의 장점인 농생명·바이오·역사와 전통·자연과 휴식·맛과 멋·생활문화와 공동체성을 어떻게 지속가능한 행정 목표로 구체화할 것인지, 도민 행복을 어떻게 측정하고 예산과 제도에 반영할 것인지에 대한 성찰적인 논의가 필요한 때다. 내년 6월이 지방선거이기 때문에 더 그렇다. 김춘석 한국리서치 여론조사 부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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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2.17 17:36

[타향에서] 법조계의 양심, 중립성을 성찰하다

최근 국회에서 논의되는 내란전담 특별재판부 설치 법안과 법왜곡죄 신설 법안은 우리 사법제도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다. 이러한 법안들이 공론의 중심에 서면서, 변호사 단체가 어떠한 견해를 밝혀야 된다는 사회적 기대가 컸다. 그 과정에서 한국여성변호사회에도 여러 회원과 외부 기관으로부터 견해 표명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이 요청들은 가볍지 않았고, 단체의 미래와 정체성, 그리고 법조계 전체의 공공성을 종합적으로 고민할 수밖에 없는 무거운 시간이 이어졌다. 특히 대한변호사협회가 중대한 현안임에도 불구하고 신속한 입장을 내지 않은 데 대한 많은 아쉬움이 제기되면서, 여성 변호사들 사이에서는 여성변호사회가 보다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요구가 이전보다 강했다. 이 요청들은 단순한 의견 진술이 아니라 우리 단체의 미래와 정체성, 그리고 법조계 전체의 공공성을 종합적으로 재고해야 하는 무거운 과제다. 한국여성변호사회가 대한변협을 무시하거나 충돌하는 방식의 견해 표명은 단체 간 조화뿐만 아니라 법조계 전체의 신뢰를 고려할 때 신중할 수밖에 없다. 회장으로서 단체의 자율적 의사표현과 직역 내 상호 존중이라는 책임 사이에서 어떤 선택이 가장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지에 대해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 복잡한 문제는 정치적 중립성의 기준이 법조인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는 점이다. 같은 사안을 두고도 누구는 “중립”이라 판단하고, 누구는“편향”이라 지적한다. 법조인의 사회적 경험, 정치적 감수성, 개인적 가치가 중립성 판단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현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단체 내부에서도 이러한 차이는 의견 형성 과정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회장으로서 이런 차이를 어떻게 조정해야 할지, 어떤 기준으로 전체의 합의를 이룰 수 있을지 깊은 고뇌 속에 놓였다. 한국여성변호사회는 설립 이후 여성·아동·취약계층을 위한 법률 지원에 집중해 왔다. 우리 단체의 사회적 신뢰는 정치적 이해관계와 무관하게 공익적 활동을 꾸준히 수행해 온 기반 위에 쌓여 왔다. 그런데 최근 정치적 민감성이 큰 사안들에 대해 적극적인 의견 표명을 요구받는 일이 잦아지면서, 본래의 공익 활동이 의도치 않게 정치적 해석의 대상으로 비칠 수 있다는 우려도 함께 제기되고 있다. 단체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과, 회원들의 요구에 응답해야 한다는 책임 사이에서 선택은 쉬울 수가 없었다. “정치적 중립성과 공익적 활동은 어떻게 조화될 수 있을까?” 정치적 중립성은 단체가 모든 사안에 침묵하겠다는 뜻이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판단의 기준이 특정 정치적 입장이 아니라, 법률가가 지켜야 할 원칙과 헌법적 가치, 인권 보장의 기준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개인의 성향이 공적 판단에 개입하지 않도록 부단한 성찰이 필요하며, 단체 차원에서도 객관적 기준을 마련하려는 꾸준한 논의가 뒤따라야 한다. 앞으로도 사회적 논쟁이 발생할 때마다 한국여성변호사회에 견해 표명을 요청하는 목소리는 더욱 커질 것이다. 이러한 요구가 증가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우리 여성변호사회의 활동에 대한 긍정적 평가이자 사회가 여성변호사회에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이러한 점에서 회장으로서 큰 보람과 책임을 동시에 느낀다. 한국여성변호사회는 앞으로도 공익적 사명을 중심에 두고 흔들림 없이 나아갈 것이다. 급격한 사회 변화 속에서 어떤 사안에 대해 책임 있는 목소리를 낼 것인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는지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민하며 공익 단체로서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해 나갈 것이다. 왕미양 한국여성변호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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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2.10 18:45

[타향에서] 거주지 국외 이전과 조세 전략

대재산가 등 거주자의 해외 이민 또는 해외법인 설립 사례가 늘고 있다. 삶의 질, 자산관리 또는 글로벌 비즈니스 확대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조세부담을 줄이기 위한 전략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싱가포르·말레이지아 등 상속세가 없는 국가로 이민을 떠나고, 홍콩·BVI 등 저세율 국가에 법인을 설립해 사업 거점을 해외에 둔 것처럼 꾸미거나 명의신탁을 활용하는 사례도 있다. 문제는 이들의 사업 의사결정이나 생활 중심지가 실질적으로 한국이라면 무거운 세금과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사모펀드 A사는 홍콩에 지주회사를 두고 국내 주식에 투자하여 큰 차익을 거두었지만, 국세청은 투자 의사결정 및 자산관리 활동이 실제 한국에 거주하는 경영진에 의해 수행되었다는 이유로 실질적 관리장소를 국내로 판단해 법인세를 추징했다. 또한, 대재산가 B씨는 싱가포르로 이민을 갔지만, 실제 B씨와 가족들은 연중 상당한 기간을 한국에 머물며 사업체의 주요 의사결정을 직접 챙기고 있다. 이 경우 향후 한국 거주자로 판정되어 무거운 세부담을 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법률상 국적이나 주소 이전만으로 거주지 변경이 인정되는 시대는 지났다. 세법은 “형식이 아니라 실질”을 본다. 외국에 등록된 법인이라도 실질적 관리장소가 한국에 있으면 내국법인으로 간주되고, 이민을 갔더라도 생활근거, 가족, 자산, 사업 의사결정이 국내에 존속한다면 한국 거주자로 보게 된다. 거주지 국외 이전을 통한 절세전략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첫째, 형식적 해외 이주는 당장은 세부담이 가볍지만, 추후 세무조사에서 소득세·법인세·상속세가 한꺼번에 부과될 위험이 크다. 이제는 조세회피처 국가에 설립된 법인, 신탁 및 금융계좌 정보까지도 과세당국 간 정보교환의 대상이 된다. 둘째, 법인과 개인 모두 국제조세 기준이 강화되었다. 우리나라 등 대다수 국가는 실질 기준에 따라 과세권을 배분하는 OECD 권고안을 이미 국내법에 반영했다. 단순히 해외에 주소를 두거나 페이퍼컴퍼니를 세우는 방식은 더 이상 유효한 절세수단이 아니다. 셋째, 형식적 해외 이전은 내부 지배구조나 자금흐름의 투명성을 떨어뜨려 회사 가치에도 부정적이다. 해외법인이 국내에서 사실상 운영되는 구조는 회계투명성, 이전가격 리스크 등 여러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준비하고 대응해야 할까? 첫째, 해외 이주나 해외법인 설립이 필요하다면, 생활·경영의 중심을 해외로 실질적으로 이전해야 한다. 체류기간, 가족거주, 사업 의사결정구조의 재편이 모두 함께 움직여야 한다. 둘째, 기업의 경우 해외법인에 독립적 의사결정구조, 직원과 사무실, 회의·계약체결 등 실질 활동이 존재해야 내국법인 간주 위험을 줄일 수 있다. 셋째, 개인·기업 모두 국제조세, 상속세, 이전가격 규제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사전 세무진단 서비스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이민, 지배구조 변경, 해외 자산이전은 전체 구조 속에서 설계되어야 한다. 거주지의 국외 이전은 선택이다. 그러나 세법은 그 선택의 실질을 평가한다. 형식만 해외로 옯겨 놓는 조세회피 시도는 결국 더 큰 세금과 위험으로 돌아온다. 해외 이전이 필요하다면, 그만큼 정직하고 투명한 구조 설계가 필요하다. 법과 현실 모두에서 정당한 글로벌 세무전략을 세워야 할 때다. 김명준(법무법인 태평양 고문, 前 서울지방국세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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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2.03 18:42

[타향에서] 탄소 4억 톤 문턱, 대한민국이 세계에 서명한 ‘신뢰 약속’

