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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만난 전북- 태조 이성계

중학교 수업 시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고려 말 왜구가 아지발도라는 소년 장수를 앞세워 쳐들어왔다. 아지발도는 얼마나 용맹하고 싸움을 잘하던지 고려군이 크게 밀렸다. 그는 온몸을 갑옷과 투구로 감싸고 있어 칼이나 활도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이성계가 멀리서 활을 쏘아 투구를 맞춰 벗겨냈다. 그 틈에 이성계의 의형제인 이지란이 아지발도의 얼굴에 화살을 쏘아 맞췄다. 아지발도의 몸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랐고, 지금도 바위가 피로 물들어 붉은색을 띈다. 그래서 피바위라고 불린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지요. 남원시 운봉읍에 있는 황산대첩비와 피바위에 관한 전설같은 이야기입니다. ‘정말로 활을 쏘아 그렇게 정확히 맞출 수 있나’라는 의문이 들긴 했지만,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하는 걸 보면 왜구를 물리친 무용담이 재미있었던 건 분명합니다. 전주로 유학을 갔던 고등학교 시절, 어느 가을 경기전에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은행나무는 왜 그리도 크고, 왜 그리도 노란색을 가졌는지. 지금은 한옥마을과 함께 한 해 1,500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방문하지만, 당시만 해도 그저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있는 곳에 불과했지요. 서울에는 정동(貞洞)과 정릉동(貞陵洞)이 있습니다. 비슷한 이름이지요. 이름이 비슷한 건 유래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이성계의 본부인은 청주 한씨였습니다. 태종 이방원 등 8남매를 낳은 신의왕후이지요. 그런데 이성계가 본부인이 있는 상태에서 새로운 부인을 맞이했습니다. 바로 신덕왕후 강씨이지요. 신의왕후는 조선이 개국하기 약 1년 전에 사망해 개성에 묻혔습니다. 따라서 개국 당시에는 신덕왕후가 왕비였지요. 태조는 신덕왕후를 무척이나 사랑했습니다. 덕분에 신덕왕후 소생인 여덟째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지요. 왕자의 난이 일어난 배경입니다. 조선의 법도에 의하면 도성 안에는 묘지를 쓸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태조가 신덕왕후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이를 무시했지요. 경복궁에서 보이는 지금의 덕수궁 옆 영국대사관 부근 언덕에 신덕왕후의 능을 조성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조선의 사랑꾼’인 셈이지요. 문제는 태조 사후에 일어났습니다.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통해 태종이 된 후 신덕왕후의 능을 현재의 정릉동 자리로 옮긴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능의 석물들을 파내어 청계천 광통교를 지었습니다. 백성들이 사실상 왕후의 능을 밟고 다니게 된 것이지요. 태종의 복수심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어쨌든 이런 연유로 서울에는 두 개의 정릉동이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이장을 하다 보니 ‘릉’이 없어져 먼저의 정릉동에서 ‘릉’자 하나를 뺀 것이지요. 그렇다면 태조는 사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금의 구리에 있는 동구릉에 묻혔는데, 바로 건원릉입니다. 건원릉은 다른 왕릉과 다른 점이 있지요. 봉분이 잔디로 덮힌 다른 능과는 달리 억새로 덮여 있습니다. 태조는 조상들이 있는 함흥에 묻어달라 유언했지요. 하지만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왕릉을 조성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타협책으로 함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와 봉분을 만든 것이었습니다. 태조는 조선을 건국했습니다. 두 명의 왕비와 여섯 명의 후궁이 있었지요, 열네 명의 자녀도 두었습니다. 그런데 사후에는 곁에 누가 남았을까요. 정릉과 동구릉을 걸으며 생각합니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양중진 변호사는 대전지검 공주지청장, 춘천지검 강릉지청장, 수원지검 제1차장 등을 거쳐 마음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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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15 18:21

고향에서 키운 꿈, 서울 가서 전국에 펴다

남원에서 태어난 내가 처음 동물병원을 개원한 도시는 전주다. 애견문화(요즘은 반려문화)를 새로 정립하는 데 힘썼다. 그러다가 한계를 느꼈다. 전북을 넘어 우리나라 전체에 메시지를 전해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전주 병원을 접고 1985년 서울로 간 이유다. 그 무렵 서울 지역 동물병원은 100곳 미만이었다. 지금은 1000군데, 전국적으로는 5000곳에 육박한다. 당시 동물병원의 환경은 열악했다. 동물병원이 아닌 ‘가축병원’ 간판이 흔한 시절이다. 중구 필동에 자리를 잡은 나는 개를 전문적으로 진료하는 병원을 표방했다. 그때만 해도 고양이는 드물었다. 지연도 학연도 없는 타향살이, 나는 이를 악물었다. 혼신을 다하는 수술과 치료 틈틈이 방송사와 신문사의 문을 두드렸다. 현대인의 정서에 애완견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전도사처럼 설파했다. 심상사성(心想事成)이었다. 간절히 바라니 이루어졌다. 동물 관련 TV프로그램 사회자 옆에 서는 일이 잦아졌다. 역시 동물 관련 신문 기사 중 전문가 코멘트는 어느 순간부터 내 몫이 되다시피 했다. 동물 칼럼 연재는 덤이었다. ‘매스컴을 타니’ 개와 주인들이 내 병원으로 몰려들었다. 끼니를 걸러가며 하루 34마리를 수술하기도 했다. 그렇게 물이 들어왔지만 나는 노를 젓지 않았다. 타 병원들의 비난을 감수하며 파격적인 수가로 아픈 동물들을 치료했다. 그 와중에 심각한 텃세에도 시달렸다. 치러야 할 유명세로 치부하기에는 ‘안티’ 세력의 가짜뉴스는 도를 지나쳤다. 동물약을 싸게 팔고, 또 이를 적극 홍보하는 내가 못마땅한 이들이 많았다. 심지어 내 신앙까지 걸고 넘어졌다. ‘세계적인 권위의 수의사는 자기 광고를 합리화하기 위해 신성한 종교를 이용하고 예수님을 팔고 있다. 정상적인 기독교인이라면 이렇게 하겠는가. 소문이 언론에 나가면 세계적인 망신거리 톱뉴스가 될 것’이라고 비아냥댔다. 인내심에 한계가 왔다. 사필귀정, 법은 내 손을 들어줬다. 명예를 훼손 받고 모욕을 당했다는 사실을 법원이 확인했다. 나는 철저히 ‘내돈내산’ 원칙을 지켰다. 서울 능동 어린이대공원에서 애완동물사진촬영대회를 매년 열었다. 김대중 대통령, 개그맨 이경규씨, 영화배우 김혜수씨 등 유명인들의 동물사랑 사연을 널리 알렸다. 내 책 ‘개를 무서워하는 수의사’를 읽은 어린이신문 독자들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나를 지명, 팬레터를 보냈다. 그 아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내 이름에 꽂혀 수의대로 진학했다. 외화내빈을 경계한다. 모든 것의 바탕에는 실력이 있어야 한다. 나는 코로나바이러스, 케널코프 따위 질환의 심각성을 외쳤다. 종합예방접종(DHPPL) 한 방이면 그만이던 관행이 어느덧 교정됐다. 심장사상충의 위험을 공론화한 것 또한 나다. 내가 고쳐주는 개는 대개 서양품종이다. 되돌릴 수 없는 현상이다. 실내에서 키우기에 적당한 사이즈들이다. 토종은 대부분 중개다. 나는 이들 한국견도 챙긴다. 진돗개, 삽살개, 동경이(댕견), 불개, 제주개, 그리고 오수개 등 국산이라면 예외없이 개입해 있다. 심지어 북의 풍산개 연구서까지 냈다. 이 책은 과거 정부를 통해 북측 권력자에게도 전달됐다. 그리고, 지나친 동물 의인화를 나는 반대한다. 사람이 동물을 모신다는 것은 본말전도다. 사람을 위한 동물보호가 우선이다. 그래야 상생할 수 있다. △윤신근 원장은 전북대 수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한국동물보호연구회'를 설립해 동물 질병에 대한 연구와 '동물권' 확립에 앞장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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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08 17:12

