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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한 박스 보다 절실한 건 한국서 살아가는 방법"

이수현 씨(새터민)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는 새터민 이수현씨의 뒷모습,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들 걱정에 얼굴을 공개할 수 없다는 얘기에 뒷모습만 촬영할 수 있었다. 안봉주(bjahn@jjan.kr)

북한판 코리안드림의 상징인 새터민(탈북자) 조명철씨가 공무원으로서는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얼마 후엔 북한 주민 9명이 서해상으로 넘어왔다. 정착해 있는 새터민들의 고민과 삶이 궁금했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기도 해서 새터민을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인터뷰 대상자를 섭외하기가 쉽지 않았다. 북한에 두고 온 가족 때문에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전북하나센터의 조미영 실장이 열심히 사는 사람이라며 이수현(42)씨를 추천해 주었다. 물론 가명이다. 이수현씨 역시 이름과 얼굴이 나가면 안된다는 조건을 달고 인터뷰에 응했다.

이수현씨가 탈북 후 한국에 정착하면서 겪은 어려움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안봉주(bjahn@jjan.kr)

남남북녀. 미인이다. 억양이 센 북한 발음은 마치 싸우는 것처럼 들려 불편했지만 2년쯤 지나니까 괜찮아졌다고 했다. 그래도 액센트는 살아있었다. 성격은 활달했고 말솜씨는 수준급이었다.

 

인터뷰는 지난 17일 점심식사를 같이 하면서 이뤄졌고 커피전문점으로 옮겨 3시간 가까이 진행됐다. 사흘 뒤 그녀는 못 미더웠던지 전화를 걸어 왔다. "내가 가치 있는 사람도 아니고 새터민들한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해서 순수한 마음으로 인터뷰에 응한 것이다. 얼굴 나가면 안 된다."

 

-얼마전 북한 주민 9명이 배를 타고 서해로 넘어왔다.

 

"잘 왔다. 뱃길로 오는 게 어려운데…"

 

-새터민으로서는 처음으로 조명철씨(52)가 지난 7일 공무원 1급 자리인 통일교육원장에 임명됐다.

 

"그런 사람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새터민들을 밀어줄 게 아닌가. 새터민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조명철씨는 김일성 종합대에서 교수생활을 하다 중국에 유학하면서 전환기를 맞아 탈북했다. 공무원으로서는 최고위직에 올랐다. 북한판 코리안 드림을 이룬 사례로 새터민 정착 지원에도 큰 의미가 있다.)

 

-탈북과정이 궁금하다. 어렵지 않았나.

 

"아홉 살 짜리 딸 손잡고 압록강 건너 탈북했다. 2003년의 일이다. 1년 뒤에 한국 땅을 밟았다. 중국에서 6개월 체류하는 동안 숨막히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계기는.

 

"먼저 탈북한 언니가 한국은 지상천국이라며 오라고 했다. 언니는 지금 신학대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형부는 전주 사람이다. 서울에서 전도사 일을 하고 있다."

 

-북한에는 누가 살고 있나.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오빠들이 있다."

 

-송금한 적은 있나.

 

"오빠에게 한차례 송금했다. 중국에 산다고 속이고 통화했다. 잘 있다고 했다. 아마 한국으로 간 걸 느낌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연간 송금액은 100억원에 이르고 송금은 한두시간 내에 완료된다. 중개 수수료로 30% 정도를 지불한다. 정부는 앞으로 개인간 거래도 승인을 받게 할 방침이어서 일부 반발을 사고 있다.)

 

-북한 화폐개혁이 실패로 돌아갔다. 얘기는 들었나.

 

"2009년 화폐개혁을 했다. 돈 바꾸는데 한 세대당 얼마로 제한하는 바람에 불만이 고조됐다. 악착같이 번 돈을 불태우고, 많은 돈들이 강물에 던져졌다. 왜 탈북할 수밖에 없는지, 왜 새터민이 늘어나는지 안보강연 때 이런 말을 거침 없이 한다."

 

-강연에서는 주로 무슨 내용을 얘기하는가.

