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부터 비가 왔다. 봄부터 가뭄이 계속되었으니 단비다. 비오는 서울 풍경은 일상적으로 만나는 도시 서울과는 사뭇 다르다. 광화문 넓은 광장은 더 특별한 풍경이다. 지나면서 언뜻 보니 세종대왕 동상 앞에 녹색공간이 펼쳐져 있다. 자세히 보니 벼다. 웃자란 벼들이 단비를 맞아 더 푸르다. 도심의 광장에 논을 들여놓은 풍경은 낯설어야 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친숙하고 흥미롭다. 이 도발적인 행위의 주체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광화문 광장에 논을 만들어 도시농업의 가능성을 대중들 앞에 펼쳐놓은 사람. 작가 임옥상씨(62)다. 그는 우리 사회에 가장 뜨거운 예술적 이슈를 가장 많이 생산해내고 있는 작가다. 1970년대부터 2010년대를 막 거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가 쏟아놓은 예술작업들은 한 시대를 관통하며 기록해온 역사로 서있다. 평론가 김정환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훌륭한 예술가란 사회의식이 새로운 예술언어를 만드는 것보다 예술언어가 새로운 사회의식을 만드는 면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시대를 향한 치열한 발언으로 대중들을 깨어나게 하는 그가 다시 새로운 운동을 시작한 것은 올해 초다. 지난 4월 세종문화회관의 초대를 받아 극장 계단위에 넝쿨콩이며 고구마와 감자를 심어 놓더니 5월에는 아예 광화문 광장에 논을 만들었다. 그가 하는 대부분의 작업이 그랬듯이 이 프로젝트 또한 뜨거운 이슈가 됐고 2개월이 지난 지금, 광화문 광장의 벼들은 쑥쑥 잘 자라고 있다.
그를 만났다. 80년대와 90년대 초반 10여년을 전주에서 보냈지만, 그는 전주를 고향처럼 아낀다. 예술적 정신의 자양분이 전주에서의 삶으로부터 온전히 온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뷰는 지난 5일 평창동 그의 연구소에서 시작해 광화문 광장에서 끝났다.
-남미여행은 어떻셨습니까. 꽤 긴 일정이던데요.(그는 환경재단 일원으로 멕시코 리우에서 열리는 국제행사에 참가하고 3일 귀국했다)
"좋았어요. 리우에서 행사 끝나고 상파울로를 거쳐 페루 아르헨티나 브라질 몇 개 도시를 답사했습니다. 주로 생태 환경 도시들이죠. 비행기만 열두 번 타는 고생스러운 일정이었는데 아주 의미있었습니다."
-광화문 광장 설치작품은 선생님께서 즐겨하시는 '그로잉 아트'라고 들었습니다. 도심의 공간, 그것도 광화문 광장에 그런 작품을 들여놓을 수 있다는 것이 놀랍더군요. 반대는 없었습니까.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논쟁도 있었고요. 그러나 예술가의 예술적 행위에 논리가 중요한 것은 아녜요. 시기상조를 내세워 반대했던 측에서 내세웠던 것이 여론수렴이었는데 물론 여론수렴은 중요하지만, 오히려 일방적인 경우가 많잖아요. 시대의 이슈가 될 만한 것이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예술행위에 그런 논리를 대는 것은 부당하죠."
-벼가 아주 잘 자라고 있더군요. 가을이면 전국 각지를 대표하는 쌀이 광화문에서 수확되는 진풍경이 벌어질 텐데 또 하나의 예술적 사건이 될 것 같습니다. 도시농업에 주목하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번 프로젝트의 주제가 '이제 농사다'예요. 개인 작업으로 접근할 수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도시농사를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뿌리를 내릴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중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판단이었죠. 도시농업은 지금 우리 사회가 꼭 지향해야할 가치 있는 과제예요. 예술적 행위로 그런 운동이 더 즐겁게 확산될 수 있다면 의미 있는 일이죠."
-이런 큰 화두를 잡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까.
"'어느 날 우연히'는 아니고, 그림을 그리면서 나 스스로 뭔가 붕 떠있는 듯 한 느낌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위안하지만 해결되지 않는 의문이 남아요. 내 예술이 사람들에게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죠. 사실은 지난해 개인전을 마치고 이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었어요. 이제 나이도 있으니 완성도 높은 작품에 집중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연말 연초를 지내면서 문득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냐' 싶더군요. 그것은 결국 스스로 편안하게 살겠다는 것인데, 내가 그렇게 작품 뒤에 숨어 지낼 나이는 아니지 않는가하는 생각이 들면서 새로운 고민이 들기 시작했어요. "
-그래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신 거군요. (웃음) 그런데 그 고민의 답이 도시농업이었다는 것이 의외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도시농업에 관심이 갔어요. 도시에 생명을 불어넣고 함께 사는 공동체 사회를 지향하는데는 농사만큼 좋은 통로가 없거든요. 때마침 이런 고민을 공유하는 지인들이 있어서 구체적인 논의를 진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농촌운동하는 것도 아니고 예술문화운동으로 도시농업을 실현시켜가겠다는 목표가 바람직하긴 하지만 실현시키는데에는 많은 과제가 있지 않을까요.
