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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청수 청수나눔재단 이사장 "나누는 삶에는 은퇴가 없죠 내 몸 완전 연소될 때까지 도움 필요한 곳 찾아갈 것"

어머니가 가르쳐 준 종교인의 삶 책으로 펴내…인간은 본능적으로 이기적이며 잘난 맛으로 살죠…無我奉公의 마음으로 사회 양극화 해소해야

▲ 세계 55개국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찾아 평생 봉사의 삶을 살아온 박청수 청수나눔재단 이사장이 나눔의 실천 동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안봉주기자 bjahn@

남원 출신으로 한국의 마더 테레사로 불리는 박청수 청수나눔재단 이사장(78). 세계 55개국의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찾아 평생 나눔의 손길을 펼치면서 세계인의 어머니가 된 박 이사장을 익산 원불교 중앙총부에서 만났다. 지난 2007년 26년간 봉직해온 원불교 강남교당 교무직을 은퇴한 뒤 경기도 용인에 작은 거처를 정하고 여전히 나눔의 삶에 분주한 나날을 보내면서도 익산까지 내려오는 여유(?)를 내셨다. 국내외 각계 인사 97명이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 지난 2010년 최종 10인 후보에 오를 정도로 해외에서 더 알려져 있다. 소녀처럼 수줍으면서도 해맑은 미소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교무직을 은퇴한 후에 경기도 용인에 있는 '삶의 이야기가 있는 집'에 있어요. 평생 봉사의 삶을 살면서 생긴 이야기들을 담은 소박한 곳이죠. 1층과 2층은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고 3층에 법당과 서재와 방 한 칸을 마련해 쓰고 있습니다. 나누는 삶에는 은퇴가 없습니다. 몸이 완전 연소될 때까지 도움이 필요한 곳이 있으면 어디든 가려고 합니다."

 

 

-출가는 어떤 계기로 하셨는지요. 또 원불교 정녀된 동기는.

 

"어머님의 영향이 절대적이었죠. 어머님은 늘 그러셨어요. 너는 시집가지 말고 큰 살림을 하라, 더 넓은 세상에 나아가 일을 하라, 더 많은 사람을 도우라고. 여자가 아무리 똑똑하고 부지런해도 한 가정으로 시집가면 한평생 몇 식구를 위해 사는 거지만 원불교 교무님이 되면 넓은 세계를 한 집안 삼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 일할 수 있다고 하시면서. 그리고 네가 교무만 된다면 이 어미는 너를 끝까지 가르치겠다 면서 저에게 꿈을 심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전북고녀(전주여고 전신)를 졸업하고 바로 출가했죠. 어머니의 뜻대로 우리 두 자매 모두 정녀가 되었어요.(동생은 박덕수 교무)"

 

 

-지난해 말 어머니에 관한 책인 '어머니가 가르쳐 준 길'을 출간하셨죠.

 

"어머니는 스물일곱에 남편과 사별하고 그 어려운 시기에 홀로 두 딸 공부를 시키셨어요. 바느질과 음식 솜씨가 뛰어났던 어머니는 교무가 될 딸에게도 음식 만드는 법 등을 가르치셨죠. 호의호식하며 호강하려고 교무가 되었느냐, 고생을 해봐야 그만큼 보람도 크다며 격려했습니다. 그래서 종교인으로서의 나의 삶을 열어준 어머니에 대한 감사와 그 뜻을 따라 살았던 지난 날들을 정리했죠. 어린 시절 어머니에 대한 추억과 어머니의 헌신과 사랑, 강남교당에서의 교화활동, 세계를 돌며 봉사한 여정, 마음으로 만나왔던 각계각층 인사들과의 인연 등을 책이 담았습니다."

 

 

-교무는 언제 되셨는지요.

 

"대학 졸업후 교화부 서기부터 시작했죠. 교무는 31살 때 사직교당을 맡으면서 됐어요. 당시에는 지도자들이 많지 않아서 비교적 이른 나이에 교무가 됐던 것 같아요. 10년간 봉직한 뒤 김제 원평교당에서 2년, 서울 우의동수도원에서 2년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1981년 강남교당을 개척하면서 26년간 퇴임 때까지 있었죠.

 

 

-강남교당을 세울 때 삼성 홍라희씨가 도왔다는 얘기도 있던데요.

 

"홍라희 여사와는 1980년 '불의회' 모임을 통해 알게 되었죠. 홍 여사 어머니도 독실한 원불교 신자였는데 당시에 교당 부지를 마련해주었습니다. 이후에도 가난한 나라 사람들에 옷 등을 지원할 때 많은 후원과 도움을 주었습니다. 지난해 미국 뉴욕에 세운 원불교 원다마르센터도 홍라희 여사와 홍석현 회장이 후원해서 이뤄진 것이었죠.