새해는 인성(人性)을 성근(誠勤)히 하자

오늘날 사회는 물질만능 주의가 인격위에 군림하여 인성은 찾아보기가 힘든 세상이 되었다.그러다 보니 공허한 마음속엔 늘 불안과 혼돈이 존재해 방황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안타깝다. 옛날에는 집성촌에 일가친척이 자연스럽게 함께 살면서 어울림으로 구성원들이 각자의 역할을 하여, 옳고 그름을 제시해 주며 바른 길로 인도하고, 관심과 사랑 안에서 성장, 평생을 함께 소통하며 끈끈한 유대로 인성(人性)은 늘 중심에 있었다. 사회 생활도 인성은 근간이 되어 자신과 가문에 누가되지 않기 위해 정도를 알고 힘쓰며 살아왔다. 그러나 사회의 고도성장과 외국 문명이 쓰나미처럼 밀려와 새로운 변혁기에 적응하다보니 지역에서 도시로 대부분 이주하게 된다. 함께 공유했던 일가친척과 정겹게 나누던 이웃은 흩어져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다. 핵가족화로 가정은 정신학적 결핍의 굴레가 되었고, 자녀는 온실속 화초로 자라 이타심이란 찾아보기 힘들다. 이기심은 강해져 개인주의로 울타리를 치면서 끼리끼리 문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자녀들은 유치원부터 경쟁하며 우열속에서 신음하고 불안의 심리를 안고서 자라고 있다. 돈이 있어도 없어도 불안하고, 직장을 다녀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으니, 직장마저 없는 사람은 얼마나 힘들겠나 싶다. 이때 나를 일으켜 세워주고 자존감을 주는 것이 정심(正心)이다. 정심이 마음뜰에 성근(誠勤)하게 자란다면 어떻한 고난과 시련이 오더라도 능히 뚜벅뚜벅 세상을 향해 도전하고 꿈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진리이다. 영원없이 공허하게 세월을 보내는 것은 우둔한 짓이다. 인생은 되돌아 오는 길이 없고, 빈손으로 왔다 가는 게 인생인데 빛나는 이름은 아닐지언정 부끄럽지 않은 이름을 남기도록 우리는 성심을 다해 살아야 한다. 소크라 테스는 30년을 아테네 시민 정신혁명을 위해 생을 바치신 분이다. 부패하고 타락한 아테네 사람들의 양심과 생활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방황하는 청년들을 향해 호소하고 계도에 힘쓰며, 인격을 각성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하셨다. “시민들이여! 청년들이여! 지혜와 진리와 자기의 인격을 깨끗하게 하는 일에 노력을 합시다.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바르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첫째로 진실하게 사는 것이요, 둘째로 아름답게 사는 것이며 , 세째로 보람있게 사는 것입니다. 항상 철학자처럼 사색하고, 농부처럼 일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인간상입니다” 라고 열변을 토하고 다녔다. 생각은 인생의 소금같은 것이다. 말과 행동을 하기전에 생각하고 행동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좋은 말은 덕(德)으로, 나쁜 말은 화(禍)로 온다. 선과 악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선악이 구별받는다. 육조 혜능대사는`불사선 불사악`(不思善 不思惡)이라 하셨다. 상황에 따라 선악은 넘나들고 있으니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다. 미움은 사각에서 오고, 이해는 자각에서 오며, 사랑은 생각에서 온다. 생각은 천사가 주는 마음이고, 사각은 악마가 주는 마음이며, 자각은 자기 생각을 가지는 마음이다. 고마운 것들은 마음에 담고 기억하며, 섭섭한 것들은 물에 새겨서 흘려보내는 한해가 되었으면 한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자신을 수양하고 가정을 잘 다스리면 나라를 다스리고 태평해 진다는 뜻이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여기에도 정심(正心)에서 시작되고 있다. △오동근 위원장은 (주)금산영상사업단(영화제작)대표를 역임했고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오동근 재경남원문인협회 기획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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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01 15:18

삼각산 인수봉 기슭 국립 4·19 민주묘지가 있다

대학생 때 수유리 4·19 묘지를 갔다. 하지만 해마다 들어가지 못했다. 서슬 퍼런 전두환 정부 시절 4·19 묘지를 간다는 건 그리 쉽지 않았다. 검문검색이 당연한 때 수유역에서 전경들에 둘러싸여 꼼짝도 못 했다. 그렇게 대학 생활을 마칠 무렵 4·19 묘지에 간신히 들어가 이곳저곳 돌며 정중히 절하였다. 가슴이 벅차고, 마음이 떨렸던 그때 저 멀리 삼각산 인수봉이 보였다. 기이하고 아름다운 풍경에 넋을 잃을뻔했다. 수많은 사람이 오가고, 외국 등반가까지 암벽 등정하던 인수봉이 내 마음을 달래주었다. 그런데 왜 삼각산 인수봉(仁壽峰) 기슭에 묘역을 만들었을까? 1960년 4월 19일 초·중·고·대학생들이 교복을 입은 채 경무대로 향했다. 이승만 정부하에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4·19 혁명의 도화선은 막 입학한 어린 김주열 학생이었다. 마산상업고등학교 입학생이었지만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고향인 남원에서 다녔다. 넉넉한 집안에 3남 2녀 중 차남인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대속에 경남 마산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공부에 전념하려던 15살 김주열 학생이 마산 중앙부두 앞 바다에서 최루탄이 오른쪽 눈에 박힌 채 떠올랐다. 끔찍한 사진 한 장 속 그의 죽음은 대한민국 역사를 송두리째 바꾸어 버렸다. 지금 생각해도 끔찍한 일이다. 차가운 주검이 된 김주열은 장례식도 없이 몰래 묻혀졌다. 원통한 어머니의 울부짖음이 전국 학생들과 부모들을 울렸다. 슬픈 역사의 한 페이지가 해방 후 15년 만에 일어났다. 이후 김주열 열사 무덤은 남원시 금지면에 조성된다. 남원역에서 10분 거리 17번 국도변에 묘역과 추모각 및 기념관도 있다. 해마다 김주열 열사 묘를 찾는 사람이 많다. 김주열 열사 묘는 이제 성역화되어 추모식을 성대하게 거행하고 있다. 하지만 삼각산 인수봉 기슭 국립 4·19 민주묘지 내 김주열 열사 허묘는 찾는 이가 별로 없다. 1960년 4·19 혁명의 도화선이었던 김주열 열사 허묘와 비석에 쓰여진 몇 글자는 쓸쓸함마저 감돈다. 김주열 열사의 어린 시절 사진을 기억하는 사람도 이제 거의 없다. 하지만 2024년 12월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다시 요동치고 있다. 64년 전 어린 김주열 학생의 희생과 어머니 권찬주 여사의 열정이 재평가 받는 시점이 되었다. 대한민국 헌법을 모든 국민이 다시 한번 되새겨 보면 좋겠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 중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가 분명히 새겨져 있다. 서울에서 가장 자연과 하나된 동네, 삼각산 인수봉 기슭에 어린 김주열 학생 등 186명이 영원히 잠들어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가 강북구다. 이제 서울시 강북구와 전북자치도 남원시가 자매결연 맺어 그들을 위한 포럼과 추모행사도 함께 하면 좋겠다. 또한 김주열 열사 나신 날과 가신 날 만큼은 함께 기념하면 어떨까? 김주열 열사 묘비에 새겨진 ‘살아서는 호남의 사랑스런 아들이었고, 죽어서는 영남의 자랑스런 아들이 되었다’라는 문구를 모든 사람의 가슴에 담아주면 좋겠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김주열 열사 만나러 삼각산 인수봉 기슭으로 간다. 태양은 국립 4·19 민주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 또다시 희망찬 내일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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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25 17:52

영화의 힘

초등학교 때였을 것이다. 간혹 TV에서 계급장이 번쩍거리는 제복 차림의 경찰이 무서운 표정으로 뭔가를 발표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 일이 있고 나면 한동안 해가 짧은 겨울이 된 듯 동네는 어두워졌고, 이웃 세탁소나 인쇄소 주인도 혹시 이상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도 그런 것이 TV에서는 대공 수사물이 인기리에 방영됐고, 곳곳에 붙어 있는 “수상하면 신고하라”는 간판은 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고 나서 역산해 보니 그때의 일이 훗날 조작으로 판명 나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사건이었음을 알게 됐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고등학생 때 광주사태라는 이름으로 접했다. 방송이나 신문에 보도되지 않았으니 서울에서는 온갖 소문만 난무했다. 12.12. 사태로 불렸던 군사 반란 역시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국회 청문회와 수사를 통해 진상이 알려지게 됐다. 지난 12월 3일 밤, 일찍 잠이 들었는데 둘째 녀석이 흥분한 상태로 귀가해 계엄이 선포됐다고 소리쳐 일어났다. TV에서 현실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장면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일을 처음 경험했을 아들과 달리 나는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차분했다. 몇 시간 만에 계엄은 해제됐고, 이후 우여곡절 끝에 국회의 탄핵소추안이 의결됐다. 계엄 발표 후 특전사 군인보다 먼저 국회로 달려간 국회의원과 수많은 시민의 용기에 대해서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무엇보다 그날 군인들의 소극적 태도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한 눈에도 첨단 장비를 갖춘 최정예 대원임을 알 수 있는 그들이 맨손의 시민들에게 힘없이 밀리는 것을 보면서 상황이 길지는 않겠구나 싶었다. TV를 통해 똑똑히 목격했던 그날의 상황과 1980년 광주는 무엇이 달랐기에 그토록 다른 결과가 되었을까? 나는 그렇게 된 이유 중 하나로 영화 <서울의 봄>을 들고 싶다. 천만 관객이 들었던 이 영화를 보면서, 이미 과거지사인데도 영화 속으로 뛰어 들어가 그 상황을 막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은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군사 반란으로 한때 권력과 부를 차지했지만, 법정과 역사의 심판으로 씻을 수 없는 오명을 쓴 이들의 부끄러운 역사가 영화를 통해 재현되었다. 그 시절을 살지 않았던 젊은 세대, 그 시대를 살았어도 전모를 알지 못했던 거의 모든 세대에 영화는 엄청난 학습 효과를 끼쳤다. 국회 진입 작전에 참여했던 군인 중 상당수는 이 영화를 봤을 것이고 자신들이 훗날, 아니 며칠 후 어떤 자리에 있게 될 것인지 어렵지 않게 예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일주일도 채 되지 못해 작전을 이끌었던 장군들이 눈물을 참으며 그날 일을 후회하는 장면이 방송을 통해 중계됐다. 그들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 편의 영화가 이렇게 힘이 있다. 무장한 군인들보다 훨씬 많은 수의 휴대폰 카메라가 일촉즉발의 상황을 동시에 촬영하고 실황 중계했다. 1979년과 1980년, 서울과 광주에서 무장 군인들이 시내에서 총격전을 벌이고 시민을 향해 발포했어도 신문과 방송만 장악하면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릴 수 있었던 시대는 이제 다시 돌아오기 어렵다. 이번 사건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리고 세계의 이목이 한국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광장에 나왔던 사람뿐만 아니라 TV와 휴대폰을 통해 사건의 발생부터 전 과정을 실시간 중계로 경험한 이들에게 그날 밤의 일은 비가역적인 역사가 되었을 것이다. 남형두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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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18 18:53

