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최월상선생 독립유공 밝힌 장남 최명우씨
“조국의 해방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아버님의 숭고한 정신에 내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기 그지 없고 자식으로서 그 큰 뜻을 헤아리지 못한채 눈앞의 생업에만 소탐한 옹졸함이 한없이 부끄럽습니다.”
올해 3·1절을 맞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는 ‘최월상 선생(1912~1948)’의 항일운동 발자취를 찾아내기 위해 10년 가까이 전국 곳곳을 누빈끝에 약 60년만에 업적을 복원시킨 장남 최명우씨(61·군산시 미룡동).
최씨는 어릴 적에 집안어른들로부터 부친의 독립운동에 관한 얘기를 들었지만 청상과부였던 어머니 (작년 6월 작고)를 돕기 위해 고교를 마친 뒤 곧바로 생업전선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직장때문에 1969년 전주에서 군산으로 이사,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왔으나 뜻하지 않게 아버지의 행적에 관심을 갖게 된다.
IMF때인 1998년, 최씨도 당시 보통의 한국인이 겪었던 것처럼 실직하게 됐다. 그는 직장을 새로 구하는 일보다는 이 때를 활용, 선친의 항일운동 발자취를 찾아야겠다는 결심과 함께 기나긴 탐문에 나섰다.
구전(口傳) 대신 국내에 발간된 ‘독립운동사’를 비롯 ‘전주시사’ ‘전고 북중 80년사’ 등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수집에 들어갔고 주위의 도움을 받아 5여년만에 상당한 성과물을 찾아냈다.
최월상 선생은 1929년 3월 전주고보 재학때 일본의 민족혼 말살정책에 맞서 독서회에 가입했을 뿐 아니라 광주학생의거와 유사한 일본인 교사 및 학생들의 차별에 항거, 시위를 주도하다 퇴학을 당했다. 3년뒤 3월1일을 기해 ‘반제 반전’운동을 거사하려다 일경에 발각돼 옥고(1년6월)를 치렀고 출소후 정읍 등지에서 농민운동을 벌이다 다시 붙잡혀 혹독한 고문과 함께 6개월 형을 마치고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최선생은 해방후 고문후유증으로 36세의 나이에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이 공로로 최씨 가족들은 2002년 2월 전주고와 총동창회로부터 아버지의 명예졸업장을 받았지만 그해 8월 국가보훈처로부터 ‘광복이후 수형 때문에’ 독립유공자 선정이 불가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에 굴하지 않고 최씨는 3년동안 대전 등을 오가면서 정부기록보존소에서 문제가 됐던 1946년 5월 경찰과의 충돌사건 진상이 담긴 판결문을 찾아냈다. 민족정신이 투철한 최월상 선생은 ‘우리가 정당한 정치운동을 하는데 과거 친일 경찰관이 우리 행사를 방해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항의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폭력사건으로 복역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선생의 걸림돌이 말끔히 해결됐다. 이 결과물로 정부로부터 올해 3·1절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게 된 것.
최씨는 “어머니 생전에 선친의 항일운동을 평가받았어야 했는데 정부의 무관심 등으로 이렇게 늦어졌지만 불효를 거둘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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