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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향에서] 보신탕과 견분곡(犬墳曲)

6월부터 여름, 보신탕 시즌이다. 서로 평행선을 달리는 찬반논쟁이 벌어지는 계절이다. 어찌 사람이 개를 먹을 수 있느냐는 것은 감성 호소일뿐 논리가 아니다. 개고기 옹호자는 전통 음식문화를 즐기는데 왜 외국 눈치를 봐야 하는가라며 전의에 불탄다. 아니나 달라, ‘거위 간도 먹으면서’ 운운한다. (개고기는 제사상에 오르지 못하므로 전통음식이 아니다) 해외사례 열거도 별무소용이다. 과거 노태우 대통령이 영국여왕을 만나고 나간 뒤 여왕이 궁전 정원의 개 마릿수를 세는 만화가 현지 신문에 실렸다, 미국지사로 발령난 아버지를 따라간 어린이가 ‘식견종’이라고 학교에서 왕따 당했다는 실화도 먹혀들지 않는다. 보신탕이 참 맛있다는 백인의 실명이 줄줄이 제시된다. 보신탕에는 우격다짐식 ‘국뽕’도 개입돼 있다. 개를 먹는 사람은 민족주의자, 안 먹고 반대하면 매국노라는 투의 비약마저 이뤄진다. 개는 여느 짐승과 다르다, 정을 주고받는 반려다, 가족처럼 지내다가 잡아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하소연 또한 통하지 않는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왜 동물을 차별하는가, 소·돼지·닭도 정겹기만 한데, 식물이 불쌍해요…이런 유의 대응이 잇따른다. 식용견과 반려견은 별개다, 고문치사 대신 고통없이 죽이면 괜찮지 않을까라며 합리적인 척하는 남녀도 있다. 황구는 본래 먹으라고 있는 것이라며 고개를 주억대기도 한다. 하지만 누런 진돗개도 보신탕감이다. 치와와, 요크셔테리어 같은 조막 만한 개는 근수가 덜 나오는 덕에 연명할 따름이다. 반려견도 개소주로, 보신탕 국물용으로 도살되고 있다. 필자는 한국동물보호연구회 회장으로서 1990년대 초부터 보신탕과 싸웠다. 국내 최초로 일간지에 애완동물면을 만든 신동립 기자와 의기투합했다. 신문에 실린 대만의 떠돌이개 뉴스를 접하고 대만으로 날아간 게 벌써 30년 전이다. 보신탕용으로 가져간다고 의심하는 현지 동물보호소를 설득, 겨우 데려왔다. 이 사연을 보도한 이도 신 기자다. 그와 나는 강산이 세 번 바뀔 동안 그렇게 쉼 없이 보신탕에 돌을 던졌다. 2027년 마침내 보신탕이 사라진다. ‘개식용금지법’이 작년 초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법안 공포 3년 뒤부터 시행한다. 지난달 임실군의 제40회 오수의견문화제에 맞춘 나의 졸시(拙詩) ‘견분곡(犬墳曲)’을 읽고 개고기를 지웠으면 좋겠다. ‘너는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짖지도 망설이지도 않았지/ 그저 내 곁에 있었을 뿐인데/ 너는 결국 나 대신/ 불길에 스러졌다// 내가 눈을 떴을 때/ 내 몸은 젖어 있었고/ 내 숨은 여전했지만/ 너는 조용히/ 다신 일어나지 않았다// 냇물로 달려가 첨벙/ 불꽃을 향해 네 온몸을/ 던진 그 발굽 자국/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온몸이 타고 꺾이고/ 무너졌어도/ 너는 물을 안고 왔다/ 오직 나를 살리겠다는/ 그 하나뿐인 마음으로// 내가 너를 데려왔을 때/ 그저 길 위의 개 한 마리였거늘/ 오늘 나는/ 사람보다 더 사람다운/ 너를/ 무덤에 묻는다// 돌 위에 새긴다/ ‘여기, 나보다 먼저/ 사랑을 아는 생이/ 잠든다’// 오수의 바람이 분다/ 그 바람은 뜨겁고도/ 차갑다/ 마치 네 마지막/ 숨결처럼// 내 눈물은 말라가지/ 않는다/ 살아남은 죄가 너무 커/ 너를 부를 수도 없다// 너는 개였지만/ 너는 참 사람이었다.’ 윤신근 서울 윤신근박사동물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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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6.04 18:34

[타향에서] 평범한 일상을 감사히 생각하자

어제까지 별 탈 없이 친구들과 곡차도 하고 유쾌하게 귀가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려는데 무릎과 허리가 아프다. 조금 지나면 괜찮겠지 했는데 오후가 지나도 불편함이 이어진다. 할 수없이 약국을 다녀와 근육통 완화제를 복용했다. 외출을 못하고 쉬고 있는데 웬걸, 나아지기는커녕 일어나 활동도 어렵고 하루사이에 사소한 일들이 굉장한 일로 바뀌어 버렸다. 씻는 일, 떨어진 물건을 줍는 일, 양말 신는 일, 기침을 하면 견갑골 근육통 때문에 참아야만 하고, 앉았다 일어나는 것도 내게는 더 이상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별 수 없이 병원을 다녀왔다. 하루 종일 빈둥거리다 몸의 소리가 들려왔다. 등산을 가끔 했는데 무릎이 시큰할 때도 있었고, 뒷목이 뻐근하기도 하며, 목도 결리고 등짝은 근육통이 가끔 왔었다, 눈도 침침하며 속도 불편할 때가 많았다. 몸 구석구석에서 힘들었노라고 불평을 해댔는데 무시한 게 기습적으로 반란을 일으켜 수습이 어렵다. 중국 속담에 `기적은 하늘을 날거나 바다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걸어 다니는 것이다`라는 말을 싱겁게 웃어 넘겼는데 반듯하게 짱짱히 걷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실감하는 중이다. `아프기 전과 후`가 명확하게 구분되는 게 우리 몸이다. 평범한 일상생활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축복으로 알고 진정으로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필자가 아시는 분은 성공도 하셨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으신 분인데 어느 날 갑자기 뇌경색으로 입원하시게 되었다. 각별한 인연이 있어 병문안을 다녀온 적이 있다. 2년여 입원 치료중인데 상태는 호전되지 않고, 본인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눈을 깜빡이는 정도에 불과한 모습에 마음 아프게 다녀왔었다. 열정과 예리한 분석력, 인본을 기본에 두고 사업을 전개 승승장구 하셨던 분인데, 무기력한 모습을 마주하고 있으려니, 한때의 빛났던 재능과 인품도 다 소용 없구나 하는 생각에 서글픈 마음이 앞섰다. 지금 저 분이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혼자서 일어나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웃으며 얘기하고 식사하는 것, 그리고 두발로 산책하는 등 그런 아주 사소한 일이 아닐까, 그런 소소한 일상이 기적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은 뒤라는 점이 안타깝다. 대부분 사람들은 하늘을 날고 물위를 걷는 기적을 이루고 싶어 안달하며 무리를 한다. 땅위를 걷는 것쯤은 당연한 일인 줄 알고 말이다. 타인에게 일어나는 일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의사께서 몸에 무리가 와서 그러니 약 먹고 며칠 쉬면 회복할거라 진단이지만, 아침에 벌떡 일어나는 일이 감사한 일임을 이번에 또 배웠다. 건강하면 다 가진 것이다. 오늘도 일상에 감사하며 살아가자, 말로는 늘 감사를 생각하지만 진정으로 느끼며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훌륭한 두발 자가용을 가지고 세상을 활보할 수 있다는 기쁨을 우리는 잊지 않았으면 한다. 어느 의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 몸을 의술로 할 수 있는 것을 금액으로 계산하면 약 50억 원이라 한다. 건강한 몸을 가진 사람은 50억 순자산 가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늘 불행하다고 생각 할까요? 그건 욕심 때문입니다. 감사함을 느끼지 못한 사람은 기쁨이 없고, 기쁨이 없으면 행복할 수 없다. 감사하는 사람만이 행복을 누릴 수 있고 정상에 올라가 있는 것이다. 오동근 재경남원문인협회 기획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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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28 18:31