법의 현장에서 보이는 모습들

제가 법률 분야 직업을 가지고 사회생활을 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고, 그 시간 동안 셀 수 없는 사람들과 많은 사건들을 접하면서 결정하고, 도와주는 활동을 해왔습니다. 처음에는 수사와 공판 활동을 수십 년 하다가 이제는 몇 년 전부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법률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 피해를 입었거나 피해를 당한 사람들을 위하여 증거를 모으고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의 협조를 받아 조사하여 법원에 기소하거나 불기소 결정을 하는 활동을 하였다가, 몇 해 전부터는 그러한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도와주며 심리적 안정감을 유지해 주는 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수십 년 동안 법률분야 활동을 하면서 그 현장에서 목격하고 깨닫게 되는 진실 하나는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피해를 준 사람이나 피해를 당한 사람도 피해자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사람의 신체나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물질에 피해를 주는 사례의 경우에는 그러한 현상이 일반화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고, 그로 인하여 사람의 생명에게까지 해악을 미치는 사안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러한 다툼이 법적 분쟁으로 진행되었을 때 탐욕에 젖어 유리한 결론을 이끌어 내려고 법률적 지원을 해주는 사람마저도 객관적 견해를 유지하지 못한 채 그에 동조하는 사례도 이따끔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원인은 사람들이 각자 생각하는 대로 자신이 이기는 게 아니면 최소한 유리하게 되는 게 정의라고 고집하는 데 있었고, 그러면서도 각자의 내면에는 참된 정의에 관하여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 그 심연에는 신의 공의가 자리를 잡고 있다는 사실도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근ㆍ현대 시대에 접하고 있는 법률쳬계와 그 기저에 있는 철학적 조류에는 서양에서 비롯된 자연법론과 법실증주의, 그리고 제3의 이론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철학적 조류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는 정의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고, 정의의 여신상으로 만들어진 조각상은 그리스와 로마 시대 신화에서 유래한 디케, 유스티티아의 상으로 알려져 있고 눈을 가리고 검과 저울을 들고 있습니다. 눈은 가려져 있으나 내면에 담겨있는 바른 관념을 바탕으로 공평하고 공정하게 현명한 결단을 하는 상징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왜 가장 사람과 사물을 인식하는 가장 중요한 눈을 가리고 있을까요. 사유해 보건대, 그 눈으로 볼 수 있는 범위보다 내면으로 꿰뚫어 보는 범주가 더 넓고 깊이 있게 통찰하여 지혜로운 결론을 끌어내지 않을까 라고 판단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나아가, 인간은 그 판단에 머무르지 않고 신의 공의를 추구하고 따르려고 한 것이 아닌지 묵상해 봅니다. 그래서, 동ㆍ서양의 학문적, 문화적 배경과 표현은 다르더라도 진리와 정의를 추구하는 수많은 글귀에는 무거운 울림과 깊은 깨달음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 글귀들이 찾아가는 곳에는 늘 낮음과 겸손, 사랑과 관용이 피어 있고, 물 같이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 흐름은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낮은 곳으로 나아가며 정의와 공의라 불리는 드넓은 바다에 이르게 됩니다. 김석우 LKB&PARTNERS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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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11 18:31

나는 기다린다, 고향을 빛낼 또 다른 지도자를

1987년 12월, 뱃속에 7개월 된 첫째를 품은 여성의 손을 잡은 나는 마포대교를 건너 여의도로 향하였다.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대통령병에 걸린 사람”이라는 비난 속에서도 후보로 나선 이를 보기 위해서였다. 1988년 2월 4일, 첫째는 군부 출신 대통령이 취임한 나라에서 태고의 울음소리를 냈다. 그렇게 참된 민주주의와 진보의 꿈은 좌절되었지만,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났다. 1992년 12월 18일, 다섯 살이 된 첫째와 두 살이 된 둘째는 부모 손에 끌려 다시 그이의 유세장에서 민주주의와 진보, 통일의 외침을 자장가 대신 들어야 했다. 1997년 12월 18일 밤, 드디어 두 아이와 그들의 부모는 온갖 거짓과 비난, 오해와 무지의 파도를 이기고 한 나라의 지도자로 우뚝 선 이의 승리를 함께하였다. 광복된 지 80년이 되어가는 이 나라에 대통령은 여러 명이 존재했지만, 위대한 정치인이라고 부를 만한 인물은 어쩌면 단 한 사람뿐이었는지 모른다. 누군가는 “그만을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지역감정의 소산이야.”라거나, “너의 편견일 뿐이야.”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병에 걸린 사람”이니 “빨갱이”니 하는 비난이 지나고 보니 모두 거짓이었던 것처럼, 역사는 그가 “가장 위대한 정치인”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킬 것이다. 그가 지도자가 된 후, 우리 사회에서는 비로소 민주, 진보, 통일 세력이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전에 대한민국에서 민주진보통일 세력은 누군가와 손을 잡아야 다수를 차지하는 취약한 처지였다. 그 역시 보수의 심장 세력과 손을 잡아야만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는 우리 사회를 한 걸음 진보시켰다. 그는 대한민국 사회를 민주와 진보 세력이 다수를 차지하는 보다 앞선 사회로 개조하였다. 참으로 놀라운 성과였으니, 나는 IMF 외환위기를 이른 시일 내에 극복시킨 그의 능력보다 이를 더욱 중요하게 여긴다. 무엇보다도 그이에게 위대하다는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는 까닭은 올곧은 자세 때문이다. 그이는 곡절이 지배해온 대한민국 정치계에서 단 한 번도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다. 설사 죽음이 눈앞에 어른거릴 때조차 그이는 옆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이가 노벨평화상을 받은 이유 역시 바로 그러한 인간적 자세 때문일 것이다. 시류에 영합하고, 죽음 앞에 타협하며, 자리를 위해 철학을 굽히는 이들이 난무하는 인류 역사에서 그이와 같은 사람은 흔치 않다. 그러하기에 역사는 그러한 인물을 위인(偉人)이라고 부른다. 나는 그이가 태어나 가장 자랑스럽게 여긴 것이 분명한(이는 그이가 자신의 고향 마을 이름을 따 후광(後廣)이라는 호를 만든 것에서 유추할 수 있다) 고향과 같은 뿌리를 가진 땅에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지금은 고향을 떠나 있지만, 그 땅의 말투와 그 땅의 음식과 그 땅에서 함께 살아가던 이들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의 뒤를 이을 지도자의 출현을 기대한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배지와 자리와 돈다발과 명성을 한없이 가벼이 여기는 반면, 민주주의와 약한 이웃과 정의로운 역사의 무게를 두 어깨에 짊어지고 쓰러질지언정 그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는 후배 지도자를 기다린다. 그 후배가 그이와 한강의 뒤를 이어 다시 한번 세계에 호남의 가치를 펼칠 것을 믿는다. 김흥식 도서출판 서해문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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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04 18:19

충무공 이순신 장군, 어디서 태어났을까?

서울시 중구에 있는 대한극장이 문을 닫았다. 1958년 개관하여 66년 동안 영화의 메카로 대한극장은 충무로의 상징이었다. 영화관 시작이 단성사라면 영화인들이 모이는 곳은 충무로였다. ‘영화의 날’ 기념행사도 대한극장에서 하였다. 서울역에서 숭례문 지나면 명동과 충무로 일대가 극장가로 필름 현상소와 인쇄소가 즐비했다. 명보극장과 스카라극장 그리고 중앙극장과 국도극장 등이 있는 영화의 거리 충무로는 한국 영화의 상징처럼 되었다. 그런데 목멱산 기슭 충무로와 충무로역이 있는 대한극장은 왜 ‘충무로(忠武路)’라 불렸을까? 대한민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은 세종대왕 이도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시다. 두 분 모두 경복궁 앞 광화문 광장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서 계신다. 세종대왕은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 준수방 장의동에서 태어나셨다. 그렇다면 목멱산을 바라보고 계시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어디서 태어났을까? 우리나라에 이순신 장군의 흔적은 너무도 많다. 이순신 장군은 도성 안 무과시험을 치르는 훈련원 봉사직을 시작으로 최초로 정읍 현감과 태인 현감까지 겸하였다. 또한 해미읍성 군관으로 해안가에 머물며, 진도군수를 거쳐 통영에서 초대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바다를 지켰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23번 싸워 23번 전승을 이룬 해군의 제왕이셨다. 하지만 무고로 인해 백의종군 후 남원에서 섬진강 따라 남해안까지 걷고 또 걸었다. 결국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목숨을 잃고, 84일 후 아산 외가 선산에 묻혔다. 하지만 아산 현충사가 태어난 곳은 아니다. 이순신 장군이 태어난 곳은 과연 어디일까?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서울시 중구에 있는 서애길 역시 충무로역 대한극장 가는 길 위에 있다. 500여 년 전 퇴계 이황의 제자이자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과 이순신 장군을 선조에게 천거한 인물이 있다. 임진왜란 3대첩을 이끈 도원수 권율 장군과 통제사 이순신 장군 사이에 도체찰사 서애 류성룡이 있었다. 류성룡이 자란 곳도 대한극장 근처 충무로역 1번 출구에서 50m 앞이다. 류성룡과 이순신은 어린 시절부터 목멱산 기슭 마른내골 건천동과 개천에서 함께 지낸 형과 동생 사이다.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懲毖錄)>에서 징비는 ‘내 지나간 일을 경계하고, 뒤에 근심이 있을까 삼가노라(豫其懲而毖後患)”라는 시경에서 따온 말이다. 징비록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기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에 걸친 전란의 원인과 상황을 기록한 류성룡의 땀과 혼이 담긴 서적이다. <징비록>에서 위기 속 나라를 생각하는 ‘이순신과 선조, 권율과 원균, 이이와 이항복 이야기’도 나온다. 수많은 목숨을 앗아가고, 소중한 강토가 유린당한 7년의 현실을 그대로 담았다. 역사 속 위기는 언제나 있었다. 위기 속 또 다른 기회를 찾는 지혜가 다를 뿐이다. 어머니와 자식을 잃어도, 나라가 자신을 버려도, 변함없는 마음으로 국토와 백성을 지킨 인간 이순신이 생각나는 계절이다. 1598년 12월 16일 노량해전에서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 말씀이 가슴을 울린다. “전방급 신물언아사(戰方急 愼勿言我死).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마라.” 쌀쌀하지만 활기찬 겨울, 충무로 대한극장에서 본 <노량 : 죽음의 바다> 그 장면이 더욱 애틋해진다. 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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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27 18:45

