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형(CBS 방송본부장)
뜻도 잘 몰랐던 '워낭소리'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의 열기가 대단하다. 지난 설 연휴기간에 가족들과 함께 이 영화를 볼 때만 해도 상영관을 수소문해서 겨우 찾았는데 이제는 상업영화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관람객이 2백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는 소식이다.
영화가 대박을 터뜨리자 경상북도가 기회를 놓칠세라 노부부가 살고 있는 봉화군의 산골마을을 주말 테마여행 코스에 포함시켰다가 갑론을박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경북의 대표적 낙후지역인 봉화를 잘 알릴 수 있는 기회로 삼아 주민들의 관광소득을 늘려보자는 경북도의 갸륵한 뜻을 모르지 않지만, 평생을 고향과 함께 조용하게 살아온 노부부의 사생활을 침해하고 영화가 가지고 있는 진정한 의미를 상업화로 전락시키는 얍삽한 행정 아니냐는 것이다.
어쨌든 유명한 배우도, 뛰어난 절경의 명승지도, 이렇다 할 스토리도 없고, 촌로와 늙은 소만 보이는 이 영화에 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지 평론가들이 저마다 다양한 분석을 내놓고 있지만 나는 한마디로 '느림의 미학'으로 규정하고 싶다. 분초를 다퉈가며 앞만 보고 달려가는 오늘의 현실에서 시계바늘을 수십 년 전으로 돌려놓은 듯한 시골의 고향 모습, 그리고 자연에 모든 것을 맡겨둔 채 전혀 서두름 없이 유유자적 살아가는 모습에서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고 이것이 묵직한 울림으로 가슴속에 깊이 새겨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실 워낭소리가 아니더라도 이런 느림의 미학은 이미 우리 주변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요즘 제주여행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은 '올레길'이 아닌가 생각된다. 비싼 돈 들여 비행기 타고 제주에 가서 렌터카를 빌린 만큼 한 곳이라도 더 돌아보기 위해 한라산 산간도로와 해안도로를 종횡무진 차를 몰았던 것이 지금까지의 여행패턴이었다면 이제는 그냥 '걷기 위해' 제주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는 것이다.
제주의 자연을 온 몸으로 체험하면서 걷는 올레길이 이미 12개 코스나 소개됐고, 이것이 입소문으로 번지면서 전국 방방곡곡에서 올레길을 순례하기 찾아오는 이른바 올레꾼들이 지난해에만 3만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제주의 올레길과 더불어 지리산을 둘러싼 전남북, 경남 3개도 100여개 마을들을 도보로 넘나들며 지리산을 내면으로 만나는 '지리산길'도 기대를 모으고 있다. 남원 산내면 매동마을에서 시작하는 지리산길 시범구간의 체험담도 인터넷을 뒤지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느림의 미학을 통한 새로운 체험 트렌드와는 달리 지리산에 케이블카를 놓아 관광의 주도권을 잡겠다며 지방자치단체들 사이에 물밑전쟁이 벌어지고 있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경남 산청과 함안, 전남 구례에 이어 남원까지 경쟁적으로 지리산 케이블카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산간내륙 지역의 어려운 경제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관광소득을 늘려보자는 고육지책이겠지만 속전속결식으로 케이블카 타고 훌쩍 올라갔다 경치만 보고 지나가는 관광이 머무는 관광으로 이어질 수 없고, 산만 망가지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지리산은 현대사의 아픔을 가슴에 품고 있으면서 항상 동경의 대상이기도 한 산이다. 산 아래 마을마을마다 산 골짝골짝마다 지닌 역사와 한을 여유 있게 음미하면서 지친 심신을 달래고, 새로운 희망을 담아가는 한국의 산티아고길, 지리산길을 기대한다.
/이길형(CBS 방송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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