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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선교회 대표 이동휘 원로목사 "세상의 빛과 소금역할이 교회의 사회적 책임이죠"

'깡통교회' 개척, 교회재정 70% 선교 구제에 사용 / '불편하게 삽시다' 목회철학…자가용 없이 살아 / 기복주의 신앙은 복음 왜곡… 반드시 경계해야

▲ 전주 안디옥교회를 한국 대표의 선교 교회로 성장시킨 이동휘 원로목사는 교회의 사명은 세상의 빛과 소금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안봉주기자 bjahn@

목회자로서는 늦은 나이에 교회를 개척해서 한국을 대표하는 선교 교회로 성장시킨 전주 안디옥교회 이동휘 원로목사(78). 교인수가 8000여명에 달하는 큰 교회로 부흥했지만 개척 당시 비행기 격납고를 뜯어다 만든 깡통교회 그 모습, 그대로 외형에 치중하지 않는 대신 세계 90개 국가에 4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수많은 농어촌 교회를 지원하며 장애인과 저소득층 홀로노인 등 소외된 이웃을 돕는 그에게서 한국 교회의 새 희망을 찾게 된다. 성공한 목회자로서 편하고 안락한 길 보다는 '불편하게 삽시다'를 목회 케치프레이즈로 평생 자가용 없이 청빈하고 검소한 삶을 살았고 은퇴 후에도 교회에 부담주기 싫다며 수원의 조그만 아파트로 이사한 이동휘 원로목사는 좁은 문, 좁은 길을 가는 이 시대의 참 목자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국내 교회와 해외 집회의 바쁜 일정 가운데도 흔쾌히 시간을 내서 전주에 있는 2평도 채 안 되는 선교회 사무실에서 이동휘 원로목사님을 만났다.

 

-은퇴하신지 벌써 7년 되셨는데,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목회하실 때 보다 더 바쁘신 것 같으신데…

 

"은퇴 후 수원으로 이사했어요. 최근 미국 캐나다 선교집회에 초청받아 다녀왔습니다. 국내 교회와 선교단체에서도 오라고 부르면 갑니다. 또 바울선교회 대표를 맡고 있어 전주에 있는 선교사무실에도 자주 내려옵니다."

 

-전북일보와는 인연이 깊으신데 은퇴하시던 해인 2006년엔 '나의 이력서'를 18회에 걸쳐 연재하셨었죠.

 

"저도 전북일보 애독자입니다. 지금은 신문을 볼 수 없지만 전주에 있을 때는 꼭 보았습니다. 또 개인적인 친분도 있고요."

 

-목회자로서는 좀 늦은 나이에 안디옥교회를 개척하셨는데, 지금도 처음 개척 당시의 깡통교회 모습 그대로이더군요.

 

"제가 49살 때인 1983년 4월에 안디옥교회를 개척했죠. 농촌교회에서 19년동안 사역하다 전주로 와서 4년 만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당시 교인이라야 몇 십명에 불과했었죠. 교회 자리를 물색하다 비행장 격납고를 뜯어다 창고로 사용중이던 건물을 600만원 전세로 빌렸죠. 그 뒤 건물을 매입하고 2차례 깡통 건물을 증축해 현재까지 교회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안디옥교회 정도의 교세이면 규모에 맞는 교회 건물을 마련하고도 남았을 텐데요.

 

"교인들도 그렇게 불편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요, 또 교회 건축의 필요성을 얘기하는 교인들도 없었고…"

 

-왜 안디옥교회라 이름 지었는지요.

 

"교회 개척할 때부터 선교에 대한 비전을 세웠습니다. 성경에 보면 선교를 많이 한 교회가 안디옥 교회라서 이를 본 따 교회 이름을 지었죠."

 

-목회 방침이 "불편하게 삽시다"이던데, 창고같은 건물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어려움이 많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특히 여름과 겨울철엔 냉난방이 제대로 안돼 찜통더위와 추위에 고생하셨다던데 왜 스스로 불편을 감수하시는지요.

 

"기후나 언어가 달라 불편을 감수하는 선교사를 돕는 교회인데 우리가 편안하게 지낼 수는 없잖아요. 마치 아들을 전선에 보낸 어머니가 편한 잠을 잘 수 없는 것처럼 말이예요. 그래서 어머니 교회로서 반문화 생활만 하자 제안했고, 교인들도 억지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받아들렸죠."