액자 걸기

몇 년 전 어떤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에 ‘사물에게 말 걸기’라는 코너가 있었다. 일상에서 늘 보는 물건을 관찰하고 그 의미를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이 자리에서 ‘액자’에게 말을 건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아내와 나는 신혼 때 많은 부분에 차이가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액자 걸기’였다. 아내는 눈높이에 걸자고 했고 나는 천장에 가깝게 걸어야 한다고 했다. 아내가 말하는 높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낮은 것 같았다. 벽에 붙어있는 액자라는 사물을 처음 인식한 것은 물론 어려서이다. 그때 액자란 고개를 뒤로 젖혀야 볼 수 있는 높이에 걸려 있었다. 그런 경험은 아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니 아내와의 견해차이는 그보다는 내가 살았던 부안의 옛집 천장이 낮아서 높게 걸렸다고 착각한 데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이 당시 아버지가 벽에 붙은 괘종시계의 태엽을 감을 때 의자 위에 올라섰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옛집에는 시계와 함께 돌아가신 조부모 사진도 천장과 벽의 모서리를 이용해 거의 45도 각도로 걸려 있었다. 어른을 우러러보라는 뜻이 있는 것 같고, 조상님들이 방안의 우리를 지켜보니 삼가라는 뜻도 담겨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보면 대단히 권위적이지만, 시계나 유리 액자를 높이 다는 데는 위험한 물건이나 중요한 물건을 키 작은 어린아이가 함부로 손대지 못하게 하기 위한 까닭도 있었으리라. 액자란 무엇일까? 사람이 보기 위해 벽에 거는 사물이다. 그렇다면 서 있는 사람의 눈높이에 거는 것으로 충분하다. 액자 또는 그 안에 들어 있는 사진을 포함한 내용물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일 뿐, 주체가 될 수 없다. 위험한 물건은 경우마다 다를 수 있겠으나, 어른 키높이라면 문제 될 것이 없다. 세월이 흐르면 사물의 쓸모가 잊혀져 도리어 주인 행세하는 경우가 있듯이 사회의 제도도 그 본질을 잃고 인간을 옭아매는 경우가 있다. 과거에 안존하려는 관성과 타성 탓도 있지만 그것이 유리하기 때문에 본질을 애써 외면하려는 점도 있다. 한 지붕 안에 사는 부부도 의견이 다를진대 직장, 지역, 국가, 세계 등 크고 작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생각이 어떻게 하나로 모여질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각기 다양함을 인정하며 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의견 차이가 사회적 갈등으로 번지고 가부간 판단이 필요한 때가 있다. 정부, 국회, 법원에서 하는 일이란 대체로 이런 것들이다. 같은 호모사피엔스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좁혀지지 않는 골을 두고, 인간보다 뛰어난 인공지능(AI)에 판단을 맡기자는 의견이 나올 만도 한 것이 오늘날 현실이다. 축구나 야구 경기에서 불완전한 인간 심판 대신 기계의 정확한 판단으로 인간의 판단을 번복하는 일이 당연시되고 있다. 그렇다고 숫자와 양으로 계량할 수 없는 가치 충돌의 세계에 인공지능을 내세워 그 판단에 순복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인공지능이 판단할 수 있도록 세상의 모든 가치를 숫자로 환원하면 되지 않은가 하는 주장도 나오지만, 이 단계에 오면 과연 “인공지능이 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본질과 쓸모를 보는 눈에도 주관이 개입할 수 있다. 그러나 갈등을 일으키거나 수습해야 할 목적을 지닌 법과 제도의 본질을 보려는 노력 그 자체만으로 문제의 절반은 해결된 것이나 다름 없다. “액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처럼. 남형두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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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20 18:36

전주 길 서울 길

나는 소년 시절 임실에서 전주로 이사를 온 다음 서울에 올라가서 직접 본 것은 20대 초반 한여름 때 시험을 치르기 위하여 성동구에 있는 어느 대학교에 간 게 처음이었다. 그 뒤로 3년이 지나서 서초동에 있던 연수원에 이르러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이따금 외출하여 본 서울의 광대한 규모, 엄청난 시람들 수에 놀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물론, 연수원 들어가기 1년 전에 시험을 마무리하려고 국민대학교건너편에 있는 하숙집에서 열흘 동안 하숙하며 지낼 때 전주와 같은 푸근한 인심과 풍광을 체험한 적도 있었다. 연수원 기숙사에 머무르면서 그 건너편 백화점과 주변 새 아파트 단지들, 근처 지하철역 부근에 있는 초대형 상가 건물을 보면서 우리나라 수도의 위용을 실감하였다. 연수원 1년 차 동안 그 위용과 풍광에 감탄은 했지만, 담담한 마음으로 응시하며 가슴 속에 미래에 대한 밝은 비젼을 가지고, 젊은 열정과 올곧은 의지로 법률가의 길을 시작한 것으로 생각이 난다. 처음 근무한 곳과 다른 지역 근무를 3년 반 동안 마치고 그 후로 서울에서 수년간 지내게 되면서 전주와 임실에는 생신, 명절, 기일,여름 휴가, 다른 일이 있을 때 가게 되었지만, 늦은 밤과 새벽녘까지 일하는 게 일상이었던 일의 패턴 때문에 자주 가지는 못하였다. 어느 해인가 추석 명절 때 어머님께서 홀로 올라오셔서 내 야윈 얼굴을 보시고 염려하시던 모습에, 최소한 명절 때는 내가 전주에 내려가기 며칠 전부터 일을 줄이는 방법도 생각해 봤지만 여의찮았다. 내가 하는 업무적인 일들과 개인적인 일들이 그랬던 것처럼 전주 길 서울 길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내가 청년 시절, 한때는 힘드신 모습을 뵐 때마다 내가 종교인의 길을 걷게 되면 고생을 덜 하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생계를 위해서는 법률가의 길을 가야 한다고 판단하고 초지일관하였던 것 같다. 그랬다. 내가 항상 다니면서 생각해 온 전주 길 서울 길은 한결같으면서도 깊이가 있는, 넓으면서도 평안해지는 강과 바다에 이르게 한다는 깨달음이 온다. 그 강과 바다는 과연 무엇일까 사유해 보는데, 인간에 부여된 자연의 빛을 사용하여 “물 같이, 마르지 않는 강같이”추구하는 진리의 길에 다다르는 것이라고 묵상해 본다. 내가 스스로 깨달아진다고 사유하는 것은 내가 주인이 된 견지에서 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베푸시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으로부터 받는 은혜로움에 있다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것은 사물과 사리에 대한 인식과 깨달음의 주체는 나 스스로가 되어야 하지만, 그 안에는 그 인식과 깨달음을 부여하는 부동의 원동자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므로, 오로지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오만의 늪에 빠져서는 안 되며, 그 늪의 근처에도 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묵상해 본다. 그래서, 동양의 현자들도 “타고난 자질은 하늘에서 얻은 것이고, 확충하여 기르는 것은 자신에게 달린 것이다(資品得於天, 充養存於己).”라고 설파하였다. 이제 공직을 벗어났지만 앞으로도 내가 전주 길과 서울 길을 오가면서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 말씀하신 물과 강 같은 진리의 길, 동·서양의 현자들이 제시한 선한 길을 제대로 찾고 실천하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보고 묵상해 볼 것이다. 김석우 LKB&PARTNERS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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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13 17:53

고창 읍성이 한 마디 하셨습니다!

오랜만에 김제평야를 달려 고창을 다녀왔다. 김제평야는 갈 때마다 속 좁은 내게 감탄을 안겨준다. 눈길 가는 끝까지 산이 안 보이고, 저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강일까, 들일까, 아니면 대부분 한반도에서 보듯 산일까? 상상의 날개를 펼치도록 만든다. 답은 이미 알고 있다. 그러하기에 더더욱 놀랍다. 언제부터인가 이런 소박한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 어린이들, 청소년들에게 지평선을 보여주고 싶다. 그렇게 실제로 끝없는 땅을 보여주고, 그로부터 드넓은 꿈과 의지를 키우도록 해주고 싶다. 또 하나! 토성의 고리를 보여주고 싶다. 그렇게 이 지구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알려주고 싶다. 좁으면 좁은 대로, 귀하면 귀한 대로, 지구에서의 삶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도록 알려주고 싶다.”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 교육은 여전히 줄을 세우고, 돈다발과 수능 성적이 비례함을 귀에 못이 박히게 주입하고 있다. 토성의 고리는커녕 달의 분화구에 대한 관심도 지우고 오직 점수에 목매달도록 가르치고 있다. 그렇게 해서 기쁨과 환희, 행복이 가득한 삶이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그런 삶은 없다. 공자님, 부처님, 예수님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런 탐욕으로 마음의 평안과 희열을 느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가끔 있겠지만 무시해도 될 정도일 것이다. 요즘 들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지만, 아직 다수는 아닐 것이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노벨상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그러나 노벨이 세계에서 가장 권위적인 상을 수여하기로 다짐한 것이, 바로 자신이 개발한 다이너마이트, 즉 사람의 삶과 생명, 문명을 파괴하는 물질에 대한 반성과 후회에서 비롯했다는 사실을 되살리는 사람은 드문 듯하다. 맞다. 노벨의 뛰어난 점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그 반성의 삶을 새롭게 뒤집은 데 있다. 그는 자신이 획득한 부의 크기를 맞닥뜨리는 순간, 그 부를 낳은 원천이 인간의 삶에 어떤 존재였는지를 되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원천이 인류 문명에 해를 가져다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인류에 진 빚을 갚기로 했다. 그 결과물이 노벨상이었다(노벨경제학상, 그러니까 인류에게 경제적 성과를 가져다준 이에게 수여하는 상을 그가 제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따라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개인적으로는 하루라도 빨리 노벨경제학상은 폐지되는 것이 맞다고 여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한 번이라도 뒤를 돌아보며 살아가고 있는가? 자신의 발자취를 살펴본 적이 있던가? 한 번이라도 눈앞의 아파트 가격, 눈앞의 사치명품, 눈앞의 점수 대신 먼 곳의 지평선, 높은 곳의 토성 고리, 깊은 곳의 지성을 살펴본 적이 있었던가. 노벨문학상 소식에 수백만 명이 한강 작가의 책 한 권씩을 사서 흔들고는, 불과 몇 달 후에는 다시 사치명품 시계와 핸드백, 아파트 가격표와 수능 성적표에 목매다는 삶으로 돌아가지는 않겠는가. 김제만경 들판으로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달려간 고창 읍성은 아무 말이 없었다. 참 따스하고 조용하고 깊었다. 그 모습이 나를 향해 속삭이는 듯했다. “타향에서 고생이 많지. 그 시끌벅적한 곳에서 힘들었지.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잠시일지언정 내 품에서 쉬거라. 모든 것 다 내려놓고 쉬거라. 그리고 수면제 없이 잠 푹 자고 올라가거라.” 김흥식 도서출판 서해문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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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06 17:22