정부가 국제사회에 제출한 2035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는 단순한 수치를 넘어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 공식적으로 남긴 약속이자, 국가의 품격과 신뢰를 가늠하는 기준선이다. 온실가스 감축은 이제 환경정책의 영역을 넘어 산업 경쟁력과 미래 성장 전략, 나아가 다음 세대의 삶을 지켜낼 국가적 선택이다. 우리의 새로운 NDC는 2018년 대비 53~61% 감축으로 확정되었다. 이는 1990년대 초반 국가 총배출량 수준으로 돌아가는 규모이며, 현재 쓰는 에너지의 절반 이상을 덜어내야 하는 도전이다. 결코 쉬운 목표는 아니지만, 우리가 피할 수 없는 길이기도 하다. 정부는 목표 달성 경로를 규제와 제도 중심의 감축은 물론, 기술혁신·인센티브·국제협력을 활용한 추가 감축까지 명확히 구분했으며, 미래세대 부담 완화와 산업계 수용성 등 다각적인 원칙을 고려해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특히 우리나라 배출 구조에서 전력과 산업 부문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만큼, 에너지 믹스 전환과 혁신적인 기술 개발 없이는 감축 자체가 불가능하다. 건물과 수송 부문 역시 전기화와 효율 개선이 핵심이다. 결국 어느 한 분야의 노력만으로는 목표 달성이 어렵고, 전 부문의 구조적이고 과감한 전환이 시급하다. 감축 목표의 적정성이나 산업 부담에 대한 이견은 존재하지만, 감축목표를 꾸준히 상향하며 국제사회 신뢰를 지켜온 국가들이 결국 기술·시장·투자에서 주도권을 확보해 왔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유럽연합의 재생에너지 육성이나 미국 IRA 정책이 이를 증명한다. 한국 역시 이제는 “가능한가?”를 묻던 시대를 넘어,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를 논해야 할 단계에 진입했다. NDC 이행은 대한민국의 국제 신뢰를 시험하는 엄중한 과정이다. 한 번 잃은 신뢰는 회복하기 어렵다. 이를 위해 우리는 다섯 가지 원칙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첫째, 정부·기업·국민 등 모든 주체가 목표를 정확히 이해하고 하나의 목표선을 바라봐야 한다. 둘째, 기술·규제·재정·투자를 부문별로 정교하게 설계하여 구체적인 실행 전략을 가져야 한다. 셋째, 정부와 산업계, 학계, 연구기관, 국제기구가 함께 움직이는 전 국가적인 역량 확장이 필요하다. 넷째, 객관적 데이터에 기반한 감축 실적을 투명하게 공개하여 국제사회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기후 대응이 의무가 아닌 우리 삶과 국가 경제의 생존을 좌우하는 문제임을 모두가 이해하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전환의 흐름 속에서 전북은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 있다. 재생에너지, 농생명, 수소, 미래형 산업구조 전환 등에서 전북은 ‘한국형 저탄소 성장모델’을 선도적으로 설계할 수 있는 최적의 지역이다. 필요하다면 넷제로 2050 기후재단도 지역의 성공적인 전환을 돕고 실행 가능한 기후 전략을 구축하는 데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IMF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팬데믹 등 수차례의 더 큰 위기를 극복해 온 나라다. 탄소 4억 톤, 4억 5000 톤을 줄이는 일은 결코 작은 도전이 아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세계에 약속한 신뢰이며, 다음 세대에게 반드시 물려줄 최소한의 책임이다. 이제 선언의 시대를 넘어, 모두가 함께 참여하고 행동하는‘실행의 시대‘를 열어야 할 때다. 장대식 넷제로 2050 기후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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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26 18:19

[타향에서] 4년을 맡길 사람, 전화 한 통화로 뽑을 것인가?

그리스에서는 2006년 아테네 교외 마루시에서 사회당 PASOK이 시장 후보를 숙의형 공론조사로 선출하는 실험을 했다. 무작위에 가깝게 뽑힌 시민들이 주말 동안 시정 현안과 후보들의 정책을 학습하고, 소규모 토론과 전체 질의응답을 거친 뒤 비밀투표로 후보를 선택했다. 전화 한 통으로 인지도 높은 이름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정보와 토론을 기반으로 유권자가 직접 후보를 검증한 것이다. 이 사례는 정당 내부 공천 과정에 숙의민주주의를 접목해 기존 여론조사 중심 경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음을 보여준다.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시도이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2016년 국민의당이 광주광역시 5개 선거구 국회의원 후보를 숙의 공론화 방식으로 선출해 모두 당선시킨 경험이 있고, 올해 민주당도 평당원 최고위원 선출 과정에서 같은 방식을 도입해 전북 출신 30대 청년인 박지원 최고위원을 선택한 바 있다. 인지도와 조직 동원력이 아니라, 정보를 충분히 제공받은 시민·당원이 토론과 숙고를 거쳐 ‘준비된 사람’을 선택해 낸 결과다. 숙의 공론화 방식의 후보 선출은 특정 계파의 이해관계를 넘어, 당 전체와 지역사회의 장기적 이익을 중심으로 후보를 평가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이와는 달리 선거후보 공천 방식으로 광범위하게 활용되어 온 전화여론조사는 유권자의 검증을 사실상 생략한 절차에 가깝다. 짧은 통화 속에서 유권자는 후보의 경력, 정견, 정책을 제대로 접할 수 없고, 서로 다른 후보를 비교 평가할 기회도 없다. 익숙한 이름과 이미지, 동원된 조직과 광고, 유력 정치세력의 천거가 결과를 좌우하고, 그 여파로 무자격·무능력 후보가 지자체장으로 선출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 번 그렇게 뽑힌 지자체장은 최소 4년 동안 자리를 유지하고, 시민은 그 기간을 무기력하게 감내할 수밖에 없다. 이는 민주주의가 단지 투표 행위로 축소될 때 어떤 위험이 발생하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전북처럼 민주당 당내 경선이 곧 본선이나 다름없는 지역에서는 이러한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민주당 공천이 사실상 당선을 의미한다면, 민주당 후보 공천 과정은 곧 유권자의 선택권이 실질적으로 행사되는 처음이자 마지막 관문이다. 그 과정이 인지도 조사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후보에 대한 충분한 정보 제공과 비교·검증의 기회, 시민이 질문하고 숙고할 수 있는 장을 보장하는 것이야말로 전북 유권자의 권리를 존중하는 길이다. 지역 언론과 시민사회, 정당이 함께 협력해 공개 토론회와 숙의 패널, 온라인 중계 등을 결합한 새로운 경선 모델을 설계할 수도 있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전북의 광역·기초단체장 후보 선출 방식으로 숙의 공론화 모델을 도입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작위에 가까운 유권자 선발과 균형 잡힌 자료 제공, 숙의 과정과 비밀투표를 결합한 공론화 절차는 유권자에게는 더 나은 정보와 숙고의 기회를, 정당에게는 경쟁력 있고 책임감 있는 후보 선출 기회를 제공한다. 호남에서의 민주당 후보, 영남에서의 국민의힘 후보처럼 공천이 곧 당선인 지역일수록 당내 공천 과정은 숙의민주주의에 걸맞게 재설계 할 필요가 있다. 만일 전북이 내년 지방선거에서 이러한 방식을 선도적으로 도입한다면 지방자치를 회복하고, 한국 정당정치를 한 단계 성숙시키는 모범을 창출하게 될 것이다. 김춘석 한국리서치 여론조사부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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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19 17:36