 

"북한의 맥을 잡아 이야기한다. '새터민 중에는 간첩도 끼어 있다더라'는 질문도 받는다. 설령 올 때는 간첩으로 왔더라도 (남북한 차이가 너무 커) 전향할 수밖에 없을 정도라고 하면 이해를 한다. 중국에는 탈북을 준비하려는 주민들이 10만 명이나 들어와 있다. 두만강 압록강 쪽 건물은 물론이고 내륙 쪽에도 문은 너덜너덜하고 건물이 텅 비어있다. 주민들이 다 빠져나간 탓이다."

 

-북한에서 보는 남한, 남한에서 보는 북한은.

 

"만날 데모하고 머리띠 두르고 남한은 어떻게 사나 했다. 북한에선 그런 것만 보여주니까. 그런데 와서 보니 혼란스럽더라도 양보도 하고 머리도 맞대고 하면서 잘 풀어간다. 북한은 그런 게 없다. 북한 주민 생활은 남한 밑바닥 생활 보다 못하다. 여기 사람들 풍족하게 사니까 이해 못한다. 하루만 살아보라고 하면 다 못산다고 할 것이다. 북한은 '하지 말라' '해라'만 있다. 듣지 않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잡아간다."

 

-뭘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게으르면 윗동네나 아랫동네나 살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바이올린 레슨을 4~5개 정도 한다. 운전면허는 땄지만 아직 자동차는 없다. 지금 신학대학을 다니는데 올해 졸업한다. 전공은 음악(바이올린)이고 사회복지와 보육을 부전공하고 있다."

 

(새터민들은 북한을 '윗동네', 한국을 '아랫동네'라 부른다.)

 

-바이올린은 언제 배웠나.

 

"어릴 때 배웠다. 오케스트라 규모의 기동대 생활을 했다."

 

(기동대는 일종의 선전대로, 행정기관에 소속돼 김일성∂김정일과 체제를 찬양하는 음악활동을 한다.)

 

-새터민들끼리 자주 어울리나. 그들은 어떻게 생활하고 있나.

 

"한달에 한번 정도 만나는 모임이 있다. 수다 떨고 가장 행복할 때다. 대부분 어렵게 산다. 뚜렷한 기술 직업이 없다 보니 여자들은 식당일, 남자들은 막노동 일도 한다. 나도 처음에 김 구워 파는 일을 했다. 연변 조선족으로 알더라. 그러거나 말거나 '맛 보세요 맛 보세요' 외치며 열심히 팔았다. 세탁소에서 밤 10시까지 1년 간 옷 수선하는 일도 했다. 돈 버는 게 얼마나 힘든지…"

 

-한국에 온 지 6년 정도 됐다. 살아보니 어떻던가.

 

"처음에 남한에 왔을 때 깜짝 놀랐다. 막힌 세상, 울타리 안에서만 살다가 인권이 보장되고 자유로운 걸 보고 놀랐다. 윗동네에 비하면 대한민국은 지상천국이다.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고 정보화, 컴퓨터 등이 잘 돼 있다. 윗동네를 모르고 살아서 그렇지 천국이다."

 

-그래도 한국은 비리 부정이 판치고 있지 않은가. 얼마 전에는 대통령까지 나서서 '나라가 온통 비리 투성이'라고 장차관들을 질책했다. 이런 걸 보는 심정은 어떤가.

 

"북한은 더 썩었다. 남한에는 시스템이라도 있지 북한엔 그런 게 없다. 해먹는 게 임자다. 강탈하고 약탈하고 말 못할 정도다. 권력자, 세력자들은 시스템이 없으니까 노련하게 해 먹는다.

 

(시스템은 견제 감시장치를 말하는 것 같다. 비리가 터지면 언론 등 감시망 때문에 덮어둘 수 없는 제도적 틀을 두고 하는 말로 들렸다.)

 

-냉대나 차별적 대우도 겪었을 텐데.