익산 미륵사지, 백제 융성기 최고의 걸작이다

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예로부터 도읍지는 큰 강을 따라 형성되었다. 대동강 변 고구려, 한강 변 백제, 낙동강 변 신라가 삼국시대를 이끌었다. 섬진강 변 가야국들은 남해와 지리산을 끼고 발전하였다. 예성강 변 고려와 한강 변 조선은 물길 따라 수운과 해운으로 물류 최적지인 개성과 한양에서 성장하였다. 하지만 백제 개로왕은 고구려 장수왕에 의해 한강 위 아차산에서 475년 죽임을 당한다. 한강을 떠나야 살 수 있었다. 한강 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뒤로하고, 금강 변 웅진성에서 웅진 백제로 새롭게 시작한다. 좁은 땅과 약한 권력은 웅진 호족들에 밀려 5대 63년 동안 백제 재건을 위한 시간이었다. 공주 웅진성(熊津城)은 무령왕에게 위기이자 기회의 땅이었다. 금강 따라 펼쳐지는 새로운 문물과 도전이 웅진 백제를 사비 백제로 일으켜 세웠다. 538년 성왕은 금강 변 웅진에서 사비로 수도를 이전하였다. 국호도 백제에서 남부여로 바꾸고, 금강의 이름도 백강으로 불렀다. 다시 가장 강한 나라가 되고자 사비성을 쌓고, 백제 중흥을 꾀하였다. 이때 불교를 통해 찬란한 백제로 나가려 했다. 해상 활동을 위해 부소산에 도성 쌓으니 사비성이다. 부여 사비성(泗沘城) 밖 정림사를 짓고, 불교의 힘으로 백제 중흥에 이른다. 부여 정림사지와 금당의 석가여래는 한성 백제기 이후 찬란한 백제로 전환하였다. 공주에서 부여로 온 백제는 땅을 넓히고, 문화를 확장하며 익산에 왕성도 새롭게 만든다. 익산은 절대권력 무왕의 고향으로 천도를 준비한 별도 도읍지 별도(別都)였다. 당시 막대한 경비와 시간을 쏟았던 백제 최대 규모 사찰이 익산 미륵사다. 미륵산이 보여주는 끝없는 기운과 미륵산 기슭에 자리한 미륵사지 흔적은 연지의 규모가 대신 말해준다. 무왕은 사비에서 익산(益山) 천도로 귀족과 호족 세력을 제압하려 했으나 실패한다. 왕족인 부여씨와 8성 귀족들을 장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이야기, 마지막 의자왕과 왕자 부여융 및 백제부흥운동의 부여풍 이야기는 전설처럼 전해온다. 계백장군 이야기도 백제 역사와 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백제 성곽은 어디까지 있었을까? 금강 따라 백제 5방성 중 임존성과 금강지류인 해안가 부안에 있던 주류성은 백제의 화려한 옛 모습을 보여준다. 백제는 사찰과 탑이 많았다. 백제 탑은 온화하고 은은한 아름다움을 준다. 불교의 융성한 모습은 마라난타에 의해 최초로 서해를 통해 전해졌다. 백제 금동대향로는 도가와 신선 사상까지 여유로운 모습을 담았다. 부여 정림사지오층석탑과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백제 석탑 중 가장 아름답다. 백제 최대 사찰인 미륵사지 연지에서 대형 치미(鴟尾)가 나왔다. 매의 머리처럼 불거지고, 깃 모양의 선과 점이 새겨진 건축물이다. 678년간 백제를 이끈 문화와 예술은 지금껏 우리에게 전해오고 있다. 정읍사·지리산가·무등산가·선운산가 등 찬란한 백제의 소리가 K-팝의 시작이다. 사비 백제 왕릉으로 추정되는 능산리 고분에 연꽃무늬 ‘연화문’, 구름무늬 ‘운문’ 그리고 사신도를 그린 벽화가 곧 백제다. 미륵사지에서 용의 날개와 꼬리를 닮은 ‘용문’, 용마루 위 ‘치미’가 백제 문화를 K-컬처로 만들었다. 백제에서 시작한 역사와 문화가 대한민국을 넘어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까지 탔다. 가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 익산 미륵사지를 가야 할 이유다. 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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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30 18:13

노벨문학상과 주변국 언어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함께 거명되는 번역자 데보라 스미스에 관한 일화를 소개한다. 번역 저작권을 연구하던 중 2017년 연세대학교 유영 번역상 세미나에서 수상자 스미스를 만났다. 한국말을 잘할 줄 알았는데 의사소통이 안 돼 영어로 몇 마디 나누었다. 그런데 그것이 흠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작년 초 한국문학번역원이 개최한 한국문학번역상 신인상 취소 관련 재심위원회에 참여한 적이 있다. 모 일간지 기자가 일본인 수상자와 전화 인터뷰를 하다가 한국어 대화 능력이 부족한 데서 출발해 인공지능 번역기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고 보도했다. 확인 차원에서 일부 번역기를 사용했음이 밝혀져 해프닝으로 끝나고 수상은 유지됐다. 인공지능 번역 문제는 차치하고 두 사례는 한외번역, 즉 한국어 원전을 외국어(영어와 일본어)로 번역했다는 것과 번역자들의 한국말 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한국어 말하기 능력과 번역 능력의 연관성에 대한 관점에 차이가 있다. 언어의 헤게모니로 생긴 일이다. 수많은 언어 가운데 중심국 언어와 주변국 언어가 존재한다는 것은 불편한 현실이다. 영어는 중심국 언어이고 한국어와 일본어는 주변국 언어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중심국인 서구 언어 간에는 어떨까? 체코 출신 밀란 쿤데라는 프랑스에 망명해 프랑스어로 소설을 썼다. 자신의 책이 영어, 독어 등으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오역은 물론 뉘앙스가 잘못 전달되는 것에 극도로 민감했던 그는, 이례적으로 번역과 저작권에 관한 책을 남겼다. 『배신당한 유언들』이라는 책에서 번역자가 따라야 할 최고 권위는 저자의 개인적 문체임에도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공동 문체를 최고의 권위로 여기는 것을 참을 수 없어했다. 중심국 언어 간에 이런 치열함, 긴장감이 있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데보라 스미스의 번역 『Vegetarian』에 있는 적잖은 오역은 한국 번역문학계에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채식주의자』에 나온 ‘수간호사(首看護士)’를 ‘male nurse’로, ‘춘화(春畵)’를 ‘spring flower’로 번역한 것이 그 예이다. 만약 외한번역에 이런 오역이 있다면 같은 잣대로 관대했겠느냐는 지적이다. 타당한 말이나 어찌하겠는가? 언어 간 헤게모니가 있다는데.. 스미스의 오역을 들춰내 한강의 놀라운 업적을 깎아내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오히려 한강 소설을 정말 좋아한다는 스미스와 함께 일한 한강이 너무나도 부러울 뿐이다. 소설가는 아니지만 내가 쓴 논문이나 책을 도착어권의 맥락에 맞게 정확한 문장으로 번역해줄 스미스 같은 파트너를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한국어로 글쓰는 이는 쉽게 동의할 것이다. 스미스가 없었다면 한강이 노벨상을 받을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은 한강의 수상에 조금도 흠집을 내지 않는다. 맨부커상이 작가와 번역자에게 공동 시상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영화 ‘기생충’으로 아카데미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이 “1인치 자막의 장벽을 뛰어넘으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라고 한 수상소감은 시상식장에 큰 울림을 주었다. 우리와 같은, 아니 우리보다 더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주변국에도 한강과 같은 보물이 있지 않을까? 중심을 지향하다 보면 자칫 주변을 놓치기 쉽다. 한강의 노벨상 수상으로 문화의 주변국뿐 아니라 우리 안에서도 중심부에 있지 않은 보석이 있지 않은지 돌아보게 된다. 남형두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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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23 18:28

