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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찬규 학고재(學古齋)대표 "전북 문화·전통 살려 국제적 미술 레지던스 운영을"

지역 화가들 서로에게 자극줄 수 있는 통로 만들어줘야 좋은 작가 많아지면 그 나라의 미술은 자연스럽게 발전 사설 화랑은 작가 지원 한계… 정부·자치단체가 나서야

▲ 부안 백산 출신 우찬규 학고재 대표가 2년 전 문화계에 큰 화제를 불러온'500년만의 귀향-일본에서 돌아온 조선 그림'전시회를 갖게된 동기와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안봉주기자 bjahn@
▲ 우찬규 학고재 대표와 본보 김은정 선임기자가 갤러리에서 작품을 감상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안봉주기자 bjahn@

2년 전쯤 문화계에 큰 화제를 불러온 전시가 있다.'500년만의 귀향-일본에서 돌아온 조선 그림'전이라 이름 붙은 전시였다. 일본에 반출됐던 고서화 30점. 길게는 사오백 년, 짧게는 수십 년의 유랑 신세를 마치고 귀향한 이 작품들은 대부분이 국내 화단에 처음 공개된 작품이란 점에서도 그렇거니와 빈자리가 많은 조선 전기 회화사를 보완해줄 귀중한 작품으로 미술계의 주목을 모았었다. 이 작품들을 모으고 전시를 연 사람. 학고재(學古齋) 우찬규 대표(56)다. 전공은 한학이지만 일찌감치 고미술 영역에 입성해 고미술전문가로 한 시대를 살고 있는 그는 지금 한국미술의 오늘을 이끌어가는 중심에 서있다. 온고지신의 이치를 그대로 실천하는 삶이다.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에만 집착하는 시대에, 한눈팔지 않고 옛 것과의 대화를 삶의 노정에 온전히 들여온 그의 선택은 옳았을까. 그래서 만났다.

 

옛것을 배우고 익히는 즐거움을 온전히 체득하여 세상에 널리 전파하고자하는 우대표와의 대화는 편안했다. 결코 서두르지 않고 마치 옛 책을 읽는 것처럼 '자분자분' 들려주는 화법이 주는 즐거움이 컸다. 인터뷰는 학고재 신관에 있는 그의 업무실에서 있었다.

 

학고재는 서울 도심의 번잡함을 살짝 빗겨선 종로구 소격동 국립민속박물관 건너편에 자리 잡고 있다. 옛 한옥의 외형을 고스란히 지키고 있으면서도 내부는 본격적인 갤러리로 탈바꿈한, 공간 또한 옛것과 현대가 조화를 이룬다. 지금 학고재에서는 스물여덟살 젊은 여성작가 유현경의 전시 'Lying'이 열리고 있다. 개관 이래 가장 나이 어린(?) 작가란다. 평일인데도 전시장에는 관객들이 뒤를 잇고 있었다.

 

 

-평일인데도 관객이 참 많습니다. 언론에서도 주목하고 있던데, 학고재의 작가발굴 안목이 다시 확인되는군요.

 

"성장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는 작가예요. 자기 작업에 몰두하는 힘과 표현 역량이 놀랍습니다. 6개월 동안 문화예술진흥위원회의 레지던스 지원을 받아 독일에서 작업을 하고 왔는데, 500점을 그려낸 작가입니다. 참으로 놀랍지요. 이런 작가야말로 우리 미술의 미래를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이 직전 전시도 호평을 받았던데요. '디자인의 덕목'전인가요. 시대도 공간도 다른 작품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었는지 궁금했습니다.

 

"시공을 초월해 디자인이 갖춰야 하는 기본과 정신을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싶었습니다. 전통고가구 강화반닫이, 고미술품인 책가도, 추사 김정희의 판전 현판 탁본, 유럽 출신 디자이너 헬라 용에리 위스, 로낭과 에르완 부훌렉, 피에르 샤르팽, 제임스 얼바인 등의 가구와 조명, 이우환, 정상화, 프랑수와 모렐레, 천원지의 회화를 전시했어요. 한곳에서 비교해보니 우리 조상들이나 유럽의 디자이너들이나 모두 기능을 충족시키는 범위 안에서 가구를 디자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더군요."

 

 

-미술애호가들에게는 학고재의 이미지가 특별합니다. 일종의 신뢰 같은 것일텐데요. 학고재도 엄연히 상업화랑인데 의미나 명분만 추구하는 일은 한계가 있지 않나요.

