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 다가오면 한 달 전부터 김치를 담고, 밑반찬을 만들고, 제사음식 준비할 생각에 몸과 마음이 분주한 어머니께서 추석을 남겨 앞두고 장을 봐야 한다시며 나서신다. 며느리들의 장보기가 늘 시원찮았던 어머니의 명절장 비법은 무엇일까. 지난 결혼생활 10년 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한 번도 장에 따라 나가 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어머니 명절장 보기 비법을 전수 받겠다는 일념으로 장보기와 함께했다.
어머니께서 찾은 시장은 전주 모래내시장. 아직 명절장을 보기에는 이른 시기여서인지 사람들은 많이 붐비지 않았지만, 갖가지 제수용품을 비롯해 지난 여름 가뭄과 태풍을 잘 이겨 낸 풍성한 과일들과 곡식들이 반갑게 손님들을 맞이했다.
갓 따온 호박·가지·고추·고구마순과 무·파·도라지를 이리저리 살피시는 어머니는 야채를 파는 아주머니와 눈을 맞춰 앉으시고는 "질기지 않느냐, 맵지 않느냐, 속에 바람들지 않았느냐' 등 야채들의 상태에 대해 꼬치꼬치 물으신다. 매번 뻔한 질문에 뻔한 대답이 오고가는 데도 확인하지 않고 지나는 법이 없으시다. 역시 수십년 경력의 베테랑 주부답다.
명태전을 부칠때 마다 단골집 칭찬이 자자하셨던 바로 그 생선집. 드디어 솜씨 좋은 사장님을 실물로 뵙게 되었다. 어머니를 알아보신 사장님께서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이 집을 찾는 이유는 일단 깔끔하고 포가 부서지지 않게 결을 잘 살려 뜨는데다 모양까지 예쁘게 떠 주니 상에 올리기도 좋아서란다. 벌써부터 명태포 주문이 밀려 분주하다는 사장님께서 포를 뜨고 남은 고기 부스러기를 찌개 끓여 드시라고 많이 담아 주신다. 홍어와 오징어도 알맞게 손질해 주셔서 요리하기가 한결 수월할 것만 같다.
차례상에 올릴 과일을 사기 위해 드른 과일집. 모양도, 색깔도 예쁜 과일들을 보시며 어머니는 가격을 묻기에 앞서 지난 태풍을 잘도 이겨 냈다며 기특하다고 칭찬하신다. 어머니는 가족들이 먹을 과일과 상에 올릴 과일을 구분해서 사는데 상에 올릴 것은 가격이 좀 비싸더라도 보기 좋고 맛있는 것으로 사라고 이르신다.
과일집 앞에서 이제 막 따가지고 온 듯한 먹음직스러운 거봉에 눈이 간다. 아침 이슬을 그대로 머금고 있는 거봉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걸음을 멈춘다. 손주를 주면 좋겠다고 큼지막한 송이를 잡아 든 어머니 미소가 가을 햇살처럼 따사롭다. 이렇게 싱싱한 농산물을 직거래 할 수 있다는 게 전통시장의 묘미 아닐까.
어쩐 일인지 어머니께서는 떡집을 그냥 지나치신다. "어머니, 떡은 안 사세요?", "떡은 추석 전날 중앙시장에서 살란다" 생각 같아서는 시장 나온 길에 모두 장만해서 들어가면 좋으련만 걸음이 조금은 수고스럽겠지만, 어머니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머니의 고집은 '지혜'이기 때문이다. 물건 하나하나를 고르고 사는 일에 정성을 다하시니 이제부터는 나도 그 고집을 배워볼까 한다.
명절 장을 전통시장에서 처음 보게 된 전체적인 소감은 '전통시장은 불편할 것이다. 전통시장에는 필요한 물건이 거의 없을 것이다. 전통시장에는 할인이 안 될 것이다.' 라는 전통시장에 대한 편견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어머니는 '뭐니 뭐니 해도 전통시장이 최고!'라며 더도 덜도 붙이지 않고 담백한 한 마디로 전통시장을 표현했지만, 막상 장보기에 따라나서 보니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이었는지 알수 있을 것 같다.
전통시장은 '거래'의 개념 보다는 '나눔', '교환'의 개념이 더 앞선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건 아마도 전통시장만이 가지고 있는 정직함과 신뢰, 오고가는 情, 사람과 사람간의 소통과 관계 맺음, 상인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개성이 묻어나기 때문 아닐까.
어머니의 장보기 비법은 정성을 다해 음식을 준비하고 사랑을 담아 가족을 맞이하는 '마음'에 있었다. 누구는 주부들의 '노동절'이라고 표현하며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지만, 어차피 맞이할 명절이라면 이 '사랑의 마음'으로 준비해 보는 건 어떨까. 우리 어머니들이 늘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어머니와의 전통시장 장보기로 시작한 이번 명절은 그래서 더 넉넉하고 풍성해지는 것만 같다.
※ 김병희씨는 2001년부터 4년간 '아이 군산' 취재로 활동했으며 현재 한기장복지재단 전라북도 분사무소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다.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