도덕률에서 황금률로 머무를 때까지

전주에 있는 병원에 가려고 광주 사무실을 나서서 차를 운전하여 동광주 IC를 빠져나와 광주-대구 고속도로에 진입하였다. 주말과 주일에는 누님과 매형, 조카들까지 나서서 병문안과 돌봄을 해드리고, 나는 주중에 병원에 들러 살펴드리지만, 병원을 나설 때에는 간호사와 돌보는 분들에게 부탁드리고 오는 게 가슴이 많이 아팠다. 병원에 입원하실 때만 해도 막연하나마 좀 지나면 퇴원하실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어서 광주에서 전주에 있는 병원을 오가는 일정이 힘들지 않았다. 병상에서 누워 계시다가 너무 늦으면 안되니 이제 돌아가라고 말씀하시는데 일어설 수가 없어 앉아 있다가 자정 넘어 일어나 고속도로로 들어서는 날이 많아지던 중, 봄을 지나 한여름, 늦가을, 겨울로 접어들었다. 나는 인간적 힘겨움을 잠재우려고 동양 고전 서적, 성리학자들의 마음 학문에 관한 고전, 근대 서양철학자들의 이성과 정신론, 도덕신앙론, 신학론을 다시 펼쳐 들고 깊이 파고 들었다. 그러면서도, 나 자신을 있게 하신 분에 대한 마음의 원리인 효, 그 이치를 깨닫게 인도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신 분에 대한 사유와 묵상을 할 틈이 없이 광주에서 전주에 있는 병원까지 다녔던 것 같다. 걱정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의 눈과 마음을 가볍게 해주려고 담대하게 말하고 행동하였지만 나 스스로는 사별을 예감한 혼돈의 시간이었다. 여러 병원을 알아보고 병원을 옮기는 데 애써준 누님 내외분과 아내, 병환의 치료를 위해 귀한 약재를 달인 물을 건네주고, 병원까지 차로 태워다 주며, 병원에 와서 휠체어를 밀어주기까지 한 친구들의 손길 가운데, 나는 다시 광주에서 서울로 떠나야 했다. 서울로 올라와 집에서 사무실을 오가다가 늦은 겨울 아침 출근 길에 1년 후배와 같이 지하철 안에서 아내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고 정신없이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달려가 그날 천국으로 보내드렸다. 다음 해 여름 청주로 다시 옮긴 후 사무실에서 일하고 퇴근하면 숙소에서 신학 서적을 정독하며 지내던 어느 날 이른 아침 동편 하늘에 아침 빛과 구름이 맞물려 열린 구름사이로 빛이 내려오는 현상을 보고 감탄을 하였다. 그 현상을 보면서 광주와 전주에 있는 병원을 오갈 때 새벽녘 고속도로 굽은 구역에서 운전하는 차 앞으로 달려오는 게 고라니가 아니라 암벽이었던 장면을 보여준 날이 떠올라 기도를 드리며 긴 묵상을 하였다. 내가 보았다고 한 장면이나 현상이 하나의 환상일 수도 있지만, 내게는 그 동안 지내왔던 고된 시간들에 대한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신 분의 응축된 가르침이라는 것을 지득하게 되었다. 또한, 내가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잡고 있던 도덕률이 서적에 적혀있는 문자가 아니라 실천으로 현시되어야 하는 삶의 원리이자 정언명령이라는 사실을 되새겨보았다. 자신을 가해하는 부친과 아우들을 관용과 포용으로 아우르는 순 황제, 육신을 다하여 부모를 봉양하는 수사제 태자, 갈대밭에 있는 배에 올라예상된 희생을 감수하는 공자 급과 수, 리디아 크로이소스와 결전을 앞둔 아브라다타스에게 맹세하는 판테아의 언행들, 이는 인간들이 이뤄낸 삶의 원리들이었다. 그러한 삶의 원리들을 실천하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에 들어있는 황금률이 자리잡게 되고, 사랑과 겸손이 뒤따른다는 것을 체감하게 되었다. 수년 전 서울, 광주에서 전주에 있는 병원을 오가는 고속도로와 길에서 나 보다 먼저 내미는 손길들을 감사하게 받았고, 어머님을 천국으로 보내드린 후 더 깊이 깨달으며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다. 이제 서울과 광주에서 전주에 있는 병원을 오가던 그 길을 나 자신의 순례길이라고 내 마음과 영혼속에 새겨놓고, 그 새김을 하나하나 실천하리라 묵상해 본다. 김석우 LKB&PARTNERS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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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16 18:35

수도권 집중 뉴스를 읽으며 불꽃놀이를 듣네!

선친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노래가 있다. 한 송이 눈을 봐도 고향 눈이요 두 송이 눈을 봐도 고향 눈일세 타향은 낯설어도 눈은 낯익어 고향을 떠나온 지 고향을 이별한 지 몇몇 해던가 (<고향설>, 조명암 작사) 어린 시절, 서발 장대 휘둘러도 거칠 것 없는 고단한 삶을 겪으며 할머니와 단 두 분이 고향 담양에서 쫓겨나듯 떠나 순창에 닿았지만, 그곳에서도 땅 한 뙈기 없는 팍팍한 삶에 떠밀려 다시 군산으로 오셨단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삶도 만만치 않았고, 결국 배우신 목수 일을 터전 삼아 그 무렵, 머나먼 경기도 수색으로 일거리를 찾아 가셨단다. 그 추운 겨울, 곱은 손으로 나무를 매만질 때 내리는 눈송이를 보며 늘 부르셨다는 노래가 <고향설>, 즉 <고향의 눈>이다. 그러니 어찌 그 노래를 평생 잊으실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 노래를 부른 가수 이름마저 백년설 아니었던가 말이다. 그런데 ‘고향설’과 ‘고향의 눈’이 주는 음색은 많이 다르다. 우리에게 훨씬 정감을 불러일으킬 듯한 고유어 ‘고향의 눈’보다, 한자어 ‘고향설’이 막연하면서도 깊고 낯설면서도 따스한 느낌을 주는 까닭을 밝히는 것은 언어학자의 몫이리라. 우리는 그저 고향에서 머나먼 땅에 소리없이 내리는 눈송이의 촉감을 눈물로 녹이면 그뿐이다. 전국의 모든 젊은이들이 수도권으로 몰려든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50년 전 고향을 떠나 수도 서울로 옮겨온 나를 떠올린다. 다행히 열서너 살 소년은 고향이라는 – 결코 고유어로 표현할 수 없는 – 단어를 품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수도에서 태어난 자식들은 고향이라는 단어를 떠올려 보아야 이웃 아파트뿐일 것이다. 층간소음과 주차 문제로 삭막하기 그지없는 바람이 부는 그곳 말이다. 수도권 집중 현상은 그래서 단순히 경제적 문제만이 아니다. 아파트 숲에서 내리는 눈은 치우기 힘든 겨울의 불청객에 불과할지 모른다. 눈이 내린다는 예고에는 어김없이 빙판길 조심, 출근길 조심이라는 경계 신호가 뒤따른다. 도시의 삶에서 눈은 향수와 그리움, 어머니와 고향의 숨결이 아니라 귀찮고 치워야 하는 존재가 된 셈이다. 그뿐이랴. 가을 바람과 봄 바람, 겨울 바람의 표정 변화는 우리를 가슴 설레게도 하고, 깊은 우수에 잠기게도 하였다. 그러나 아파트 숲에서 부는 바람은 베르누이의 정리를 따르는 자연현상일 뿐이다. 아무 숨결도, 색상도 갖지 않은 기압 현상. 어제 저녁 서울 도심에서는 수백억 원을 단 한 시간 동안 터뜨리는 불꽃축제가 열렸다. 전혀 편의를 제공하지 않는 편의점에서는 한 시간에 천문학적 매상을 올렸다는 기사가 나오고, 가장 긴 기다림의 행렬은 이동식 화장실 앞에서 펼쳐졌다는 소식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다. 한 시간의 기쁨을 위해 열 시간의 수고도 마다하치 않는 도시인들의 곤핍한 삶이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가슴속에 낭만 한 점 품지 못한 이웃들이 그 안타까움을 해원(解冤)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현상이 그렇게 아플 수 없었다. 아무도 그렇게 연결하지 않겠지만, 나는 고향의 상실과 인위적 불꽃놀이를 동시에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 머릿속에 고향이 떠오른 이 가을에, 전군가도에 퍼지는 저녁놀의 품 안으로 여행 한 번 가야겠다. 빠르디 빠른 KTX 대신 50년 전 준급행(완행보다는 빠르고 급행보다는 느린)보다 세 배는 빠른 군산행 서해금빛열차를 타고서. 김흥식(도서출판 서해문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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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9 19:07

