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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화 성장’ 큰 문제…정부, 강력한 재분배정책 펴야”

박승 前 한국은행 총재

▲ 한국경제의 가장 큰 문제로 ‘빈곤화 성장’을 꼽은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가 강력한 재분배 정책을 제안하고 있다. 안봉주기자 bjahn@
-요즘처럼 경제가 어려우면 더욱 바쁘실 것 같은데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

 

“여행도 하고 글도 쓰고…. 인터뷰나 강의요청도 있어 바빠요. 행사도 많고.”

 

 

-경제문제를 먼저 꺼내야 할 것 같습니다. 모두들 살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어디에 문제가 있는 걸까요.

 

“국가경제는 성장하지만 대부분의 국민은 더 어렵게 되는 ‘빈곤화 성장’이 문제입니다. 자유 경쟁 개방 등 신자유주의 질서의 역기능이지요. 성장의 과실이 승자독식되고 그 결과 양극화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겁니다.”

 

 

-MB(이명박 대통령) 정부는 서민경제를 내세우지만 역설적으로 서민고통이 더 큽니다.

 

“출범 초 친기업, 부자감세 정책을 내놨지만 이건 서민경제를 악화시키는 역주행이었습니다. 뒤늦게 친서민 정책을 내걸고 부자감세도 철회했지만 서민민생고는 더 깊어지고 있어요.”

 

 

-왜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보십니까.

 

“MB의 개혁의지 부족 때문이지요. 부자와 대기업 등 기득권 세력의 저항을 극복하지 못한 결과라고 봅니다.”

 

 

-MB 정부의 경제정책 중 가장 큰 문제점은 어떤 점일까요.

 

“기업식으로 하면 국가도 잘 경영될 것으로 본 것 같은데 잘못된 판단입니다. 기업은 잘못하면 퇴출시키고 잘 되는 부문만 끌고 가면 되는데 국가는 그렇게 할 수 없지요. 공항에 기업인을 위한 귀빈실 만들고 친기업정책 펴면서 세금 깎아주면 잘 될 걸로 알았지만 기업들은 투자하지 않고 경제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경제정책들은 갈팡질팡했지요.”

 

 

-참여정부도 ‘친 서민정책’을 폈는데 결과는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총재께서는 ‘노무현의 역설’로 표현하셨던데 무슨 의미입니까.

 

“노무현 대통령은 늘 약자를 배려했고 정책도 서민 위주로 수립하도록 주문했습니다. 그러나 노 대통령 재임 시절 실제 혜택을 본 사람은 부유층이었고 서민대중의 삶은 더 어려워졌습니다. 말하자면 배를 서쪽으로 저어갔는데 실제 배는 동쪽으로 가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나는 ‘노무현의 역설’이라고 부릅니다.”

 

 

-‘노무현의 역설’의 원인이 뭘까요.

 

“집값폭등, 양극화현상 두가지입니다. 노 대통령은 부동산 값 상승과 관련해서는 최강도 대책을 주문했습니다. 그래서 집값 안정효과는 임기말에 나타나기 시작해서 그 혜택은 MB정권이 누리고 있습니다. 집값상승보다 서민생활을 더 어렵게 한 것은 경쟁우위 부문인 대기업과 열위부문인 중소기업, 자영업, 농업과의 양극화현상이었습니다. 재임 5년간 대기업은 연평균 4.4%씩 성장했지만 중소기업, 자영업, 농업은 위축되고 실업자는 늘어나고 빈부격차는 커져서 서민들 먹고 살기가 더 어렵게 된 것이지요.”

 

 

-양극화 현상은 사회통합과 경제발전의 걸림돌입니다. 우리사회가 풀어야 할 숙제인데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만일 정부가 강력한 의지를 갖고 대응하지 않으면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자유 경쟁 개방의 시장주의는 생산과 수출증대에는 효과적이지만 분배문제에는 역행합니다. 파이가 특정 계층에게 돌아가고 국민 대부분은 빈곤해지는 게 문제입니다. 이를 극복하려면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재분배 정책을 펴야 합니다. 시장주의는 지켜가지만 분배문제 만큼은 시장에 맡기지 말자는 겁니다.”

 

 

-재분배 정책을 하려면 많은 재원이 관건인데요.

 

“‘사회복지세’를 신설하자는 겁니다. 빈부격차의 주범이 자산에 있기 때문에 개인에게는 자산(금융자산과 부동산)을 기준으로 세금을 부과하고, 법인에게는 기업소득(이윤)에 일정 비율을 세금으로 떼낸다면 연간 20조~30조원의 재원이 마련되는데 이 돈은 결국 부유층과 대기업이 부담하는 돈입니다. 이 돈으로 반값 등록금과 실업자 최저 생활비, 최저생계를 하면서도 정부한테 한푼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쓰자는 겁니다.”