"물론입니다. 도시농업이라는 화두도 중요하지만, 도시농업을 어떻게 현실화 시킬 수 있을까가 가장 큰 과제예요. 그 답을 협동조합에서 찾고 싶습니다. 사실 엔지오 활동이 그동안 눈에 띄게 성장했지만 여전히 정치적인 바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시민사회단체도 마찬가지고요. 지속성과 주체성을 갖춰 나가기가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 협동조합 체제예요. 지금까지 만들어진 제도 중에 협동조합은 가장 앞선 제도가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협동조합을 만들어 도시농업을 뿌리 내릴 수 있게 하자는 것이 목표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과정이 필요한데 문화예술로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통로를 찾아보자 싶었지요. 그래서 상징적으로 광화문에 논을 만들자. 그냥 논이 아니라 예술가가 작품의 일환으로 만드는 논, 농사, 이런 것이라면 훨씬 설득력이 있지 않겠냐 했던 것이지요."
-도시농업의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한, 시민들의 인식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군요.
"그렇죠. 대개 사람들은 농사를 어떻게 도시에서 짓느냐는 생각부터 하는데, 사실 벼농사가 아니어도 좋아요. 농작물이라든지 어떤 다른 것도 상관없어요. 도시농업의 소재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런 프로젝트가 서울에서 벌어지는 것이 상징적이기는 하지만, 전라북도의 도시들처럼 중소도시에서 더 성공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요.
"물론이죠. 중소도시에서는 더 아름답게 시민들과 더 긴밀하게 판을 짤 수 있겠지요. 작은 도시의 풍경을 주민들이 모두 나서서 바꾸는 일은 상상만 해도 멋있는 '퍼블릭 아트'가 될겁니다."
-큰 프로젝트에만 집중하시다보면 개인적인 작업은 너무 밀리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선생님의 그림을 만나고 싶은 사람들도 많을 텐데요. 실제로 아까 말씀 하신 것처럼 이제 그림을 그리시겠다는 생각도 하셨었구요.
"그림이라는 것이 좁은 의미가 있고 넓은 의미가 있는데, 넓은 의미의 그림은 그만큼 넓기 때문에 사회적 파급력은 있지만 사실 고단하지요. 일을 성사시키기에도 어려움이 많고요. 그래서 잠깐 개인작업을 마음에 품기도 했었을겁니다. 이제는 좀 편하게 살고 싶어서.(웃음)"
-그런데 또 다시 돌아오셨잖아요. 이것이 무슨 생각인가 하면서.
"그러니까요. 그림을 그리긴 하는데 사회의 그림을 그리겠다는 데에 마음이 닿은 것이죠. 소셜 큐레이팅이나 퍼블릭 아트 같은 영역이 나에게 주어진 어떤 소명 같은 것인가봐요."
-그동안의 삶에서 전주는 어떤 시기였는지 궁금합니다.
"나에게 전주는 아주 의미 있는 공간입니다. 내 삶에서도 그렇고 예술적 활동에서도 그렇죠. 전주에서의 삶은 80년대의 격변기에 온전히 놓여있습니다. 내 작품의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 공간이었죠. 그러니까 전주라는 공간과 정서적 풍토가 없었으면 내 예술은 발화하기 어려웠을겁니다. 70년대 말 광주에서의 생활이 피 끓는 치열함으로 들떠 있었다면, 전주는 마음에 확신을 갖고 열정을 구체화시키고, 작품을 해나갈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확보했던 공간이었던 것 같아요."