[타향에서] ‘마당 깊은 집, 전주에서 놀다

내가 이사장을 맡고 있는 사)세계신화연구소에는 그리스 신화를 공부하는 ‘신화반’이 있다. 현재 제10기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읽고 있다. 지난 5월 10일 ‘신화반’ 선후배 포함 총 12명이 ‘마당 깊은 집, 전주에서 놀다’라는 제목으로 1박 2일간 전주를 다녀왔다. 2016년 연구소가 설립된 이래 매년 개최하는 행사다. 몇 년 전에는 연구소 회원 50여 명이 서울에서 전세버스를 타고 다녀오기도 했다. 이번엔 특히 『전라도 천년』의 작가 김화성 전 동아일보 기자가 인솔 교수로 동행했다. 일정은 매년 거의 똑같다. 첫째 날은 전주 시내 비빔밥 전문점에 집결하여 점심을 먹고 교외에 있는 귀신사歸信寺, 금산사, 금산교회, 강일순의 동곡약방, 정여립 집터, 동학 원평집강소, 수류성당 등을 둘러보고 전주 시내로 돌아와 전주 막걸리 전문점에서 저녁을 먹고 가맥에서 가볍게 2차를 한 뒤 숙소로 향한다. 둘째 날은 아침 일찍 숙소 근처인 ‘혼불문학공원’을 거쳐 오송제까지 1시간 정도 산책하고 콩나물국밥으로 아침을 먹은 뒤 한옥 마을 내 경기전, 전주사고, 전동성당, 오목대, 향교 등을 탐방하고 해산한다. 기행에는 이야기가 빠질 수 없는 법. 주로 인솔 교수가 탐방지에 숨어있는 일화를 소개하지만, 회원들도 그곳과 관련된 글을 낭독한다. 귀신사에서는 그 절을 배경으로 한 양귀자의 소설 『숨은 꽃』의 한 대목을 낭독하고, 오목대에서는 이성계가 남원 황산에서 왜구를 무찌른 뒤 그곳에서 잔치를 벌이면서 한나라 시조 유방의 ‘대풍가大風歌’를 읊어 은근히 역성혁명의 의지를 내비치자, 동석했던 정몽주가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와 근처 남고산성의 만경대에 올라가 크게 한탄하며 지은 우국시와 관련된 글을 낭독한다. 귀경 후 단톡방에 이번 전주 기행이 성지 순례였다며 귀신사와 금산사는 불교, 금산교회는 개신교, 전동성당과 수류성당은 천주교, 동곡약방은 증산교, 원평집강소는 천도교 성지라는 촌평이 올라왔다. 맞는 말이다. 근처 금구의 원불교 교당까지 포함하면 여러 종교 성지가 이렇게 한곳에 모여있는 경우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이번 전주 기행은 단순한 성지 순례를 넘어 세상 더께에 물들지 않은 신앙인의 참모습을 성찰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게 바로 내가 이 코스를 기획하고 애정하는 이유다. 가령 금산교회는 당시 시대 상황을 고려해 남녀가 따로 앉도록 지은 ㄱ자 한옥교회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 교회를 세운 거부 조덕삼의 미덕이다. 그는 당시 엄격한 신분사회였음에도 백정 출신 머슴 이자익과 함께 교회에 다녔고, 함께 세례를 받은 후 집사가 되었다. 그 후 장로 선거에도 두 사람이 함께 출마해, 예상외로 이자익이 당선되자 조덕삼은 하나님의 뜻이라며 깨끗이 승복했고, 자신은 정작 2년 후에 비로소 장로가 되었다. 게다가 그는 사비를 들여 이자익을 평양 신학교로 보내 목사로 만들었다. 그래서 조덕삼에게서는 사도 바울이 개척한 소아시아 초대교회 신자들의 형제애가 엿보인다. 더 나아가 조덕삼은 신분과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며 동학군 김덕명 장군에게 원평집강소를 헌납한 백정 동록개의 분신分身이고, 모두가 평등한 후천개벽의 세상을 기약하며 구릿골에 동곡약방을 열고 천지공사를 펼친 증산교 창시자 강일순의 분신이며, 신분엔 귀천이 없어 누구나 임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다 역적으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정여립의 분신이다. 김원익 홍익대 교수·세계신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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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21 18:33

[타향에서] 서울에서 만난 전북- 정순왕후 송씨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더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1980년대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던 왕방연의 시조입니다. 이 시조에 곡을 붙여 조용필이 노래를 부르기도 했지요. 학교 시험이나 학력고사에 자주 나왔던 시조인데요. 여기에서 ‘님’은 조선의 임금 중 가장 슬픈 사연을 갖고 있는 단종을 말합니다.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된 후 사방이 강과 절벽으로 둘러싸인 육지 속의 섬 청령포로 유배되었는데요. 왕방연은 단종을 호송하는 임무를 맡았다가 돌아오면서 슬픔에 겨워 이 시조를 지었다고 합니다. 단종은 유배된 지 몇 달 후 1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요. 조선의 왕 중 가장 단명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왕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단종의 왕비는 정읍시 칠보면에서 태어난 정순왕후 송씨인데, 본향은 여산입니다. 호남고속도로 여산휴게소가 위치한 바로 그곳이지요. 개인적으로는 45년 전 중학교 때 수학여행을 가면서 난생 처음으로 들른 고속도로 휴게소입니다. 정순왕후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한양으로 이주하였다가 15세의 나이로 당시 국왕이던 단종의 비로 간택됩니다. 하지만 1년 후 세조가 즉위하면서 왕비에서 물러나 대비가 되었다가 다시 1년 후 서인으로 강등됩니다. 파란만장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겠지요. 종로 쪽에서 신설동 쪽으로 가다 보면 흥인지문(동대문)을 지나 왼쪽으로 야트막한 산이 하나 보입니다. 그 산 끄트머리 부근을 동망봉(東望峯)이라고 부르는데요.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동쪽을 바라보는 봉우리’라는 뜻입니다. 정순왕후는 단종과 헤어진 후 이 부근에 살았는데요. 매일 단종이 있는 영월 쪽을 바라보며 이곳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이곳을 동망봉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지요. 흥인지문 부근에는 유독 정순왕후와 관련된 곳들이 많은데요. 먼저 동망봉에서 북쪽으로 가면 ‘청룡사’라는 사찰이 있습니다. 그곳에 ‘정업원구기비(淨業院舊基碑)’가 있는데요. 정업원 옛터에 세운 비석이라는 뜻입니다. 정업원은 왕실과 관련이 있는 여성들이 출가해 거주하던 곳이었는데요. 정순왕후는 서인으로 강등된 후 이곳에서 염색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부근에 있는 자주동샘(紫芝洞泉)이라는 곳에서 염색을 했다고 하는데요. 그녀가 지초(芝草)라는 자주색 나는 풀로 염색을 해 자주색 물이 흘러내린 데서 연유합니다. 동망동에서 내려와 청계천에 이르면 ‘영도교(永渡橋)’라는 다리를 만나는데요. ‘영영 이별하는 다리’라는 뜻입니다. 이곳에서 단종과 정순왕후가 헤어졌기 때문인데요. 왕후는 이 다리를 건너 부녀자들만 드나들 수 있는 여인시장에서 염색한 천을 팔아 생계를 이었다고 합니다. 정순왕후는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 대까지 살다가 82세의 나이로 그토록 그리워하던 단종의 곁으로 갔는데요. 안타깝게도 영월 장릉에 잠들어 있는 단종과는 멀리 떨어진 남양주시 진건읍에 있는 사릉에묻혀 있습니다. 단종은 숙종 대에 정순왕후와 더불어 복위되었는데요. 사육신을 선양함으로써 왕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려는 왕권강화책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을 이루어 행복하게 사는 일. 아마도 저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꿈일 텐데요. 정순왕후는 저승에서나마 낭군을 만나 이승에서 못다 이룬 꿈을 이루었을까요. 양중진 법무법인 솔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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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14 18:07

[타향에서]길고양이를 자연에 맡기라고?

길고양이가 눈에 띄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남녀가 많다. 혹한과 폭염에 무방비 상태로 내던져진 굶주리는 생명체를 불쌍히 여기는 이들이다. ‘사람이 먼저다’라는 어쭙잖은 말장난 뒤에 숨지 않는다. ‘그대로 두라’며 생태계 운운하지도 않는다. 측은지심으로 족하다고 나는 본다. 안쓰러워하는 데서 나아가, 행동하는 양심이 된 경우가 ‘캣맘’이다. 골목골목 길고양이들에게 밥과 물을 주는 그들에게 자연의 순리를 들먹이며 시비를 걸어서는 안 된다. 도시에는 흙길이 없다. 포장도로에서는 물 한 모금 구할 수 없다. 사방이 콘크리트 빌딩숲이다. 들어갈 처마 밑도 없다. 그렇게 좋으면 당신네 집으로 데려가라는 댓글 한 줄 달면서 이성적인 척해도 안 된다. 그들은 이미 여러 마리를 구해다가 보살피고 있다. 자기 돈으로 사료를 사고, 자기 발품을 들여 공존공생을 실천한다. 어느날 갑자기 출현하지도 않았다. 조선시대에도 ‘묘마마(猫媽媽)’라고 불린 선량한 백성들이 길고양이를 챙겼다. 길고양이를 노리는 흉악한 자들이 공분을 사는 사건이 반복되는 세상이다. 나중에 연쇄살인범이 될 수도 있는 아이에게서 나타나는 정신병리학적 요소 중에는 동물학대로 대표되는 사디즘이 있다. 보통사람도 유년기에는 경미한 수준의 가학성이 있다. 교육으로 교정 가능한 정도다. 연쇄살인범의 싹에게 만큼은 예외다. 장차 사람을 공격하기 위한 연습과정일 따름이다. 다만, 길고양이 개체수는 조절해야 한다. 용어부터 섬뜩한 살처분을 하자는 게 아니다. 무한번식을 방지하는 중성화(TNR)가 현시점 거의 유일한 해결책이다. 포획(Trap)-중성화수술(Neuter)-방사(Return)로 이어지는 과정이다. 길고양이의 왼쪽 귀에 ‘V’자형 표시가 있다면 중성화수술을 받은 것이다. 나는 전 서울시장에게 길고양이 무상 중성화수술을 제안한 바 있다. 한 두 마리가 아니었다. 더 할 수도 있으나 길고양이 수술에만 전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하루에 5마리만 거세(수컷)하거나 난소자궁 제거(암컷) 시술을 하겠다고 했다. 1년이면 1800마리다. 그러나 그 시장은 묵묵부답이었다. 본인이 아닌 엉뚱한 수의사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을 원치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선의의 재능기부 실천 의지는 어쨌든 그렇게 꺾이고 말았다. 우리집에는 반려묘가 있다. 이른바 ‘품종묘’는 아니다. 어느 대학생이 빈사 상태의 새끼고양이를 주워 내 병원으로 안고 왔다. 결국 살려냈고, 자연스럽게 집고양이가 됐다. 이름은 ‘갸릉이’, 이제는 늙어 만사 심드렁한 녀석이다. 그래도 저 위하는 건 잘 안다. 경계를 풀고 다가와 몸을 비비고, 박치기를 하고, 알아듣지 못할 대화를 시도한다. 주인의 품에서는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지 않는다. 믿음에 근거한 방심으로 배를 내놓은 채 곯아떨어지기도 한다. 감동이라는 감정, 거창한 게 아니다. 길고양이의 미래가 장밋빛 해피엔딩이기를 바란다. 상당부분 희망적이기도 하다. ‘도둑고양이’라는 단어가 죽은말이 됐다는 사실에서 성선설을 감지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 ‘길고양이’가 등재된 것이 불과 4년 전이다. 반려동물 가운데 30%를 차지한 고양이가 언어생활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이른 셈이다. 고양이를 기르는 인구가 늘수록 길고양이의 안전은 강화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행위는 불법이 아니다. 윤신근 서울 윤신근박사동물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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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07 17:55

