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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한 정운천 前 장관 "중앙과 통로 만들어 우호적인 환경 조성해야 전북 발전"

▲ 4·11 총선 전주 완산을 지역구에 출마해 낙선한 새누리당 정운천 前 장관이 선거를 치르면서 겪었던 일들을 말하고 있다. 안봉주기자 bjahn@

옛말에 선거는 학교 반장 선거가 됐건, 이장 선거가 됐건 이겨야 한다고 했다. 선거에 지면 사람이 떠나고 심리적 위축감도 상당할 터다. 큰 선거라면 패가망신하기 십상이다. 선거라면 승자와 패자로 나뉘기 마련이다. 당선자는 권력을 위임받아 6월부터 임기를 시작하게 되고 패장은 안으로 울음을 삭일 것이다. 고진감래와 와신상담. 전북의 출마자 45명 중 11명이 단 맛을 봤고 34명은 쓸개를 씹는 심정으로 다음을 기약할 것이다. 4·11총선에서 전주 완산 을(새누리당 정운천)과 대구 수성 갑(민주통합당 김부겸), 광주 서을(새누리당 이정현)은 지역장벽 극복 여부로 여야는 물론 국민적 관심을 끌었던 선거구다. 전주 완산 을에서 낙선한 정운천(58) 전 장관을 만났다. 선거가 끝난 뒤에도 방송 대담과 언론매체 인터뷰에 참석하느라 서울을 오가는 등 바쁘게 보내고 있었다. 인터뷰는 20일 그의 선거사무실에서 2시간 가량 진행됐다.

 

 

-'바보 정운천의 일곱번째 도전'은 실패로 끝이 났습니다. 서운하지 않습니까.

 

"4년전 총선 때 4500표였는데 3만표를 넘게 얻었으니 감사한 마음 그지 없어요. 지역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어려움과 고통을 감내하면서 선거에 나섰는데 일할 기회를 갖지 못해 아쉬움이 커요."

 

 

-오차범위 내 치열한 접전이 예상됐는데 투표 결과(3만406표)는 당선자와 11.2%나 차이가 났어요.

 

"선거 이틀 전까지도 여론조사 결과는 앞섰어요. 그 사이 엄청난 변화가 있었던 거지요. 기표소에서 30년 지역주의 장벽이 재현된 걸로 봐요. 기대가 컸는데 결과를 보고는 멍 했지요."

 

 

-박근혜 위원장이 뭐라고 하던가요.

 

"선거 끝나고 만났어요. 선물 하나 드릴려고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고 하자 고생이 너무 많았다며 그걸로도 충분하다고 하셨어요."

 

 

-눈물이 나도록 고맙다는 플래카드를 내거셨던데 다음에도 출마하실 건가요.

 

"대학 졸업 후 대한민국 농업 살리는 모델을 만들기 위해 해남에서 25년간을 보냈습니다. 도지사 출마 이후엔 신념이 지역장벽 극복으로 바뀌었어요. 농촌에서 25년을 보낸 걸 감안하면 앞으로 10년 쯤은 당락에 매달리지 않고 올인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구 광주 전주는 여야가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을지 관심 선거구였는데 모두 낙선했습니다. 지역장벽이 여전히 높다는 걸 까요.

 

"모두 비슷한 비율로 낙선했어요. 후보가 누구인가를 떠나 넘을 수 없는 장벽이 확실하게 나타난 선거라고 봐요. 30~40년 된 두꺼운 얼음을 녹여내는 데는 한 두번 갖고 되는 게 아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민심변화 같은 건 느끼지 못했나요.

 

"작년 8월부터 쟁기질로 자갈밭을 가는 심정으로 저변층을 훑고 다녔습니다. 표를 달라고 하지 않고 마음을 얻으러 왔다고 했습니다. 많은 변화가 있었지요. 격려해 주는 사람도 많았고요."

 

 

-선거 슬로건이 '당 보다는 인물을 보고 뽑자'였는데 먹히던 가요? 상대 후보들은 '사람보다는 당이 먼저' 'MB 심판론'으로 맞섰는데….

 

"인물론에 공감하는 분위기가 많았지만 막판에 MB심판론이 먹힌 것 같습니다. 시의원 도의원이 총동원돼 새누리당을 찍으면 MB를 찍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표가 많이 달아난 것 같아요."