-선생님의 작업은 항상 시대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외면하고 싶은 시대적 상황이나 우리가 처한 현실을 강렬한 메시지로 전하면서 예술에 대한 편협한 시각을 교정시켜주었죠. 미술의 사회적 역할이 중요하긴 하지만 의미나 보람만 있었던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91년 호암갤러리 전시 이후 주목받는 민중작가로 각인됐습니다. 화가로서 예술성과 가능성을 인정받은 셈인데, 그럼에도 제가 가야할 길은 그림을 그리는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자연히 사회적 발언으로서의 미술활동을 해나갔는데 그때 주위에서조차 왜 자꾸 판을 벌리느냐는 비판을 했어요. 섭섭함이 크더군요. 작가가 작가로서 행보를 할 때 박수를 쳐주지는 못할망정 왜 자꾸 그쪽으로 가느냐는 식의 조언은 바람직하지 않죠. 우리나라 풍토가 갖고 있는 한계일 텐데, 개인적으로는 그런 과정 속에서 오히려 단련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91년까지 몸담았던 대학교수직을 버리고 전속작가가 될 때는 또 그와 반대되는 혹평이 있지 않았나요.
"그랬죠. 상업작가로 변신한다고. 민중작가에 대한 기대를 저버렸다고 비판했습니다."
-대학교수직을 그만둘 때 갈등은 없으셨는지, 왜 그 길을 택했는지 늘 궁금했습니다. 선생님이 생각하는 미술의 사회적 역할은 대학교수를 하면서도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요.
"갈등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구요. 그런데 그때 상황이 참 어려웠어요. 당시 제가 교수협의회장을 맡아야 했습니다. 재단과의 힘겨루기를 해야 하는데 자신이 없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학생들에게 올인할 수 없는 제 환경이었고요. 소모품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내 스스로 계기를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림으로 살래 아니면 교수로 살래, 이런 양자택일의 경계에 나 스스로를 내놓고 선택했지요."
-그럼에도 정작 개인적인 그림을 그리는 대신 거리로 나오셨는데, 지금은 보편적인 예술행위가 되었지만 아이엠에프 직후 인사동과 여의도에서 벌였던 '당신도 예술가' 프로젝트는 획기적인 예술적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아이엠에프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예술 활동으로 위로하고 함께 놀고 싶었습니다. 예술의 가치가 특권층의 고급문화로만 놓여있던 환경에서는 예술이 대중들을 소외시키고 동시에 대중들로부터 외면 받게 되죠. 그런데 직접 대중들을 찾아가 그림을 갖고 놀자고 하니 반응이 아주 좋았어요.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거리미술제니 찾아가는 미술이니 체험미술이니 하는 모든 양식의 출발지점이라고 할 수 있죠."
-정치에도 관심이 많으시죠. 지난 지방선거때는 젊은 세대들의 투표독려를 위한 인증샷 운동에 나서기도 했었는데요. 혹시 정치적으로 보이는 것에 부담은 없습니까.
"그런 것에는 신경 안 씁니다. 정치와 문화 사회 경제 이런 것들은 우리 삶을 규정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경계를 구분하고 살 수 있는지 궁금해요. 우리 삶의 근간이 그들 영역에서 나오는데. 저는 정치는 못합니다. 그러나 정치적 활동은 제가 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총선때는 특별히 할 일이 없었는데, 이번 대선에서는 해야 할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무엇이 되던 역할을 할 겁니다. 한 인간으로서 주어진 허락된 정치 행위를 한다는 의미죠."
-이 작업 이후의 프로젝트가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
"이제 시작한 도시농업 운동을 열심히 해나갈겁니다. 협동조합이 중심이고 더 재미있는 예술적 행위도 더해질겁니다. 그리고 문자축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세계문자축제죠. 인류의 역사에서 문자는 매우 중요합니다. 문자에 의해서 문화가 구분될 정도로 문자의 가치는 큽니다. 활자 시대에서는 문자가 모든 것을 지배했던 시대라고도 할 수 있죠. 요즈음은 문자가 새로운 도전을 받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힘을 발휘하기도 하는 시대잖아요. 그래서 한글을 만든 나라로서 문자에 주목하고 문자를 바라보는 크고 넓은 시각을 우리가 먼저 만들어낼 필요가 있겠다는 의지를 모았습니다. 얼마 전부터 한국문화가 케이팝으로 대표되고 있는데 문화소비의 부분에서는 상당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지만 문화의 전반을 고민하는 국가로 인식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문자나 활자 출판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는 전주도 문자축제를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문자축제는 문화를 문명사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시도입니다. 세계의 사라져가는 문자 사라진 문자, 더 나아가서는 문자 이전의 문자, 그리고 앞으로의 문자의 운명과 세계가 어떻게 만나고 무엇을 만들어나갈 것인가 이런 큰 틀을 고민하는 자리죠. 우선은 서울을 세계 문자의 허브도시로 만드는 것이 목표인데 전주를 비롯한 도시들과 연대하는 것도 좋은 방식이 될 것 같습니다. 기회를 만들어보면 좋겠군요."
안봉주기자 bj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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