[타향에서] 백석 시인과 김영한의 거룩한 사랑

살랑살랑 봄바람은 온 누리에 꽃을 피우고, 뽀송한 생명들을 어루만지며 사랑을 피우는 봄날, 아름다운 순정을 전한다. 일제 강점기 때 시인 백석은 천재적인 재능과 훤칠한 외모로 많은 여성들에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가 사랑했던 여인은 기생 김영한 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 못지않은 절절하고 가슴 뭉클한 사랑을 나누었다. 백석은 함흥 영생여고에서 영어 교사로 재직하던 1936년 어느 날 회식 자리에 갔다가 기생이던 김영한을 보고 첫눈에 반하고 만다. 잘생긴 얼굴에 로맨티시스트 시인은 그녀를 옆자리에 앉히고서 손을 잡으며 하는 말 “오늘부터 당신은 영원한 내 여자야.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기 전 까지는 우리에게 이별은 없어요” 라며 진심을 전한다. 이후 백석은 이백(당나라시대 시인)의 시구에 나오는 자야(子夜)라는 애칭을 김영한에게 지어줬다고 한다. 그렇게 둘은 첫눈에 반해 연인이 되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였다. 부모님께서 기생과 동거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강제로 다른 여자와 혼사를 치르게 한다. 그러자 백석은 첫날밤 집을 나와 연인 자야에게로 간다. 그리고 자야에게 만주로 도망을 가자고 제안을 했다. 자야는 보잘 것 없는 자신이 백석의 장래에 누가 된다는 염려로 단호히 거절을 하였다. 할 수 없이 백석은 혼자 만주로 떠나기로 마음을 먹고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만주에서 홀로 자야를 기다리며 유명한 시 <나와 나타샤와 힌 당나귀>를 짓는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나타샤를 사랑하고/눈은 푹푹 내리고/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소주를 마시다 생각한다/나타샤와 나는/눈이 푹푹 쌓이는 밤/힌 당나귀 타고/산골로 가자/출출이 흐르는 깊은/산골로 가 살자/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면/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이야기 한다/산골로 가는 /아름다운 나타샤는/나를 사랑하고/어데서 힌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응앙응앙 울 것이다. 그러나 간절한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백석은 자야를 찾아 함흥으로 왔지만 그녀는 이미 서울로 떠나고 없었다. 그녀를 그리워하며 세월을 보내고 있는데 3.8선이 그어지고, 이어서 6.25 전쟁으로 남과 북으로 갈라져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만다. 이후로 백석은 평생을 홀로 자야를 그리워하며 살다가 북에서 1996년에 운명(殞命)한다. 서울에서 살던 자야(김영한)는 대한민국 3대 요정 중 하나인 대원각을 세워 부를 이루며 성장을 거듭하였다. 훗날 자야는 시가 1,000억 원 상당의 대원각을 아무 조건 없이 법정스님에게 시주를 하였다. 그 대원각이 현재 서울 성북동에 있는 길상사(吉祥寺)다. 자야도 평생 백석을 그리워하며 살았다고 한다. 폐암으로 1999년에 세상을 떠났다. 살아생전에 어느 날 기자가 물었다. “1,000억 원의 재산을 시주한 게 아깝지 않느냐”고 물으니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1,000억 원의 재산은 그 사람 시 한 줄만도 못 합니다” 라고 했다 한다. 평생 동안 백석을 절절한 마음으로 그리워하며 순정으로 살아 왔던 것이다. 유언으로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해서 길상사에 눈이 많이 내리는 날 뿌려 달라” 고 하였다니, 백석의 시처럼 눈이 푹푹 내리는 날 백석을 죽어서라도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오동근 재경남원문인협회 기획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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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30 18:36

180만 전북도민 염원에 응답할 시간이다

결국, 제자리다. 윤석열 정부의 일방통행식 의대정원 증원은 채 아물지 않은 깊은 상흔만을 남긴 채, 실패로 귀결됐다. 대책은 손바닥 뒤집듯 번복됐고, 대화와 협의는 실종됐으며, 원칙은 무너졌다. 정부는 목적지는 알았지만, 그곳에 다다르는 법을 알지 못했다. 살리겠다던 공공·필수·지역의료는 오히려 송두리째 무너졌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취약한 의료체계의 민낯 앞에 누군가는 목숨을 잃었다. 불안과 염려는 국민의 몫으로 남았다. 이제 갈등의 늪에서 나와, 다시 미래로 향해야 할 시간이다. 제대로 ‘진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정확한 ‘처방’ 이다. 의료개혁의 첫 단추를 다시 꿰어야 한다. 대한민국은 자랑스러운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지방이 직면한 처참한 현실과 마주하면, 과연 우리의 의료체계는 선진국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는 민간 위주의 의료공급으로 공공의료 기반이 취약해, 언제라도 집단 사직 등 갈등의 불씨가 되살아날 수 있다. 자원과 인력 편중이 심각하고, 특히 응급, 심뇌혈관 질환, 고위험 분만 등 생명과 직결되는 필수의료의 지역 내 자체 충족이 불가능하다. 그 결과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 때론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다. 언제까지 주저앉아 서글픔만을 삼킬 수는 없다. 필요한 곳에 의사가 있어야 한다. 의대정원 증원의 최우선 목적은 공공·필수·지역의료의 확충이 되어야 한다. 아프면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차별 없이 치료받을 수 있는 나라로 나아가야 한다. 모든 국민의 건강하고 안전한 삶을 위한 보편적 공공보건의료의 요람, 그 최전선이 공공의대의 역할이다. 공공의대를 통해 배출되는 의료인은 지역별 격차를 줄이고, 수익성이 낮은 필수의료 분야의 공백을 해소하는 선봉이 될 것이다. 국민의 생명을 무너진 외양간에 이대로 방치한다면, 국가는 왜 존재하는가. 공공·필수·지역의료가 처한 작금의 위기 앞에 또다시 비겁하게 침묵한다면, 상처는 곪고 곪아 대한민국을 치유 불가능한 사회로 만들 수 있다.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 2018년 서남대 폐교에 따라 당시 당·정 합의사항인 서남의대 정원 49명을 활용한 공공의대 설립은 기울어진 불균형을 바로잡고, 필수과목의 인력 확보, 감염병·재난대응 구축 및 의료의 공공성을 이루는 한걸음이다. 차분히 준비 해왔고, 많은 논의가 있었다. 21대 국회에서 관련 법이 복지위를 통과했지만, 정부와 여당의 반대로 안타깝게도 목전에서 좌절됐다. 그사이 남원은 부지의 50% 이상을 매입했고, 전북은 공공의대 유치지원 특별위를 꾸렸다. 더불어민주당은 작년 6월, ‘공공의대법’ 당론 추진을 발표했다. 70여명이 넘는 의원들이 힘을 모았다. 여야와 정쟁에 가둘 일이 아니다. 정치적 소모와 갈등을 뒤로 하고, 국민의 생명 앞에 책임 있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공공의대는 단순히 의사 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곳에 필요한 인력을 배치하는 일이다. 그저 학교 하나를 더 짓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의료계가 나아갈 백년대계를 설계하는 물꼬를 트는 일이다. 개혁에도 ‘골든타임’이 있다. 시대적 책무를 받들고, 남원시민뿐 아니라 전북특별자치도민과 지리산권역 의료취약지역 주민의 염원을 이뤄야 한다. 이제, 국회가 180만 전북도민의 염원에 응답할 시간이다. 박희승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남원장수임실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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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23 18:27

