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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의 흔적, 군산으로의 시간여행

째보선창과 양키시장, 일제·미군정 '아픔의 역사'

달력 한 쪽을 넘겨 새해가 왔음을 알아차렸지만 새로울 것도 없이 매번 똑같은 무사안녕한 날들이었다. 집에 있기 심심해 집 앞, 시립도서관을 찾았다. 책장에 꽂힌 책 가운데‘은파에서 째보선창까지’가 눈을 사로잡았다. 우리 동네 옆에 있는 은파는 알겠는데 째보선창은 모르겠다. 때마침 집에 있는 엄마께 물어봤다.

 

“엄마, 군산에 째보선창이 있다는데 뭔지 아세요?”

 

“째보선창? 느그 외할머니가 인부들 데리고 쌀을 팔러 댕긴데였지.”

 

이번에는 지나가는 언니에게 째보선창을 아는지 시험해봤다.

 

“군산에 째보선창이 뭔지 알아?”

 

“그럼, 탁류 안 읽었어? 채만식 소설에 등장하는 그 곳이잖아.”

 

△잊히는 곳 ‘째보선창’

▲ 군산 째보선창의 풍경.

그렇게 시작된 째보선창 찾기. 이름만 들어도 낯선 그곳은 실제로 아주 가깝고도 먼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지도로 위치를 확인해보니, 관광객이 군산에 오면 꼭 한 번씩은 가본다는 진포해양박물관 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천천히 지도를 따라 진포해양박물관에서 바닷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철썩 파도가 심장을 강타하듯 마음이 조여 왔다. 너무나 음산했기 때문이다. 째보선창 찾기에 선뜻 동참해준 언니와 함께 길을 걸어도 무섭기는 마찬가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째보선창을 찾는데 실패했다. 안내문을 봤는데 왜 실패했을가? 그건 바로 째보선창이 복개공사를 거치면서 땅으로 매립돼 현재는 동부어판장 건물이 들어서 옛 모습을 감추었기 때문이다. 째보선창을 기억하는 어르신들은 옛날에 분주했던 부둣가의 모습을 회상한다.

 

째보선창은 째보와 선창이 합쳐진 말이다. 째보라는 말은 언청이를 얕잡아 부르는 말이고 선창은 배가 육지에 맞닿는 곳이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언청이 선착장이다. 조선시대에는 죽성포구라 불렸다. 숙종 27년(1701년) 전라우도군산진지도를 보면 죽성리에서 둔율, 송창, 개복에 서 있는 야산에서 모아진 물줄기가 소가 되었고 이것이 큰 내를 이루고 째보선창으로 흘렀다. 현재 째보선창으로 흐른 물은 다시 금강 쪽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조선시대의 죽성포구가 째보선창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어느 누가 정확하게 설명해 줄 수는 없지만 크게 3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 옛날 한 언청이(째보가)가 외지에서 이곳(선창)을 오게 되었는데 힘이 무척 센 장사여서 상인들로부터 자릿세를 상납하도록 하여 불리어졌다고 한다. 두 번째는 지형학적인 추측이다. 강물줄기가 옆으로 째져있는 모양에서 본 땄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군산의 옛 지명인 진포에서 찐포, 째보로 이어져온 말이라는 설도 있다.

 

설이야 어찌됐건 아주 흥미로운 이름을 가진 부두가 째보선창이다. 과거 째보선창에서 해망정 기슭까지 작은 배가 즐비하게 머무르고 있었고 이곳은 조선 말까지 삼남의 농산물 등이 상인들에 의해 서울지방으로 보내지는 중요한 선창이었다. 그 후 일제에 의한 타율적 개항으로 수탈의 장소로 전면 활용되기도 한 아픔의 장소이자 역설적이게도 활기를 띈 장소이기도 하다. 실제 그 당시에 이곳이 얼마나 부흥하던 곳인지 탁류를 읽어보면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실향민의 삶이 모여 만들어진 ‘양키시장’

▲ 군산 양키시장 입구.

째보선창처럼 점점 잊히는 곳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양키시장이다. 격변의 역사 속에서 시대의 변화를 전면으로 겪으면서 이제는 아련한 추억이 되가는 곳이다. 째보선창이 일제시대의 아픔을 대변한다면 양키시장은 민족의 아픔이었던 6·25 이후 살고자 하는 실향민의 아우성과 열강의 침입이 버무려진 역사적 장소다.

 

양키 시장은 미군용물품을 판매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6·25가 발발하자 실향민이 L.S.T군용선을 타고 또는 어선을 이용해 군산에 정착했고, 이로 인해 난민촌이 이뤄졌다. 이들을 위해 임시 수용소가 설치되었으나, 수용물자가 턱없이 부족하여 실향민은 자활의 길에 나섰다. 이들은 수용소 생활을 청산하고 군산 곳곳에 난민촌을 건립해 자립의 터를 잡기 시작했다. 부두 노동 또는 어로 조업선 선원, 장사 등으로 생계를 유지해 나갔다.

 

특히 군산은 미군비행장에서 미군 물자가 쏟아져 나와 실향민은 미군용품과 국군용품으로 좌판을 벌였다. 이로 인해 양키시장이 탄생했다.

 

우연히 시작된 째보선창 찾기로 잊히는 것들을 기억으로 살렸다. 군산은 일본 진출의 전진기지가 되었던 항구도시이자 해방 당시 미군정의 거점도시라는 뼈아픈 타이틀을 거머쥐고 있다. 째보선창과 양키시장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압축적으로 드러내기에 충분한 공간이다. 본연의 모습은 빛이 바랬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도 근대의 흔적은 남아있었다. 아픈 역사지만 한국이 밟아온 역사의 뒤안길에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역사가 아닐까.

▲ 박미소 전북도 블로그 기자단

 

※ 박미소씨는 전주교대 영어교육과에 재학하고 있다. 전북도민블로그 단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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