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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간이역' 익산 춘포역】일제 호남 식량 반출 아픈 역사 간직

이호형 전북도 블로그 기자단

 

사람들은 '간이역'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영화 속 한 장면의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리거나 어떤 사람은 집 앞에 있는 조그마한 술집을 떠올리기도 할 것이다. 이렇듯 간이역은 우리에게 만남의 장소, 휴식, 추억, 여행 등을 떠올리게 한다. 간이역은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바로 익산시다. 오늘 간이역의 첫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익산 춘포역을 직접 찾아가 보았다.

 

 

△ 우리나라 최초의 간이역 춘포역을 찾아가다

 

익산시는 일제 식민지 시대의 수탈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도시다. 당시 일본은 우리나라의 곡창지대인 호남지역의 농산물을 손쉽게 수탈하기 위해서 철도를 놓았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익산시 춘포면에 있는 춘포역이다.

 

1914년에 건립된 춘포역은 일제 강점기에 호남지역의 식량 반출의 거점으로 이용되었다. 그 이후 2011년 전라선 복선 전철화 사업으로 인해 폐역이 되었다가 한 철도동호인에 의해서 춘포역의 역사적 중요성이 재조명되었다. 현재는 등록문화재 제210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중요하지만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이러한 오래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익산시 춘포면 춘포리의 춘포역을 찾아가 보았다.

 

△ 춘포면 춘포리? 춘포면 대장촌리?

 

춘포역이 있는 면소재지에 도착하면 '대장촌'이라는 입간판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리고 몇몇 어르신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대장촌이라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다. 이러한 이유는 일제 강점기 시대 춘포리의 옛 지명이 대장촌이었기 때문이다. 대장촌(大場村)은 '큰 마당이 있는 마을'을 뜻한다. 당시 춘포역 주변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중에서 대농장을 소유하고 있는 일본인들이 있었다. 그런 일본인 대농장의 이름이 따서 '대장촌'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춘포역 주변에는 아직도 그 일본인의 고가(古家)가 한 채 남아있다.

 

△ 일본은 쌀 뺏어가고 도깨비는 물고기 훔쳐가고

 

춘포역 주변 마을에서는 꽤 유명한 전설 하나가 있다. 바로 '도깨비 방죽'이야기다. 현재 춘포초등학교 앞 논 사이에 조그마한 방죽 터가 있는데 마을 주민들은 그 방죽을 '도깨비 방죽'이라고 불렀다. 마을 사람들은 농사를 짓거나 물고기를 잡을 때 방죽에 있는 물을 퍼냈다. 하지만 어느날 주민들이 방죽의 물을 퍼내 물고기를 잡았는데, 잡아 둔 물고기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고 한다. 며칠 뒤 춘포산(일명 봉개산)에 가보니 곳곳에 누군가 먹다 버린 생선의 시체로 가득했고, 옛 어르신들은 그것이 도깨비의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도깨비 방죽'에서 물고기를 잡기 전에는 말머리를 잘라서 제사를 지내고 방죽 주변에 거울을 놓아두면 희한하게 위와 같이 물고가기 사라지는 일이 없어졌다. 이는 도깨비가 말 피를 무서워하고 또 거울에 비친 자신에 모습에 겁을 먹고 도망갔기 때문이란다.

 

어쩌면 이 전설은 일제 강점기 일년 동안 열심히 농사지어 수확한 농작물이 모두 일본으로 송출되고 남은 곡물들로만 연명해야 하는 그때의 우리 농부들의 모습을 투영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 춘포역의 명물 개국 장사

 

지금은 조용한 시골마을이 되어버린 춘포역. 하지만 예전에는 그 일대 모든 사람들이 춘포역을 이용하기 위해 모여들어 매일매일 시끌벅적 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당연히 시장도 들어서게 되었다. 그 시장에서 유명하게 팔았던 것이 바로 '개국'(일명 보신탕)이다. 실제로 현재 춘포역 주변에는 보신탕집이 많다. 춘포역을 찾은 날이 마침 초복이었는데 주변의 보신탕집에 익산이나 전주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었다.

 

△ 만경강 배가 드나들었던 춘포

 

춘포역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걸어가다 보면 높은 둑이 하나 나온다. 이 둑은 춘포면에서 오산면까지 약 19km에 달하는 긴 제방이다. 현재 익산시에서 벚나무를 심어 자전거 여행으로도 유명하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쌓아 올리기 시작한 제방. 이는 농토를 늘려서 더 많은 쌀을 일본으로 송출하기 위한 일본인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다보니 예전에 만경강을 타고 드나들던 배들도 자연스럽게 사라졌다고 한다.

 

실제로 춘포라는 이름 역시 봄 춘(春)자에 개 포(浦)자로 포구를 뜻하는 지명이다. 강으로는 배가, 땅으로는 기차가 지나다녔던 춘포! 옛날에는 아주 중요한 교통의 요지가 아니었을까?

 

지금은 어느 누구도 찾아오지 않고 옛 향수만을 간직한 채, 고가 철도 밑에서 매일매일 지나가는 기차를 바라보고 있는 춘포역. 예전에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했을 춘포역, 주민들의 발이 되어준 춘포역 그 춘포역은 99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 이호형씨는 원광대 국어국문학과에 재학 중이다. 현재 2013 도민블로그 단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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