「제다움」과 「나는 반딧불」 단상斷想

우리나라 대중가요 가사에는 인생의 온갖 애환이 녹아 있다. 송대관의 트로트 「유행가」에도 “유행가 노래 가사는 우리가 사는 세상 이야기”라는 구절이 있지 않은가. 간혹 어떤 사람이 우연히 어떤 가수의 노래를 듣고 큰 감동과 위로를 받아 그의 광팬이 되었다고 고백하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가령 진성의 트로트 「보릿고개」의 “아야 뛰지 마라 배 꺼질라”라는 가사에는 50~60년대 자식들을 제대로 먹이지 못해 애간장을 녹이던 부모들의 깊은 슬픔이 오롯이 담겨있다. 내가 요즘 꽂혀 있는 노래가 두 곡 있다. 페이스북 프로필에 번갈아 공유할 정도로 즐겨 듣는다. 하나는 「홀로 아리랑」과 「개똥벌레」를 작사·작곡한 한돌의 「제다움」. ‘제다움’은 표준어는 아니지만 ‘자기다움’의 준말. 노래 내용은 마치 꽃은 꽃으로 살고, 나무는 나무로 사는 것처럼 나는 나였으면 좋겠고 너도 너였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한돌은 진영논리의 블랙홀에 빠져 서로를 헐뜯기에 바쁜 세태를 점잖게 꼬집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감히 손에 꼽는 음유시인답다. 또 하나는 황가람의 「나는 반딧불」. 내용은 ‘나는’ 개똥벌레라는 사실은 새까맣게 모른 채 한때 하늘에서 떨어진 빛나는 별로만 생각했다는 것. 개그우먼 안영미는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에 황가람을 초청해 대담을 나누면서 이 노래를 처음 듣는 순간 자신의 노래라고 생각해서 복받치는 감정을 추스르는 게 힘들었다고 술회했다. 한때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살아오다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뒤 어느 순간 문득 자신이 너무 기고만장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 그리스 신화에도 「나는 반딧불」의 ‘나’를 빼닮은 벨레로폰이라는 코린토스의 왕자가 있었다. 그는 실수로 동생을 죽인 뒤 조국에서 추방당해 티린스의 왕 프로이토스에게 몸을 의탁했다. 얼마 후 왕비 안테이아가 궁전에서 우연히 벨레로폰을 보고 첫눈에 반해 구애했다가 단박에 거절당하자 남편에게 오히려 벨레로폰이 자신을 유혹하려 했다고 그를 모함했다. 프로이토스는 아내의 말만 믿고 복수심에 불타올랐다. 하지만 손님을 죽였다는 세간의 비난을 받고 싶지 않았다. 궁리 끝에 그는 벨레로폰을 죽여달라는 내용의 밀봉한 편지와 함께 그를 장인이자 리키아 왕 이오바테스에게 보냈다. 편지를 읽은 이오바테스도 손님을 죽였다는 비난을 받는 게 두려워 위험한 과업을 주어 벨레로폰을 자연스레 해치우려 했다. 하지만 그는 지혜의 여신 아테나가 보내준 천마 페가소스를 타고 힘든 과업을 3개나 완수하고, 길목에 매복해서 자신을 급습한 왕궁수비대마저도 몰살했다. 이오바테스는 그제야 벨레로폰에게 편지를 보여 주며 용서를 구했다. 진실이 밝혀지자 이오바테스는 벨레로폰에게 작은딸을 주고 그를 후계자로 삼았다. 이때까진 벨레로폰에겐 전혀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얼마 후 그는 마치 신이나 된 것처럼 사람들에게 으스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어느 날 신들의 왕 제우스와 식사하고 오겠다며 페가소스를 타고 올림포스 궁전을 향해 날아갔다. 분노한 제우스가 재빨리 쇠파리를 날려 페가소스의 궁둥이를 물게 했다. 놀란 페가소스가 갑자기 치솟아 오르자 벨레로폰은 그 충격으로 지상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인간은 잘나갈 때일수록 더 조심해야 한다. 인간이 정상에 올랐을 때, 신은 오만이라는 깊은 함정을 파놓고 시험한다. 거칠 것 없는 인간에게 오만은 꿀처럼 달콤한 법이다. 그래서 인간은 신나게 오만을 만끽하다가 결국 나락으로 추락한다. 김원익 홍익대 교수·세계신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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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23 18:26

원동산공원 의견상, 오수개와 다르네

지난 2월12일 이 코너 ‘타향에서’를 통해 오수개 이야기를 했다(‘오수개 있음에 임실이 있네’) 술에 취한 주인이 들판에서 잠이 든 사이 불이 나자 개울을 오가며 제 몸에 물을 적셔 주인을 살리고 죽은 개다. 오늘 한 번 더 오수개, 정확히는 오수개 동상을 이야기한다. 남원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우리집은 남원 시내보다 임실군 오수면과 더 가까웠다. 오수개의 사연을 일찌감치 접할 수 밖에 없었다. 오수개 복원의 첫 걸음으로 1996년 오수견연구위원회 위원장을 맡게 된 것도, 성장기에 오수개의 강렬한 스토리가 뇌리에 각인됐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후 각고의 노력 끝에 오수개를 부활시켰다. 과학은 기본이고 미(美)까지 탐구했다. ‘목적에 적합하도록 완성된 것이 아름답다’는 명제에 충실했다. 처음부터 막연하나마 글로벌 스탠더드를 지향했다. 국제축견연맹(FCI)의 원산지 기준을 과정과 단계마다 엄격히 적용했다. 중후하고 믿음직한 오수개는 그렇게 부활했다. 역사에서 현실로 실체를 드러낸 오수개, 복원된 오수개는 그러나 시빗거리도 들고 왔다. 바로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322번지 원동산 공원의 의견상이다. 고증과 유전학으로 육종해 낸 오수개와 의견상의 오수개 모습이 딴판이기 때문이다. 오수JC 심재석 전 회장이 특히 문제 삼고 있는 부분이다. 이 의견상은 1997년 세워졌다. 오수개를 되살려 내기 전이다. 동상 오수개가 실물 오수개를 닮지 않은 이유다. 상상으로 만든 것이니 어쩔 수 없다. 귀와 갈기털 등 오수개와 다른 구석이 많다. 게다가 너무 높은 곳에 동상을 설치한 바람에 기특하다고 머리를 쓰다듬기는커녕 기념촬영을 하기에도 불편하다. 동상을 실제 오수개 형태로 다시 빚고, 명칭도 ‘의로운 오수개’식으로 새로 붙임직하다. 동상은 ‘그까짓’ 게 아니다. 동상은 일방적, 무조건적 긍정이다. 본받아야 마땅할 대상만 동상으로 제작해 기린다. 추상적 개념을 구체적 형상으로 제시하는 것이 동상이다. 따라서 동상은 사실과 진실에 기반해야 한다. 기존의 의견상은 오수개의 상징성을 웅변하기에 부족하다. 동상을 보고 받은 감동과 교훈을 살아있는 오수개에게서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오수개의 감동적인 충의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미덕이다. 조각가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조각한 여인상과 사랑에 빠졌다. 극진한 사랑에 감동한 여신 아프로디테는 피그말리온의 여성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줬다. 간절하면 하늘도 돕는 법이다. 그리스 신화의 ‘피그말리온 효과’를 오수개 동상에 원용하기를 바란다. 아울러 새로운 오수의견상에는 ‘불끄는 개’의 이미지가 추가됐으면 좋겠다. 119구조견, 그 가운데서도 소방견으로 오수개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미국화재예방협회(NFPA)의 달마시안종 소방견 ‘스파키’처럼 오수개도 글로벌 인지도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오수의견문화제 시즌이 다가오고 있다. 심민 임실군 군수의 적극행정 덕분에 해를 거듭할수록 알이 꽉꽉 차는 행사다. 올해는 더욱 성황을 이룰 것이다. 윤신근 서울 윤신근박사동물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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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09 18:28

서울에서 만난 전북- 권율 장군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 ‘호남이 없으면 곧 나라가 없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사이던 이순신 장군께서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에 쓰신 글입니다. 임진왜란에서 조선이 무사할 수 있었던 건 곡창지대인 호남을 지켜낸 덕분입니다. 군량미를 지켜냄으로써 왜군이 식량을 조달할 수 없게 만들어 궁지에 몰아넣었던 것이지요. 당시 호남을 지켜낸 싸움이 이치전투와 웅치전투입니다. 충무공 3부작 중 2부에 해당하는 영화 ‘한산’에 웅치전투가 등장하는 이유이지요. 웅치·이치 전투는 1592년 음력 7월 완주와 금산의 경계인 배고개(梨峙)와 전주와 진안의 경계인 곰치(熊峙)에서 벌어졌습니다. 이치는 김제 군수 정담, 나주 판관 이복남, 의병장 황박 등이, 웅치는 임시 전라도절제사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 등이 지켰습니다. 조선군은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싸워 결국 호남을 지켜냈습니다. 왜군을 몰아낼 토대를 마련한 것이지요. 이후 권율 장군은 수원을 거쳐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행주산성으로 군대를 움직입니다. ‘평양성에서 패한 왜군이 전열을 정비해 대규모로 쳐들어왔다. 조선군은 수적으로는 열세에 놓여 있었지만 지휘관인 권율 장군을 필두로 똘똘 뭉쳐 사기만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한참을 싸우던 중 화살이 떨어지자 부녀자들이 치마에 돌을 날랐다. 왜군에게 돌팔매질이라도 하는데 사용하도록 한 것이다. 결국 왜군을 물리쳤다. 그때부터 행주치마라는 말이 생겼다.’ 제 기억으로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이런 내용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서울로 유학을 온 후 행주산성이 어디인지 무척이나 궁금했습니다. 판문점 가는 길 쪽에 있다던데 도무지 어디인지 알 수 없었지요. 그쪽으로는 산성을 쌓을 만큼 높은 산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남원검찰청을 떠나 고양검찰청에 근무하게 되면서 행주산성의 위치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좀 실망스러웠습니다. 명성에 비해 성의 규모가 너무 작은 것처럼 보였거든요. 서울에서 자유로를 따라 고양쪽으로 가다 보면 한강변에 외롭게 떠있는 조그마한 야산이 있습니다. 바로 덕양산이지요. 그 얕고도 조그마한 산에 행주산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행주산성을 올라가 보고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높이는 125미터에 불과하지만 천혜의 요새라는 걸 알 수 있었지요. 우선 3면이 강과 늪,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러니 군사가 진입할 수 있는 곳이라고는 서북쪽 능선뿐인 데다가 이곳도 좁디좁아 한꺼번에 대규모 병력이 진입하기 어렵습니다. 저 같은 문외한의 눈으로 보아도 적은 인원으로 많은 적을 격퇴할 수 있는 곳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권율 장군을 만날 수 있는 장소가 또 한군데 있습니다. 사직공원과 독립문을 연결하는 사직터널 위쪽 산기슭에 있는 장군의 집터입니다. 지금은 집 대신 500여년 된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지요. 덕분에 동네 이름도 은행나무 동네, 즉 행촌동(杏村洞)입니다.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 은행나무 아래라고 합니다. 때문에 예로부터 학문이나 학교의 상징으로 여겨져 향교나 문묘에 심었다고 합니다. 또 선비가 살던 집이나 별서 혹은 마을의 입구에도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하는데요. 햇살이 좋은 날 행촌동 골목길을 걷다 보면 선비의 향기가 코끝을 스치는 걸 느낄 수도 있을 겁니다. 양중진 법무법인 솔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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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08 15:43

