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소멸 위기가 현실로 다가오면서 농촌 마을들은 고령화와 청년층 이탈로 존립의 한계에 직면하고 있다. 행정과 정치권은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농촌 살리기에 나서고 있지만, 눈에 띄는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도 특별한 금전적 지원이나 파격적인 혜택 없이 원주민과 귀농·귀촌인이 어우러져 지속 가능한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마을들이 있다. 가장 작은 행정 단위에서 시작된 이들의 도전은 지방소멸 위기 극복을 위한 소중한 실마리가 되고 있다. 전북일보는 올 한해 이 마을들의 사례들로 공동체의 가치를 되새기고, 지속 가능한 농촌 재생의 해법을 찾아보고자 한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마을에서만 살았어요. 주민 모두가 가족이자 공동체가 되어 마을을 아끼고 지켜나가고 있습니다”
진안군 동향면 봉곡마을에서 나고 자란 이상철(68) 이장은 마을을 자랑스럽게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봉곡마을은 진안군, 무주군, 장수군의 경계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주민 수는 70여 명에 불과하다.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여 외부와 극단적으로 단절된 이 마을은 지방소멸의 위기에 가장 큰 영향을 받고 있는 지역 중 하나다.
이처럼 자연스럽게 소멸될 것만 같았던 봉곡마을은 귀농귀촌 운동을 통해 새로운 활력을 얻으며 변화의 길을 걸었다.
2005년 서울에서 귀농한 이재철 자치위원장은 아내와 함께 마을에 정착하며 빈집을 개조해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는 농촌 생활에 적응하면서 빈집을 활용해 귀농·귀촌인들을 불러 모았는 데 힘썼다.
이 위원장은 처음부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오는가’보다 ‘얼마나 오래 머무르는가’에 초점을 맞췄다.
그 결과 이 위원장이 정착할 당시 29가구에 불과했던 봉곡마을은 현재 34가구로 늘어났고, 이 중 17가구가 귀농·귀촌 가구다. 절반 이상이 외부에서 온 이주민들로 채워지면서 마을은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모든 것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도시의 개인주의 문화와 농촌의 공동체 문화는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을 활동과 교류가 필수적인 농촌의 공동체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난 도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게 이 위원장의 설명이다.
이재철 위원장은 귀농·귀촌인에게 마을 활동을 강요하지 않고, 각자의 속도에 맞춰 자연스럽게 공동체에 스며들도록 배려했다. 그는 “결국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오느냐가 아니라 누가 오느냐다. 농촌에 어울리는 사람, 오래 머물 사람을 맞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이에 따라 귀농·귀촌인들이 스스로 자리를 잡고 마을에 기여할 수 있도록 돕되, 지나친 간섭은 피했다. 이러한 배려와 소통의 자세가 봉곡마을이 지금까지 지속 가능한 공동체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
봉곡마을은 단순한 ‘거주지’를 넘어 주민들이 함께 어울리며 문화를 공유하는 진정한 공동체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이곳에는 ‘행복한 노인학교’, ‘학선리 마을박물관’, ‘문화공간 담쟁이’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특히 ‘함께하는 밥상’은 마을 공동체의 상징적인 프로그램이다. 주민들은 매일 마을 회관에 모여 점심을 함께 먹는다. 이곳은 단순한 식사 공간을 넘어 마을 소식을 나누고 유대감을 다지는 중요한 소통 창구 역할을 한다. 농번기에는 젊은 주민들이 어르신들을 위해 반찬을 나누고 일손을 돕기도 한다.
행복한 노인학교는 젊은 주민들이 한글, 미술, 요가, 수영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어르신들의 배움을 돕는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연극 공연, 시집 발간, 작품 전시 등 문화 활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해거름 갤러리’에서는 어르신들의 손길이 담긴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되며, 이를 통해 어르신들의 자존감도 높아지고 있다.
학선리 마을박물관은 마을의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중요한 공간이다. 주민들이 기증한 요강, 학생증, 주민등록증 등의 물품이 전시되면서 마을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통로가 되고 있다. 이 박물관은 마을 주민뿐만 아니라 외부 방문객들에게도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봉곡마을이 지속 가능한 공동체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핵심은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주요했다. 쓰레기 분리수거와 자원재활용, 햇빛발전소 건립 등 친환경적이고 지속 가능한 마을을 만들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주민들이 주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마을의 미래를 설계하는 과정 자체가 봉곡마을의 강력한 성장 동력이 되고 있다.
주민들은 직접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쓰레기 분리수거’를 주제로 한 이 영화는 서툰 연기와 제작 과정에도 불구하고 마을 전체에 웃음과 감동을 전하며 큰 성공을 거뒀다. 2021년에는 ‘제8회 생생마을만들기 콘테스트’에서 문화·복지 분야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그 성과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최근에는 ‘봉곡이야기’라는 유튜브 채널도 운영하며 마을의 다양한 이야기를 온라인을 통해 공유하고 있다 이처럼 봉곡마을은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공동체를 형성하고, 이를 통해 지속 가능한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지방소멸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정부와 지자체는 다양한 귀농·귀촌 지원 정책을 시행 중이다. 주택 마련 지원, 농업 교육, 기술 지원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지만, 정착의 어려움으로 다시 도시로 돌아가는 사례도 적지 않다.
단순한 경제적 지원만으로는 농촌에 정착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봉곡마을은 이런 정책의 한계를 넘어선 모범 사례다.
이 위원장은 "금전적 지원을 바라고 온 사람들은 오래 못버티고 떠나는 게 대부분이다"며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누가 이곳에 와서 얼마나 오래 머무를 수 있는가가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는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그들이 자연스럽게 마을에 녹아들도록 돕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다”고 덧붙였다.
봉곡마을의 사례는 귀농·귀촌 지원 정책이 단순한 일회성 지원이 아닌, 사람 중심의 정착 지원과 공동체 문화 활성화가 뒷받침될 때 비로소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작은 마을 봉곡의 사례는 지방소멸 위기를 맞은 모든 농촌 마을에 하나의 소중한 이정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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