 

 

-정동영 의원이 주장하는 부유세와는 어떻게 다른가요.

 

“부유세는 부자한테만 세금을 부과하고 부자를 미워하는 느낌이 들어 있습니다. 반면 사회복지세는 중산층을 포함해서 먹고 살만한 계층이 세금을 조금씩 더 내고, 대기업도 이윤의 일정액을 세금으로 내기 때문에 개념이 다르죠. 어려운 계층을 돕는다는 명분이 있어 가능합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퓨전이군요.

 

“공동체 자본주의로 가자는 거지요. 국민의 기본수요인 교육, 의료, 생존의 문제 만큼은 빈부 격차 없이 똑같이 누려야 할 덕목 아니겠습니까. 똑같이 책임지고 함께 잘 사는 사회를 만들자는 겁니다.”

 

 

-한국은행 총재 임기 4년 중 3년을 참여정부에서 지내셨습니다. 경제문제에 관한 노무현 대통령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항상 약자와 서민 편에서 국정을 챙기셨습니다. 특권과 권위의식이 없고 부동산투기에 대해서는 반도덕적, 사회적 죄악이라고 말할 만큼 거부반응을 보였습니다. 중요한 정책회의도 사저에서 상의 벗어 제치고 넥타이 풀고 담배도 권하면서 자유분방하게 했습니다. 소탈한 그런 분위기는 처음 경험했습니다.”

 

 

-지금 지구촌에서는 ‘월가를 점령하라’는 항의 시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탐욕스런 금융자본’에 대한 저항인데 정부가 금융자본을 더 견제하고 감시해야하지 않겠습니까.

 

“무질서한 과당경쟁의 대표적인 사례가 금융입니다. 승자독식, 빈익빈부익부가 심화되고 빈곤과 실업이 최고조에 이른 시점에 서민들의 소외감이 폭발한 것이지요. 정책 당국이 깊이 새기지 않으면 자본주의 위기로 치달을 수 있어요. 정부가 강력한 재분배정책을 펴야 합니다.”

 

 

-이야기를 돌려, 지난 4월 모교인 김제 백석초등학교에 ‘박승 도서관’이 개관됐습니다. 총재께서 5억원을 기부해 성사됐다는 소식이 지역사회에 알려져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만.

 

“내 재산은 자식한테 안 물려준다,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30년 전부터 공언해 왔어요. 그런데 3년 전 폐교 위기에 몰린 모교에서 교장과 교사들이 목공기술과 빵굽는 기술, 예절을 가르치는 등 좋은 학교를 만들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걸 봤습니다. 이에 감명 받아 나도 힘을 보태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지난 4월 22일 개관한 이 도서관은 박 전 총재가 5억원을 기부하자 도교육청이 2억원을 지원해서 지상 2층 규모로 지어졌다. 박 전 총재의 이름을 따 ‘박승 도서관’으로 명명됐다. 1층에는 도서관 및 박 전 총재 기념관, 2층은 3D영화관(80석) 및 연극, 세미나실을 겸비한 문화관으로 꾸며졌다. 3000여권의 장서가 있다. 이영란 교감은 모교에 대한 박 전 총재의 관심이 지대하다며 장학금 등 필요할 때마다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신다고 전했다.

 

 

-총재님의 좌우명이 선심후물(先心後物)입니다. 기부도 많이 하셔서 ‘노블레스 오블리제’(사회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회자됩니다. 선심후물은 어떤 의미가 담겨있나요.

 

“‘물질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뜻인데 나는 자식들에게 정신은 남보다 앞서고 물질은 한발 뒤따라가라고 가르쳐 왔어요. TV나 전화, 냉장고도 남보다 늦게 마련했고 자동차도 동료들보다 한단계 낮은 차를 탔어요. 그렇다고 권위가 떨어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바른 정신은 많을 수록 좋고 물질은 많을 수록 조심해야 합니다.”

 

 

-대학시절 서울을 오가면서 농사를 지으며 공부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동력이 작용한 걸까요.

 

“가난 때문에 다른 길이 없었어요. 아버님은 중풍으로 누워 계시고 어머님은 연로해서 노동능력이 없었지요. 직접 농사(논 2000여평, 밭 500여평)를 지어 등록금을 마련해야 했어요. 등록만 하고 내려와 농사를 짓다 시험 때가 되면 친구 노트를 빌려 공부하고 시험을 쳤어요. 집에 내려올 때에는 책을 한아름 도서관에서 빌려와 주경야독을 했습니다. 3학년 1학기까지 그런 생활을 했는데 자각은 더 깊어졌고 의지는 더 강해졌던 것 같습니다. 4학년 때는 서울대 상대를 대표하는 학생으로 뽑혔으니까.”