십승지(十勝地) 운봉고을

역사적으로 전쟁,재해,질병이 없고 거주환경이 좋은 조선 정감록에 기록되어 있는 십승지가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해발450-550m)이다. 필자가 태어나고 자란곳은 가장리(법정리명은 덕산리)다. 마을뒤엔 큰 저수지가 있다. 용왕님이 있다는 검푸른 저수지는 두려움이 있던 곳으로 나에게는 신성한 경외심으로 다가와 용왕님께 두손모아 간절히 소망을 빌었던 기억들이 생각난다. 봄이 오면 수리조합 직원들이 와서 거대한 수문을 열었다. 한번은 친구와 나는 저수지 아래 작은 방죽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데 엄청난 굉음에 놀라 소리난 곳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폭포수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용수철 튀어 오르듯이 쏟아져 내리는 모습은 주변을 삼켜버릴 듯한 포악스러운 모습이었다. 처음 보는 광경에 친구와 나는 두려움이 엄습해 낚시를 포기하고, 먼 발치에서 수로를 따라 넘실대며 도도하게 흐르는 물살의 위용에 넔을 잃고 한참을 지켜보고 있었다. 수리조합 직원들의 안내를 미리받은 아버지와 동네 어른들께서는 큰 축복을 받으신 듯 물길을 내느라 분주히 다들 소란스러웠다. 논에 물이 잠기자 이곳저곳에서 누렁소를 이끌고 논갈이가 시작되었다. 한해의 농사가 물의 공급으로 시작된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저수지 물은 벼농사를 위해 겨우내 움크리고 추위를 견디며 봄날을 그리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시절 둑방은 아득한 높이여서 친구들과 자주 선착순 경쟁을 했다. 도착하면 가슴은 터질 듯이 숨이 차오르고 수평선을 바라보면 물결은 우리들을 포근히 품어주던 엄마같은 존재였으며 용왕님이 깊은 곳에 있다는 신비를 동경헀었다. 부드러운 물결은 투박한 우리들 마음을 어루만저 주고 푸른 꿈을 심어 주었다. 둑 정상에서 바라본 운봉은 넓은 들녘을 철갑산으로 울타리를 만들어 전란에서도 우리를 보호하는 요새였고, 평야는 오곡백과로 풍성해 살기좋은 낙원이었다. 성심으로 땀흘리시며 사셨던 선조님과 부모님 세대의 지혜와 삶이 있었기에 미래를 향한 우리들은 도전할 수 있었고 나래를 펼수 있었다. 좋은 환경의 양분은 오늘날 곳곳에서 소금되고 빛이되는 훌륭한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라 말할 수 있다. 여름이면 맑은 개울에서 친구들과 물장구치며 여울목 막아 가물치,쏘가리,피라미,메기,붕어,미꾸라지,모래무지,가재등을 잡느라 시간가는 줄 모르고 해지는 무렵에야 각자 집을 향해 달음박질 하며 짧은 하루를 보내며 지냈다. 가을날엔 오고가며 길목에서 단감,오이,토마토,자두,복숭아,무우,당근등을 살며시 취해 인적드문 곳에서 깔깔대며 철없는 만찬을 즐기기도 했었다. 지금은 어림없는 얘기다. 당시엔 너그러이 용서해 주고 눈감아 주셨다. 때론 무서운 주인을 만나면 크게 혼이 나고 부모님까지 난처하게 한 상황도 있었다. 겨울이면 무릎까지 차오르는 눈길을 형들이 발자국 내어 주면 그곳을 밟으며 등교를 하였다. 운봉고원은 고지가 높아 추위가 매섭고, 눈보라 치는 날이면 온몸이 꽁꽁얼어 교실 공탄 난로의 따뜻함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지금은 두려움의 저수지도 작은 호수에 불과하고 마을, 저수지둑방,학교길,개천,정자나무,뒷동산등은 오랜 세월의 풍파에 낡고 왜소해진 모습으로 변해있다. 1년에 한두번 방문하면 필자를 알아보시는 고령의 어르신 몇분이 계신다. 힌머리에 굵은 주름과 구부정한 세월의 낙관(落款)을 볼 때마다 많은 세월이 흘렀음을 알고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느낀다. 오동근 재경남원문인협회 기획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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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02 18:05

몽당연필과 책보

나는 샤프펜슬이 아니라 연필 세대다. 연필심을 보관통에 집어넣고 맨 위 버튼을 누를 때마다 자동으로 심이 조금씩 나오는 샤프펜슬과는 달리 연필은 칼로 직접 끝자락을 깎아야 심이 나왔다. 이를테면 샤프펜슬이 디지털이라면 연필은 아날로그였던 셈이다. 내 기억으론 그때 난 친구들과 연필을 가장 빠르고 예쁘게 깎는 시합도 벌였다. 난 아직도 책을 읽으면서 책장에 뭔가를 기록해두거나 노트에 요약할 때 연필로 써야 마음이 편안하다.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젠 칼 대신 연필깎이를 쓴다는 것. 모든 게 귀했던 국민학교(!) 시절 우린 새 연필이 생기면 닳고 닳아 몽땅하게 될 때까지 써야 했다. 심지어 연필이 엄지와 검지로 잡을 수가 없을 정도로 짧디짧은 몽당연필이 되어도 머리 부분을 칼로 다듬어 어렵사리 구한 볼펜 몸체에 끼워서 썼다. 가수 마이진의 노래 <몽당연필>에서 “닳고 닳은 인생이라 비웃지 마소”와 “내 목숨이 줄어드는 줄도 모르고”라는 가사가 애틋하게 귀에 착 꽂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몽당연필’처럼 내 어린 시절 추억과 애환이 오롯이 담겨있는 단어가 바로 ‘책보’다. 그 시절 우리 소꿉친구들 사전辭典엔 ‘책가방’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우린 등교 전날 저녁이나 당일 아침에 방바닥이나 마룻바닥에 보자기를 펴놓고 그 위에 수업에 쓸 책들과 공책들을 대각선으로 놓은 다음 둘둘 싸서 방 한쪽에 챙겨놓았다. 우린 그 책 다발을 ‘책을 싼 보자기’의 줄임말인 ‘책보’라 불렀는데, 이럴 때 ‘책보’는 당연히 ‘책가방’을 의미한다. 하지만 ‘책보’는 그냥 ‘보자기’라는 뜻으로도 쓰였다. 보자기조차 귀했던 시절이었으니 어렵사리 보자기가 생기면 으레 책보로 썼기 때문일 것이다. 우린 당시 책보를 꾸릴 때 가운데쯤에는 필통을 넣었고, 둘둘 만 보자기 끝자락은 풀어지지 않도록 오삔(!)으로 고정했다. 이어 부리나케 아침밥을 먹은 후, 어떤 친구는 책보를 마치 벨트처럼 허리에 두른 채, 어떤 친구는 마치 검객이 칼을 메듯 대각선으로 어깨에 멘 채 대문을 나서자마자 학교를 향해 쏜살같이 뛰었다. 그렇게 학교에 도착해서 책보를 열면 필통 속 연필심은 이미 부러져있기 일쑤였고, 가끔 책보에 도시락을 함께 쌌을라치면 책들과 공책들이 모두 김칫국물로 범벅이 되기도 했다. 그런 줄 알면서도 우린 다음 날 아침도 어김없이 무조건 달려 숨이 차서 헉헉거리며 학교에 도착하는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수업 전에 연필을 깎느라 바빴다. 그때 우리가 왜 그렇게 무작정 뛰었는지 지금도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마 어린아이들이 늘 그렇듯 힘이 넘쳤거나, 얼른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공부하고 놀 생각에 마냥 신이 났기 때문이리라. 혹은 그냥 좋아서 그랬으리라. 어린 시절은 그저 바람만 불어도, 비만 와도, 눈만 내려도 절로 웃음이 나오는 순진무구한 때가 아니었던가? 선물 보자기를 보면 불현듯 어린 시절 책보를 메고 신작로를 질주하던 내 모습과 더불어 또 다른 광경이 눈앞에 떠오른다. 때가 되면 엄마가 내게 책보를 가져오게 하여 가운처럼 내 목에 두르고 바리깡(!)과 가위로 머리를 깎아주시던 장면이다. 궁핍한 시대였는지라 설 명절 등 특별한 날 외엔 자식들을 이발소에 보내지 못했기에 집집마다 생긴 진풍경이다. 내가 4남 2녀 중 막내라서 엄마의 시행착오를 경험하지 못한 덕분일까? 내 생각엔 당시 엄마의 바리깡과 가위질 솜씨는 단연 우리 동네 최고였다. 김원익 세계신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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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26 18:47