[타향에서] 품격은 시간으로 쌓이지 않는다

얼마 전 평소 온화하고 신중하던 지인이 어두운 표정으로 찾아왔다. 조심스레 이유를 묻자 한숨 섞인 답이 돌아왔다. “오랜 세월 존경하던 선배에게 실망했습니다.” 그는 오랜 인연의 선배가 금전적 어려움을 호소했을 때 기꺼이 도왔다고 했다. 당시 선배는 간곡히 부탁했고, 그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선배는 일이 잘 풀리자 태도를 바꿨다. 감사는커녕 도움받은 일조차 잊은 듯 행동했다. 지인의 표정엔 분노보다 허탈함이 짙었다. 나이가 들면 저절로 현명해지고 성숙해질 거라 믿는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흘러가지만, 그 시간이 모두에게 지혜를 남기진 않는다. 오히려 어떤 이들은 세월 속에서 배은망덕(背恩忘德)을 합리화하고 자기 이익만 좇는다. “그땐 어쩔 수 없었다”는 말 한마디로 신의를 덮고 관계를 계산으로 바꿔버린다. 오래전 한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나이 먹는다고 다 현명해지는 건 아니야. 오히려 비합리적으로 변하는 사람도 있지.” 그땐 과장처럼 들렸지만, 지금은 그 의미가 또렷하다. 우리 사회는 연륜을 존중한다. 나이가 곧 경험이고, 경험이 곧 지혜라 여긴다. 유교 문화의 영향으로 연장자를 공경하는 미풍양속이 뿌리 깊다. 하지만 경험이 반드시 지혜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세월은 얼굴에 주름을 남기지만, 마음에는 반드시 깊이를 새기지 않는다. 품격은 시간으로 쌓이는 게 아니라 매 순간의 선택으로 만들어진다. 진정한 성숙은 나이를 먹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를 돌아보며 부끄럽지 않게 사는 일이다. 은혜를 잊지 않고 약속을 지키는 태도. 그 단단한 마음이 사람의 품격을 결정한다. 누군가는 30년을 살아도 여전히 자기중심적이고, 누군가는 30년을 살며 타인의 아픔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 된다. 차이는 시간이 아니라 그 시간 동안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변화했느냐에 있다. 최근 사회 곳곳에서 원로라 불리는 이들의 민낯이 드러나는 사례를 본다. 지위를 이용한 갑질, 후배에 대한 무례, 공과 사의 혼동. 나이와 경력은 높지만 존경받지 못하는 어른들이다. 세월은 그들에게 권위를 주었지만 품격은 주지 않았다. 그들은 나이를 방패 삼아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지만, 주변은 이미 그 허상을 꿰뚫어 본다. 반대로 젊은 나이에도 깊은 품격을 지닌 이들이 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원칙을 지키고, 작은 은혜도 잊지 않으며, 자신보다 약한 이를 배려하는 사람들. 이들에게선 나이를 뛰어넘는 무게가 느껴진다. 그들은 나이가 아니라 태도로 존중받는다. 결국 중요한 건 살아온 시간이 아니라 그 시간을 어떻게 채웠느냐다. 매일 조금씩 자신을 돌아보고, 잘못을 인정하며, 타인에 대한 예의를 잃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 그가 진짜 어른이다. 나이 듦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성숙은 의식적인 선택이다. 세월불대인(歲月不待人),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 무심한 시간 속에서도 진심을 잃지 않으려면 스스로 마음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수기치인(修己治人), 남을 탓하기보다 먼저 자신을 닦는 일. 그것이 품격의 시작이다. 지인과 헤어지며 생각했다. 겉의 나이는 어쩔 수 없지만, 마음만큼은 언제나 곧고 따뜻하게 지키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가 나를 떠올릴 때, 나이가 아니라 사람됨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세월이 깊다고 마음까지 깊은 건 아니지만, 마음을 곧게 지키는 사람은 어느 나이에도 존경받을 것이다. 왕미양 한국여성변호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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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12 18:11

[타향에서]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조세정책과 우리 기업의 대응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조세정책은 한마디로 ‘감세를 통한 국익우선’이다. 미국 제조업의 부활과 국내 일자리 확대를 목표로 세제를 산업정책의 도구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단순한 감세가 아니라, “어디서 생산하느냐에 따라 세금이 달라지는” 구조적 신호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GILTI(Global Intangible Low-Taxed Income)와 FDDEI(Foreign-Derived Deduction Eligible Income) 제도다. GILTI는 해외 자회사가 저세율 국가에서 벌어들인 소득을 본사 차원에서 과세하는 장치로, 트럼프 2기에서는 과세범위를 확대하는 한편 외국납부세액공제를 90%까지 허용했다. 반면 미국 내에서 생산·수출하는 기업에는 FDDEI 공제를 통해 법인세율(21%)보다 낮은 최대 14%의 실효세율을 적용한다. 즉, “미국에 공장을 세우면 세금이 줄고, 해외에 두면 세금이 늘어난다.”는 명확한 신호다. 여기에 청정에너지 세액공제(IRA)나 리쇼어링 투자공제 등 각종 인센티브가 더해지면서, 미국에 생산거점을 둔 기업은 실제로 법인세 부담이 10%대 중반까지 낮아지는 반면, 해외생산 기업은 GILTI나 BEAT(세원잠식방지세제)로 인해 20%대 세율을 부담해야 한다. 이른바 ‘세율을 통한 산업정책’이다. 예컨대, 한 국내 전자부품 기업은 그간 동남아 공장에서 생산해 미국 완성차업체에 납품해 왔으나, 트럼프 2기 정부 들어 FDDEI 혜택과 상호관세 부과가 동시에 적용되자 미국 현지 조립공장 설립을 검토하고 있다. 세제와 관세가 맞물려 기업의 공급망 구조 자체를 바꾸는 셈이다. 문제는 우리 기업의 대응이 아직 충분히 체계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미국의 제도는 OECD가 주도한 ‘글로벌 최저한세’와 방향이 다르다. 미국은 글로벌 최저한세를 공식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GILTI·FDDEI·BEAT 등 자국형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 기업이 단순히 OECD 기준인 ‘15% 실효세율’만 맞추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계산방식과 과세기준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첫째, 국가별 실효세율(ETR) 시뮬레이션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한국·미국·베트남 등 주요 생산거점별로 실제 세부담을 실시간 비교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세액공제 제도의 국제적 정합성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OECD는 ‘환급가능 세액공제(QRTC)’만을 실효세율 산정시 우호적으로 인정한다. 따라서 정부는 비환급형 R&D 공제나 투자세액공제를 QRTC형으로 전환해 세제 인센티브의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 셋째, 이전가격(Transfer Pricing) 정책의 재설계가 필요하다. 미국 내 기능확대에 맞춰 이익배분 기준을 다시 정비하고 세무당국과의 사전합의(APA)를 통해 리스크를 줄여야 한다. 결국 트럼프 2기 정부의 조세정책은 단순한 감세정책이 아니라, 세금으로 설계된 산업정책이다. 조세가 통상과 외교, 산업전략의 핵심 수단으로 작동하는 시대다. 우리 기업이 이 변화의 파고를 기회로 바꾸려면, 국가별 세제·관세·공급망을 통합 관리하는 글로벌 세무전략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이제 조세는 단순한 비용이 아니라, 기업 경쟁력을 결정짓는 또 하나의 자본이 되었다. 김명준(법무법인 태평양 고문, 前 서울지방국세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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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05 17:50

[타향에서] ‘통합의 지혜’로 여는 지속가능한 미래, 넷제로 2050 국제기후포럼

인류는 지금 문명의 미래를 결정할 중대한 전환점에 서 있다. 기록적 이상기후는 ‘기후위기’가 더 이상 미래의 경고 아닌, 오늘 우리 눈앞 현실임을 생생히 보여준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 넷제로 2050 기후재단은 인류의 지속가능한 미래 해법 모색을 위해 2022년부터 꾸준히 국제기후포럼을 개최, 지혜를 모았다. 재단은 2022년 아프리카 기후 불평등을 다루었고, 2023년 유럽 선진국의 탄소중립 전략, 2024년 기후테크 기반 대응 방안을 논의하며 전문성·신뢰를 쌓았다. 매년 포럼을 지탱한 큰 동력은 발표자·토론자의 진정성 있는 참여, 뜨거운 질의응답과 활발한 토론으로 좌석을 메운 참석자들, 그리고 전북 도민의 깊은 관심과 적극적인 참여였다. 이는 필자의 큰 소회이자 보람이었다. 이들의 열의 없이는 재단의 국제기후포럼은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넷제로 2050 기후재단은 그간 노력을 집대성하여 재단 창립 5주년을 맞아 제4회 국제기후포럼을 개최한다. 「전환의 기로에서: 글로벌 기술, 협력, 정책 이행으로 여는 지속가능한 미래」라는 부제 아래, 우리는 기존 포럼 한계를 넘어 기후기술(Tech), 정책(Policy), 국제협력(Cooperation), 기업 대응 전략(Corporate Strategy)을 총괄하는 ‘통합형 종합 국제포럼’을 준비했다. 기후위기는 한 분야 노력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복합 과제이기에, 모든 요소의 유기적 연동이 필수라는 신념에서 기획됐다. 전 세계 유례없는 다층적·종합적 접근 방식을 시도한다. 오늘 포럼에는 인류 지속가능성 비전을 제시해 온 반기문 제8대 유엔 사무총장이 기조연설로 자리를 빛낼 예정이다. 주한 독일·덴마크 대사, 각국의 외교사절, 국내외 정부 관계자, 학계·선도 기업 최고 전문가들을 비롯해 약 800여 명의 참석자가 모인다. 특히 전북 지역을 대표하는 한병도 국회의원과 정헌율 익산시장 등 주요 인사들도 대거 참여하여 포럼의 깊이를 더하고 의견을 리드할 것이다. 탄소중립 에너지 전환 선도국 덴마크와 독일의 그린에너지 비전, 한국의 기후테크 활성화 정책, 글로벌 기후 거버넌스 대응, 국내외 기업 실질적 탄소중립 전략 및 경쟁력 강화 방안 등 심층적 논의가 활발히 펼쳐질 것이다. 존경하는 전북 도민 여러분, 기후위기 대응은 더 이상 특정 전문가 몫이 아니다. 삶의 터전이자 미래 세대 자산인 전북의 아름다운 자연을 지키고 지속가능한 지역 경제를 만드는 중요한 문제다. 탄소중립 사회 전환은 지역 경제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고,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창출할 잠재력을 갖는다. 오늘 국제포럼에서 논의될 세계 각국의 지혜와 전략은 많은 전북 도민의 깊은 관심과 참여 속에서 전북이 기후변화 대응을 선도,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루는 소중한 밑거름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넷제로 2050 기후재단은 앞으로도 인류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통합 해법을 모색하고, 실질적 기후행동 촉진에 앞장설 것이다. 이 길에 적극적으로 함께해 주는 여러분과 전북 도민들의 지속적 관심과 참여는 우리 모두가 '전환의 기로'를 성공적으로 헤쳐 '지속가능한 미래'로 나아가는 큰 힘이 될 것이다. 부디 이 포럼이 지구를 살리고, 우리 모두의 내일을 밝히는 이정표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장대식 넷제로 2050 기후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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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29 17:41

[타향에서] 왜 여론조사 결과는 내 생각과 다를까?