 

-안디옥교회가 짧은 기간에 폭발적 성장과 부흥을 이룬 동력은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요.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처럼 없는 가운데도 줄 수 있는 기쁨은 주어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습니다. 주는 기쁨이 쌓이다 보니 교인들 스스로도 자부심이 생겼죠. 예수님도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다 내게 한 것이다'고 말씀하셨는데, 교회는 선교와 구제가 가장 중요한 사역입니다. 해외 선교 뿐만 아니라 어려운 농촌교회를 후원하고 장애인들과 소외계층을 지원하고 하니까 자연스럽게 성장도 됐죠. 물론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교회 재정의 70% 이상을 선교와 구제에 사용하는데 교인들의 반대나 불만은 없었습니까. 교회내 각 기관 단체를 운영하는 비용도 많이 들텐데요.

 

"반대하거나 불만을 얘기하는 사람은 전혀 없었습니다. 또 교회 기관과 단체는 모두 스스로 자립했죠. 자립하니까 더 발전하고 더 성장하고 더 좋아했습니다. 성장은 교회 재정 투자와 관계없이 이뤄졌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예산을 따로 세우지 않는다고 들었는데요, 어떻게 예산을 세우지 않고도 수백명에 달하는 선교사를 지원하고 장애인 농어촌 선교 등 많은 일을 감당하셨는지요.

 

"제가 전에 있던 교회에서 어려운 농촌교회를 돕자고 하니까 장로님 한분이 예산이 없어 안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안디옥 교회를 개척했던 것입니다. 목사와 직원들 필수 경비만 정해놓고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필요한대로 채워주신다는 믿음으로 해왔습니다. 이달 초 미국 집회에 갔을 때 어떤 분이 경제계도 예산 계획없이 더 잘 된 사례가 있다며 분석기사가 실린 잡지를 저에게 준 일이 있었습니다."

 

-해외 선교사 지원뿐만 아니라 농촌교회에도 많는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는데…

 

"농촌 목회를 20년 가까이 해서 농촌교회의 열악한 실정을 잘 압니다. 그래서 3년 동안 지원해서 자립시키는 것을 원칙으로 교육 훈련프로그램과 재정지원을 했죠. 한번에 70~80개 교회가 참여합니다. 그렇지만 모두가 잘 되지만은 않습니다."

 

-장애인 예배를 마련하는 등 장애우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배려가 남달랐었죠.

 

"지금이야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많이 개선됐지만 예전에는 장애인들이 집 바깥으로 나오기조차 힘들었죠. 장애인 오후 예배를 신설하자 처음에는 수십명이 참여하더니 나중에는 수백명씩 몰려오는 거예요. 깜짝 놀랐죠. 재가 장애인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습니다. 장애인 지원 뿐만 아니라 독거노인과 중증 장애인 목욕차량 선교, 발클리닉선교, 의료선교, 교도소선교, 노인복지센터 위탁운영 등으로 확대해 나갔습니다."

 

-안디옥교회 하면 바자회 교회로 유명한데 바자회를 시작한 배경은.

 

"미국에서 이웃돕기 바자회가 잘 되는 것을 보고 우리 교회도 시작했죠. 품질 좋은 옷을 천원씩 저렴하게 팔고 먹거리까지 구색을 갖추니까 교인뿐만 아니라 시민들도 몰려들면서 전주시내 명물이 됐죠. 1년에 2차례씩 바자회를 가져 해외 선교센터나 학교 건립을 지원하게 됐습니다."

 

-현재 바울선교회 대표로 활동중이신데, 바울선교회는 언제 설립했고 지금 선교활동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지난 1986년 바울선교회를 교파를 초월해서 설립했습니다. 매년 선교사를 선발해서 교육하고 파송하고 있습니다. 지난주 제36기 선교사 12명을 새로 뽑아 이번 주부터 훈련에 들어갑니다. 현재 아시아와 서부 아프리카, 중동지역을 비롯 세계 90개 국가에 선교사 400명을 파송했습니다. 복음의 사각지대에서 질병과 박해와 테러 등의 어려움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하는데 헌신하고 있죠."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점에 대해서 여쭈겠습니다. 며칠 전 서울 대형교회 원로목사의 고백으로 한국교회의 부자 세습 문제가 다시 이슈화되고 있습니다만…

 

"교회세습에 대해선 좋은 사례와 나쁜 사례가 있습니다. 세계 선교를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는 캐나다 토론토의 피플스 교회의 경우 오스왈드 스미스목사에 이어 아들 목사가 맡아서 잘 이끌었는데 3대에 다른 목사가 맡으면서 기울어졌거든요. 전주의 한 교회는 아버지 목사가 아들이 교회를 맡는 것을 반대했는데 교인들이 원해서 아들 목사를 세워서 지금 잘 하고 있습니다. 일부 몇몇 대형교회에서 막연한 생각으로 아들에게 맡겼다가 교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좋지 않은 일이 있어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목사님도 자녀들이 모두 선교사의 길 걷고 있는데 교회를 물려주고 싶다는 생각은 안드셨는지요.