서울에서 만난 전북- 백정기 의사

마포구 공덕동에 있는 서울서부지검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일입니다. 청사 뒤쪽에 공원이 있어 산책하기 좋았지요. 바로 효창공원입니다. 원래 정조의 첫째 아들인 문효세자와 그의 어머니 의빈 성씨의 무덤이 있어 효창원(孝昌園)으로 불리던 곳이었지요. 일제 강점기 왕실 무덤은 고양에 있는 서삼릉으로 이전했고, 대신 골프장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효창공원을 산책하다 보니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들의 추모 시설이 유난히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선 김구 선생의 묘소와 기념관이 있습니다. 또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셨던 이동녕, 조성환, 차이석 선생도 모셔져 있지요.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띈 묘역이 한군데 있었습니다. 바로 ‘삼의사묘’입니다. 삼의사(三義士)는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세 분을 말합니다. 부끄럽게도 당시 저는 윤봉길, 이봉창 두 분은 알았지만 백정기 의사는 잘 몰랐습니다. 설명판에는 백의사에 대해 이렇게 적혀 있었지요. “전북 부안 출신으로 3·1 운동 후 상하이로 건너가 무정부주의자 연맹에 가입하여 노동자 운동과 일본 상품 배척 운동을 이끌었고, 일본 시설물 파괴 공작과 요인 암살, 친일파 숙청 등을 목표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 상하이 홍커우 육삼정 연회에 참가한 일본 주중공사 아리요시를 습격하려다 잡혀 일본 나가사키 법원에서 무기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이듬해 6월 5일 순국하였다.” 당시만 해도 저는 ‘무정부주의자 운동’라던가 ‘일본 공사 습격 사건’ 같은 내용들은 문외한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나중에 책이나 영화를 통해 이회영, 박열, 백정기 선생 같은 분들이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을 펼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백정기 의사는 1896년 부안군 동진면에서 태어났습니다. 1902년 정읍시 영원면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성장했지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성장하다가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고 19세 때인 1914년 서울로 상경했습니다. 그러다가 3·1 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을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와 항일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이후 계속 무장 투쟁의 길을 걸었지요. 1924년 일본 하야카와수력발전소 공사장 파괴 시도, 같은 해 일본 천황 암살 시도, 1932년 홍커우 공원 폭탄 투척 시도, 1933년 홍커우 아리요시 일본 공사 습격 시도 등이 그것입니다. 홍커우 공원 폭탄 투척 시도는 윤봉길 의사가 성공했던 바로 그 사건과 같은 사건입니다. 당시 백 의사도 일본군 사령관 암살 등을 노리고 있었으나, 마지막에 입장권을 구하지 못해 거사를 일으키지 못했다고 합니다. 효창공원에 ‘삼의사묘’가 조성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1946년 일본에서 순국하신 세 분의 유해를 고국으로 모시자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1946년 대한민국 최초의 국민장으로 세 분을 효창원으로 모신 것이지요. ‘삼의사묘’ 옆에는 묘가 하나 더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묘이지요. 하지만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신 후 유해를 찾지 못해 현재는 가묘 상태로 되어 있습니다. ‘조국의 자주 독립이 오거든 나의 유골을 동지들의 손으로 가져다가 해방된 조국 땅 어디라도 좋으니 묻어주고, 무궁화 꽃 한 송이를 무덤 위에 놓아 주기 바라오.’ 백 의사의 유언입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대한민국이 의사에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덕분에 자주 독립된 나라에서 사는 우리도 한 번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양중진 법무법인 솔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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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19 18:19

진료는 수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약국이 개·고양이 약을 판다. 마취제, 호르몬제, 항생항균제, 생물학적제제 등 종류도 가지가지다. 코로나·인플루엔자 사독백신 등 주사제도 수의사 처방 없이 약사가 판매한다. 반려동물이 실험동물이 돼버린 셈이다. 말을 할 줄 모르는 동물은 약의 부작용도 호소할 수 없다. 약사는 사람약 전문가다. 동물약은 수의사가 전문이다. 약국의 새로운 수입창출 욕구와 반려동물 주인의 ‘귀차니즘’이 맞아떨어진 시장 왜곡의 현장이 바로 ‘동물약 파는 사람약국’이다. 수의사는 동물을 시진, 청진, 타진, 촉진한다. 주인을 문진하기도 한다. 진찰 후 처방이 정확할 수 밖에 없는 체제다. 반면, 약사는 ‘내 개는 내가 제일 잘 안다’는 주인의 자가진단만 믿고 약을 내놓는다. 위험하고 위태롭다. 이게 다 ‘약사법’의 독소조항(제85조 제7항) 탓이다. 수의사를 건너 뛰고 누구나 약국에서 동물약을 구매할 수 있도록 했다. 수의사의 처방을 생략한 채 동물약품을 유통할 수 있도록 약사법에 예외를 부여했다. 동물용 실데나필을 사다가 남성용 ‘비아그라’로 오남용하는 것마저 가능할 지경이다. 이런 약국이 전국에 1만5000곳 이상이다. 수의사들은 동물판 의약분업에 찬성하지 않는다. 동물병원들의 피해가 막심하다. 법을 바로잡아야 동물병원이 정상 가동되고, 동물병원이 제 기능을 해야 아픈 동물들이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 약사가 수의사를 동물약품 시장에서 몰아내고 있다. 동물병원 말고 약국으로 오라고 호객하는 약사들이 증가일로다. 약대의 동물용의약품 교과목을 확대하고 동물약 전문약사를 양성해 약사가 동물약을 조제토록 하려는 움직임마저 감지된다. 동물병원은 수술과 내과진료만 하라는 우격다짐이나 다름없다. 의약품을 내 준 동물병원은 사실상 운영이 불가능하다. 개와 고양이와 그 주인이 사람약국을 찾는다면 동물병원의 미래는 없다. 수의사 단체들이 나서야 한다. 약사법 개정 투쟁을 서둘러야 한다. 국회와 농식품부에 약국의 부당함을 알리고 단속 강화를 촉구해야 한다. 수의사에게만 공급하는 동물약품을 약국 매대에 진열해 팔고 있는 행태를 좌시해서는 안 된다. 수의사는 동물용의약품을 제외한 인체용의약품은 사용만 할 뿐 판매할 수 없다. 그런데 왜 약사가 동물용 의약품을 판매하는 것은 허용하는가. 동물에 관한 한 ‘수의사법’이 ‘약사법’ 위에 있다고 본다. 약사법은 강도 프루크루테스, 수의사법은 그 침대에 묶인 나그네 꼴이다. “동물학대를 유발하는 무분별한 약품 판매가 개선되기를 바라고 동물약품을 판매하는 곳에서도 해당 행위가 사용자의 오남용을 유발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하며 동물의 보호자 역시 선의로 행한 행위가 동물에 대한 학대 행위가 될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는 대한수의사회의 어필은 한가롭고 점잖다. 현 시점 동물병원 수의사들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 돌려대라’는 말씀을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실천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수의사는 이미 20여년 전 어의사(수산질병관리사)에게 물고기 등 수산생물 진료를 내줬다. 이번에는 동물약품까지 약국에 헌납한 ‘실패를 잊은 백성’으로 연명해야 하나. 남의 것을 빼앗으면 안 된다. 남 또한 내 것을 빼앗으면 안 된다. 개와 고양이를 기르는 시민들도 당장의 편리만 좇지 않았으면 좋겠다. 윤신근 서울 윤신근박사동물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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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12 18:41

조선시대 김삼의당 여류시인

지난 2월달 칼럼에서 ‘남원을 문화의 도시로 만들자’에 이어 남원이 낳은 조선시대 여류시인 김삼의당은 누구인가. 김삼의당은 1769년(영조45)년 김해김씨 탁영(濯纓)김일손(金馹孫)의 후손 김인혁(金仁赫)의 딸로 남원부 서봉방(유천마을)에서 출생하여 18세 되던 해, 같은 해 같은 날 같은 동네에서 출생한 담락당(湛樂堂) 하립과 혼인하였는데, 하립은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하연(河演)의 후손인 하경천(河經天) 의 아들로 비록 가세는 기을었지만 시아버지를 비롯해 다섯 형제가 모두 시문에 능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립과 김삼의당 부부는 입신양명하여 두 집안의 가세를 회복하고, 부모님께 영화를 보여 드리기 위해 과거시험 합격을 목표로 삼아 신혼생활을 꿈꿀 겨를도 없이 이별과 별거를 15년 하며 학업에 정진하였으나 과환(科宦)의 뜻은 이루지 못했다. 여러 차례 과거에 낙방한 결과 어렵던 생활은 더 어려워져 갔지만 낙방 소식을 전해들은 김삼의당은 뒷바라지를 위해 머리를 자르고 비녀를 파는등 전력을 하였다. 편지에는 ‘당신의 과거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제 소임입니다. 올 가을에 경시(慶試)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나 같은 아녀자에게 마음쓰지 마세요, 꼭 합격하여 큰 꿈을 펼치시고, 우리 임금을 요순(堯舜)처럼 훌륭하게 만드세요’ 라며 간절한 마음을 전하였으나 끝내 부부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256년 전, 하립과 김삼의당은 혼인식을 하였다. 두 사람은 문학적 재능으로 첫날밤 신랑이 먼저 시를 읇었다. “우리 둘이 만났으니 광한루 신선인가/이 밤에 만남은 분명 옛 인연을 이음이오/배필은 원래 하늘이 정한다고 하니/세상의 중매란 모두 부질없는 일이라오/부부간의 도리는 인륜의 시작으로/온갖 복이 여기서 비롯한다 하오/시험삼아 <시경> 도요편 살펴보니 /집안의 화목이 당신 손에 달렸다오”. 그러자 신부가 아미(蛾眉)를 살짝올리며 시로 화답한다. “열여덟 살 신랑과 열여덟 살 새색시가/동방화촉 밝히니 좋은 인연이네요/같은 해 같은 달에 태어나 한 동네에서 살았으니/이 밤의 우리 만남 어찌 우연이겠어요/부부의 만남에서 백성이 생겨나며/군자의 도리도 여기에서 시작된다지요/공경하고 순종함이 아내의 도리이니/이 몸 다하도록 당신 뜻 어기지 않겠어요”. 이렇게 시를 나누며 첫날밤을 보낸 신랑은 신부의 방벽에다 그림과 글씨를 가득 붙여놓고, 정원에는 여러 가지 꽃을 심은 다음 아내의 방문앞에 ‘삼의당(三宜堂)’ 이란 당호(堂號)를 걸어주었다. 뜻은 ‘집안을 화순하게 한다는 의미다’. 김삼의당은 시문집으로 99편 264수의 시와 22편의 산문이 있다. 조선시대에 여류작가는 신사임당(1504-1551),송덕봉(1521-1578),허난설헌(1563-1589)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삼의당(1769-1823)작품도 손색이 업으며 작품 수에서는 압도적이다. 그동안 조명을 받지 못한 이유로는 가세가 회복되지 못하고 기울어졌던게 원이이라 할 수 있다. 신사임당은 율곡이이가, 허난설헌은 교산허균, 송덕봉은 미암유희춘 같은 걸출한 배경과 후광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00년도부터 남원김삼의당 기념 사업회를 추진해 오신 분들께 존경심을 표한다. 2020년에는 사단법인 김삼의당 기념사업회도 발족하였다하니, 문학을 통하여 남원문화 창달에 크게 기여하리라고 본다. 오동근 재경남원문인협회 기획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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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05 18:32