신문이나 방송을 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의문을 품는다. 대통령 국정운영 평가나 정당 지지도, 계엄이나 탄핵에 대한 국민 인식 조사를 접할 때 특히 그렇다. 전북처럼 진보 성향이 강한 지역에서는 그 간극이 더욱 크게 느껴질 것이다. “우리 주변 사람들은 다 이재명 대통령을 잘한다고 하던데 왜 긍정평가가 60%밖에 안 되지?”, “윤석열 전 대통령이 30% 넘는 긍정평가라니, 너무 높지 않나?” 하는 반응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여론조사는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생각만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다. 전국의 다양한 연령, 지역, 성별 등을 대표하도록 설계된 표본을 대상으로 한다. 즉, 전북만이 아니라 전국의 민심을 비율에 맞게 반영한 결과라는 점을 잊기 쉽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를 기준으로 보면, 호남은 약 10%, 대구·경북도 10%, 부산·울산·경남이 16%, 충청 10%, 수도권이 절반가량을 차지한다. 따라서 전북을 포함한 호남 사람들의 의견이 전국 여론조사에서 10명 중 1명꼴로 반영된다고 보면 된다. 이념 성향으로도 진보 25%, 보수 25%, 중도 50% 안팎으로 분포한다. 이런 전국적인 구성비를 고려해 조사하기 때문에, 특정지역이나 성향의 여론만으로는 전체 결과를 가늠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전북에서는 이재명 대통령에 대한 긍정평가가 80%를 넘을 수 있지만, 영남 지역에서는 과반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 전국 평균 60%라는 수치는 이런 상반된 지역별 결과를 종합한 ‘대표값’인 셈이다. 결국 여론조사는 ‘내 생각’이 아니라 ‘국민 전체의 평균적인 생각’을 비율대로 담아낸 사회의 거울이다. 나와 내 주변의 의견과 다르다고 해서 조사가 틀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차이를 통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점은, 여론조사 결과가 ‘사실’이나 ‘진실’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여론조사에는 항상 오차가 존재한다. 조사 대상이 전체 국민이 아니라 무작위로 뽑힌 일부 표본이라는 특성 때문에 표본오차가 발생한다.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3%p의 오차범위라면, 50%라는 결과는 실제로 47~53% 사이일 개연성이 높다는 뜻이다. 비표본오차는 질문 문항이 분명하지 않거나, 자료처리를 잘 못했을 때 발생한다. 사람이 수행하는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오차로, 표본오차보다 더 클 때도 있다. 따라서 여론조사 결과는 표본오차와 비표본오차를 감안한 추정치로 이해해야 한다. 조사방법의 차이도 결과를 달리 만든다. 숙련된 면접원이 직접 응답자와 대화하며 수행하는 전화면접조사는 대표성이 높고 응답률도 상대적으로 높다. 반면 기계음에 의한 자동응답(ARS) 방식은 응답률이 낮고 정치 관심도가 높은 사람들의 응답이 몰릴 가능성이 커 왜곡이 생기기 쉽다. 그래서 과학적인 표본 설계와 절차를 거친 조사인지, 아니면 특정 대상자 중심으로 여론을 단순히 집적하여 보여주는 비과학적 조사인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여론조사를 이해하고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이런 여러 요소를 함께 살펴보는 수고로움이 요청된다. 그러나 그 수고만큼 우리는 더 실재에 가깝게 민심을 읽을 수 있다. 여론조사는 내 주변의 세상보다 훨씬 넓은 세상을 비춰주는 창이다. 그 창을 통해 보이는 모습이 낯설다 해도, 그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온전한 모습에 가까울 수 있다. 김춘석 한국리서치 여론조사부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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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22 18:19

[타향에서] 나이 들수록 그리운 이름, 고향

젊을 때는 고향이 그저 '떠나온 곳'이었다. 서울의 빠른 공기 속에서 살다 보면, 정읍의 느린 걸음과 흙냄새가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상하게도 그 느림이 그리워지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더 따뜻하게 다가온다. 고향은 어느새 내 마음의 쉼표가 되어 있었다. 몇 년 전, 서울의 한 모임에서 우연히 정읍 출신 선배님 한 분을 만났다. 첫인상은 아주 세련되고 도시적인 분이었다. 어딘가 거리를 두는 듯한 차분한 눈빛. 옷차림도 깔끔하고 말투도 또렷했다. 그래서일까, 처음에는 조금 까다로울지도, 아니 솔직히 말하면 좀 도도해 보이기까지 했다.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가 있었다. 그런데 내 이름 앞에 '정읍 후배'라는 단어가 붙는 순간, 그분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아이고, 우리 정읍 후배야?" 그 한마디와 함께 도도해 보이던 얼굴이 환하게 펴지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그날 이후로 그분은 나를 챙겨주셨다. 행사장에서 멀리서라도 나를 보면 환한 미소로 다가와 "잘 지냈지, 난 항상 우리 후배 응원하고 있네" 하고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처음 만났을 때의 도회적인 말투는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나를 만나면 같은 고향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억양과 어투로 말을 하셨다. 표준어 같지만 표준어가 아닌, 그 미묘한 억양 속에는 서울에서 오랜 세월 감춰왔던 고향의 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돌아보면, 고향이란 그런 것 같다. 특별한 이유 없이도 서로 마음이 닿는 사람들, 그리고 말 한마디에 마음이 풀어지는 공간 말이다. 서울에서 살아온 세월이 길어질수록, 나는 점점 고향 사람들에게 마음이 끌린다. 그들이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고, 꾸밈없는 정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 선배님처럼, 고향 사람 앞에서는 오랫동안 숨겨왔던 진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고향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가끔 주말 아침, 유난히 푸르고 맑았던 고향 하늘이 떠오르는 날이면 그 선배의 말이 떠오른다. "고향 사람은 만나면 그냥 반가운 거야. 이유가 없어." 그 말 속에는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정과 믿음이 담겨 있었다. 학벌도, 직장도, 지위도 중요하지 않았다. 같은 땅을 밟고 자랐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삶이 점점 복잡해질수록, 사람 사이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우리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곳에는 계산 없는 정이 있고, 서툴지만 진심이 있으며, 말보다 눈빛으로 마음을 전할 줄 아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오직 같은 고향 사람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미묘한 억양과 어투로 서로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편안함이 있다. 요즘처럼 각박한 시대에, 고향은 우리에게 여전히 필요한 마음의 안식처다. 나이가 들어가며 깨닫는다. 고향은 단지 내가 태어난 장소가 아니라, 여전히 나를 품어주는 사람들의 마음이라는 것. 그리고 그 마음은 세월이 흘러도, 내가 어디에 있든, 변함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그 앞에서는 서울에서 쌓아온 겉모습을 벗어던지고, 편안하게 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오늘도 나는 마음속으로 그 이름을 조용히 불러본다. 정읍, 그리고 나의 고향 사람들. 왕미양 한국여성변호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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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15 18:22