 

"고생하는 자리인데 왜 자식들에게까지 물려주겠습니까."

 

-대형교회 목사들의 경우 은퇴하면 적지않은 예우를 받으시는 분들도 많은데 목사님께서는 교회에서 전주에 거처를 마련하려 했지만 극구 사양하시고 수원의 조그만 아파트로 가셨죠.

 

"나 편하려고 수원으로 간 것입니다. 그동안 자가용 없이 생활해왔기 때문에 대중교통 이용이 수월한 수원을 택했습니다. 수원은 호남선 전라선 경부선 모두 닿고 인천공항도 리무진으로 50분이면 갈 수 있어서 좋습니다."

 

-몇몇 대형교회 목사들의 돈과 여자 문제가 언론에 오르내리다보니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요, 요즘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시각도 많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부 성직자의 실수 인정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민족 앞에 고백해야 합니다. 얼마 전 불교계 문제가 불거졌지만 유독 기독교계 문제에 대한 폭로와 공격이 많다보니 극히 일부 문제가 마치 전체 문제인것 처럼 잘못 비쳐지는 대목도 있습니다. 인터넷에서도 안티 기독교세력이 크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도 사상이나 이념보다도 기독교를 더 말살하려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70~80년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외형적으로 급성장을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교인수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한국교회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하시는가요.

 

"교회가 기도의 힘이 약해지니까 기독교가 약해지고 있습니다. 예전에 뜨겁게 기도하던 기도원들이 지금은 세미나 장소로 변했습니다. 무릎 끓고 기도하기보다는 듣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밤을 세워 기도했던 것처럼 성도들이 기도를 회복해야 합니다. 미국도 교회가 많이 침체되고 있지만 일부 교회는 계속 성장하고 부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변질된 교회가 아닌 원색적인 교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봉사 잘하면 복 받고 성공하고 잘산다는 이른바 기복주의 신앙이 한국 교회 내에 여전한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우리가 부모님께 효도하면 복 받는다는 것과 복 받기 위해 효도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성경에 축복에 대한 얘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복 받기 위해 믿는 것은 이기적인 신앙입니다. 이 같은 믿음은 시정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참 자유와 평강을 얻는 것이 믿음의 복입니다."

 

-교회 내에서는 모두 천사들 같지만 사회 속에서는 크리스챤들이 잘 구별이 안 된다는 지적도 많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뭔가 달라져야 하는데 변화가 없는 것은 왜 그럴까요.

 

"구라파는 기독교 역사가 1000~2000년씩 되었쟎아요. 해적, 바이킹이었던 그들이 예수 믿고 신사국가로 변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 역사가 120~130년으로 좀 짧습니다. 신앙의 생활화가 안 된 것에 대한 잘못이 있습니다만, 그래도 예수 믿으니까 우리나라가 이 정도 유지되고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개인적 차원에서 보면 신앙의 미성숙한 면이 있죠. 성경을 제대로 알고 말씀대로 살면 자연히 변화될 수 밖에 없죠. 이를 위해 교회에선 제자화 훈련과 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교회내 목사 장로 권사 집사라는 직책이 섬김과 봉사라는 직분보다는 계급화 서열화 되고 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만…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장로의 경우 평신도로서는 최고 예우를 받는 직책입니다. 명예욕이 사람을 타락하게 만들듯 장로 권사로서 인격적 결함이 있어선 안되겠죠. 교회 중직(重職)은 순교(殉敎) 순서이고 교회의 최고 VIP는 새신자입니다."

 

-교회의 역할, 교회의 사명은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요.

 

"성경에 있는 사도행전 1장 8절이라 생각합니다. 제 목회 철학이기도하고요. 예루살렘 즉 전주지역과 온 유다인 대한민국과 사마리아인 어려운 이웃과 소외된 사람들, 그리고 온 땅인 세계를 향해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사회적 책임입니다."

 

-앞으로 계획은.

 

"앞으로도 바울선교회 봉사를 계속하고요, 한국교회에 힘과 격려가 된다면 집회도 계속 참석하고, 나 자신의 회개도 계속하고, 주님이 허락하는 날까지 할 일을 하겠습니다."

 

 

▲ 이동휘 원로목사가 1983년 전주 안디옥교회 개척 당시 비행기 격납고를 뜯어다 만든 깡통교회 앞에서 본보 권순택 선임기자 와 담소를 나누고 있다. 안봉주기자 bjahn@

※기사내용 가운데 언급된 일부 통계 수치는 이 목사님이 밝히기를 꺼려해서 간접 취재를 통해 기록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권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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