아주 보통의 하루

전주에서의 고등학교 시절, 기전여고 뒤 도토리골 등 여러 하숙집 중 특히 중노송동 하숙집을 잊을 수 없는 건 그곳에서 난생처음 생생하게 직관한 죽음 때문이다. 1학년 여름 어느 토요일, 난 한방을 쓰던 3학년 형의 예지력(!)으로, RCY에서 인공호흡 교습을 받고 와 꽤 피곤한 터라 초저녁에 곯아떨어졌다. 새벽녘, 갑자기 안방에서 하숙집 아주머니의 어린 딸이 울면서 다급하게 엄마를 흔들어 깨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왜 그래? 엄마!” 깜짝 놀라 형과 함께 벌떡 일어나 달려가 보니 아주머니가 주무시다가 갑자기 서너 번 “크억!”하시더니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얼른 아주머니에게 다가가 번갈아 가며 인공호흡을 실시했다. 하지만 응급차가 올 때까지 아주머니의 호흡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날 우린 교회에서 목사님으로부터 아주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다. 아울러 성도를 살리려 애써준 두 하숙생에게 감사하다는 말도 들었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인 2021년 11월. 느닷없이 고등학교 같은 기수 동문회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동기가 날 찾고 있는데 전화번호를 알려줘도 되냐는 것. 이름을 물어보니 나도 그동안 찾으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하다가 포기했던 친구였다. 우린 고등학교 때 절친이었는데, 각각 지방과 서울로 대학을 가면서 헤어진 뒤 속절없이 40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 말았다. 망설일 필요가 뭐 있겠는가? 얼른 친구 전화번호를 받아 당장 통화를 할 수밖에. 정말 감격의 해후였다. 우린 내내 달뜬 기분으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연말쯤 부부끼리 만나기로 하고 아쉬운 통화를 끝냈다. 내가 친구를 찾지 못한 것은 일단 내 착각 때문이었다. 난 친구가 한의학과에 들어간 줄 알고 인터넷에서 전국에 있는 친구 이름의 한의원만 찾았는데, 사실 친구는 의대에 진학해서 졸업 후 의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게다가 친구는 나처럼 고등학교 동문회 활동에 소극적인지라 동문 주소록에 연락처를 남겨놓지 않았다. 이러구러 크리스마스가 지난 2021년 12월 26일 이러다가는 해를 넘기겠다는 조급함에 친구에게 카톡을 보냈다. “메리 크리스마스! 11월에 연락했는데 어느새 연말이야. 연말연시 가족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라. 올해 너와 연락된 게 내겐 정말 가장 큰 선물이었어.” 하지만 2주가 되도록 아무런 답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해를 넘겨 2022년 1월 초에 이번에는 문자를 보냈다. “잘 지냈어? 카톡을 안 보네? 설마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 역시 아무런 답이 없었다. 며칠 후 불안한 예감에 사로잡혀 막 동문회장에게 연락해보려는 참에 카톡으로 청천벽력 같은 친구의 본인상 부고가 날아왔다. 나는 큰 충격을 받고 당장 인천 장례식장으로 달려가 혼자 소주잔을 기울이며 통곡했다. 친구 동생을 통해 사정을 들어 보니, 친구는 처음엔 혼자 의원을 운영해오다가 몇 년 전 뜻이 맞는 지인들과 큰 병원을 설립해서 이제 막 편안하게 살만하니 갑자기 쓰러져 홀연히 먼 길을 떠나버렸다. 올 2월은 다섯 번이나 지인의 부음 소식을 들었다. 나는 부고장을 받을 때마다 불현듯 내 뇌리에 깊이 아로새겨있던 위의 두 죽음이 떠오르며 삶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새삼 실감하곤 한다. 그렇다고 허망해하며 절망하는 건 아니다. 원래 허망한 삶을 내가 어쩌겠는가? 알베르 카뮈의 책 『시지프 신화』의 시지프처럼,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히라야마처럼 ‘아주 보통의 하루’에 감사하며 살 수밖에 별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김원익 세계신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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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26 18:03

서울에서 만난 전북- '인촌 김성수'

제가 그를 처음 만난 건 40여년 전의 일입니다. 남원 촌놈이 태어나서 처음 서울에 올라오던 날이었지요. 남원역에서 통일호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내렸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물어물어 서울역 건너편으로 가서 버스를 탔습니다. 교문을 들어서는 순간 꿈에 그리던 풍경이 나타났지요. 돌로 지어진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마치 ‘대학이란 이런 곳이야’라고 알려주는 듯했기 때문이지요. 그 건물들 정면에 머리와 어깨에 하얗게 눈을 뒤집어쓴 그가 서 있었습니다. 바로 ‘인촌 김성수 선생’입니다. 입학 후에 보니 고려대학교 교내에는 그의 묘소도 있었습니다. 학교 뒤편 고즈넉한 곳에 있었는데 ‘인촌묘소’라고 불렸지요. 당시에는 학생들의 데이트나 동문회 장소로 자주 이용되었습니다. 그의 묘소는 1987년경 남양주시로 이장되었고, 그 자리에는 ‘인촌기념관’이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왜 고려대학교 안에 그의 동상과 묘소가 있었을까요. 선생은 1891년 고창군 부안면 인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선생의 집안은 당시 조선에서 가장 대표적인 지주 집안이었지요. 담양에 있는 창평 영학숙과 부안에 있는 내소사에서 공부하다가 일본으로 유학해 1914년 와세대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이후 1915년 중앙학교를 인수해 1917년 교장으로 취임했습니다. 1919년에는 3·1 운동에 참여해 자신의 집을 회합 장소로 제공하기도 했지요. 그해 10월에는 경성방직을 설립해 운영했고, 다음 해에는 동아일보를 설립해 사장으로 일했습니다. 여러 사회활동을 하던 선생은 1932년 3월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한 뒤 1932년 6월부터 1935년 6월까지 교장으로 활동했습니다. 보성전문학교는 1946년 고려대학교로 전환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고려대학교 교내에 선생의 동상과 묘소가 있던 이유이지요.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1936년 동아일보도 일제에 의해 발행이 중지됩니다. 바로 ‘일장기 말소 사건’ 때문이지요. 때문에 선생도 사장이던 송진우 선생과 더불어 동아일보 취체역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그러다가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친일 행적을 보이게 되는데요. 친일 강연을 하고 국방헌금을 낸 것이 대표적입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이름을 올린 이유이지요. 해방 후 선생은 제2대 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는데요. 재직 당시 ‘각하’라는 호칭을 폐지했는데, 선생이 물러나자 다시 부활했다고 합니다. 서울에는 고려대학교 이외에 세 곳에 선생의 동상이 있습니다. 먼저 중앙고등학교입니다. 1915년 경영난으로 폐교 위기에 처한 중앙학교를 인수해 민족사학으로 육성한 선생의 뜻을 기린다는 의미로 세워졌습니다. 과천 서울대공원에도 1991년 선생의 동상이 세워졌는데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건립했습니다. 청계천 입구 동아미디어센터에도 선생이 40대 초반의 모습으로 있는데요. 동아일보를 설립해 운영한 업적을 기리는 취지입니다. 최근 105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님께서는 자신이 만난 사람 중 인격과 인간관계에서 제일 훌륭한 분이 인촌 선생이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기주의 배격, 선의의 경쟁과 결과에 대한 승복, 사회에 헌신하기 위한 후학 양성의 중요성 강조 등이 인촌 선생이 강조하신 덕목이라고 하셨는데요.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덕목 아닐까요. 양중진 법무법인 솔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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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19 18:15

오수개 있음에 임실이 있네

전북 임실군 오수면은 의견의 성지나 다름없다. 모름지기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충견의 사연을 간직한 곳이다. 때는 신라 말~고려 초, 술에 취해 풀밭에 잠든 남자에게로 들불이 엄습했다. 곁에 있던 개는 수십수백 번 물을 오가며 제 몸을 적셔 주인을 살리고 죽었다. 그는 개를 묻고 무덤에 지팡이를 꽂았다. 지팡이는 자라서 나무가 됐다. 개 ‘오(獒)’, 나무 ‘수(樹)’, 오수라는 지명의 유래다. 이 동화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인 오수개를 내가, 아니 우리가 부활시켰다. 1996년 오수면 청년회의소(JC) 심재석 회장과 의기투합해 이듬해 ‘오수견 연구위원회’를 결성했다. 한국동물보호연구회장·국견세계화추진위원장 자격으로 내가 위원장을 맡았다, 한홍률 서울대교수, 최인혁 전북대 교수, 민속학자 천진기 관장, ‘얼굴박사’ 조용진 교원대 교수 등 사계의 권위들을 연구팀과 육종팀으로 모셨다. 여기에 정관일 오수개육종사업소장의 헌신이 더해졌다. 티베탄마스티프에 주목했다. 적당히 긴 털에 물을 묻혀 불을 끌 정도의 몸집과 체력을 갖춘 오수개의 조상으로 가장 유력했다. 이 견종을 순종교배(퓨어브레드 브리딩) 방식으로 육종했다. 흑색 수놈 3두(흑 2·황 1)와 암놈 7두(흑 5·황 2)로 시작했다. 숱한 시행착오와 난관을 극복한 끝에 오수개는 어느덧 제 모습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오수개는 처음부터 핫이슈였다. ‘순종’으로 확정되기 전인데도 마리당 3000만~5000만원을 낼테니 분양해 달라는 애견인들이 있었다. 물론, 안 팔았다. 혈통이 완전히 고정되지 않기는 했다. 그래도 오수개라는 존재를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들 차 버렸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수개는 그렇게 ‘만들어 낸’ 품종이다. 행여 천연기념물로 지정 받을 생각은 해서는 안 된다. 정체성 시비에서 자유롭지 못한 어느 토종개(?)를 타산지석 삼아야 한다. 1000년을 타임슬립해 탄생한 오수개는 오수와 임실, 나아가 전북을 상징하는 보배가 돼야 한다. 충의의 오수개는 기록, 달리말해 출전(出典)이 명확하다. 스토리텔링 만으로 세계인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 ‘알프스’하면 세인트버나드가 떠오르 듯 오수개는 임실의 상징물이 되기에 충분하다. 플란다스의 개, 충견 하치코는 결코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다. 지역경제에 도움이 되는 것은 덤이다. 30년 전 오수개를 역사에서 불러내겠다고 선언했을 때의 비상한 관심이 좋은 보기다. 1990년대 아날로그 시절의 모든 매체가 일제히 이 소식을 대서특필했다. 임실은 들어봤지만, 오수는 생소하기만 한 사람들에게 오수를 각인하는 효과를 거뒀다. 하물며 지금은 IT시대다. 파급력이 빛의 속도다. 노스탤지어에서 소환해 낸 오수개와 함께 장밋빛 미래를 향해 걸어야 한다. 오는 5월 초 오수 의견공원 일대에서는 어김없이 의견문화제가 열린다. 벌써부터 기다져진다. 과거 의견문화제에서 아이러니한 상황을 겪었다. 지금은 전주로 옮겨 메뉴도 바꿨다는 개고기 음식점이 오수에서 성업 중이었다. 의견 행사장에서 마이크를 잡고 외쳤던 기억도 생생하다. 다른 곳도 아닌 오수에 보신탕집이 웬말이냐는 요지였다. 윤신근 서울 윤신근박사동물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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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12 18:15