[타향에서] AI 시대의 일자리, 이재명 정부의 과제

인공지능(AI) 시대는 더 이상 미래가 아니다. 제조업의 공장라인, 금융기관의 단순 사무, 유통매장의 계산대처럼 익숙한 풍경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다. 대신 데이터 분석가, 앱 개발자, AI 윤리전문가처럼 몇 년 전만 해도 낯설던 직업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기술이 일자리를 빼앗는 동시에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고 있는 것이다. AI 시대는 단순한 기술혁신을 넘어 경제·사회·문화 전반에서 인공지능이 핵심 동력으로 작동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의미한다. 최근 한국 정치·경제의 중심 화두 역시 ‘AI 대전환’이다. 이재명 정부는 AI를 국가 성장의 엔진으로 삼고, 제조·금융·복지·교육 등 전 산업에 AI를 확산시키며 고용서비스와 평생교육 체계를 개편하고 AI 융합산업에 대한 세제·금융 지원도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일자리의 양과 질 모두를 혁신하겠다는 포부다. 그러나 방향이 옳다고 해서 성과까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정책의 성패는 계획 속 구호가 아니라 노동자·중소기업·지방 등과 같은 경제적 약자가 현장에서 실제로 체감하는 변화에 달려있다. AI 시대의 핵심 과제는 단순히 일자리 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새로운 기술환경 속에서 안정된 생계와 의미있는 일을 함께 누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데 있다. 실제로 19세기 영국의 러다이트 운동(Luddite Movement)은 기계가 노동을 대체하자 일자리를 지키려던 노동자들의 저항으로 촉발됐다. 그러나 역사는 기계가 일자리를 빼앗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산업을 재편하고 새로운 직종을 만들어왔음을 보여준다. AI 역시 단순·반복 업무는 빠르게 줄이겠지만, 창의성·판단력, 윤리성과 공감능력이 필요한 영역에서는 오히려 더 많은 기회가 열릴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이러한 전환이 결코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교육·훈련 체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많은 노동자들이 변화의 파고 속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정부가 풀어야 할 과제는 세 가지다. 첫째, 교육혁신이다. 단순 지식의 주입이 아니라 문제해결능력, 데이터 활용역량, 인간적 소통능력을 키우는 방향으로 교육이 시급히 바뀌어야 한다. 특히 평생교육 체계를 강화해 노동자들이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일자리를 옮길 수 있는 사다리를 마련해야 한다. 둘째, 포용적 성장이다. AI가 만들어내는 부와 기회가 대기업과 수도권에만 집중되지 않도록 중소기업·지방·취약계층을 위한 지원 장치를 확대해야 한다. 기술 대체로 인한 실업과 소득격차를 완화할 사회안전망의 보강이 절실하다. 셋째, 윤리와 규범 확립이다. AI가 의사결정을 대신하는 영역이 확대될수록 투명성과 책임성, 공정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수적이다. AI가 인간의 일을 대신할 때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단순한 생계 수단을 넘어 성취와 창의성, 공동체적 연대를 담는 새로운 노동의 가치를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 디지털 혁명이 전통 산업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 효율적이고 편리한 방향으로 진화시켰듯이, AI 시대 역시 일자리의 종말이 아닌 진화의 길을 향해 갈 가능성이 높다. 중요한 것은 사회가 그 변화의 속도와 방향을 어떻게 조율하느냐다. 이재명 정부가 그 길을 올바르게 열어줄 때 비로소 AI는 두려움이 아닌 희망의 동력이 될 것이다. 김명준 전 서울지방국세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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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01 17:16

[타향에서] 인생의 행운 ‘로또’는 단 한명, ‘탄소중립’은 전 인류의 당첨!

생각이 복잡할 땐 그냥 걷는다. 걷다 보면 묘하게 마음이 정리되곤 한다. 어느 날도 그랬다. 천천히 걷던 길, 문득 복권 판매점 앞에 길게 늘어선 사람들을 보게 됐다. 그들의 얼굴엔 기대, 희망, 그리고 왠지 모를 설렘이 가득했다. ‘오늘은 내가 1등?’ 그 표정에서 인생 한 방을 향한 간절함이 묻어났다.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한 가지. ‘우리 인류에게도 저렇게 간절히 바라는 꿈이 하나 있다면?’ 바로 탄소중립이다. 누군가는 로또로 인생 역전을 꿈꾸고, 누군가는 탄소중립으로 미래의 전환을 꿈꾼다. 로또는 운에 맡겨야 하는 일이지만, 탄소중립은 우리가 함께 만들 수 있는 확실한 당첨이다. 그것은 특정 개인이 아닌, 모든 세대를 위한 진짜 ‘대박’이다. 기후위기의 속도는 이미 예측을 앞서고 있다. 한 해가 다르게 반복되는 폭염, 이상기후, 산불, 가뭄. 자연은 분명히 신호를 보내고 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 무엇인가 바꿔야 한다는 것을. 기후위기는 경고를 끝냈고, 이제는 행동만이 답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탄소중립은 단지 이산화탄소를 줄이는 기술적 접근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삶을 선택하고, 어떤 세상을 후손에게 물려줄 것인지에 대한 가치의 선언이다. 더 나아가 탄소중립은 우리 사회의 구조를 공정하게 재편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에너지 소비와 생산의 전환 과정에서 에너지 복지의 사각지대를 살필 수 있고, 미래 세대를 위한 교육과 일자리 창출이라는 부가가치도 함께 기대할 수 있다. 이는 단순한 환경 문제가 아닌, 정의로운 전환의 문제이기도 하다. 또한, 국가 차원의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 기업에는 탈탄소 혁신을 유도하고, 금융에는 ESG 기준을 뿌리내리게 하며, 시민에는 행동 실천을 유도할 수 있는 정책 설계가 중요하다. 지자체, 중앙정부, 산업계, 시민사회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기후 거버넌스’ 구축이 탄소중립의 성패를 좌우할 것이다. 단순한 캠페인을 넘어서 시스템 차원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탄소중립은 거창한 이상이 아니라, 지금 당장 우리가 손에 쥘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희망이다. 물론 과정은 쉽지 않다. 탄소를 줄이는 일은 에너지 시스템을 바꾸고, 생활 방식을 조정하고, 산업 구조를 재편하는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길의 끝에 있는 보상은 상상 이상이다. 로또처럼 운에 맡길 게 아니라, 함께 계획하고 실천해야 얻을 수 있는 ‘확실한 당첨’이다. 우리 넷제로 2050 기후재단은 그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좋은 에너지, 좋은 기후환경, 더 좋은 세상’을 기치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시민교육, 기업 연계 프로그램, 지자체와의 협력사업, 탄소중립 실천 캠페인까지. 탄소중립은 더 이상 먼 이야기나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일상의 선택으로 스며들어야 할 실천이다. 생각해 보면, 로또는 단 한 명의 삶을 바꿀 수 있지만, 탄소중립은 모든 인류의 미래를 바꾼다. 그 가능성과 파급력은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우리는 이제 기다릴 수 없다. 기후위기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있다. 탄소중립은 누군가의 몫이 아니라, 모두의 책임이다. 우리가 함께 결단하고 함께 실천할 때, 그 어떤 복권보다 값진 행운은 반드시 찾아온다. 그것이 바로 인류의 최애이자 최선의 길, 탄소중립이다. 장대식 넷제로 2050 기후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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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9.24 18:41

[타향에서] 경청(傾聽)으로 모두가 평안한 한가위를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인 추석이 다가온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한국리서치는 추석을 앞두고 국민들의 행동과 생각을 매년 정기적으로 조사하고 있다. 2024년 8월 말 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69%는 추석에 따로 사는 가족을 만난다. 추석의 의미를 묻자 50%가 ‘가족·친지와의 화합’을 꼽아 1위를 차지했고, 36%는 ‘휴식과 재충전’을 선택하여 2위에 올랐다. 추석은 여전히 일가와 친척이 모여 공동체의 온기를 느끼면서, 살아갈 힘을 또 다시 얻는 시간임을 알 수 있다. 조사 결과에 따라 사람들을 구분해 보니, 추석을 가족과 정을 나누는 명절로 여기는 ‘가족 중심 전통주의자’가 23%, 가족은 물론 지인과의 관계를 다지는 ‘인간관계 중시자’는 13%를 차지했다. 합이 36%이다. 그리고, 휴식과 재충전에 무게를 두는 ‘휴식 추구자’는 32%로 그 다음을 차지했다. 그런데, 명절을 경제적·정신적 부담으로 느끼는 ‘명절 부담자’도 16%에 이르렀다. 5천1백만 인구의 16%면 816만명이다. 적지 않은 사람이다. 정신적 부담에 명절 대화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언론과 정치권은 흔히 명절을 ‘민심의 변곡점’이라 말한다. 가족 친지가 모이면 정치 이야기가 활발하게 오갈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정치보다는 생활 이야기를 나누거나 휴식을 즐기려 한다. 정치나 정치인에 대한 대화는 으레 얼굴을 붉히거나 감정의 골이 패이기 십상이다.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는 가족의 안부와 일상사를 나누며 서로의 정(情)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는 것이다. 그렇지만, 애정을 앞세운 말이 부지불식 간에 상처를 남길 수 있다. 나의 생각과 마음에 갇혀 마주하는 사람의 표정과 말을 세심하게 살피지 않는 일방적 대화는 부담과 불편을 야기할 수 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경청(傾聽)’이다. 경청은 귀뿐만 아니라 몸까지 기울여 상대의 말을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경청을 잘 하기 위해서는 ‘개시개비(皆是皆非)’의 정신이 필요하다. ‘개시(皆是)’는 모두가 옳다는 의미이다. 자신보다 이야기 상대에 방점이 있다. 누구의 어떤 이야기에도 진실이 있음을 믿고 존중한다는 자세이다. 장님 한 사람이 코끼리를 만진 후의 표현은 기둥, 벽, 동아줄, 부채 등으로 불완전할 수 있지만, 이 또한 코끼리 형상의 일부에 해당한다는 이치와 맞닿아 있다. 이와 달리 ‘개비(皆非)’는 모두가 그를 수 있다는 의미이다. 상대보다는 나에 대해 저어하는 마음이다. 나의 생각과 주장에 잘못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상대를 향해 나를 열어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과학적 절차를 거쳐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보편적인 생각을 확인하는 여론조사 결과를 해석할 때도 늘 오차를 전제하듯, 제한되고 제한된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염두에 두라는 경고이다. 개시와 개비 두 마음이 함께할 때 비로소 귀와 몸이 온전히 상대방을 향할 수 있다. 경청은 소극적으로 듣는 행태가 아니라, 상대에 대한 존중과 자신에 대한 겸허를 바탕으로 한 적극적인 소통 행위이다. 그러기에 경청은 가족과 이웃, 더 넓게는 사회의 화합을 가능케 하는 출발점이다. 다가오는 추석, 가족과 친지의 목소리에 귀와 몸을 기울이면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 안에 담긴 진실을 발견하고자 노력해 보자. 나의 욕구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잠시 유보해 보자. 그러면 함께하는 가족과 친지뿐만 아니라, 누구보다 내가 평안해짐으로써 모두가 풍성한 한가위가 될 수 있으리라. 김춘석 한국리서치 여론조사부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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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9.17 18:13