 

"우리도 돈이 되는 전시 많이 합니다.(웃음) 사실 의미를 내세운 전시만 하기에는 한계가 있지요. 아무리 좋은 뜻을 갖고 있어도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어렵게 되니까요. 그렇다고 경제성만 탐하게 되면 화랑의 중요한 역할을 놓치게 됩니다. 적당한 절충, 적당한 경계, 이런 것들을 지켜야해요"

 

 

-그런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저희 화랑의 강점이기도 한데, 제가 고미술을 조금 안다는 것이예요. 그쪽에서 수익 창출을 어느 정도 해내기 때문에 현대미술분야로 하고 싶은 전시를 1년에 한두 번은 할 수 있습니다."

 

 

-한학을 전공했고, 고전번역으로도 실력을 인정받으셨는데 그 길을 놔두고 왜 '학고재'라는 화랑을 택했는지 궁금합니다.

 

"학고재가 문을 열었던 1988년 즈음에는 이상하게도 인사동에 고서화전문화랑이 많지 않았어요. 오히려 한참 잘나가던 고서화랑들이 문을 닫고 새로운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던 때였지요. 학고재는 오히려 그런 분위기를 거슬러 고서화전문을 표방하고 나선 셈인데, 특별한 욕심을 내지 않아서였는지 화랑운영이'순풍에 돛 단듯' 잘되었어요. 열 평 옹색한 공간을 불과 2년 만에 벗어나 제 건물을 가질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남다른 문화인식이 읽혀집니다만 그래도 또 다른 비결이 있지 않았을까요.

 

"옛것이라해서 옥석 구분 없이 상품화했던 기존 고서화전문화랑들과 차별화하고 싶었습니다. 철저한 기획 전시로 우리의 옛미술을 대중화하는 방식이었지요.'19세기 문인들의 회화전''무낙관 회화전''구한말 그림전''조선중기 서예전' 등이 그렇게 나왔습니다."

 

 

-그런 기획전들이 고미술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었지요.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학고재의 대중화 명성은 90년대 초반, 민중미술 작가 초대전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입니다. 상업화랑에서 민중미술 작가들의 전시를 한 것은 학고재가 처음이었지요. 결과적으로는 화랑도 그 분들 덕분에 잘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신학철 이종구 오 윤 김정헌 강요배 씨 등 한국미술판도를 바꾸어 놓은 작가들과는 지금도 여전히 교류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어려운 시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운이 좋아 잘 지나갔던 것 같습니다."

 

 

-그 시절, 민중미술에 관심을 가진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고서화를 전문으로 하는 화랑이 민중미술작가전을 기획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었겠지만 저는 고서화전을 기획하면서도 회화사에 남을 미술품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회화사에 남을 작품이란 게 어떤 것입니까. 시대정신이 담겨 있는 것이어야죠. 당시 역량 있는 민중미술작가들의 작품에는 시대정신이 살아있었어요. 그것을 주목했을 뿐이지요."

 

 

-인사동 학고재 시대는 완전히 마감한 셈인가요.

 

"소격동에 한옥을 구해 '아트스페이스 인 서울'이란 이름으로 현대미술 전문 화랑을 마련한 것이 1995년인데, 주로 고서화를 전문으로 하는 인사동 학고재와 함께 운영하다가 2008년에 인사동 건물을 팔고 소격동으로 모두 옮겨왔습니다."

 

 

-소격동으로 이사온 이후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한국미술계에서 학고재의 위치가 아주 굳건하던데요.

 

"더 책임이 커지는군요. 인사동에서 옮기면서 소격동 공간을 늘렸습니다. 본관 전시 공간을 확충하고 뒤쪽의 당초 학고재 출판사가 있던 곳에 신관을 지었어요. 신관은 새롭고, 앞쪽 한옥은 예스러운 분위기지요. 내용적으로는 기획전을 다양화하고 집중해 화랑을 국제화 시키는데 주력했습니다."

 

 

-화랑의 국제화는 한국미술의 위상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지 않습니까.

 

"물론입니다. 2008년은 학고재 개관 2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그때 소격동 신관을 짓고 20주년 기념전을 했는데, 저희로서는 중요한 전시였어요. '센시티브 시스템'을 주제로 한 전시였는데 프랑스 생테티엔느 미술관 관장인 로랑 헤기에게 기획을 맡겼습니다. 이 전시를 계기로 학고재의 국제 무대 진출 통로가 좀 더 넓게 열렸습니다."

 

 

-외국작가들을 초대할 때는 어떤 가치를 우선에 두나요.