 

 

-가족 단위의 조용한 선거를 치렀는데 효과가 있었나요.

 

"선대위나 선거대책본부 같은 것 만들지 않고 직접 발로 뛰었어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으니까 큰 효과가 있었다고 봐요. 1월10일 출판기념회 때 2200여명이 참여했는데 이 때부터 진정성이 알려지고 응집력이 발휘되면서 변화가 있기 시작했습니다."

 

 

-가족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던가요.

 

"어릴 때부터 밥 먹을 때 자유로운 주제를 놓고 토론을 해 왔어요. '밥상머리 토론'이지요. 아빠가 왜 해남에서 일하려 하는가, 아르바이트는 뭘 위해서 하는가 등등 자유로운 주제를 놓고 토론 하다 보면 공감하게 되고 이해하게 되지요. 강압이 끼어들 여지가 없어요."

 

 

-가족들한테 미안했겠어요.

 

"미안하지요. 아내는 경북 선산이 고향이고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 곳에 내려와 교직을 사표 내고 1년 가까이 도왔는데…. 진정성을 갖고 일한 만큼 기대가 컸었는데 펑펑 울더라고요."

 

 

-정치하는 이유는 뭡니까.

 

"지역장벽을 깨자는 확실한 가치 때문입니다. 어려운 일이라 더 가치를 느껴요. '안되는 줄 뻔히 알면서 뭐 하러 이곳에 왔느냐' '비례대표 자리도 있는데 왜 힘들게 출마했느냐'는 충고가 많았지만, 중앙에서 소외받고 광주·전남의 변방인 전주와 전북을 살리기 위해 출마했어요. 단 한 석이라도 중앙과의 통로를 만들어 우호적인 환경을 조성해야 전북이 발전합니다."

 

 

-도지사 선거 때 논쟁이 된 LH유치 청와대 교감설은 사실입니까, 아니면 표를 의식한 발언입니까.

 

"당시 도지사 선거에 나가라는 권유가 있었는데 두 세달을 버텼어요. 선물 보따리를 달라고 요구했지요. 선거를 한달 보름 쯤 앞둔 5월16일 청와대 박형준 수석비서관이 '내려가서 지지율 20% 이상 올려봐라. 들어주겠다'고 해서 청와대 교감설이 나온 겁니다. LH유치 무산 뒤 함거를 타고 석고대죄 했는데 사실은 도지사나 국회의원 등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책임지는 사람 하나 없어요."

 

 

-농업발전과 지역장벽 극복 두가지를 평생 해야 할 일로 꼽던데요.

 

"두가지는 전북에서 가장 절실한 문제입니다. 농도이기 때문에 그렇고 지역주의의 피해를 가장 많이 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소명으로 알고 계속 노력해 나갈 생각입니다."

 

 

-지역장벽 극복은 석패율이나 독일식 정당명부제 같은 제도적 접근이 병행돼야 하지 않을까요.

 

"제도개혁을 줄기차게 요구해 왔지만 정치하는 사람들의 당리당략 때문에 이번 선거에서도 물건너 갔어요. 국민 뜻을 저버린 직무유기입니다. 석패율제가 시행됐다면 처음으로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됐겠지요. 독일식 정당명부제는 의석을 50~100석 늘려야 하는데 의석 확대는 국민저항 때문에 쉽지 않아요. 10여석을 배정하는 석패율제가 오히려 가능성이 있어요."

 

 

-농업을 전공한 특별한 동기가 있습니까.

 

"인촌 선생과 아버지는 8촌지간이었어요. 인촌 선생이 서울로 올라가신 뒤 그 집에서 살았는데 인촌 선생이 태어난 그 방에서 제가 태어났어요. 인촌 선생은 학창시절의 제 멘토였어요. 가장 최첨단 아니면 가장 낙후된 곳을 가라는 가르침 때문에 농업을 택했고 해남까지 가서 농사를 짓게 된 겁니다."

 

 

-해남에서 25년간 전업 농부로 살았습니다. 이때 '참다래 유통사업단'을 만들어 고소득 작물로 키위를 육성했는데 그 비결은.