 

 

-그동안 여러 권의 책을 펴내 내셨고 수필문학상도 받으셨죠.

 

"사실 학창시절 글 재주는 좀 없었어요. 하지만 정녀로서, 또 교역자로서의 삶을 살다보니 모든 수도자의 목표이자 내 인생의 목표인 '하늘사람'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구체적인 사례를 남겨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졌죠. 그래서제 삶의 궤적을 글로 남기게 됐습니다. 첫 세계 기행인 '기다렸던 사람들처럼'을 시작으로 '마음으로 만난 사람들' '나를 사로잡은 지구촌 사람들' '하늘사람' '마음눈이 밝아야 인생을 잘 살 수 있다' 그리고 '어머니가 가르쳐 준 길' 등 모두 6권을 펴냈습니다. 글을 쓰다보니까 1996년 현대수필문학상도 받게 되었죠."

 

 

-해외에선 '빅 마더'로 불리우시며 국내에서보다 더 유명하신데 나눔의 삶을 시작한 계기는 언제입니까.

 

"1987년 인도로 40일간 순례 여행을 갔을 때예요. 날람다대학의 아난다 스님의 안내를 통해 성지를 돌아보게 됐습니다. 당시 겨울철에 몹시 추운데 눈과 얼음 속에서 신발도 없이 홑이불을 덮고 생활하는 노숙인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그 뒤 히말라야 라다크의 상가세나 스님이 한국으로 찾아와서 아난다 스님의 부탁편지와 함께 다른 인쇄물도 함께 건넸는데 거기에 히말라야 설산 사람들의 딱한 처지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먹고 살기 어려운 점과 인근에 학교가 없어서 4000km나 떨어진 남인도로 보내어 공부시키고 있다는 내용 등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는 장학금이나 아니면 책걸상이라도 마련해 달라는 요청이었어요.

 

그래서 설교 시간에 이 같은 얘기를 하니까 교도 중에 한분이 아들과외비 200만원을 쾌척하였고 십시일반 모금을 통해 5000달러를 상가세나 스님에게 쥐어주었죠. 이것이 해외 나눔의 시작이 됐습니다. 상가세나 스님 또 도움을 요청해와 동대문과 남대문 상가를 돌며 학용품과 필기구 등을 구입하고 1만 달러를 모아서 보내게 됐고 이 같은 지원이 계속되면서 1991년 6월 라다크 사부마을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마을 공터에 기초석을 놓아두고 상가세나 스님이 무슨 설계도 같은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학교를 지어달라는 요구였죠. 그래서 학교건립 지원을 결심하고 먼저 7만 달러를 보내고 나중에 4000만원을 모아서 보냈죠. 그렇게 해서 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마하보디 기숙학교가 세워졌습니다,

 

 

-그 같은 인연으로 오지 중에 오지인 히말라야의 라다크에 마더박청수재단이 세워지고 학교와 병원 국제명상센터까지 설립됐군요.

 

"산간 오지라 병이 들면 치료받을 의료기관이 없었고 더욱이 병원이 없다보니 아이를 출산하다가 사망하는 사례가 부지기수였죠. 그래서 7억원을 들여 병원을 세우고 명상센터를 건립해 게스트룸을 만들어놓으니까 세계 곳곳에서 관광객들이 찾아오면서 지금은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바뀌었습니다."

 

▲ 박청수 청수나눔재단 이사장과 본보 권순택 선임기자가 인터뷰 도중 환하게 웃고있다. 안봉주기자 bjahn@

-캄보디아에서도 지뢰제거 후원을 비롯해서 물이 없는 마을에 우물을 파주고 무료 진료 병원을 세워 주는 등 많은 일을 하셨죠.

 

"1988년 한국에서 세계 MRA대회가 열렸었습니다. 그 때 참석했던 앵모리씨라는 분이 크메르루즈에 의해 200만명이 학살됐다며 울면서 얘기를 하더라구요. 딱한 사정 얘기를 듣고 매년 1만 달러정도를 모아 지원했죠. 그 분이 나중에 장관이 되었더라구요. 그 후 1994년 스위스에서 캄보디아 평화를 위한 원탁회의가 열려 참석했는데 웬 남자한테 전화가 왔어요. 나중에 알고보니 훈산총리 아들이자 국회부의장인 손 수베르씨였죠. 그 분 요청으로 17년간 지뢰제거 사업과 고아원 건립을 지원했고 2003년엔 구제병원을 세워 지금까지 13만여명이 무료진료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또 76개 지역에 우물을 파주고 지뢰로 팔다리는 잃은 사람들에게 의족 의수 1595개를 지원했습니다.

 

 

-그 같은 공로로 캄보디아 국가훈장을 받으셨고 앞서 언급한 인도에서도 올 초에 좋은 소식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요.