정읍사 노래 속 서울을 걷는다

해마다 봄·가을이면 귀한 손님이 오신다. 꿈과 미래를 짊어질 청년들이 오신다. 정읍 신태인고와 왕신여고 학생들이다. 7년 전 학생들과 함께 한양도성 성곽길을 걸었다. 첫 번째 책이 나올 무렵 만남이 이루어졌다. 우연한 기회였다. 출판기념회 제쳐두고 그들을 보러 갔다. 청년들과 함께 서울 속 정읍을 찾아 흥인지문에서 돈의문 터까지 순성하였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리’ 백악산 정상에 오르니 땀이 비 오듯 흐른다. 목이 마르고 지쳐갈 무렵 어디선가 들리는 노랫소리에 모두 웃는다. 학생들과 선생님도 백악산 정상 바위에 올라 발아래 펼쳐진 경복궁과 목멱산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마치 정읍사 여인처럼 산 위에 올라 남편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듯 한양도성 따라 걷는다. 천 년 동안 계속 불려진 노래가 정읍사다. 애달프지만 장단에 맞추어 박수로 호응한다.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도성 안 정읍의 흔적은 무엇일까? 낙타산 성벽에 井邑(정읍) 각자성석이 있다. 600여 년 전 한강 건너 한양도성을 만든 정읍 사람들 흔적이다. 그들도 정읍사 노래를 부르며 고향으로 돌아갈 그날을 기다렸으리라. 발길을 옮긴다. 서울 한복판 광화문 광장 이순신 상이 있는 곳이 황토현이었다. 그 옛날 청계천으로 물이 흘러가는 언덕배기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순신 장군이 정읍 초대 현감이셨다. 정읍 성황산 기슭 충렬사에 기념비와 영정이 있다. 그곳은 일제강점기 신사 터다. 이제 충무공 이순신 상과 함께 정읍시청이 있는 충무공원이 되었다. 서울에는 충무로와 충무로역이 이순신 장군을 기억하는 거리다. 보신각 가는 길 종각역 5번 출구 앞 황금색 상이 웃는다. 녹두장군 전봉준 상이다. 매서운 눈빛, 꼿꼿한 허리, 불끈 쥔 주먹, 다리를 걸치며 누군가 응시하는 눈빛 그리고 오른손을 바닥에 받치고 앉아 기다린다. 종각이 있는 이곳은 전옥서 옛 감옥 터다. 회문산에서 이곳으로 압송되었다. 1895년 전옥서에서 속전속결 첫 재판을 받고, 종로 한복판에서 손화중·최경선·성두환·김덕명과 함께 교수형을 당했다. 127년 전 41세 나이로 별이 되었다. 이곳은 서울 속 전봉준 거리다. 아니 정읍의 거리다. 보신각 건너 탑골공원 지나 수운회관까지 동학의 길이자, 녹두장군을 기리는 기억의 공간이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꽃에 앉지 마라’ 파랑새 노랫소리와 함께 학생들과 걷는다. 뜨거운 태양 속에 덥지만 길 위에서 묻고 답하며 길을 찾는다. 길 위에서 정읍을 생각하고, 정읍에서 찾아온 청년을 보며 함께 미래도 그린다. 그들이 힘이요, 청춘이 곧 미래다. 올해 효창원을 함께 걸었다. 도성 밖 추모 공간이다. 이른 아침 새들이 반기는 고요한 공간이다. 초록색으로 바뀌는 계절 발걸음도 가볍다. 효창원은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의 무덤이었다. 해방 후 목멱산과 한강이 보이는 독립운동가 묘역이 되었다. 이봉창·윤봉길·백정기 의사의 묘가 나란히 있다. 백정기의사기념관과 동상은 정읍에, 백정기 의사 묘는 효창원에 있다. 의열사와 삼의사 묘가 있는 이곳은 역사의 숨결이자, 기록의 공간이다. 몸과 맘을 바친 독립운동가 정신을 되찾는 곳이다. 정이 메말라가는 요즘, 부부간 사랑과 남편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담긴 정읍사(井邑詞) 노래가 우리의 마음을 흔든다. 삭막한 서울에 정다운 정읍 청년들이 꿈과 희망을 심고 간다. /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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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25 18:00

어른들의 대화, 상상의 보고(寶庫)

지금은 불쑥 남의 집에 가면 실례이지만, 어렸을 적 우리 집에는 초대와 무관한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친가, 외가, 진외가 등 부모님을 중심으로 이어진 친인척들과 촌수를 따지기도 뭣한 먼 일가들이 명절이나 집안 제사, 하다못해 장날 특별한 용건 없이 드나들었다. 그들이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어린 나로서는 대부분 이해할 수 없어 생각나지 않지만, 그 광경은 생생하다. 울 정도로 배꼽 잡고 웃다가 허기지면 자주 돌아오는 생일 떡이나 국수를 끓여 먹기도 했다. 버스 시간에 누군가는 떠나고 다른 이가 그 자리를 채워도 대화는 탈 없이 이어졌으니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땐 왜 그렇게 심심했던지, 학교를 파하고 놀다가 집에 왔어도 저녁 식사 때까지 하루가 참 길었다. 일없이 곤충을 잡아 빈 병에 넣어 관찰하기도 했으니 손님으로 집안이 북적이면 싫지 않았다. 구석에 엎드려 숙제하는 것처럼 뭔가를 끄적거렸지만, 실은 어른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TV가 없던 시절 그들의 만담은 내게 연속극 재방송 같았는데, 왜 어른들은 비슷한 이야기에도 매번 재미있어할까 의아했다. 평교, 주산, 동진, 성내, 소성, 이평 등지에서 온 착하디착한 사람들, 그들의 자손은 지금 전주나 서울, 그리고 그 주변 어딘가 아파트에 살고 있을 것이다. 하도 많이 들어 귀에 못 박힌 군대 이야기 하나를 소개한다. 훈련은 고된데 부식이 형편없던 시절, 중대장이 애지중지 키우던 토끼 한 마리가 사라졌다고 한다. 끝내 범인이 나타나지 않자, 중대원들 전부 연병장에 집합시켜 놓고 “토끼가 왜 죽었나”라는 구호로 토끼뜀을 시켰다는 이야기다. 기억이 부실한 탓도 있지만 옮겨 쓰고 보니 별 시답지도 않다. 누군가의 뱃속에서 이미 소화가 돼버렸을 토끼로 화난 사람은 중대장 한 사람이었을 뿐, 부대원들 모두 전우애로 똘똘 뭉쳐 그 기상천외한 구호를 외치며 뛰었을 상황은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다른 이야기가 된다. 화자도 어쩌면 자신이 직접 경험한 이야기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군대 이야기에 으레 들어가는 과장은 당연하고, 앞뒤로 높으신 중대장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장치가 들어가면 한 편의 완벽한 소극이 된다. 다음번 장날에 새로운 청중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이야기는 재현됐을 것이니 볕이 잘든 우리 집 마루는 일종의 소극장이었던 셈이다. 나는 논문이나 책을 저술할 때 비유를 즐겨 쓴다. 내용보다는 저술 중에 나온 비유가 좋다는 말을 간혹 듣는다. 그리고 대화나 강연 중에 ‘예를 들어’나 ‘비유컨대’로 새로 시작할 때가 많다. 그 말투는 단언컨대 장날 우리 집 손님들의 대화에서 익힌 것이리라. 그들은 자기 말에 집중케 하려고 월남전, 농사, 하다못해 소, 돼지, 닭까지 소품으로 썼다. 그 과정에서 비유와 우화, 메타포가 등장했고, 어린 나는 이런 문화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사회과 부도에서 본 나라와 광주, 부산 등 대도시, 어른이 되어야 가는 군대를 그려볼 수 있었다. 상상력이란 근육이 있다면 그때 부쩍 자랐을 것이다. 주교황청 한국대사를 지냈던 성염 교수가 번역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비록 내륙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소싯적부터 조그만 잔에 담긴 물을 보고도 나는 바다를 상상할 수 있었다.” 감히 이에 견줄 바 못 되지만, 장날과 명절 어른들의 대화는 내게 재미있는 이야기책이자 상상의 세계였다. /남형두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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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18 17:07

봄볕과 가을비를 같이 한 친구와 아우들

고향 마을 어귀에서 들리는 여름 새소리를 추억하던 소년이 청년으로 커서 전북대학교 법정대학에 이르렀을 때의 일입니다. 봄볕이 따사롭지만 아직은 쌀쌀한 무렵 신입생이라서 설레는 마음으로 대학 건물을 오가며 1층 도서관에 둥지를 만들어 놓습니다. 대학에 들어왔지만 앞으로 어떤 길을 선택해서 가야 할 지를 생각하며 1학년 초반을 지나던 중, 청년은 1층 도서관에 놓아둔 검정색 책가방과 책들을 모두 도둑맞습니다. 청년이 망연자실하여 의자에 힘들게 기대어 있다가 도서관 밖으로 걸어 나오는데 한 친구가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합니다. . 하루, 이틀 지나서 몇 권의 다른 책을 들고 오가는 길에 그 친구가 청년에게 힘내라고 말하면서 검정색 가방을 건넵니다. 그 안에는 도둑맞은 책들을 새로 사서 넣어 둔 채로. 청년은 그 친구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네며 겸연쩍게 그 가방을 받아 들었습니다. 전공 서적 1권 사고 나면 시내버스 회수권(시내버스 승차권)을 사는 게 주저되어 걸어 다닌 일이 생생한 터라 너무 감사했습니다. 덩치 큰 익산 친구, 하얀 고무신 신은 춘포 친구, 중키에 점잖은 부안 친구, 작은 키에 체격좋은 부안 친구와 같이 어머님이 끓여주신 김치찌개를 단칸 셋방에서 나눠 먹으며 감사의 마음도 나누고 순전한 우정도 채웁니다. 청년이 미래 방향을 정하여 2층 도서관과 중앙도서관을 오가며 그 친구들과 같이 대학생활을 하며 꿈을 키웁니다. 덩치 큰 익산 친구와 하얀 고무신 신은 춘포 친구는 새벽 열차를 타고 걸어 다니고, 작은 키에 체격 좋은 부안 친구는 대학 근처에서 자취 하며 같이 어울려 소망의 시간을 보냅니다. 그즈음 청년은 완산고등학교 1학년 때 헤어진 임실 친구를 대학에서 다시 만나 그 기쁨을 간직한 채 평생 법률 직역에서 같이 지내게 됩니다. 대학 근처에서 자취하는 중키에 안경 낀 김제 친구, 안경 낀 까무잡잡한 정읍 친구의 자췻방에서, 청년과 비슷한 키에 논리적 말솜씨가 좋은 남원 친구와 더불어 우정의 공간을 채워 갑니다. 한 친구는 시험 보러 다니는 청년의 단칸 셋방에 들러 어머님 몰래 청년이 서울이나 대전으로 시험을 보러 가는 데 들어가는 차비를 이불 속에 넣어 두고 갑니다. 그 어느 날 6월 항쟁 한 가운데 한 친구가 붙잡혀 갔는데도 법률비용을 마련하지 못해 청년과 친구들은 분노를 삼키며 굵은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어머님께서 자주 끓여주시는 김치찌개를 맛있게 먹던 친구들과 1, 2살 아래 아우들이 어느 늦은 가을날 저녁 비를 흠뻑 맞고 눈물이 범벅되어 청년을 끌어안고 축하의 탄성을 지릅니다. 그들은 전북대학교에서 청년의 단칸 셋방까지 시오리가 넘는 거리를 차가운 비를 마다하지 않은 채 맞고 걸어와 밤새 많은 얘기를 나누다 아침에서야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 후 청년이 전주지방검찰청에 근무하면서 많은 친구와 아우들과의 교류가 많아지면서 오래전부터 친구와 아우들과의 소중한 만남을 열어 주신 감사함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신 분께 드립니다. 청년이 장년이 되어서도 늘 선함과 배려, 의로움과 자애로움을 피어나게 인도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청년은 작고 빈한했지만 장년이 되어서까지 평생 같이 하는 친구들과 아우들이 많은 우정의 부자가 되어 있음을 마음에 심어두고 감사 기도를 붙잡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아나니아, 키루스 옆에는 고브리아스와 가다타스, 크리산타스가 있었고, 관중에게는 포숙, 백사에게는 한음, 청년을 지나 장년이 된 제게는 각 분야의 리더나 전문가가 되어 있는 친구들과 아우들이 있음을 깊이 사유해 봅니다. /김석우 LKB&PARTNERS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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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11 15:32