 

"1990년 첫 수입개방이 되면서 바나나·파인애플은 1년만에 사라져 버렸고 키위도 똑같은 운명에 처했어요. 상대는 몽둥이를 들고 오는데 우리는 회초리 밖에 없어 경쟁이 안됐지요. 그래서 농민 300명을 모아 '참다래유통사업단을 만들어 백화점 매대를 확보하는 등 유통을 장악해 타개했습니다. 이때 '사즉생'을 체화했고 멘토도 이순신 장군으로 바뀌었습니다. 독특해야 살아남는다는 '거북선 농업'을 실천했지요."

 

 

-당시 돈은 좀 벌었습니까.

 

"조합원 300명이 출자해 최초의 영농조합법인을 만들어 운영했는데 적자 내지 않고 1년에 10억 이상씩 매년 조합에 돌아갔습니다."

 

 

-MB정부 초대 농림수산식품부 장관 발탁은 어떤 계기였나요.

 

"2007년 11월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 캠프인 안국포럼의 농업분야 토론회 참석 요청을 받고 갔는데 주로 표를 의식한 발언과 정책들이 거론되더라고요. 토론 말미에 5분간 발언할 기회가 주어졌는데 그 때 '그래서 우리 농업이 망했다. 식품과 결합해야 경쟁력이 있다'고 지적했어요. 식품산업을 신성장동력으로 삼아야 한다는 등 여러 처방을 제시했는데 이런 게 계기가 됐다고 봐요. 농림수산부 명칭에 '식품'을 넣은 것도 그런 맥락입니다."

 

 

-김홍국 하림 회장이 장관 제의를 받은 걸로 알려져 있는데….

 

"맨 처음엔 하림의 김 회장이 입각 제의를 받았지만 기업경영을 이유로 고사했어요."

 

 

-MB맨으로 호칭되는 데 대해선 어떤 생각입니까.

 

"초대 장관을 해서 그런 것 같은데 개의치 않아요.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직속 농어촌특별대책위원(차관급)으로 활동할 당시 현장체험을 보고했더니 노무현 대통령이 '참 존경합니다'고 칭찬하시더라요. 한미FTA를 앞두고 입각제의를 했지만 거절했어요. MB도 대선때 농업분야 선대위원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했어요. 성공한 농업인이 많은데 나 같은 사람이 들어가면 표를 잃게 되고, 기존 농민단체 대표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것이며 나의 본업이 정리되지 않은 것 등을 이유로 들었지요. 굳이 말한다면 나한테는 '친 전북맨' 밖에 없어요."

 

 

-장관을 하지 않았다면 정치도 하지 않았겠네요. 도지사나 총선 출마도 없었을 테고….

 

"그렇지요. 정치한다는 생각은 아예 없었어요. 이순신 장군도 일 중심으로 했지 어떤 자리나 직책에 매달리지 않았어요. 반장 선거에도 출마해 본 적이 없고 농업 관련 CEO자리도 모두 추대받아서 한 겁니다."

 

 

-정치를 하지 않았다면 지금 뭘 하고 있을까요.

 

"1980년부터 20년간 땅을 임대해 농사를 지었는데 그 기간이 끝났어요. 농업 관련 단체에 종사하면서 우리나라 농업을 살리는데 일정 역할을 하고 있겠지요."

 

 

-농업발전은 쉬운 일이 아닌데 우리나라 농업이 발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보조·지원 틀에서 산업화의 틀로 농업구조의 틀이 바뀌어야 해요. 생산에서소비 중심으로, 주체도 정부가 아닌 농민 중심으로, 생산물량도 질 위주로 전환하고 소비자 선택이 확대될 수 있도록 공급물량을 늘려야 합니다. 장관 재직 때도 이 네가지 틀을 강조했어요."

 

 

-선거에서 지면 지역을 떠나는 경우가 많은데 전주에서 계속 사실 건가요.

 

"해남에서도 20여년 간이나 살았지 않습니까. 중요한 일이 있으면 험난한 길이라도 찾아간다는 것이 신념이고 이 곳이 필요하다면 여기에서 살 것입니다. 신념이 중요해요."

 

 

-향후 계획이 궁금합니다.

 

"우선 새만금위원 활동에 집중할 생각입니다. 새만금발전계획 입안에 참여했고 새만금은 전북발전의 큰 동력이기 때문에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지역장벽 극복인데 말은 쉽지만 실천은 간단치 않아요. 전주와 전북을 발전시키는 길이기 때문에 의지를 갖고 실천하려 합니다."

 

▲ 정운천 전 장관과 본보 이경재 선임기자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안봉주기자 bjahn@

이경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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