 

"내세울 것도 없는데 과분하게 지난 2000년 캄보디아 시아누크 국왕으로부터 사하메트레이 훈장 받았습니다. 인도에선 1월말에 인도 헌법의 아버지인 암베드 카르의 탄생을 기념해 제정한 2012년 암베드 카르 국제시상식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전갈을 받았죠. 수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번 주에 인도로 출국합니다."

 

 

-북한동포 돕기에도 앞장 서섰는데 어떻게 지원했는가요.

 

"1994년 평양교구장으로 있을 때 우리민족서로돕기 공동대표를 맡았죠. 중국 훈춘에 조선족 장애학교를 세워주었을 때 먼 발치에서 북한 쪽을 보았는데 사람들이 너무 헐벗은 거예요. 그래서 쌀 18가마를 구입해서 건네 주고 1995년에 1000만원과 옷 컨테이너 두 대 분량을 보냈죠. 1998년에는 정부 허가를 받아 직접 방북해서 3000만원과 간장 옷감 폐결핵환자 의약품 등을 지원했고 이후에도 북한학생 절반이 사용할 교과서용지와 감자 옥수수 생리대 20만개 등을 전달하는 등 모두 7억여원 어치와 옷 9개 컨테이너를 지원했습니다."

 

 

-그 외에도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를 비롯 지진이나 화산 전쟁 피해지역에 긴급 구호지원활동에도 앞장서섰는데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성 라자로마을 후원은 종파가 다른데 어떻게 해서 31년간이나 하셨는지…

 

"원불교 대변인으로 활동할 때 한번은 서양인 수녀를 만나 손을 잡았는데 꽁꽁 얼어붙은 손으로 환자들을 보살피는 거예요. 남의 나라까지 와서 도와주고 있는데 우리는 뭐하나 이런 생각이 들어서 시작한게 31년째 발길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또 라자로마을과 천주교 등에 건축공사를 할 때면 성금을 지원했어요. 지금까지 한 1억 정도 후원했습니다. 종교간 불화로 십자군전쟁이 일어났고 종교간 갈등이 큰 충돌을 빚고 있는데 종교 지도자들이 서로 교류하면 이 같은 갈등과 대립도 사라질 것으로 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법정 스님과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 또 김수환 추기경님 등 각계 각층의 명사들과도 깊은 교류가 있으셨던 것으로 아는데요.

 

"법정 스님은 1991년 불일암에서 처음 뵌 후 많은 후원과 격려를 해주셨죠. 2003년 대안학교인 헌산중학교 개교식엔 강원도에서 직접 차를 몰고 참석해주셨죠. 캄보디아 봉사를 나갈 때는 더위를 식히라고 눈 그림엽서를 보내주시기도하고. '내가 등너머로 항상 지켜보고 있어요'라며 격려와 함께 저의 세정을 알아주시던 분이었죠.

 

박완서 선생님은 내가 라자로마을 봉사활동할 때 보시고 담박에 눈에 들었다고 말씀하셨죠. 이 후 10년이상 교류했는데 호암상 수상금중 1000만원을 제게 주시며 좋은 일에 쓰라고 후원해주셨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1975년 라자로마을에서 처음 뵌 이후 자주 만났습니다. 은거중인 노기남 주교님을 뵙기위해 자주 오셨다는데 그 때 걷는 모습이 경건 그 자체였고 고뇌의 옷을 걸치고 계신 듯 했죠. 독재와 불의에 맞서 정의를 지키신 큰 지도자이자 어른이었죠."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움켜 쥐려고만 하는데 교무님께선 비우고 내려놓고 베풀며 살아오셨는데 이 같은 삶의 동력은 무엇인가요.

 

"저는 수행자이기 때문에 사심이 없어요. 제가 쓰는 방은 두 사람이 들어가기가 어려워요. 제가 입고 있는 옷은 천주교 수사가 해주었는데 30년째 입고 있습니다. 무소유의 삶을 살고 있지요. 내 것을 챙기지 않는 공심(公心) 때문에 사람들을 기꺼이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보다 남을 위해 살 때 충족감이 더 큽니다. 내 인생 내 목숨이 완전 연소될 때까지 시간을 아껴서 이 같은 삶을 살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고향인 전북 도민들에게 한마디 해주신다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이기적이며 저마다 잘난 맛으로 살죠. 하지만 내 것 나 만 생각하고 살다보니 양극화 현상이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이제 가진 자들이 손을 벌리고 내놓아야 합니다. 또한 돈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지식도 나누고 마음도 나누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친절만 실천해도 우리 사회가 이렇게 삭막하지는 않을 거예요. 바로 마음의 전환이 중요하죠. 그런 마음이 모이면 태산도 움직이는 힘이 나온다는 것이 무아봉공(無我奉公)의 삶을 통해서 터득한 것입니다."

권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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