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다지 번잡하지 않은 어느 포구의 포장마차에서 조개구이에 소주 몇 잔을 기울이다 허름한 벽지 위에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무슨 표어 같은 문구를 보고 실소를 한 적이 있다. '오늘은 현찰, 내일은 외상!' 이 글귀를 뒤집어 보면 '외상 사절'이라는 뜻이 분명한데 가방끈이 별로 길 것 같지 않은 털보 주인이 어떻게 이런 해학적인 말을 생각해냈는지 웃음이 나왔고, 몇 잔 술값 때문에 작은 실랑이를 벌일 주인과 손님의 모습이 떠올라 또 한번 웃음이 나왔다.
웬만한 사람은 지갑 속에 신용카드 몇 장씩 넣고 다니는 요즘이사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외상할 일이 거의 없지만, 신용사회가 정착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외상거래는 얼굴만 익히고 살 정도면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다. 더구나 그 때는 백화점이나 할인점 같은 대형유통시설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개가 동네장사 형태를 띠고 있어서 외상을 주지 않으면 인심이 사납다고 소문이 나 장사가 잘 안될 정도였다.
외상거래가 밥 먹듯이 이뤄지던 그 시절 외상에 얽힌 웃지못할 이야기가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처음 외상을 틀 때는 시계나 반지 같은 귀금속에서부터 주민등록증이나 학생증 같은 신분증을 맡기기도 하고, 외상돈이 도를 넘어설 때는 집안의 고가품을 담보로 잡혀놓고 물건을 갖다쓰기도 했다. 그 뿐인가, 외상으로 온갖 생필품을 잔뜩 가져간 후 야반도주하는 양심불량자가 있는가 하면, 외상장부 몰래 훔쳐다가 태워버리는 심장에 털난 사람도 있었다.
가진 것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외상거래를 하기는 했지만 알고보면 외상이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다. 세상에 공짜가 없는 만큼 외상을 쓰면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것이 철칙이요, 외상이 쌓여 자기 분수를 넘어서게 되면 파멸을 부르는 것이 자명한 일이다.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는 속담도 있듯이, 이자 없다고 외상 무서운줄 모르고 설치다가는 제 운명 재촉하게 된다는 말이다.
증권시장이 최근 3일동안 36조6천6백억원어치나 폭락해 깡통계좌가 속출하고 있다고 한다. 증시전문가들은 외상으로 주식을 산 뒤 나중에 결재하는 미수거래제도가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리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외상이 소만 잡는 것이 아니라 생사람까지 잡아버리는 것 같아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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