[타향에서] 출간의 기쁨, 고향의 품에서 다짐으로

지난 8월, 필자의 책 『두 번째 기회를 위한 변론』 출간기념회를 가졌다. 오랜 고민 끝에 세상에 내놓은 첫 책이었기에 필자에게는 벅찬 날이었지만, 정작 가장 큰 감동은 책이 아니라 사람들의 존재에서 왔다. 고향 친구들, 고등학교 은사님들, 그리고 수많은 지인이 자리를 함께해 주었다. 수백 명이 모여 보내주신 응원은 책 출간이라는 개인적 사건을 넘어선 공동의 축제가 되었다. 사실 출간기념회는 필자에게는 처음 일이었다. 다행히 후배 여성 변호사들이 발 벗고 나서서 준비를 도와주었지만, 그래도 부족한 게 너무 많았다. "사람들이 과연 올까?" "준비가 미흡해서 실망하게 하는 건 아닐까?" 온갖 걱정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행사 당일, 철저한 준비를 위해 3시간 일찍 행사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행사 시작 1시간 전부터 지인들이 한두 분씩 오시기 시작하더니, "사인 좀 해주세요"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점점 늘어났다. 예상치 못하게 긴 줄이 형성되었고, 계획했던 마지막 준비는 물 건너가고 말았다. 그날 행사장은 고향에서 열차를 타고 올라오신 고등학교 은사님들부터 고등학교 동창들, 고향 친구들과 선배님들까지 수백 명이 빼곡히 자리를 메워주셨다. 필자를 키워준 고향의 모든 분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었다. 서울에서 오랜 세월 변호사로 살아오며 고향을 자주 찾지 못했다. 마음속에 늘 미안함이 남아 있었는데, 이번 자리에서 보여주신 따뜻한 마음은 필자에게 큰 울림이 되었다. 오랜만에 뵌 은사님의 눈빛은 학창 시절의 기억을 되살렸고, 친구들의 격려는 고향의 정을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그날 필자는 자신이 어디에서 출발했고 무엇으로 성장했는지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책은 필자가 13년간 파산관재인으로 활동하면서 얻은 경험과 성찰의 산물이다. 2400여 명이 넘는 채무자들을 만나며, 빚 때문에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의 절망과 희망을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실직과 병환, 사업 실패, 돌이킬 수 없는 선택들…. 사연은 제각각이었지만, 모두에게는 절망의 끝자락에서도 다시 서고자 하는 간절한 의지가 있었다.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한 '파산=인생의 끝'이라는 편견을 바꾸고 싶었다. 파산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며, '두 번째 기회'라는 제도의 참된 가치를 알리고 싶었다. 그 마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집필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과연 이런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아도 될까?" 수없이 망설이고 주저했다. 그런 필자에게 고향은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과 은사님들의 따뜻한 가르침이 책을 출간하는 힘이 되어주었다. 이번 출간기념회에서 고향의 은사님들과 친구들, 선배님들이 보여주신 환대와 격려는 이 책이 단순한 개인의 기록을 넘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사회적 희망의 메시지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걱정 반 설렘 반으로 준비했던 첫 출간기념회가 이렇게 성황리에 마무리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바쁜 중에도 시간내어 도와준 후배 여성 변호사들과 참석해 주신 고향의 모든 분들 덕분이었다. 특히 행사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켜주신 은사님들과 친구들, 선배님들의 정성과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출간의 기쁨은 언젠가 옅어지겠지만, 그날 고향에서 받은 뜨거운 응원과 격려는 오래도록 가슴에 남을 것이다. 필자는 다짐한다. 앞으로도 인생의 벼랑 끝에 선 이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돕는 일을 멈추지 않겠다고.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언제나 고향과 고향 분들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겠다고 말이다. 왕미양 한국여성변호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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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9.10 18:45

[타향에서] 상장주식 과세, 성장과 공정을 함께 보는 시선

최근 정부가 상장주식의 양도소득세 대주주 기준을 종목당 50억 원에서 10억 원으로 낮추고, 증권거래세율을 인상하는 방안을 추진하면서 논란이 뜨겁다. 이재명 정부의 ‘코스피 5천 시대’ 공약과 시장활성화 기조에 역행한다는 비판과 윤석열 정부의 감세조치를 복원하고 조세형평성을 되살리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옹호론이 맞서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조치가 자본시장 정상화와 조세형평성 및 세입기반 강화라는 두 목표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가이다. 현재 한국경제는 안팎으로 복합위기 상황이다. 안으로는 고령화, 저출산, 가계부채, 자산양극화가 경제의 기초체력을 저하시키고, 밖으로는 글로벌공급망 불안과 통상환경 악화가 수출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있다. 민간의 소비·투자·수출이 부진한 가운데 정부의 민생회복 소비쿠폰 정책은 적시에 투입된 ‘긴급수혈’이지만, 일시적 부양책만으로는 경제 체질을 개선할 수 없다. 저성장이 구조화된 상황에서는 경기가 살아나도 세입이 자동으로 늘지 않는다. 플랫폼 경제, 경제의 서비스화, 제조업 기반의 해외 이전을 특징으로 하는 글로벌·디지털 경제시대에서는 세입구조의 개혁이 없을 경우 세입기반은 약화되기 쉽다. 세입기반을 튼튼히 하려면 새로운 세원 발굴을 통한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세원 확보가 긴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조세형평성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우리 조세구조의 가장 큰 문제는 수평적 형평성의 부재다. 근로소득자는 유리지갑이지만, 자영업자는 소득파악에 한계가 많고, 주식·파생상품·가상자산 등 자산소득에는 광범위한 비과세·감면이 적용된다. 지난해 말 금융투자소득세 폐지로 상장주식 양도차익 과세는 사실상 고액 대주주로 국한되었고, 증권거래세는 거래단계에서만 부과돼 장기 보유에 따른 대규모 차익에는 세부담이 매우 낮다. 배당소득 과세 역시 분리과세와 종합과세 기준이 뒤섞여 있어 금융자산 보유자가 상대적으로 유리한 조세구조다. 금융자산 보유자는 근로·사업소득자보다 낮은 세율을 적용받는 불균형이 발생하고, 이런 구조가 지속되면 조세의 수평적 형평성이 무너지고 세입기반 역시 취약해진다. 물론, 자본시장 활성화를 위한 과세 완화가 단기적으로 거래량을 늘리고 투자 심리를 회복시킬 수는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세원잠식을 심화시키고, 근로소득자와 자산소득자 간 불공정 과세를 고착화시킬 위험이 크다. 따라서 자본시장 세제개혁은 성장과 공정의 균형 위에서 설계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금융투자소득세를 단계적으로 재도입해야 한다. 혁신기업 투자에 대해서는 일정 한도 비과세를 유지하되, 고액·단기 차익에는 정상과세를 적용해 과세 공백을 줄여야 한다. 둘째, 증권거래세율은 점진적으로 인하하되, 양도소득 과세강화와 병행해 장기투자를 유도하는 방향으로 개선해야 한다. 셋째, 배당소득 과세체계는 분리·종합과세 기준을 명확히 해 금융소득 과세의 일관성과 공정성을 확보해야 한다. 세금은 단순한 재정수단이 아니다. 경제주체들의 행동을 유도하고, 사회의 공정성을 유지하는 핵심 장치다. 주식소득 과세를 둘러싼 이번 논쟁은 자본시장의 활력을 높이면서도 조세형평성과 세입기반을 함께 강화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점을 일깨운다. 성장과 공정,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세제개편이야말로 한국 경제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여는 열쇠다. 김명준 전 서울지방국세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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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9.03 17:30

