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희
100세 시대가 도래한 이즈음 인생 육십을 우스개 소리로 '애'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인생은 육십부터라고 하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합니다.
지난여름이군요.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닌 저의 육십년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처녀수필집 <꽃으로 말한다> 를 상재하여 세상에 내보냈었습니다. 회갑이라는 마디가 전혀 배제된 건 아니지만 결실의 보따리 하나를 싸놓은 격이니 마음 뿌듯하기도 하고 홀가분하기도 했었습니다. 꽃으로>
내가 아는 최초의 토끼이야기는 토끼와 거북의 경주입니다. 날쌘 토끼는 어느새 결승점이 눈앞에 보입니다. 뒤를 돌아보니 거북이 아직도 보이지 않자 교만한 생각으로 낮잠을 자게 되지요. 느리지만 꾸준히 땀 흘리며 결승점에 도달하여 거북이 승리하는 이야기는 '꾸준함을 이기는 그 무엇은 없다' 의 대표적인 사례이지요.
농부가 밭을 갈다가 나무뿌리 밑에서 토끼가 뛰쳐나와 달아나자 어리석은 농부는 나무 밑에 앉아서 토끼가 튀어나오길 기다렸다는 이야기(樹柱待兎)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 칼을 빠뜨리고는 뱃전에다가 칼 빠뜨린 자리라고 표시해 놓은(刻舟求劍) 사람과 다를 바 없겠지요.
지난여름 어느 기관 회의실에서 문학세미나가 있었습니다. 기관장실로 안내되었는데 커다란 붓글씨 액자가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교토삼굴'狡兎三窟이었습니다. 제나라 맹상군의 식객 풍훤의 멘토에 나온 말이지요. 유약한 토끼는 맹수들로부터 위기를 모면하려고 세 개의 굴을 판다는 뜻이 랍니다.
첫 번째 굴이 생활을 위한 주거용이라면 두 번째 굴은 위기에 처했을 때 적으로부터 피신할 수 있는 굴이겠고 생존을 위해 양식을 쌓아 놓을 창고용으로 세 번째 굴을 파는 토끼의 지혜로운 유비무환의 생존 법칙에 무릎을 치게 됩니다.
강한 뿔도 없고 사나운 이빨도 없어 약하기 때문에 겁이 많은 토끼에게 살아가는 임기응변의 꾀가 있었던 걸 기억합니다. 용궁에 까지 가서 죽음을 앞두고도 당황하지 않고 능청스럽게 바위에 씻어놓은 간을 가져오겠다고 거북이등을 타고 도망쳐오는 반전에 박수를 보내지 않았던가요.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할 때 식물이든 동물이든 번식하고 살아가도록 한 가지 강점은 다 주셨기에 세상은 공평하다고 한 것 같습니다.
돈도 없고 권세도 없고 내세울게 없는 삶이 때로는 지리멸렬해서 힘들어 질 때 각자무치(角者無齒)라는 말을 생각하면 조금은 위로가 됩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아도 결정적인 한 가지가 부족한 것이 있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것 같아도 행복의 조건 한 가지는 있다고 하지요.
나에게 없는 것으로 탄식하지 말고 내게 있는 것으로 만족하자면 너무 식상한 말인가요.
토끼해엔 특히 취업난에 고뇌하는 청년들도 안타깝고 죽음으로 몰고 갈 만큼 심각한 학교 폭력도 마음을 어둡게 했지만 얼굴 없는 천사들이 나타나서 한 줄기 빛처럼 세상을 밝혀주었습니다.
무기가 없는 대신 세 개의 굴을 파서 위기를 대비하는 슬기를 가르쳐준 토끼해가 가고 이제 임진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일자리도 많이 생기고 모두가 웃는 행복한 한해, 흑룡의 역동적인 용틀임으로 꿈의 날개를 펼치는 한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수필가 박순희씨는 2004년 <한국문인> 으로 등단했다. 수필집 「꽃으로 말한다」가 있다. 한국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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