 

"학원 강사 시절 한명부터 시작해서 2년간 수강생을 많이 늘렸는데 갑자기 원장이 나오지 말라고 했던 일, 수강생이 늘자 바이올린 강습 칸을 두 개로 늘려 원장이 세를 받아먹은 일도 있었다. 감사 사례 돈을 원장이 가로챈 일도 있다. 눈물만 흘리고 누구한테 말도 못했다. 학원을 박살내고 싶었지만 하나님이 참게 했다. 나중엔 학부모들이 내 실력을 인정하고 원장한테 나만 데려오라고 요구하더라."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6∂25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나.

 

"미국놈들이 고요한 새벽에 전쟁을 일으켰다고 배웠다. 나중에 거짓말이란 걸 알았다. 언젠가 시아버지께서 "네 시어머니는 고생 안 했다"고 하셨다. 왜요? 하니까 전쟁 날 줄 미리 알고 중국에 대피시켰다는 것이다. 전쟁 나기 전 간부들은 가족을 미리 대피시켜 놓았는데 이것이 (사전에 남침을 준비했다는) 증거 아닌가."

 

-전쟁에 대해 주민들은 어떤 생각인가.

 

"너도나도 못 사니 미친 개처럼 전쟁이라도 해보자는 식이다. 세뇌가 심하다."

 

-남북한 환경 차이로 새터민들의 심리적 공황이 심각하다고 들었다.

 

"탈북 과정도 고통스럽고 해서 심리적 상처가 크다. 우울증에 걸리거나 밖에 나가기 싫다는 동료들도 있다. 힘들어 하다 나중엔 자살을 택하기도 한다. 꿈과 희망을 크게 품고 왔는데 좌절과 무력감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거리다."

 

-대책이라면.

 

"새터민들의 마음을 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상담사를 많이 배출해야 한다. 한사람이라도 더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곳에 살다 보면 자치단체나 정부한테 바라는 게 있을 텐데.

 

"제도적으로 지원해 주어야 한다. 꾸준히 상담하고, 정착할 때까지 돕는 게 중요하다. 지역사회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단체를 안내해 주고 계속해서 관리해줄 필요가 있다."

 

-정착하는 과정에서 아쉬운 점은.

 

"그냥 집이 여기다, 여기가 마트다 이런 거나 알려준다. 직업 알선 등에 좀더 투자했으면 좋겠다. 무슨 협회다 해서 전단지 잔뜩 늘어놓고 라면 한박스 주고 가면 다 되는 줄 안다. 밥벌이 수단, 사는 방법을 알려줘야 한다."

 

-한국 사람들 생활 스타일 보고 많은 걸 느꼈을 텐데.

 

"너무 큰 집만 선호한다. 식당도 먹을 것 알맞게 준비해야지 낭비가 너무 심하다. 절반만 먹고 버린다. 닭볶음탕도 3분의 1 먹고 나머지 3분의 2는 버린다. 음식 소비문화 고쳤으면 좋겠다. 너무 부유하니까 아까운 걸 모른다. 후세들한테 교육도 시켜야 한다."

 

(인터뷰하면서 점심 때 삼계탕을 시켜 먹었는데 기자는 앞가슴 퍼걱살을 남겼지만 그는 깨끗이 비웠다.)

 

-통일에 대한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통일해야 된다. 자본주의 남한식 통일로 해야 된다. 그래야 인민들이 편히 산다. 오빠들이 보고 싶다. 능력껏 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한국 사람들한테 바람이 있다면.

 

"이곳 사람들은 다 자기네 살 궁리만 한다. 새터민들이 뭘 알겠나. 새터민이라면 싫어하니까 조선족이라고 속이고 취업하는 경우도 있다. 많은 관심 갖고 따뜻하게 대해 주었으면 좋겠다. 새터민들 참으로 어렵게 산다."

 

-앞으로의 소망은.

 

"두가지다. 탈북 과정의 고통, 한국사회에서의 부적응 때문에 새터민들 정신적 상처가 심하다. 상담분야를 전공해 전문상담사로서 이들을 치료하고 싶다. 또 하나는 새터민 자녀들로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싶다. 그러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해 음악을 더 공부하려고 한다. 한국에 왔으니 열심히 살아야하지 않겠는가."

이경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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