 

당시 여동생은 오빠가 이런 변칙적인 대학생활을 하자 ‘서울대생들은 모두 시험 때만 학교에 가는 줄로 생각했다’고 박 전 총재는 회고록에 적고 있다. 푸른 벼라는 뜻의 청도(靑稻)를 호로 지은 것도 농사짓던 때 농민들의 땀냄새와 흙냄새, 푸른 벼 냄새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얼마전 회고록 ‘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를 출간하셨습니다. 가난한 농사꾼에서 한국경제를 책임지는 인물로 성장하기까지의 역사와 여러 경제 사회현안에 대한 이야기가 기술돼 있더군요. 보람 있었던 일, 아쉬웠던 기억이 있다면.

 

“일산 분당 등 5대 신도시를 건설한 것과 한은총재 시절 한은법을 개정해서 독립성을 강화한 것이 보람으로 남아요. 반면 화폐개혁이 무산된 것은 아쉬워요. 화폐단위의 인플레 현상이 심각해서 1000원을 1환으로, 대미 환율도 1대1로 하는 개혁안을 마련했지만 무산됐어요.”

 

 

-1988년 노태우 정부 때부터 참여정부에 이르기까지 경제정책을 입안하고 결정하는 등 한국경제발전사(史)의 산 증인이신데 지근거리에서 본 역대 대통령은 어떠했습니까.

 

“전두환 대통령은 호남형, 보스기질이 있지만 국정철학이 빈곤했고, 노태우 대통령은 군인이었지만 문학소년처럼 다정다감했어요. 김영삼 대통령은 우직한 결단력이있지만 지도자로서 허점이 많은 분이고, 김대중 대통령은 역사의식이 투철하고 명석한 머리를 가지셨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반권위적, 친서민적이었지만 지도자로서 세련미가 좀 떨어지는 분으로 비쳤습니다.”

 

 

-화제를 전북 문제로 돌려 볼까요. 밖에서 본 전북은 어떤 곳,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까.

 

“조용한 곳, 농사짓는 곳, 소외된 곳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요.”

 

 

-전북은 예나 지금이나 인구는 빠져나가고 국내총생산은 16개 시·도 중 꼴찌 수준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동안 산업화 정책이 경부축에 집중됐고 정치적으로도 오랫동안 소외됐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또 지정학적 조건에서도 산업화하기에 부족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당 대표, 국회의장, 대통령후보, 장관 등 인물도 많았고 호남정권도 탄생시켰습니다. 그런데도 달라진 건 없지 않습니까.

 

“인물은 많았지만 지도세력으로서 세력화하는 데에는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에 관심은 없었나요.

 

“여러번 기회가 있었지만 사양했어요. 젊었을 때부터 평생 정치는 하지 않겠다는 것이 소신이었습니다. 나는 성격상 정치가 맞지 않아요.”

 

 

-지역이 발전하려면 어떤 점이 보완돼야 할까요. 대안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전북이 실망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어느 나라나 산업화 과정에서 공장 많은 곳이 잘 살았어요. 그러나 앞으로는 돈은 공장지대에서 벌고, 소비는 환경이 좋은 곳에서 할 것입니다. 돈 버는 곳과 쓰는 곳이 분리된다는 얘기지요. 자연환경과 사회질서, 민심이 아름다운 곳이 경쟁력이 있는 시대가 옵니다. 살기 좋은 환경, 문화발전, 공공질서 있는 곳이어야 희망이 있습니다. 전북이 그렇게 되도록 잘 가꿔가야 합니다.”

 

 

-그에 덧붙여 도민들에게 당부하실 말씀이 있다면.

 

“자녀교육 잘 시켜 달라고 당부하고 싶습니다. 가난 벗어나는 좋은 방법이 교육이지요. 전북은 침체돼 있지만 2세들을 잘 가르쳐 훌륭한 인물로 만들면 그들이 전북을 일으켜 세울 것입니다. 또 하나는 공동체 의식을 가져 달라는 것입니다. 나만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해선 안 됩니다. 공동체 의식을 갖고 지역발전을 위해 힘을 합하면 막강한 힘이 발휘되고 20~50년 뒤 전북은 가장 잘 사는 지역으로 발돋움할 것입니다.”

이경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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