 

"상업적인 측면보다는 이 작가의 작품이 어떤 역할을 할까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콜렉터나 미술학도, 미술시장에서 일하는 사람들한테 도움이 될 수 있는 전시가 기준이지요. 그렇다보니 손해가 많았습니다.(웃음) 그러나 학고재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받게 되고, 또 그것을 계기로 우리나라 작가들이 외국에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렸으니 그것만으로도 보람과 의미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역량 있는 작가를 발굴하고 작가들의 지원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으신데요.

 

"화랑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니까요. 다른 예술 장르가 다 그렇지만 특히 미술 발전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작가, 가능성 있는 작가들이 많아지면 그 나라의 미술은 자연스럽게 발전합니다. 그러려면 투자를 해야지요. 우리나라는 그 부분에 너무 인색합니다. 사설 화랑이 작가를 발굴하고 지원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유럽이나 다른 나라들의 경우 정부나 자치단체가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운영해 전 세계적으로 작가를 발굴하고 지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바탕을 잘 들여다봐야합니다."

 

-전주를 비롯해 전라북도는 미술의 전통이 깊습니다.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한때 전주에서 작업하기도 했고, 교류도 활발했었지요. 그런 전통을 살려 지역발전의 동력으로 활용하는 것도 지혜로운 일일 텐데요.

 

"전북은 그런 문화적 전통과 배경도 그렇고 지형적으로도 국제적인 미술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운영하면 아주 좋을 것 같습니다. 다른 자치단체들이 비엔날레 형식의 행사를 많이 만들어내고 있는데, 동력이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반면 레지던스는 작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하면서 국제적인 도시로 만드는데 매우 의미 있고 가능성 있는 통로가 됩니다. 지역작가 지원도 그들끼리의 리그보다는 문을 열어 서로에게 자극을 줄 수 있는 판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전북을 현대미술로 주목받는 지역으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고미술 수집 활동은 어떤가요. 보람이 크겠지만 어려움도 많을 것 같습니다.

 

"10여년동안 일본에서 우리 문화재를 들여오는 일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그 즐거움이 워낙 커서 늘 새로운 마음으로 나서는데 명분이 있는 일이면서도 문화재 환수라는 것이 만만치 않은 일이긴 합니다."

 

 

-한국미술의 위상은 어떻습니까.

 

"세계미술계에서 한국미술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백남준, 이우환, 그 이후에도 좋은 작가들이 계속 나오고 있죠. 세계적인 비엔날레에서 주목받는 한국작가들이 많습니다. 이용백 같은 작가도 역대 비엔날레에서 그만큼 주목받는 작가가 없었죠. 외신들이 비렌날레를 보도하면서 이용백을 반드시 언급하더군요. 그런 작가들이 우리나라에서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이런 흐름을 있게 한 어떤 배경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들의 작품이 좋기도 하지만 지금 경제 중심축이 아시아로 옮겨져 왔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시아에서 중요한 나라가 어디입니까. 중국 한국 일본이죠. 미술의 측면에서 본다면 한·중·일 중에서도 한국 미술의 완성도가 가장 높습니다. 유럽 쪽의 미술전문가 평론가 큐레이터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내용입니다."

 

 

-학고재는 작가발굴을 어떤 기준으로 합니까.

 

"성장의 가능성을 제일 먼저 봅니다. 작가는 시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책무이기도 합니다. 그래야 역사에 남을 수 있는 작가로 성장합니다. 어느 시대건 문제가 있고 추구하는 가치가 있습니다. 그에 대한 안목을 갖추는 일이 중요한데 그것이 금방 갖추어지지 않거든요. 독서량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시대를 볼 수 있는 안목이 자연스럽게 생기지요. 그 바탕을 우선 갖춘 후에는 자기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손을 가져야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긍정적인 사고를 갖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앞으로 하실 일이 더 많아지겠습니다.

 

"좋은 작가를 발굴하는 일과 함께 아시아 미술을 이끌 수 있는 화랑으로 발전시키고 싶습니다. 아시아 작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해 세계미술의 중심이 될 수 있게 하는 작업입니다. 중국 인도 등 아시아권의 좋은 작가, 기획자들과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지요. 좀 더 활발한 현대미술 전시회를 하려고 부암동에 부지도 마련했습니다. 전시공간만 1500평 규모의 미술관입니다. 금년 하반기에 착공하는데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미술관을 만들고 싶습니다."

 

 

-고향에도 우 대표님의 문화작업이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좀 더 나이가 들면 좋은 레지던스를 운영하는 것이 마지막 바람입니다. 좋은 공간을 마련해 좋은 작가들을 지원하면서 작가들이 작업할 때 마당도 쓸어주고 함께 지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 까 상상합니다.(웃음) 그 꿈을 고향에서 이루면 더 좋겠지요. 고민도 하고 노력도 해보겠습니다."

김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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