기차를 탔다! 그리고 놀랐다!

지방 강연을 다녀오는 길에 기차를 탔다. 과거에 기차를 떠올리면 달걀, 가락국수, 구멍 뚫린 차표 같은 것이 떠오르는 반면, 오늘날 기차를 타면 보이는 건 99% 스마트폰(나야 수중자판기(手中自販機라는 표현을 고집하지만, 다른 분들이 모르실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상품을 개발한 자가 팔기 위해 붙인, 장사용 명칭을 그대로 쓴다)이다. 오늘날 기차를 타면서 느끼는 또 다른 하나는 시간 관념이다. 초등학교 때 서울 유학 중 고향 군산에 가기 위해 탄 장항선은, 기억이 맞다면 적어도 6시간 이상을 달렸다. 오늘날 KTX는 전주까지 2시간이면 족하다. 그런데 왜 오늘날 기차가 훨씬 지루한지 모르겠다. 더 빨리 다가오는 풍경과 더 빨리 사라지는 풍경은 파노라마적인 경험을 주어야 할 텐데, 전혀 그렇지 못한 듯하다. 경험이 카이로스로 승화되지 못한 채 죽은 크로노스의 시간에 멈추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잘 모르겠다. 여하튼 호두과자 상인도 없고, 이동식 매장을 끌고 다니는 종사원도 없는 요즘 기차는 참 지루하다. 그래서 모두 수중자판기, 아니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차! 이런 꼰대 같은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었는데...... 앞자리에 붙은 주머니에 잡지가 한 권 꽂혀 있다. 서둘러 꺼내 본다. 그러자 몇 가지가 나를 놀라게 한다. 우선 정말 잘 만든 잡지인데 보관 상태가 너무 깨끗하다. 공중이 사용하는 물건이 이토록 깨끗한 경우는 흔치 않을 것이다. 그것이 책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시민 모두의 공중도덕 관념이 향상되어서라면 참으로 좋을 텐데....... 그런 건 아닐 것이다. 2년 전인가? 나라를 다스리겠다고 나선 한 사람이 기차 앞좌석에 구두를 신은 채 발을 턱 걸쳐 놓은 모습을 보고 경악한 적이 있었다. 대한민국을 통틀어, 아니 전 세계를 통틀어 다른 사람이 앉을 게 분명한 좌석에 구두를 신은 채 발을 올려 놓을 사람은 내 다섯 손가락으로 꼽기에도 부족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행동을 문제삼는 이는 국민의 절반이 안 되는 듯하다. 그러니 시민 의식 덕에 책이 깨끗이 보관되는 것은 아니리라. 그렇다면 승객 대부분이 수중자판기에 관심을 집중하고 책은 멀리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렇다고 해도 정말 안타깝다. 이렇게 잘 만든 책이 이렇게 도외시되다니! 한 5분에 걸쳐 펼쳐만 보더라도 삶에 도움이 될 텐데. 특히 승객이 젊은이라면 더더욱 그럴 텐데. 왜? 우선 디자인이 워낙 뛰어나다. 그러니 넘겨만 보더라도 디자인적 감각을 키울 수 있다. 국내 여행지 순례부터 맛집 탐구, 나아가 전국의 행사 정보까지 신나는 것 투성이다. 그런 정보 구하려면 열심히 검색해야 하지 않나? 반면에, 책 한 권 다 넘기는 데 고작 5분이면 족하니, 시간도 절약할 수 있다. 이른바 크로노스 시간의 카이로스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를 더욱 감동시킨 것은 따로 있었다. <‘책 향기 따라’-전북 전주에서 특별한 테마로 꾸민 작은도서관에 들렀다>라는 내용으로 시작하는 기사다. 사진은 또 왜 이리 멋진가! 학산숲속시집도서관, 서학예술마을도서관을 가진 주민들은 선택받은 시민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런데, 이런 도서관 여행 프로그램을 매주 토요일 운영한단다. 이런 문화적인 일이! 그래! 이번 토요일에는 시간을 내는 거야. 그래서 학산숲속시집도서관에 가서 백석 시 한 편 필사하고 와야지. /김흥식 도서출판 서해문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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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04 16:41

만복사저포기, 천년 남원을 품다

가을이 오면 그곳에 가고 싶다. 산들바람 따라 상큼한 솔향과 감 익어가는 그곳은 어머니 품과 같다. 무더위 지나니 들판이 제법 누렇다. '남원산성 올라가 이화문전 바라보니, 수진이 날 진이 해동청 보라매...' 노랫가락에 발걸음도 가볍다. 누구는 남한산성 아니냐고 말한다. 남원성 너머 교룡산에 천년을 머금은 천혜의 요새 교룡산성이 남원산성이다. 그 옛날 남원에 용이 승천하기 전 교룡(蛟龍)이 살았다. 백제시대 518m 높이의 교룡산에 성곽을 3.12km 쌓았다. 성 안에 우물이 99개와 계곡마다 수문이 3개나 있던 철옹성이다. 교룡산성 동쪽 홍예문에 옹성이 있어 지금 보아도 튼실하다. 과연 누가 성을 쌓았을까? 홍예문 지나 비석들도 오랜 흔적을 보여준다. 별장과 장군의 이름이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즐비하다. 계곡 따라 오르면 선국사 대웅전 아래 보제루가 시간이 멈춘 듯 서 있다. 동학농민혁명군 김개남 장군이 머물던 곳이다. 그는 전봉준 장군과 뜻을 같이했지만, 미래를 바라보는 철학이 약간 달랐다. 누구의 영향이었을까. 동학의 시작을 알린 수운 최제우가 머물며 '동경대전'을 쓰고, '칼노래'를 부르며, 검무를 추었다고 한다. 남원은 그냥 남원이 아니다. 춘향이가 살던 광한루, 이도령과 만난 오작교, 여뀌꽃 피는 요천(蓼川)이 흐르는 남원은 사랑을 간직한 도시이자 천년 역사를 품은 도시다. 남원은 천년 전에도 남원(南原)으로 불리었다. 통일신라 5소경 중 남원경처럼 옛 이름을 간직한 곳은 남원이 유일하다. 백제의 문화도시, 신라의 역사도시에 남원성과 교룡산성 옆에 선원사와 만복사가 있다. 고려 사찰과 탑들이 지리산과 섬진강변에 많다. 고려 말 왜구 침입에 이성계 장군과 포은 정몽주 그리고 만육 최양 종사관이 황산대첩을 이룬 곳도 남원이다. 남원 운봉과 인월에 가면 역사 속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다. 태조 이성계는 피바위와 인풍리에서 황산대첩 후 남원성 옆 만복사가 있는 왕정동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남원성 안 용성관에서 미래를 기획한다. 그 후 황희 정승이 남원에 귀양 와 광한루를 짓고, 정인지가 오작교와 삼신산에 정자도 꾸민다. 또한 매월당 김시습은 최초의 한문소설 '만복사 저포기(萬福寺樗蒲記)'를 남원성 서문 옆 만복사에서 구상한다. 삶과 죽음에 얽힌 사랑 이야기가 음악과 함께 내려온다. 남원은 춘향가와 흥보가 판소리가 있지만, 더 깊은 역사 속 정유재란 만인의총 이야기가 남아 있다. 가을에 꼭 한번 가야할 도시가 남원이다. 지리산 오르기 전 섬진강 따라 뱃놀이 하기 전 남원성 옆 만복사지에 꼭 가보자. 만복사지에 가면 눈에 보이는 보물이 많다. 만복사 규모를 알려주는 만복사지 당간지주, 오층석탑과 석조대좌 그리고 석조여래입상이 시간이 멈춘 듯 서 있다. 만복사 석인상 얼굴에 미소가 머문다. 김시습의 '만복사저포기'에 나오는 양생처럼 살포시 웃는다. 남원역에서 5분 거리에 만복사지가 있다. 광한루까지 걸어서 10분이면 족하다. 남원성 북쪽 만인의총도 걸어가보자. 427년 전 정유재란 때 스러져간 우리의 조상도 만날 수 있다. 그날의 함성을 들었다면 술 한잔 올린 후 교룡산성으로 가자. 성안 보제루에 앉으면 지리산과 요천이 보인다. 가을에 남원은 언제나 엄니 품과 같다. 남원에 가면 따뜻한 온기를 꼭 담아 오자. 가을이 주는 힐링 도시, 남원~ /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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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28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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