[타향에서] 에너지 패권을 넘어서, 전북의 기후 공존 전략

미국의 경제·사회학자 제러미 리프킨은 <The Third Industrial Revolution>(2011), <The Green New Deal>(2019) 등 저서에서“재생에너지 기반의 분산형 시스템”이 미래 경제질서의 핵심이 될 것이라 주장해 왔다. 그는 유럽연합(EU)과 중국의 탄소중립 전략에 자문하며,‘세 번째 산업혁명’이라는 비전을 정책으로 연결해온 대표적 실천 지성이다. 최근 리프킨은 캐나다 에너지 산업이 여전히 화석연료 의존에 머문다고 지적하며 이를 “대륙주의적 사고(Continentalism)”라 불렀다. 단기적 이익에 매몰되면 세계적 재생에너지 전환 흐름에서 뒤처진다는 경고다. 그는 기후위기 대응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며, 재생에너지와 기후기술이야말로 미래 패권 자산이라고 강조한다. 반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기후와 에너지 문제를 경제·안보 패권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최근 캐나다를 “미국의 51번째 주처럼 다룰 수 있다”고 비하하며 고율 관세와 에너지 무기화를 시사한 것은 국제 공조보다 힘의 논리를 앞세운 행보였다. 이에 비해 리프킨은 협력과 공존을 해법으로 제시하며, <The Green New Deal>에서 “화석연료 문명은 2028년까지 붕괴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EU는 그의 전략을 정책에 반영했고, 중국은 장기 탄소중립 로드맵 수립에 그의 조언을 참고했다. 이는 오늘의 한국, 그리고 전북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전북은 새만금이라는 세계적 재생에너지 잠재지와 전국 최대 농업 기반, 풍부한 해양·바람 자원을 갖추고 있으나, 재생에너지 인프라와 기후기술 산업화 속도는 여전히 더디다. 산업구조 전환과 국제 협력 전략도 뚜렷하게 자리 잡았다고 보기 어렵다. 지금 전북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명확하다. 첫째, 국내적 전략으로는 재생에너지·수소·바이오에너지 등 특화 자원을 기반으로 한‘기후기술 산업 클러스터’구축이 필요하다. 새만금 태양광·풍력 프로젝트를 단순 발전사업에 머무르지 않고, 배터리·수소 저장·스마트그리드 등 연계 산업으로 확장해야 한다. 또한, 농업과 기후기술을 접목한 ‘탄소 저감형 농업’ 모델 개발은 기후정책과 식량안보 전략의 핵심 축이 될 수 있다. 둘째, 국제 전략으로는 아시아·아프리카 신흥국과의 재생에너지 협력 거점이 되어야 한다. 새만금의 재생에너지 기술·운영 경험을 해외에 수출하고, 국제 기후포럼이나 P4G 같은 다자협력 플랫폼에 전북 이름으로 참여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외교 활동을 넘어, 전북형 기후외교·경제외교의 새 모델이 될 수 있다. 셋째, 기후위기를 대응하는 과정에서 ‘지역민 참여’를 정책 중심에 둬야 한다. 리프킨이 강조했듯, 에너지 전환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시스템과 시민의식의 변화에서 완성된다. 지역 주민이 생산자이자 소비자로 참여하는 ‘에너지 자립 마을’과 같은 분산형 모델을 확대하면, 경제적 이익과 환경적 이익을 동시에 거둘 수 있다. 트럼프식 패권 에너지 전략은 단기적으로 힘을 줄 수 있지만, 리프킨식 기후 공존 전략은 장기적 번영을 보장한다. 전북이 지금 선택해야 할 길은 분명하다. 에너지를 힘의 도구로만 보는 과거의 사고를 넘어, 협력과 혁신, 지속가능성을 축으로 한 미래 전략을 실행하는 것이다. 오늘의 결정이 전북의 50년 뒤, 그리고 대한민국의 100년 뒤를 좌우할 것이다. 장대식 넷제로 2050 기후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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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8.27 18:30

[타향에서] 공론화를 통해 전주·완주 통합의 길을 찾자

타지에서 살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지만, 고향 전북에 대한 애정은 되려 깊어가고 있다. 자연스레 숱한 뉴스 중에서도 전북 관련 소식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요즘은 전주와 완주의 행정통합 논란에 눈길이 자주 간다. 그런데, 관련 소식을 접하면서 기대감보다는 안타까움이 앞선다. 지역 발전을 위한 논의가 정작 지역민의 피로와 분열을 키우고, 또 다시 좌절을 안기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를 감출 수 없다. 행정통합은 단순히 행정구역 재조정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지역의 정체성과 재정 구조, 주민들 일상의 삶, 공직자의 일자리, 나아가 공동체의 미래에 영향을 주는 중대한 변화다. 이러한 사안을 결정함에 있어 주민의 생각과 입장을 정확히 확인하고 충실히 반영해야 하는 일은 민주적 자치 행정의 필수 요건이다. 완주와 전주가 통합을 하든 하지 않든, 시민과 군민이 행정통합과 관련한 다양한 쟁점을 이해하고, 논의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과정의 정당성이 확보되고, 결과에 대한 수용성이 높아진다. 지금까지 행정통합 관련 민심을 파악하는 방식은 주로 여론조사였고, 현재도 여론조사 방식이 거론되고 있다. 최근에 완주군에서는 복수의 여론조사 결과를 근거로 통합 반대 여론을 형성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여론조사는 단순 쟁점에 대한 다수의 의견을 빠르게 파악하는 데 유용하지만, 깊이 있는 판단을 담기에는 한계가 있다. 정보가 부족하거나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즉흥적으로 답하는 경우가 있고, 왜곡된 정보나 유도성 설문에 기반한 응답 결과도 적지 않다. 여론조사는 순간의 반응을 수치로 보여주는 것이지, 사실관계와 그의 여파에 대한 진지한 숙고를 반영하는 방법은 아니다. 1997년 첫 시도 이후 벌써 네 번째 추진되는 전주·완주 행정통합처럼 갈등이 누적되고 쟁점이 다양한 난제일수록 단순 여론이 아닌 ‘공론’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공론은 전문가가 제공하는 정보를 일반 시민이 충분히 학습하고, 서로 입장이 다른 사람들과 질서정연하게 토의하고 숙고하며, 스스로 입장을 정돈하는 숙의 과정을 통해 형성된 정제된 여론이다. 공론이 형성되는 과정을 공론화라 하는 바, 공론화를 통해 생각의 변화와 공감의 확장까지 결합된 깊이 있는 대화가 가능하다. 우리는 공론화의 모범적인 사례를 2017년 신고리 5·6호기 공론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완주와 전주 행정통합 공론화를 시행할 경우, 공론화의 목적은 통합 여부를 결정하는 데 있지 않고 정제된 여론인 공론을 확인하는데 있다. 행정절차상 통합 여부는 주민투표나 의회 의결을 통해 최종 결정한다. 하지만, 행정통합 문제에 대한 주민투표나 의회 의결 여부 판단 및 해당 결과에 대한 사회적 수용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숙고한 시민의 목소리를 확인하는 절차를 거칠 필요가 있다. 이는 자치 단체장이나 의회 의원이 중심인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숙의민주주의를 구현하는 방편이기도 하다. 전주와 완주의 행정통합은 지역 공동체의 미래를 다시 그리는 일이다. 시민과 군민이 그 의미와 영향을 충분히 이해하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공론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야 통합 여부와 상관없이 논의 과정 자체가 완주와 전주를 넘어 전북 공동체를 더 성숙하게 할 것이다. 김춘석 한국리서치 여론조사 부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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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8.20 18:32

[타향에서] 부서진 사람들을 다시 세우는 일

변호사 26년, 파산관재인 13년. 그동안 만난 채무자가 2,400여명이다.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다. 카드로 현금서비스를 받아서 바로 고깃집으로 직행하는 사람들, 기초생활수급자면서도 카드 돌려막기에 빠진 사람들을 보며 ‘답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파산 뒤에는 단순한 무책임만 있는 게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가난, 제대로 된 교육 기회의 부재, 홀로 감당해야 할 양육의 짐, 그리고 갑작스러운 질병이나 실직. 이런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결국 파산이라는 절벽으로 내몰린 것이었다. 최근 정부가 장기 연체자 채무조정 방안을 내놓자 “성실한 사람들만 바보 되는 세상”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충분히 이해한다. 열심히 빚을 갚는 사람들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를 하나의 대가족이라 생각해보면 어떨까. 열 형제 중 몇은 똑똑하고 성실해서 잘살고, 몇은 실수도 많고 판단력도 부족해 늘 곤경에 빠진다. 그렇다고 잘사는 형제가 못사는 형제를 집에서 내쫓을 수는 없지 않은가. 많은 파산 신청자들의 이야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어려서부터 가난했고, 가정의 울타리를 경험하지 못했다. 이혼과 별거로 홀로 아이를 키우다 지쳐 쓰러진 경우도 많다. 근본적인 생활 패턴과 사고방식이 바뀌지 않으면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들을 포기할 수는 없다. 누구나 한순간에 추락할 수 있다. 성실하게 살던 사람도 갑작스러운 사고나 경제 위기 앞에서는 속수무책이 될 수 있다. 평생 모범적으로 살다 사업 실패나 보증 문제로 파산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파산관재인 13년간, 수많은 사람들의 절망과 좌절을 지켜보며 깨달은 것이 있다. 개인의 파산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 구조의 문제이고, 때로는 운의 문제다. 그래서 국가의 안전망은 필수다. 채무조정과 파산 제도는 실패한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 아니라,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돕는 최소한의 ‘사다리’다. 그렇기에 이 제도는 단기적 시혜가 아니라 장기적 투자다. 채무자의 재기를 돕는 일은 단순히 한 개인을 살리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가족과 이웃, 더 나아가 지역사회 전체를 회복시키는 힘을 지닌다. 회생한 사람은 다시 경제활동에 참여하고 세금을 내며, 소비를 통해 시장을 살린다. 이는 사회 안전망이 단순한 복지가 아니라 경제 활성화의 기초임을 보여준다. 또한 채무조정은 과거의 잘못을 덮어주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삶을 설계할 기회를 주는 제도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재정 교육과 생활 습관의 변화이며, 정부와 사회가 함께 감시하고 지원해야 한다. 그래야 같은 이유로 무너지는 악순환을 막을 수 있다. 물론 도덕적 해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이해한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공동체의 모습이 아닐까. 결국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한 사람의 실패는 사회 전체의 아픔이고, 한 사람의 회복은 사회 전체의 희망이다. 그렇기에 정부의 채무조정 정책을 지지한다. 이는 약자를 보호하고 사회 통합을 이루는 현명한 선택이다. 더 나은 공동체로 가는 길에서 우리는 누구도 뒤에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 왕미양 한국여성변호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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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8.13 19:16