남원을 문화의 도시로 만들자

고전문학의 요람(搖籃)지 남원시에 ‘고전,근현대 문학의 융합과 남원시 문화콘텐츠 창출 토탈풀랫폼’으로 공립남원종합문학관(가칭) 설립을 적극 검토하는 사명적 관심의 2025년이 되었으면 한다. ‘문학진흥법’(세부사항은 문학진흥법 시행령)에 의한 전주시 문화의 도시 ‘문화특구’에 이어 문학적 자원이 풍부한 남원시도 지정받아 문화예술, 관광, 전통, 역사등을 글로벌 문화산업 메카로 도약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여 문화특구에 기여하는 빅픽처를 바란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고전문학의 예술허브도시로 발돋움을 위한 콘텐츠를 알아보겠다. △춘향전: 조선후기 작품으로 우리나라 대표 고전소설이며, 한글소설 판소리계 소설로 신분을 초월한 사랑 스토리다. △흥부전: 조선후기 작품으로 판소리계 한글소설로 권선징악(勸善懲惡)을 표하고 있다. △만복사저포기: 조선전기 김시습이 남원왕정동에 있는 만복사를 배경으로 쓴 작품이다. 최초의 명혼소설(冥婚小說)로 이승사람과 저승영혼의 만남을 소재로한 소설이다. △최척전: 1621년 조위한 지음, 전쟁으로 인해서 조선과 일본, 명나라등에서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고전소설이다. △홍도전: 조선중기 유몽인 채록기다. 남원을 공간적 배경으로 홍도라는 주인공과 그 가족이 전쟁으로 인해 헤어지고 만나는 소설이다. 이와같이 훌륭한 고전문학이 창달(暢達)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대표적 축제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고 있는〈춘향전〉춘향제(현제전위원장 이광연)는 2024년 94회로 세계인이 참여하는 축제의 장으로 거듭나고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 행사 기간(7일)에 1백20만명이 참여하고 있다(발표자료인용) 올해는 200만명을 목표로 준비하고 있단다. 여기에 다른 고전들과 근현대 훌륭한 작품들을 발굴 문화도시 사업을 통하여 도시 전체를 문화 콘텐츠로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의 허브 도시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공립남원종합문학관(가칭) 설립이 꼭 필요한 이유로 고전,근현대 문학관련 자료수집,보존,복원,관리,전시,연구,교육,연수 기타 활동을 통하여 문학 유산의 계승과 문학활동의 진흥 및 발전을 도모하고 향유 증진하는데 목적이 있다. 비전으로는 한국문학의 살아있는 역사이기에 역동하는 미래이며, 미션으로는 문학의 가치를 발견하고 체험하는 문학관이 되어, 문학유산의 보존과 활용 및 문학생산과 교류등 문학적 삶의 공유와 연대이다. 역활 정립을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남원시 문학 인프라 구축, 남원 이미지 활용, 관광증진(지역자원과 연계),기념관 박물관적 기능 포함, 남원 특성을 살리는 문학관 건립이 요구된다. 문학은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정신과 혼이 깃든 것이다. 소중히 보존하고 가꾸는 일은 사람과 지역이 생명을 이어가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고전과 근현대 문학이 살아 숨쉬는 문학관은 문화 콘텐츠를 산업으로 성장시키고 청년 종사자를 양산하며,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은 지식 사업으로 정주,교육,경제 전반에 스며들어, 남원을 문화향유자 증대,문화공간 확충,고용창출,관광객과 매출증대,정주 만족도 상승등 문화,경제,사회적 효과가 창출되어 지역 활성화에 크게 기여 문화의 도시로 변화할 것이다. 남원을 문화의 도시 「문화특구」로 지정받기 위한 민,관,문화단체, 전문인의 적극적 노력을 당부드린다. 문화의 성지로 꽃피울 수 있게 남원예술의전당 공립남원종합문학관(가칭) 설립을 제안한다. 오동근 재경남원문인협회 기획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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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05 18:09

울엄마

내 고향은 김제 시내에서 이십여 리 떨어져 있는 봉남이다. 봉남은 그전에는 접주리接舟里라고 했다. 삼국시대 저수지 벽골제 수문을 열면 배가 그곳까지 닿았다고 해서 생긴 지명이라는 후문이다. 그만큼 마을 주변엔 온통 논이 넓게 펼쳐져 있다. 대학 시절 방학 때 고향 집에 놀러 온 강원도 친구가 이렇게 너른 들판은 난생처음이라며 탄성을 연발했을 정도다. 이제는 고향에서 산 것보다 타향살이가 더 오랜지라 고향에 대한 기억은 무의식 속에 깊이 파묻혀 있어 소환하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어린 시절 뇌리에 깊이 각인된 엄마에 대한 기억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쉽게 잊히거나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엄마는 내가 여섯 살 때인 마흔둘에 혼자가 되셨다. 아버지가 금광을 하던 친구의 보증을 섰다가 잘못되자 화병으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졸지에 남편을 잃었다. 당시 아버지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집달리’들이 우리 집에 들이닥쳐 심지어 괘종시계에까지 빨간딱지를 붙이던 광경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다. 엄마는 틈만 나면 내 손을 잡고 어느새 종적을 감춰버린 이웃 동네 아버지 친구 집을 찾아갔다. 이어 그 집 대문에 들어서는 순간 마당 한가운데로 달려가 쓰러져 그 아저씨 이름을 부르며 제발 빚 좀 갚아달라고 대성통곡을 했다. 땅을 치며 우시던 엄마를 말리며 나도 큰소리로 따라 울곤 했다. 나는 60여 년이 흐른 지금도 그 아저씨 이름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엄마는 언젠가 그 집에 들렀다가 여느 때와는 달리 인기척이 없자, 그 동네 사람들에게 수소문하여 그 아저씨가 야밤에 가족들을 모두 데려갔다는 말을 듣고부턴 그 집에 발길을 뚝 끊었다. 집안 곳곳에 즐비하던 빨간딱지가 사라진 것도 그즈음이었다. 채권자들에게 반드시 빚을 갚겠다는 엄마의 설득이 주효했던 것이리라. 그 뒤 엄마는 얼마간 있던 논을 부쳐 엄청난 빚을 갚으면서 우리 6남매를 키우시느라 정말 치열하게 사셨다. 과부라고 놀리며 윗논 물꼬를 터주지 않는 동네 아저씨와 한바탕하고 오셔서 나를 부둥켜안고 대성통곡하시기도 했다. 엄마는 유난히도 무덥던 2004년 어느 일요일, 교회에서 예배 마치시고 너른 들판 사이로 난 신작로를 따라 홀로 집에 가시다가 동백꽃 떨어지듯 길가에 푹 쓰러져 홀연히 세상을 떠나셨다. 홀몸으로 우리 6남매 잘 키워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릴 새도 없이 불현듯. 아마 엄마는 이제 지상에서의 임무가 끝났으니 자식들에게 폐 끼치기 전에 얼른 조용히 사라질 때가 되었다고 결심하신 듯하다. 일요일이라 곱게 화장도 하시고, 옷도 깨끗하게 차려입으신 채, 평소엔 교회에서 점심 식사 후 동네 어르신들과 교회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시던 분이, 아무리 말려도 손사래를 치시며 혼자 걸어가시다가 훌쩍 먼 길을 떠나셨으니 말이다. 엄마는 일찍이 선산 밭 한 귀퉁이에 아버지 묘를 이장하시고, 그 옆에 당신 가묘를 만들어 놓으신 다음, 내게 가끔 장롱에서 미리 마련해두신 삼베 수의를 꺼내 보이시면서 당신이 세상 떠나시면 입혀달라고 당부하셨다. 지금 엄마는 바로 그 수의를 입으시고 그 가묘에 누워계신다. 난 엄마 삼우제 때 무덤 앞에서 굳게 다짐했다. 설 명절과 생신 등 생전에 엄마를 뵈러 오던 날은 꼭 오겠다고. 하지만 그 다짐은 공수표가 된 지 이미 오래. 겨우 기일에나 찾아뵐 뿐, 전주에 특강이 있을 때도 잠시 생각은 해도 엄마는 늘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그때마다 내 귓가에 그리운 엄마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어이구 참말로! 썩을 놈!”. △김원익 소장은 신화연구가로 저서 〈김원익의 그리스 신화 1, 2〉, 〈브랜드로 읽는 그리스 신화〉 등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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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22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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