[타향에서] 출산율 반등의 실마리, 프랑스 가족수당에서 배운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합계출산율은 0.75명에 머물렀다.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50년 후 인구 3천만 명의 대한민국을 상상하기도 싫다. 정책당국이 수년째 저출산 해법을 놓고 씨름 중이지만, 성과는 미미하다. 이재명 정부는 아동수당 확대 등 가족친화적 과세제도 도입을 추진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가 보여주는 경험은 값진 참고서가 될 수 있다. 프랑스는 한때 출산율이 1.6명까지 떨어졌지만, 2000년대 이후 2.0명 전후로 회복시킨 대표적 국가다. 그 중심에는 다자녀 가정을 실질적으로 우대하는 가족수당 제도가 있다. 프랑스 가족수당 제도는 소득과 관계없이 자녀 수에 따라 매월 현금급여를 지급한다. 두 자녀 가정엔 약 140유로(약 22만원), 세 자녀 이상부터는 금액이 급격히 증가하는데, 세 자녀 가정은 약 320유로(약 51만원) 이상을 받는다. 네 자녀 이상 가정에는 추가 보너스와 주거수당, 교통비 감면 등 다양한 부수혜택도 제공된다. 또한 소득세 과세표준 산정시 자녀 수를 고려하는 ‘가족단위 소득분할제도(Quotient familial)’를 병행하여 세부담이 줄어드는 효과도 크다. 자녀를 많이 낳을수록 현금지원과 세금감면이 동시에 작동하는 구조다. 프랑스의 가족수당은 단순한 출산장려금이 아니다. 육아와 생활 전반의 비용을 장기적으로 보전해주는 역할을 한다. 이 때문에 지속적이고 예측가능한 혜택을 원하는 젊은 부부들의 신뢰를 얻었고, 결과적으로 출산율 반등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특히 소득이 높으면 일부 감액되긴 하지만, 중산층 이상의 가정이 혜택을 체감할 수 있어 제도의 수용성과 실효성이 높다. 우리나라도 아동수당과 출산장려금을 꾸준히 확대하고 있다. 그러나 자녀 수 증가에 따른 차등 우대가 약하거나 단기 일회성 지원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다자녀일수록 양육비 부담이 크게 늘어나는 현실을 감안하면, 현행 제도는 충분한 유인책이 되지 못한다. 프랑스처럼 현금급여와 세제가 함께 작동하고 자녀 수에 따라 혜택이 크게 증가하는 구조, 모든 계층이 혜택을 체감할 수 있는 보편적 설계는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출산율 반등은 단순한 지원이 아니라 가족친화적 사회시스템으로의 전환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정부는 프랑스식 가족수당 제도의 도입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재정의 지속가능성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연간 수십조 원의 소요예산 확보를 위한 대대적인 세출구조의 조정과 조세지출의 재설계가 요구된다. 둘째, 현금지원과 세제혜택의 연동 설계가 필요하다. 소득수준에 따른 차등 지원은 불가피하겠지만, 일정 소득이상 중산층이 혜택을 누리지 못하면 제도의 효과성과 수용성이 낮아질 수 있다. 셋째, 다자녀 가정에 실질적 편익이 돌아가는 구조가 핵심이다. 예컨대, 우리나라처럼 자녀 수에 따른 정액의 세액공제보다는 프랑스처럼 과세표준 자체를 자녀 수에 따라 나누는 방식이 실질 세부담을 낮추는데 더 효과적이다. “아이를 낳는 순간부터 국가가 함께 키워준다”는 믿음을 줄 수 있을 때, 비로소 출산율은 반등할 수 있다. 프랑스는 출생부터 육아, 교육, 주거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했다. 우리도 이제는 사회보장제도와 세제의 정교한 재설계를 통해 ‘함께 키우는 사회’로 나아갈 때다. 김명준 전 서울지방국세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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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8.06 18:12

[타향에서] 온실가스의 생로병사, 우리는 그 끝을 바꿀 수 있다

어느 날 문득, 인간의 인생을 따라가는 듯한 존재가 떠올랐다. 바로 온실가스다. 태어날 때는 필요했고, 성장하면서 세상을 바꾸었으며, 지금은 병의 원인이 되어버린 존재. 그 여정을 바라보니 KBS <생로병사의 비밀> 프로그램의 흐름과 꼭 닮아 있다. 지금 우리가 문제 삼는 온실가스는 처음부터 나쁜 존재가 아니었다. 이산화탄소, 메탄, 아산화질소 등은 원래 지구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보온 덮개 역할을 해왔다. 이들 때문에 지구는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인류는 그 품에서 진화하고 번성할 수 있었다. 화석연료도 마찬가지다. 석탄, 석유, 천연가스는 산업혁명으로 인류에게 에너지 혁신의 문을 열어주었고, 문명의 기초를 세운 자양분이었다. 경제의 성장과 삶의 질 향상이라는 두 축을 지탱한 자원이 바로 화석연료였다. 그러나 문제는 과잉이었다. 자동차, 발전소, 공장에서 쏟아지는 막대한 온실가스는 지구라는 몸에 열을 축적하게 했고, 그 결과 기후위기라는 병적 상태가 시작되었다. 만약 지금의 지구가 사람의 몸이라면, 의사는 이렇게 진단할 것이다. "체온이 2도 이상 오르면 장기 손상이 시작되며, 즉시 치료가 필요합니다." 지구도 다르지 않다. 온도가 1.5도를 넘어서면 북극의 빙하가 녹고, 해수면이 상승하며, 생태계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유럽의 폭염, 동남아의 가뭄, 한국의 이상기후 등은 모두 지구가 보내는 경고음이다. 그렇다면, 처방은 무엇인가. 첫째, 원인을 줄여야 한다. 화석연료 의존을 낮추고, 재생에너지 중심의 에너지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 전기차, 고효율 건물, 친환경 산업으로의 이행이 시급하다. 이는 단지 기술이나 경제적 논의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전환이기도 하다. 둘째, 생활 습관의 변화가 요구된다. 환자가 식습관과 생활 패턴을 점검하듯이, 우리도 일상의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에너지 절약, 저탄소 소비, 기후 감수성 교육 등을 통해 시민의식이 높아져야 한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실천이 아닌, 사회 전체의 문화적 전환으로 이어져야 한다. 셋째, 회복을 위한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 숲을 늘리고, 탄소를 흡수하는 기술을 개발하며, 국제적 연대를 통해 대응 속도를 높여야 한다. 개발도상국과의 기술 협력, 기후금융 확대, 기후난민 보호 등도 함께 추진해야 한다. 국경을 넘는 문제이기에, 국가 간 협력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온실가스는 병이 아니라, 조절되지 않은 증상일 뿐이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통제하지 못했고, 방치했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다. 마치 당뇨나 고혈압처럼, 제대로 관리하고 조절하면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병. 지금의 지구가 그런 상태다. 이제 우리는 온실가스의 생로병사에서 마지막 장을 새로 써야 할 때를 맞고 있다. 온실가스를 줄이고, 기술과 정책, 시민의식이 함께 작동할 때 지구의 건강을 회복할 수 있고, 미래세대에게 건강한 세상을 물려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이 시대에 살아가는 책임이자 다음 세대를 향한 최소한의 도리다. 언젠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온실가스는 위기였지만, 결국 인류는 그것을 현명하게 극복했다." 온실가스의 생로병사, 우리는 그 결말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 장대식 넷제로 2050 기후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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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7.30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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